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에 서울에 갈 일이(라고 주위에는 말했지만 백남준 아트 센터에 가려고) 있어서 고속버스를 탔다. 운전을 하면 버스를 탈 때만큼 멍하게 있을 수는 없기에 가끔 고속버스를 탄다. 그곳에 도착하면 나를 배웅하러 누군가 나와 있을 테고 멍한 생각에 지치면 고속버스에서 잠이 들어도 개운하다.


그때가 2월 중순이었는데 그 전날 엄청난 눈이 전국에 내렸다. 한반도가 마치 새하얀 무스케이크 같은 모습이 되었다. 눈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 온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버리겠어,라는 좀 못된 마음을 먹고 내려서인지 굉장했다. 만약 원더우먼이 봤다면 매직이군요,라고 했을 것이다. 실제로 원더우먼 1편에서 런던에서 처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갤 가돗이 크리스 파인의 품에서 그런 대사를 했다.

 

그렇지만 내가 있는 이곳 바닷가에서는 그렇게 뉴스에서 떠들썩한 것과는 다르게 눈이 내리자마자 녹아버려서 크게 와닿지 않았다.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보는 풍경은 군데군데 모아놓은 눈이 천덕꾸러기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땅바닥은 젖어 있을 뿐이었다.


 

고속버스는 자주 타지 않기에 고속버스를 탄다는 건 내가 손을 뻗을 수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는 일탈이다. 꼬마였을 때는 멀미 때문에 어딘가로 훌쩍 떠난다는 설렘보다 고속버스가 그저 거대한 바퀴 달린 네모난 악어처럼 보였다. 그렇게 심하던 멀미도 어느 기점부터 산타 할아버지처럼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고속버스의 의자는 마치 ‘당신을 여지껏 기다리고 있었어요’라며 다소곳 하게 보인다. 우등고속이라 홀로 좌석에 건방진 자세로 퍼져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으며 이어폰으로 쇼팽을 듣는 건 거짓말이지만 음악을 들으며 가면 된다.

 

스티븐 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를 읽으며 나는 스티븐 킹의 소설 속으로 기어 들어가려고 했다. 버스는 서서히 움직였다. 거대한 벌레 같은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남들 몰래 마음이 두근거린다. 책을 펼친 채 잠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둔다. 군데군데 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눈 뭉치들이 보였고 사람들이 추운지 등을 구부리고 지나치는 모습도 보였다.


겨울의 차가운 대기는 아름다운 태양빛을 눈부시게 산란시켰다. 사람들은 여름처럼 눈을 찌푸리고 미간을 좁히고 길거리를 걸어 다닌다. 그런 모습을 보면 모두 비슷한 움직임이지만 다른 철학이 개개인에게 있는 것 같아 신기하다. 길고 긴 우등고속버스가 좁은 도로를 구불구불하게 빠져나갈 때는 마치 어린 시절 극장에서 화면으로 본 로봇의 운전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택시의 뚜껑이 보이고 오토바이 운전자의 헬멧도 보인다. 인도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정수리도 가끔 보이고 혀를 내밀고 걸어가는 강아지의 등도 보인다. 버스에 건방진 자세로 앉아 창밖으로 보는 세상은 전부 눈 밑에 있었다. 오랜만에 버스를 탄다는 건 그런 분위기에 흠뻑 젖게 만든다. 멍해져도 좋을 시간, 좋을 장소인 것이다.


버스는 롯데 백화점을 경유해서 현대호텔을 지나 제니스성형외과를 지나쳐 메인 도로로 빠져 나온다. 도로 위로 올라온 대형버스는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갑고 경쾌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거대한 버스는 서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학이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를 지나 톨게이트를 향해 버스는 빠르게 돌진한다.


가까운 창밖의 풍경이 시놉시스처럼 빠르게 흘렀다. 경주를 지났다. 경주를 지나니 날이 스산하고 흐렸다. 하늘은 잿빛을 잔뜩 짊어지고 우울한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보였다. 창 하나로 가로막혀 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무척이나 차가워서 십 분만 서 있으면 다리가 덜덜 떨릴 것만 같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버스 안은 따뜻했고 의자는 편안했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서울까지 3시간은 넘어가야 한다. 실컷 자고 일어나도 2시간이 남을 것이다. 버스는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력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버스는 속도가 줄어들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올라탄 고속버스는 대구를 지나칠 무렵에 더 이상 도로 위를 달릴 수 없다며 가장 가까운 휴게소에 거북이 운행으로 들어갔다.


눈 때문이었다.


경주를 기점으로 해서 위 지방으로 갈수록 며칠 동안 내린 눈 때문에 도로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대구에서부터 잿빛 하늘은 눈을 계속 뿜어대고 있었다. ‘마이 페이보릿 띵’이 어울릴법한 광경이 창밖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세상은 전부 눈으로 덮여있었고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휴게소에 들어가기 전에 버스는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눈 때문에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예보가 없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날씨는 버스를 그만 휴게소에 묶어두게 만들었다. 얼마 동안 휴게소에 머물러 있어야 할지 몰랐다. 비처럼 쏟아지는 눈은 휴게소에 들어온 차들을 잠깐 사이에 전부 하얀색으로 만들었다.


눈의 세계라는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웅성거리며 계획에 차질이 있는 것처럼 불안해하지 않았다. 예고 없이 휴게소에 들어간 버스 때문에 잠을 자던 사람들이 일어났고 옆 좌석에 앉은 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사람들은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처지를 걱정했다.


평일이라 사람들은 정말 큰일이 난 것처럼(큰일인 것이다) 자신의 휴대전화를 통해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나를 제외한 버스 안의 대부분 사람들이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계획에 차질이 생겨 버려서 안절부절못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거의 반 백수로 4일 동안 아무런 할 일도, 바쁜 일도 없었다. 멈춰버린 이 시간을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말 될 대로 되라,라는 식이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 속처럼 그런 일이 일어나도 좋을 법한 어두침침한 날 가운데의 폭설이었다. 눈이 더 펑펑 쏟아져 집채 더미처럼 쌓이든, 그 쌓인 눈이 얼음으로 변해서 그곳에서 펑, 하며 미스터 프리즈가 나타나서 다이아몬드로 저온상태를 유지하며 극 냉동복을 입고 극저온 블래스트를 웃으며 사람들에게 마구 쏘아댄다고 해도 어쨌든 3일이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세계가 아무리 일그러질 정도로 삐뚤어져 가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영차 영차 하면 대체로 3일이면 일상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그런 생각에 잠겨 창밖을 보고 있으니 눈이 앞을 내다보지도 못할 만큼 내리고 있었다.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만난 엄청난 양의 눈을 반기는 사람들은 아이들뿐이었다.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니 방뇨의 기운이 올라와 화장실로 향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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