오늘 아침(월요일. 10월 31일)의 하늘과 집 근처의 풍경은 그야말로 달력 속의 한 모습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차들도 다니지 않아서 한참 서서 구름과 하늘과 붉게 물들어 가는 가로수의 모습을 눈으로 담았다. 자연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듯 인간의 마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타났다. 마치 약 올리기라도 하듯이 아주 밝은 얼굴을 한 채 나타났다. 너무 맑고 화창한 날이 어쩐지 밉기만 하다. 나는 겨울을 담배 연기만큼 싫어하지만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계절이 또 한 번 얼굴을 바꾸려고 한다. 이런 시기에는 옷 입기가 참 애매하다. 조금만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오면 더워서 등에서 땀이 나고, 조금만 얇게 입고 나오면 아침저녁으로는 으슬으슬 춥다. 저녁에는 조깅을 하기 때문에 그 후에는 문제가 없다. 어떻든 조깅을 한 후에는 무척 더워서 돌아오는 길에 아아를 한 잔씩 마시고 있다. 그것도 1000cc. 어떻든 요즘도 매일 저녁에 8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고 있다. 반환점에 가면 아무튼 땀이 엄청난다. 아마 패딩을 일찍 꺼내서 입고 달려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반환점에서 근력 운동을 한 20분 정도 하는데 녹초가 되어 버린다.
조깅을 하려고 나서기 전까지는 아주 하기 싫은 마음이 커다랗게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 날씨다. 뇌의 한쪽은 저녁에는 조금 쌀쌀한 게 어딘가에 들어가서 등을 구부리고 책이나 보면서 진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를 권한다. 그 경계에서 매일 고민한다. 그러나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일단 강변으로 나서면 슉슉 하며 매일 달리는 패턴으로 숨을 쉬며 달려간다. 달리고 난 후 5분 정도만 지나면 후끈후끈하다. 그러면 이어폰으로 들리는 음악을 들으며 이것저것 잡생각을 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며 달리게 된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고민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일주일 전에 비해 조깅 코스에 거의 사람들이 없다. 이제 추운 겨울이 지날 때까지 동면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며칠 전에는 독감 예방 주사를 맞았는데 절대 조깅 금지라고 해서 그날은 달리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작년에는 독감 예방 주사는 안 맞았다. 그 이전에는 매년 계속 맞았는데 맞은 날에도 지치지 않고 조깅을 했었다. 목욕만 하지 않았지 실컷 달렸다. 그런데 작년 화이자 백신 1차를 맞고 후유증을 앓고 난 뒤로는 병원에서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고 있다. 그때 오른팔에 맞았는데 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팠는데 그게 하루도 쉬지 않고 몇 개월을 갔다. 타이레놀을 먹고 파스를 붙이고, 뿌리고 매일 주물러도 몇 개월을 팔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었다. 이 이야기도 여러 번 적어서 민망하지만 나 백신 1차 맞고 후유증을 앓았소,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다 나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미는 힘은 괜찮은데 당기는 힘을 줄 수가 없다. 팔 굽혀 펴기는 괜찮은데 턱걸이처럼 당기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것 때문에 한 5분 정도 고민을 했다. 계속되던 것이 안 되게 되었을 때 오는 현타의 대미지가 컸는데 뭐 어때, 미는 힘이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나니 괜찮아졌다. 그런 건 사는데 큰 문제가 아니다.
나는 아픈 게 정말 싫다. 아플 기미가 보이는 것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감기 기운이 저 끝에 왔다 싶으면 미리미리 약을 먹어서 안 걸리게 하는 편이다. 어릴 때는 아프면 엄마에게 안겨 어리광도 부리고 보살핌을 받았고, 학창 시절에 아프면 조퇴하고 집에 일찍 갈 수도 있고, 역시 아파서 누워있으면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도 일어나자마자 먹을 수 있었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아프면 나만 손해다. 무엇보다 아픔 그 자체가 너무 싫다. 어떻든 그동안 독감 예방주사 때문인지 독감에 걸린 적도, 조깅 덕분인지 코로나도 걸리지 않고 무사통과를 했다.
여기는 반환점
분명 흑백사진인데 흑백사진 아닌 것처럼 보인다. 2022년인데 2Q22년처럼. 흑백사진은 컬러 사진이 갖지 못하는 매력이 있다. 윤주영 사진작가의 어머니 시리즈를 보면 아주 드라마틱하다. 사진 한 장인데 사진 속 인물의 역사가 필름처럼 촤르르 지나가는 것 같다. 유진 스미스도, 앙리 카르티에 브레숑도,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들을 보면 정말 흡입력이 강하다. 흑백이라 그 장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흑백사진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져 사실 담아내기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흑백으로 캔디드 느낌을 내 봤다
로베르 두아노는 피카소의 친구라서 피카소의 사진도 많이 담았다. 아주 익살스러운 사진들이 있는데 좋다. 아이들을 담은 사진도 많아서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 두아노는 그런 행복하게 보이는 사진들을 많이 담았는데 가장 유명한 사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사진이 바로 두아노가 담아낸'시청 앞에서의 키스’다. 이는 너무나 유명해져 버려 2017년에는 ‘파리 시청 앞에서의 키스: 로베르 두아노’라는 영화까지 나왔다.
어쩌면 이 세상은, 지구는, 이 세계는 이 사진을 기점으로 해서 ‘사랑이라는 것은 키스'라는 방정식이 성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작 사진 한 장인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고작 사진 한 장이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잃어버렸던 사랑에 대한 꿈을 찾게 만들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이는 시청 앞에서의 키스는 사실 연출이다.
두아노의 연출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진이었다. 당시에는 두아노가 저널리스트였다. 라이프지에 기고하기 위해서 회사의 청탁을 받아서 연극을 공부하던 젊은 남녀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시청 앞에서 연출을 시켰다. 이 사진이 유명해지고 시간이 흘러 사진 속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며 나타나서 돈을 요구하는 해프닝이 많았다. 사실이 알려지자 실제 주인공 프랑수와즈는 할머니가 되어 원본을 들고 나타나서 증명을 하기도 했다. 검색을 해서 찾아보면 이런 이야기들이 많다. 두아노는 사실 그전에 연출된 사진이라고 잡지사에 말을 했지만 대중은 너무 앞서 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대중은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을 해버리는 것이다.
사진이 왜 이렇게 작아졌는지 모르겠음
길고양이도 계절의 죽음을 아는지 이제 마지막 따뜻한 햇빛을 받을 테야, 라는 듯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사람들이 바로 앞을 지나가도 흥, 하며 할 테면 하라지, 같은 마음으로 햇빛을 받고 있다. 요즘은 우리 동네에서 길고양이들이 로드킬을 당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해안도로에는 3일에 두 번 꼴로 길고양이가 배가 터진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봤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로드킬 당한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주 좋은 현상이다.
이 꼬마 자동차 붕붕 두 대는 이제 할 일을 다하고 화분 대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두 대는 친구일까. 얼마 전에 강호동이 나와서 르세라 핌의 사쿠라와 이야기를 하는 유튜브를 봤는데 강호동이 사쿠라에게 우리 친구 아이가,라고 했더니 사쿠라가 우리는 5년에 두 번 만났는데 친구일까요?라고 했다.
일전에 10년 만에 찾아와서 우리 친구니까 친구로서 나에게 뭔가를 부탁을 했다. 우리가 친구일까? 고등학교 때야 같이 지냈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지내다가 이제 와서 우리 친구잖아?라고 하는 게 뭔가 이상했다.
사쿠라는 강호동에게 친구는 어디까지가 친구라고 하는지 물었다.
우리는 친구를 좋아한다. 죽고 못 사는 친구도 있고 친구 덕분에 웃고, 친구 때문에 울기도 한다. 친구가 없으면 나 죽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친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친구일까. 학창 시절에는 친구가 분명하게 있다. 매일 교실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밥을 같이 먹고.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된 후에는 그때만큼의 생각을 가지기 힘들다. 만나고 연락하는 문제보다 친구를 친구로 얼마나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접근해야 한다. 아내가 친구를 싫어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아내가 자신보다 친구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김영하는 “살아보니 친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잘못 생각했다. 친구를 훨씬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다고 김영하 작가는 말했다. 쓸데없는 술자리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어떤 남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 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결국 모든 친구들과 다 헤어지게 된다. 고 했는데 내가 딱 그렇다.
나는 회사를 다닌 적도 없고 모두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한 동안 친구들이 뭔가 일이 있거나, 술 생각이 나거나, 여자와 싸우거나 하면 그저 문을 열고 들어 와서 일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술집으로 갔다. 물론 그때는 나 또한 술자리가 좋아서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술을 마셨다. 정말 시간을 그냥 허비한 샘이다. 나는 분명 소설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소설은 혼자서 읽어야 하는데 잠을 자는 시간 빼고는 소설을 읽을 수 없었다. 정말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늘 주위에는 친구들이 북적거렸다.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친척들이 3일 동안 친구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것이냐며 물었다.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장례식장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전부 연락을 하지 않는다. 나도 글을 쓰고 싶어서, 소설을 한 번 적고 싶어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 저녁 상을 물리고 밤에 조금씩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잠을 몇 시간 못 잤고 건강도 별로 였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전처럼 매일 찾아왔고. 그래서 슬슬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해봐야 전혀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다단계를 한다고 진지하게 말을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친구들을 점점 만나지 않고, 약속도 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아서 그들은 내가 정말 다단계에 빠진 것 같다며 나를 피했다. 그러면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없다. 물론 연락도 내 쪽에서 먼저 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전시회를 몇 번 가지게 되었고 밀리의 서재로 전자출판도 하게 되었고 그래픽으로 디자인을 하고 그림도 그리다 보니 느닷없이, 10년, 15년 만에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좀 뭔가를 부탁하기도 했다.
모든 선택의 밑바탕에는 포기가 있다. 친구와의 만남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과 취향에 귀 기울이는 시간 그리고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시간을 잃는다. 김영하 작가는 20대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 친구를 만난 것을 후회한다고 전했다. 습관적으로 약속을 잡거나 심심할 때 그저 친구와 연락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면, 지금 자신의 내면을 채울 시간을 서서히 잃고 잇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그러나 친구가 있어서 자신이, 자기 자신이 채워진다면 친구는 분명 필요하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너무 많은 시간을 친구들과 보낸 것을 후회한다.
저녁에 온도가 떨어져 사람들이 안 나옴
야, 너 혼자 그렇게 밝기 있기 없기
요즘은 조깅을 하고 돌아올 때면 저기 저 위에서 혼자서만 밝게 빛나는 별을 매일 본다. 그리고 매일 한 컷씩 담아본다. 너 혼자 너무 밝게 빛나지 말길, 너 혼자 너무 빛나며 울지 말길,라고 속으로 말을 하면서 말이다.
너무 더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다리가 너무 굵은데 엘베 샷에서는 늘 날씬하게 다리가 나와서 좋다. 자꾸 찍자!
파란 양말 신어서 한 컷
오늘의 선곡은 그린 데이의 9월이 끝나면 깨워주세요 https://youtu.be/FUDNfZhAvCI영상출처: 희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