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이 또 하루키 이야긴데요, 이번 이야기는 여러 하루키의 에세이와 소설, 그리고 무라카미 라디오에 나온 비슷한 이야기를 한데 묶어서 해보겠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21년 11월 28일 자 19:00부터 19:55분간 진행된 무라카미 라디오로 하루키의 소소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소개된 에피소드는 앞서 여러 번에 걸쳐 피드에 소개를 했고요, 이번에는 오픈카를 탔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도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말을 했는데요, 하루키는 오픈카를 타면 꼭 자유라고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신호 대기 중에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구름의 흐름이나, 날아가는 새라든지, 그러한 것이 꽤 마음에 스며들어 그만 신호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멍하게 앉아 있다가 뒤에서 빵 하며 경적을 울리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사실 운전을 하다가 멍하게 하늘을 보는 건 꼭 오픈카가 아니더라도 자주 있는 일이죠. 새의 활공을 보다가 재수가 없는 날에는 새의 똥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금방 울상이 되고 말 겁니다. 새는 말이죠. 대소변의 배설 통로가 한 군데입니다. 그렇게 진화를 했어요. 그래서 날아가면서 바로 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먹이를 먹는 순간 위에서 바로 소화시켜 배설 구로 보낼 수 있게 프로그램이 되어 버렸습니다. 간혹 메추리알에 똥이 굳어서 묻은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런 이유죠. 그래서 새똥도 인간의 변만큼 냄새가 지독합니다. 아마도 하루키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모양이지요.


수동기어의 즐거움.


그리고 하루키는 수동 기어 자동차가 위기종으로 가고 있지만 자신은 오토매틱 차는 아무래도 좋아하지 않는다는군요. 하루키는 말합니다. 수동기어의 어디가 좋을까요? 그건 물론 스스로 기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불편한 것들은, 자동차의 수동 기어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기어를 넣어서 붕붕 가고 싶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물론 그 결과로 기어를 잘 못 넣어서 엔진을 꺼트리기도 하지만 그런 게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산길에서 무의미한 시프트다운을 하는 기쁨은 수동기어 운전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전적으로 그 즐거움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의 자동차가 수동기어이기 때문이다. 수동기어로 된 차를 오랫동안 몰고 다녔다. 그래서 오토 기어만큼 편하지는 않지만 수동기어만의 즐거움을 나는 안다.


물론 오르막길에서 대기를 하거나 정차를 하는 순간에는 아직도 등에서 땀이 한 줄기 죽 흘러내리지만 하루키의 말처럼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하루키는 오픈카를 타고 수동기어를 모는 사람은 메일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런 동질감의 고독을 위로하자며.


응? 쓰다 보니 높임말에서 어느새 ㅋㅋ. 하루키는 20여 년 전에 라디오 한국의 의뢰로 한국 대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일본인’ 2위에 뽑혔다면서 내심 1위는 누구일까, 하며 궁금해했다. 시간이 지나 독자들에게 이 메일을 받아서 답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주고받은 메일을 모아서 출판을 한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아직 깜깜하다. 거기에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받은 메일을 소개하기도 했다.


물론 영어나 일본어로 보내야만 한다. 한국어로 보내봐야 수많은 이메일 중에 어? 이건 한국이군. 하며 그냥 넘길 것이다. 하루키 굿즈를 편집해서 출력해서 만들었더니 정말 아주 예쁘다. 하루키 굿즈를 판매하는 곳에 가서 보니 새끼손가락만 한 열쇠고리가 만 팔천 원, 이만 원 정도 하기에 직접 편집해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주위의 반응이 좋다. 판매하는 건 아니고 하루키 팬들에게는 나눠주고 있다.]


또 [노르웨이 숲]에 대해서 하루키가 여러 곳에서 언급을 했는데요, 비틀스의 원곡에 대한 오역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하죠. 원래는 ‘노르웨이 가구’가 맞는다고 합니다. 그건 확실하다고 해요. 하지만 그대로 ‘노르웨이 가구’라든가 ‘노르웨이산 가구’ 같은 제목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고 하죠. 아마도 존 레넌이 제목을 ‘노르지안느 우드’라고 했을 때에는 그 뜻이 있었을 거라고 하루키가 말했습니다. 존 레넌은 아무래도 영국인이니까 ‘노르지안느 우드’는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산 가구라고 받아들인다고 해요. 그런데 이 제목이 미국으로 넘어가면 ‘노르웨이 숲’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합니다.


이런 변화? 변역? 또 나라마다, 도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서 하루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도 에세이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샐런저의 그 소설 속에는 많은 욕이 나오는데 이 욕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가 대해서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말을 했죠.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 비평을 써 놓았는데요, 영국이나 미국에서 또는 다른 나라에서, 같은 단어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요컨대 ‘~해야만 한다’와 ‘~하지 않으면 안 된다’처럼 말이죠.


노르웨이 숲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루키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호밀밭의 파수꾼, 라는 제목도 나라마다 완전히 다른 거 아세요?


이탈리아: 한 남자의 인생

일본: 인생의 위험한 순간들

노르웨이: 모두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악마는 최후 순간을 취한다

스웨덴: 기억의 순간에 나타나는 구원자

덴마크: 추방당한 젊은이

독일: 호밀밭의 남자

네덜란드: 사춘기


독일이 우리와 흡사한 제목을 사용하고 있고, 네덜란드가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이네요. 호밀밭의 파수꾼, 하면 늘 기억나는 문장이 있어요. ‘난 하품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하품이 멈추질 않는다. 이 방이 지나치게 따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졸리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글이 이상하게도 내내 기억에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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