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으른 자들 중 최상 위에 있을 정도로 귀찮아하는 일은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생리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돌처럼 처음 모양 그대로 가만히 있기도 한다. 보통 집에 있게 되면 돌처럼 굳건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이 귀찮다. 집은 그저 쉬는 곳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박힌 나는 집에 들어가면 게을러터진 인간이 되어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귀찮아서 인터넷도 넣지 않았고 더불어 컴퓨터도 없다. 집에서는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흐믈렁 해져 한 번 누우면 아코디언처럼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이 썩 많지 않다. 매일매일, 쉬지 않고 아침에 나와서 밤에 들어온다. 그래서 아마도 집에서는 동면하는 겨울동물처럼 게을러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로 의식의 흐름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줄 안다. 매일 조깅을 하니까. 매일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하니까 아주 부지런한 줄 안다. 게다가 매일 일정량의 글을 적고 매일은 아니지만 기간마다 그림을 그려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는 소리 대부분이 대단하네요, 부지런하네요, 같은 말이다. 될 수 있는 한, 버스 두 세 코스 정도의 거리는 걸어 다니며, 매일 그 시간에 와서 카페의 커피를 받아가기 때문에 일하는 점원과 인사를 하고 지낸다. 모두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대꾸는 하지 않는다. 굳이 저는 사실 아주 게으른 인간이고 모든 일을 귀찮아합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에이, 그러면 게으른 사람이 아니잖아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게으른 부분? 은 일상을 파고 들어와 정말 혀를 찰 정도로 게으르다. 


매일 조깅을 하는 건, 하루 24시간 중에 나는 거의 20시간을 앉아 있다.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렇게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거래처가 대체로 걸어서 2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어서 자주 걸어 다녔지만 지금은 온통 대구에 거래처가 있기에 갈 수도 없다. 전부 인터넷과 택배로 일이 이루어진다. 예전에 비해 참 많이 편해졌다. 그런 시스템을 파고들면 역시 사람들도 귀찮은 것을 피하기 위해 시스템이 점점 앉아서 모든 일처리를 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만약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하지 않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의 끝은 참혹하다.  


세차도 2년 동안 하지 않아서 생명에 위협을 감수하며 핸들을 돌리고 손목시계를 빼는 게 귀찮아서 24시간 차고 있으며 기기나 카메라도 어느 순간부터 바꾸는 게 귀찮아서 쭈욱 쓰고 있으며, (이건 좀 다른 문제지만) 영화도, 책도 봤던 걸 계속 보고 있다. 또 일하는 곳의 문에 연락처도 없다. 연락 주세요, 같은 문구도 없고 불이 꺼지고 문을 닫은 다음 일 때문에 연락이 오는 건 귀찮고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문이 닫혀 있고 실내의 불이 꺼져 있다면 나는 '여기에' 없기 때문에 연락 같은 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쉬는 날도 없고, 매일 일정한 일과시간에는 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굳이 문을 닫았는데 연락을 받고 통화를 하고 다시 와야 하는 이 모든 일들이 귀찮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집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정말이지 귀찮다. 집에서 해야 하고 일어나야 하는 마땅한 행위가 너무나도 귀찮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을 때가 있으며 한 자세로 꼼짝없이 있다 보면 몸이 결리고 쑤셔서 그때 자세를 바꾸기도 한다. 누가 현관문 앞에서 딩동 눌러도 나가지 않는다. 왜 그래요? 혹시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잖아요?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 보면 그렇게 딩동 누른 사람들이 중요한 일로 온 적은 없다. 강아지들이 있었을 때에도 집에 가만히 있으면 강아지들도 돌처럼 내 옆에서 가만히 엎드려 있거나 벌러덩 드러누워 있곤 했다. 마치 우리는 애초에 서먹한 사이였던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강아지와 함께 매일 조깅을, 8년 정도 했다. 그래서 집 안에서 키우는 강아지 치고 뒷다리의 근육이 좋았다. 


매일매일 부지런을 떨며 하는 루틴의 일들은 일종의 의식의 발로 같은 것이며 그 외의 것들은, 그러니까 귀차니즘의 확장은 의식의 흐름 즉 무의식으로의 전환인 것 같다. 후자가 나의 모습에 가깝다. 애초에 나라고 하는 인간은 게을러터진 인간임에 분명한데 그간 지내오면서 교육이나 경험, 사회에 대한 적응과 의무, 책임 같은 것들이 해야 할 일은 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폭넓은 사회와 인간관계에 균열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도 나의 귀차니즘 때문에 웃음이 여러 번 나온다. 

때문에 집에 있게 되었을 때 비가 오면 좋다. 빗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집구석의 정적은 농도가 짙어서 정적이 이어지면 정신적인 세계까지, 영혼이 먹힐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쌓여서 사람들은 집에서 며칠씩 있게 되면 밖으로 기를 쓰고 나가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빗소리가 들리면 뇌의 여러 구간에 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시원하고 좋다. 그건 여름 겨울이 따로 없다. 겨울에도 아아처럼 시원한 것이 좋다. 집에서는 책도 읽지 않는다. 책도 읽히지 않으며 음악도 거의 듣지 않는다.


나는 어쩌다가 집에 있게 되면 이토록 게으른 자의 최고봉이 되었을까.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일요일이 되면 오전에 헤드셋을 쓰고 몇 장 있는 레코드판을 열심히 들었다. 생각해보니 집에서 열심히 음악을 들었었다. 그건 꽤나 좋은 기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겨울에 거실로 떨어지는 햇살이 닿는 구역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헤드셋에서 나오는 음악을 두, 세 시간씩 들었다. 토토의 앨범도 들었고,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도 들었다. 물론 바쏘리나 판테라 같은 강한 음악도 좋아했다. 녹아내리는 치즈 같은 햇살을 받으며 앨범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 없이 게을러졌다. 일요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귀차니즘이었다. 그러다 보면 쉬이 오후가 되었다. 

하지만 음악 따위 이제 휴대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고 심지어는 라이브 공연도 모두 볼 수 있다. 정보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집구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종의 마지막 행위가 일찍이 소거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생존을 위해 밥을 차려 먹고 샤워도 한다. 밥을 차려 먹는 건 귀찮은데 먹고 난 후 설거지는 바로바로 해 버린다. 먹자마자 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귀찮아서 영영 설거지는 멀어지는 이야기가 된다. 


씻는 건 정말 귀찮은데 샤워하는 건 또 좋다. 그런 것들이 몇몇 있다. 조깅 때문인지 양말의 뒤꿈치가 잘 터진다. 그러면 늘 꿰매 신는다. 양말을 꿰매는 행위는 또 귀찮아하지 않는다. 인간생활을 바람직하게 영위시키는 서적은 귀찮지만 허구로 똘똘 뭉친 소설은 또 좋아한다. 거기까지 가는 건 정말 귀찮은데 운전하는 건 좋아하며, 양치질을 해서 거품이 입 안 가득 나오는 게 좋지만 물로 헹구러 가는 것이 귀찮아서 40분을 양치질을 할 때도 있다. 양치질을 40분 이상 하면 입을 굳이 헹구러 가지 않아도 되는데 이거 아는 사람이 계시려나. 이 모든 게 집에 있게 되면 집약이 되어서 만사 게을러진다. 집에 화석 인간처럼 있으니 집에서는 배가 잘 고프지도 않고 배가 고파도 한 끼 정도 건너뛰면 어때, 하는 생각이 육체를 누른다.


이런 날은 약속도 잡지 않고 누군가 집에 오는 것도 싫으며 그저 가만히 벽면의 한 곳을 응시하며 보낸다. 그러다가 잠이 오면 잠든다. 마치 영화 속 전두엽을 절제해버린 엑스트라 3처럼 한 자세로 가만히 어딘가를 보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도 귀찮다. 

 


예전의 일이었다. 집에 하루 종일 있게 된 어느 날이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벽 저 편에는 바람이 대단했다. 마치 오늘 모든 것을 다 엎어버리고 외설스럽게 생긴 누군가를 데리고 가 버릴 것처럼 포효하고 있다. 계절을 알 길이 없는 바람 소리였다. 벽이 없었다면 아마도 악마의 바람에 할큄을 당해 어떻게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벽을 두지 마라, 벽을 쌓지 마라. 같은 말이 있지만 실체의 '벽'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저 부는 바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절감한다.


집구석의 정막을 깨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거실 공간에 몸을 가만히 두는 것은 개인적으로 쓸데없지만 쓸모없지는 않다. 하찮은 공간 속에서 온전한 ‘나’로써 자유한다. 노래도, 음악도, 소음도 소거된 채 텅 빈 공간 속에 오롯이 홀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다 정신이 어떠한 세계에 접점 하려는 순간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바람 때문인지 오토바이 소리가 기이하게 들렸다.


그날은 쉬는 날이었는지 아니면 그 전날 일을 하러 나가서 작업을 하다가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오전에 들어와서 집에 있었을지 가물거리지만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건 꽤 낯설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근 10년 동안의 나를 돌아보면 나의 패턴은 아침 8시 정도에 눈을 뜨면 그대로 집 밖으로 나와서 바닷가의 어딘가에서 쓰고 싶은 소설을 조금 적는다.


한 시간 정도 바짝 적고 나면 오늘의 할당량은 어느 정도 채우게 된다. 그리고 사진관에 출근하여 사진 작업을 하고, 사진을 찍고, 시간의 틈을 벌려 기록이나 일상을 적는다. 무엇보다 그 사이를 잘 벌려 책을 좀 읽는다. 어떻든 이른 시간에 집에 있는 경우는 나의 문화권에는 없다. 몸이 아플 때에도 아침에는 일단 나와서 밖에서 골골 거리며 아파하다가 저녁에 집어 들어갔다.


그렇기에 그 시간에 집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다는 건 오전에 쓸 소설을 조금 쓴 다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 전날 사진 작업을 받아서 아마도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사진 작업을 하면서 밤을 많이도 지새웠다. 밤을 지새우면 통장에 돈이 굴러들어 온다. 하지만 몸은 나락으로 자꾸 떨어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밤을 지새우는 일은 될 수 있으면 받지 않는 게 낫다.


그날은 정적 속에 내 몸과 마음은 침잠되어 가고 있었다. 먼지의 움직임도 없어 보이는 집의 공간 속에 내 몸은 그대로 ‘집’이라는 안정됨 속에 들어 있었다. 이런 자유는 속박하는 게 아니다. 존재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평소에 누릴 수 없는 자유다. 어디에나 소음이 있지만 내가 낼 수 있는 소음을 소거가 가능한 곳이 집이다. 밖에서는 조깅도 하고 사진 작업을 하려면 머리도 써야 하고 손도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지만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런 것 따위 하지 않아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고 나 자신도 점점 집안의 적요에게 스며든다. 


정말 애벌레가 되어서 허리에 무리가 오면 그저 몸을 살며시 돌리는 정도로 가만히 있는다. 적요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딩동 하며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내가 사는 집은 복도식이었다. 한 층에 7집이 있고 내가 사는 집은 엘리베이터에서 제일 가깝게 있다. 복도식 아파트의 단점은 그렇지 않은 아파트에 비해 외부인의 출입이 잦다는 것이다.


그래도 관리소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경비원들의 노고로 외부인의 출입이 많이 줄어들었다. 배달과 택배를 제외한 판매원이나 종교인의 출입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벨을 누른 사람들은 종교인들이었다. 딩동 딩동. 하지만 나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렇게 조금 누워있으면 그들은 가게 마련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포교를 하려면 한 집에만 매달리수만은 없다.


딩동 딩동.
하지만 그들은 나의 집 앞에 진드기처럼 붙어서 초인종을 눌렀다. 5분이나 서 있었다. 보통 5분씩 초인종을 누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딩동 딩동. 보통 이 정도 되면 집주인이 나와서 화를 내거나 인기척을 내며 걸쇠를 걸어둔 채 문을 열어서 필요 없으니 가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만큼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인지 계속 초인종을 누를지도 모른다.


저들은 왜 그런지 몰라도 숨죽여 누워있지만 이 집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딩동 딩동. 나는 머리를 들고 허리를 세워 인터폰 화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봤다. 여자 두 명으로 50대로 보였다. 단정한 옷차림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종교적이었다. 조금 뒤에 서 있는 여자는 양손을 앞섶에 모으고 있는데 손에는 성경책 같은 종교서적과 팜플랫을 들고 있었다.


딩동 딩동. 나는 뭐랄까. 저들에게 한 소리를 해야 할, 그만 가라고 해야 할 만한 타이밍을 놓쳤다. 무엇보다 귀찮았다. 벽을 사이에 두고 저들과 대치를 하게 되었다. 저들이 벨을 누를 때마다 꺼졌던 인터폰 화면이 켜지면서 저들의 얼굴이 조금은 볼록하게 크게 보였다. 단색으로 보이는 화면 속 저들의 얼굴에는 보통 인간이 가져야 할 몇 개의 감정이 빠져나가 있었다.


요컨대 배려라든가, 감정의 동요 같은 것들이 없었다. 물론 온화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온화'와 '평온'이 지나쳤다. 저들이 숭배하는 종교적인 힘에 의해 아마도 몇 개의 감정은 가리거나 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들은 벨을 누르고 양손을 모으고 가만히 서서 저들끼리 소곤소곤 거리며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앞에 선 한 여자가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저들은 벽을 사이에 두고 적요 속에 집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초능력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아파트에 들어오기 전에 아파트 밑에서 베란다를 보며 물색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적요 속에 몸을 말기 전에 이불을 베란다에 내놓았는데 그 장면을 봤을지도 모른다. 저들은 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소리 없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것이다.


저들은 내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저들이 집에 내가 없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저들은 그런 나의 속 마음을 간파했다.
나는 저들이 내가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더 고요하게 바라보기를 하기로 했다.


벽이 없었다면 저들과의 대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싫든 좋든 얼굴을 마주해야 하고 좋은 소리가 오고 가지는 못할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은 저들에 비해서 하루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내쪽에서는 손해 보는 것이다. 저들은 초인종을 누르는 간격이 기계처럼 정확했다. 거의 1분 30초 만에 초인종을 누르고 초반에 비해 많은 말을 쏟아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공허를 채워줍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나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팜플랫만 드릴 테니 한 번 읽어 보세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합니다.


마치 눈 앞에 상대가 있다는 것처럼 인터폰 앞으로 와서 스피커를 통해 말을 쏟아냈다. 저들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드물게 집에서 쉬는 날에 나는 저들 때문에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무엇보다 저들의 존재가 귀찮았다.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발바닥에 쥐가 왔다. 조금 움직였다. 저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나. 나는 침을 삼켰다.


저들은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쏟아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복도에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옆 집 사람이었다. 저들은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사람 쪽으로 기계처럼 걸어갔다. 좋은 말씀이 있는데요, 라면서. 그리고 옆 집 사람은 관리실에 전화를 해서 아파트 관리를 이딴 식으로 하냐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고요는 유리조각이 되었고 잠을 자야지 했던 생각도 달아나 버렸다. 그래도 내가 이겼다. 이 게으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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