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더 밴드로스의 노래를 들으며 귤을 까 먹고 있으니 마치 겨울의 한가운데 온 기분이 든다. 루더 밴드로스의 노래는 늘 겨울에 들었었다. 팝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중학생 시절 시간과 돈만 있으면 조르르 음악감상실에 가서 루더 밴드로스의 노래를 신청해서 들었다. 귤을 까 먹으며.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아도 시원한 귤을 마음껏 까먹으며 듣는 루더 밴드로스의 노래는 어쩐지 늘 가슴의 한 부분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면 겨울 노래를 들으며 귤을 까먹고 하얗게 변한 마당을 쳐다보는 것을 즐겼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본격적인 겨울이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날이 차가워 두꺼운 옷을 입었음에도 코끝이 시큰거리는 날이 도래한 것을 말한다. 겨울 노래라는 건 보통 11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겨울이 오니까- 대체로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날을 임의적으로 본격적인 겨울의 날이라 하자- 그 시기에 듣는 노래를 겨울 노래라 말한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루더 밴드로스의 캐럴 송을 듣는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앨범을 듣고 싶지만 여기저기 이미 많은 곳에서 써먹었기에 루더 밴드로스로 하자. 루더 밴드로스는 겨울에 아주 어울리는 목소리와 리듬을 가지고 있다. 루더 밴드로스의 노래는 듣는 이로 하여금 느낌을 지니게 한다. 어떤 느낌이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느낌이다. 지금 막 엑토플라즘처럼 떠오르는, 그러나 잘 알 수는 그런 종류의 느낌을 가지게 한다. 뒷골목에서 불한당을 만나더라도 루더 밴드로스의 노래를 틀어주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이렇게 어깨를 움직이며 리듬을 탈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느낌이다. 일종의 리듬에 동화되는 기분이 든다.


겨울의 마당은 차갑다. 지나치게 세제를 많이 넣은 빨래처럼 새하얀 마당은 참으로 차갑다. 그런 마당의 틈으로 비죽 올라오던 잡초들도 없기에 마당은 그야말로 하얗게 표백된 세계다. 중앙시장의 김성명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면서 시장에서 귤 몇 천 원어치를 사면 검은 비닐 봉다리에 이만큼 귤을 담아준다. 그걸 들고 집으로 와서 손을 씻고 양반다리로 앉아 등에는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으며 마당을 본다.


루더 밴드로스의 디스 이즈 크리스마스가 나온다. 루더 밴드로스의 캐럴 송은 마치 리사 오노의 보사노바 풍의 캐럴 송을 듣는 것처럼 낯설기만 한데 익숙하다. 어렸던 그때는 리사 오노를 몰랐으니 넘어가자.


https://youtu.be/jJOPR3B5G7U


귤은 껍질이 얇지 않아서 손가락을 푹 넣으면 잘 까진다. 귤이 맛있어서 4개 정도는 그냥 연달이 까서 먹는다. 배가 부른지도 모르며 귤을 맛있게 까서 먹는다. 귤을 까먹으며 마당을 보며 잠시 귤을 좋아했던, 김승옥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시체가 된 주인공 아내를 떠올린다. 귤을 좋아했다던 아내가 죽고 시체 판 돈을 다 써버리기로 한 주인공. 김승옥의 소설을 읽은 것도 더 후에 일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마당을 쳐다보는 건 그저 보는 것이다. 그때는 시간이 막대한 자산이었고 시간이 흐르는 건 사막 거북이가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흘렀다. 집에는 어쩐 일이지 아무도 없다. 딱 이런 시간이 좋다. 오후 2시의 집에는 아무도 없고 나 혼자서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으며 마당을 보는 것. 조금 지나면 동생이 엄마와 올 것이고 그러면 이런 고요한 자유가 깨진다. 마당의 화단에 많은 나무의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미미하게 흔들린다. 그것마저 그림처럼 보인다. 새 한 마리 없고 누구 하나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세상은 분명 이런저런 이유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을 텐데 이렇게 고요하다는 것이 신기하다.


루더 밴드로스는 이어서 마이 페이보릿 띵스를 부른다. 루더 밴드로스는 2005년에 죽었다. 아직 그때는 팔팔하게 살아 있는 시기이니 루더 밴드로스의 마이 페이보릿 띵스는 마치 갓 잡은 숭어처럼 팔딱거린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또 한 곳이 김성명 치과다. 김성명 치과는 항상 겨울에만 갔던 것 같다. 기억을 벌리면 김성명 치과의 로비에는 난로가 있었고 언제나 불이 활활 타오를 만큼 뜨거웠다. 요즘처럼 실내 전체가 난방이 되는 게 아니니까 두터운 겨울옷을 벗지 않아도 되고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으면 대체로 따뜻했다. 치과가 주는 무서움도 잊고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런 모습 때문에 김성명 치과가 겨울이면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화장실은 로비에 붙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긴 복도가 나오는데 그 끝에 위치한 독특한 장소에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를 걸어가면 중간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계단의 중간 부분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철망으로 바리케이드가 쳐 있는데 고개를 빼서 그 밑을 집중해서 보면 장난감이 가득했다.


그곳의 장난감은 뭐랄까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것들인데 어딘가 부서지고 어긋나고 기이하게 생긴 것들이다. 그러니까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주인공이 장난감이 있던 중간 열차 칸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조금은 불안하고 화가 난 얼굴을 한 장난감들처럼 말이다. 그런 장난감이 계단 밑의 창고 같은 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완전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있는 힘을 다해 내 작은 머리와 목을 주욱 빼면 어느 정도의 장난감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양이 대단했다. 장난감이 좋아서 집에 있는 장난감도 대단해서 동네 아이들이 그걸 가지고 놀고 싶어서 좁디좁은 우리 집에(신기하지만 요즘도 집이 온통 피규어라 집으로 오고 싶어 한다) 오고 싶어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은 완구와 프라모델이었지만 김성룡 치과의 한 지하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장난감은 다리만 한 인형들이다. 어딘가 선택받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 인형의 얼굴이 내내 기억이 났다.


그래서 또 김성명 치과에 가는 날에는 빨리 가자고 재촉하기도 했다. 다행히 어린 시절의 내 이는 섞어서 자주 치과에 가야 했는데 김성명 치과에 가는 것이 좋았다. 그 인형들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시간은 늘 겨울이었다. 치과에서 집으로 오면 그 인형들의 잔상이 저녁시간의 그림자처럼 길어졌다. 그때는 고작 9살, 8살 정도라서(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피규어를 좋아하고 있다) 이성이라든가 루더 밴드로스의 음악보다는 사람에게 선택받지 못한 완구의 구겨진 모습이 내내 떠올랐다.


그런 모습이 표백된 하얀 마당과 이불을 덮고 있는 내 모습과 작은 덩치인데도 귤을 한 번에 네 개씩 까먹으며 듣던 루더 밴드로스의 음악과 섞이면서 어딘가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드는 오늘. 지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