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확실하진 않지만 김치가 떨어졌다 싶으면 불영계곡에서 김치가 날아온다. 그런 날이면 모친은 하루 종일 김치를 기다리느라 어디에도 가지 않고 집을 지킨다. 김치가 오는 날이면 아파트 10층의 아주머니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들 마냥 모친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다가 택배 박스를 펼치는 그 순간을 보며 즐거워한다.


울진 불영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명멸하는 새벽빛을 받으며 김치는 바다의 갯것처럼 울산의 이곳으로 온다. 그 먼 곳에서 몇 번이나 포장이 되어서 버스에 실려 바다가 있는 여기로 날아와서 입맛에 관해 하나의 레짐을 결정짓는다.

 

깨끗한 배추와 깨끗한 고춧가루.

온통 깨끗함으로 무장한 김치의 맛은 깊었기에 상자에서 나오는 순간 아주머니들은 참을 수 없다. 김치를 도마 위에서 두 번 썰어서 밥상 위에 올려놓으면 다른 반찬은 공멸시키기에 충분했다. 불영계곡에서 건너온 김치는 몸을 홧홧하게 해주었다. 김치를 벌리면 인간의 속살처럼 신비스러움이 가득했다.


불영계곡에서 시간을 들여 건너온 김치는 동네 사람들을 한자리로 끌어모으게 만들었다. 마당이 있던 고등학교 때에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생선을 같이 씹어 먹다가 이와 이 사이에 가시가 박혀 고생을 하기도 했다. 불영계곡에 사는 큰 이모는 그 깊은 계곡에서 때만 되면 김치를 담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택배를 보내주었다. 덕분에 모친은 김치를 굳이 담그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4세 일 때 가난 때문에 단칸방인 집에서 어린 동생을 키워야 했던 부모는 나를 불영계곡에 있는 외가로 보냈다. 거기서 2년 정도를 살았다. 외할머니와 큰 이모가 나를 키웠다. 일찍이 이모부를 여의고 아이가 없던 큰 이모는 나를 아들처럼 키웠다. 해가 숨어버린 저녁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면 할머니 같았던 큰 이모는 나를 끌어안고서 조금만 참으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실컷 울고 나면 큰 이모는 보리차에 밥을 말아 김치를 물에 한 번 씻은 다음 숟가락 위에 얹어 주었다. 입 짧은 나였지만 맛있게 먹었다.


어린이였던 그때 어른들이 맛있다고 말하는 김치는 큰 이모가 담근 김치였다. 김치 그 속에 생선(불영계곡의 김치에는 대부분 울진 바다의 생선이 들어가 있다) 있는데, 생선이 김치 곳곳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때부터 생선이 들어간 김치를 거부감 없이 야무지게 먹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김치를 만드는 방법은 이 집 저 집 비슷한데 맛은 전부 달랐다. 김치는 흡사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인간은 눈, 코, 입, 귀는 비슷한데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김치는 더 이상 인간에게 지엽적이지 않았다.


외할머니도 떠나고 혼자서 불영계곡에서 생활하는 큰 이모에게 돈을 벌고 나서부터는 매달 5만 원에서 10만 원 정도를 용돈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되었다. 용돈을 보내면 큰 이모는 꼭 생선이다, 문어다, 해서 울진의 진미를 택배로 보냈다. 용돈을 보내면 큰 이모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했지만 큰 이모는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큰 이모가 담근 김치는 인기가 좋았다. 김치를 택배로 받는 날이면 늘 아주머니들이 모여들어 갓 지은 밥에 김치를 올려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주머니들은 동그란 얼굴을 늘 네모나게 만들고 손을 허위허위 저어가며 식사에 열중했다.

 

아주머니들은 아이가 되어서 김치 하나로 밥을 먹으며 김치 하나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우리 집 애는 김치를 입에도 안 댄다느니, 우리 시댁은 어디 지역인데 그쪽 김치는 말이야... 입속에는 김치가 한가득 들어있고 이야기는 김치로 인해 그림을 만들었다. 김치를 먹는 그 순간은 모두가 김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순간의 행복을 영원함으로 나눠 가졌다.


촛불을 켜는 순간 현실 세계에서 이상 세계로의 이동을 찰나로 경험하여 경건해지듯 김치도 수평적인 우리를 수직으로 오르게 만드는 마법이 가득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불영계곡에서 날아온 큰 이모 표 김치는 이곳의 우리들을,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하는 수직 하는 몽상가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두 달 전 코로나 덕분에 큰 이모의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은 이모의 동생인 모친과 나, 작은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그들의 큰딸과 돌아가신 큰 외삼촌의 자녀인 사촌누나 두 명과 사촌 형 두 명이 고작이었다. 코로나 덕분에 조촐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장례식장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장례식장이 쓸쓸하다든가 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렇게 조촐하게 모인 친척들은 큰 이모 덕분에 몇 년 만에 또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뚝뚝 떨어져 앉아서 큰 이모의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모두의 입에서 이제 큰 이모 표 김치를 먹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옴으로 해서 현실을 직면했다.


큰 이모는 불영계곡의 작은 집에서 아파도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그저 아코디언처럼 몸을 웅크리고 아픔을 참아냈다. 나와 모친밖에 없는 이곳으로 오라고 해도 고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단호한 말속에 외로움과 아픔을 감지하지 못했다. 큰 이모는 병원에 실려 가기 전까지 김치를 담갔고 우리에게 보냈다.


장례식이 끝나고 큰 이모가 살던 집에 모여 장례식에 들어간 비용과 집을 처분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비용을 누군가 한 사람이 지불할 수 없으니 모두가 N 분의 1로 내기로 했다. 그러면서 큰 이모의 우체국 통장을 우체국에 가서 확인을 했더니 그동안 내가 용돈으로 보낸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돈이 천만 원 정도였다.


도대체 큰 이모는 생활을 어떻게 하며 보냈을까. 그러면서도 곱고 예쁜 옷들이, 한 번도 입지 않았을 것 같은 옷들이 옷장 속에 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친과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면서 수다를 떨고, 말다툼도 하던 큰 이모는 늘 잘 지내고 있다, 여기는 고향이니까 사람들이 가족처럼 대해주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용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문어를 보내고, 생선을 보내고, 고춧가루를 보내고 김치를 담가 보내는 줄 알았다. 그래서 택배가 평소보다 무거우면 나는 십만 원이나 오만 원을 더 보냈다. 큰 이모는 그 돈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죽고 말았다.


큰 이모의 마지막 김치를 먹었다. 잘 익어서 어디에도 어울리는 맛이다. 이제 이렇게 깊은 맛이 나는, 큰 이모 표 김치는 맛볼 수 없다. 이제 오롯이 기억이라는 깔때기를 거쳐 추억으로만 그 맛을 느껴야 한다. 김치로 점철된 큰 이모의 삶이 고통스럽지 만은 않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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