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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조지는 타이어 자국이 깊게 파인 진입로에 들어섰다. 땅거미는 내려앉았지만 아직 집 주위에 둘러쳐진 노란 테이프가 보였다.

차를 주차했지만 시동은 끄지 않았다. 뉴에식스의 막다른 길에 숨어 있다시피 한 집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여기 왔던 때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 소나무에서 저 소나무로 넓은 원을 그리며 폴리스 라인이 둘러졌고, 현관문에는 흰색과 빨간색 테이프가 X자 모양으로 붙어 있었다. 그는 시동을 껐다. 에어컨이 멈추자마자 숨 막

힐 듯한 더위가 밀려들었다. 태양이 나직이 걸린 데다 울창한 소나무가 하늘을 가려 한층 더 어둑했다.

조지는 차에서 내렸다. 눅눅한 공기에서는 바다 냄새가 났고, 멀리서 갈매기 소리가 들렸다. 진갈색 목재 가옥은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에 섞여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외벽은 때가 타서 거뭇거뭇했고, 길쭉한 창문 안쪽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폴리스 라인”, “넘어가지 마시오라고 적힌 노란 테이프 아래로 몸을 숙여 안쪽으로 들어갔다. 집 뒤의 썩은 데크로 걸어가며 들어갈 수 있는 미닫이 유리문이 열려 있기를 바랐다.

만약 잠겨 있다면 돌을 던져 유리문을 깰 것이다. 어떻게든 집 안으로 들어가 최대한 빨리 둘러보며 경찰이 놓친 단서를 찾아볼 작정이었다.

유리문에도 테이프가 붙어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조지는 서늘한 실내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면 무서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비현실적일 정도로 차분해졌다. 마치 백일몽을 꾸는 것처럼.

찾아야 할 물건이 뭔지는 몰라도 보면 알 거야.

경찰이 집 안을 샅샅이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곳곳에 지문 채취용 가루가 한두 줄씩 남아 있고, 마약을 녹이는 데 사용한 스푼도 커피 테이블에서 사라졌다. 조지는 제일 큰 침실이 있는 저택 동쪽으로 향했다.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방이었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졌을 거라고 예상하며 문을 열었지만 의외로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천장이 낮은 널찍한 침실로, 꽃무늬 침구를 씌운 킹사이즈 침대와 맞은편에 놓인 두 개의 서랍장이 있었다. 서랍장 위에 세워진 테 없는 사진틀의 지저분한 유리 너머로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이 보였다. 생일 파티 사진과 졸업식 사진이었다.

서랍을 열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옷가지와 헤어브러시, 상자에 든 향수병들뿐이었다. 모두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았고 꽃향기 같은 좀약 냄새가 풍겼다.

카펫이 깔린 계단은 아래층으로 이어졌다. 현관 옆의 층계참을 지날 때는 그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쓰러졌던 곳,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며 죽어간 곳을 유달리 오래 바라보았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는 왼쪽으로 돌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실로 들어갔다. 넓은 지하실에는 창문이 없었다. 벽에 달린 전등 스위치를 켜봤지만 이미 전기가 끊겼는지 불이 들어오

지 않았다. 미리 뒷주머니에 넣어둔 소형 플래시를 꺼내 희미한 불빛으로 지하실을 비췄다. 중앙에 놓인 아름다운 빈티지 탁구대에는 초록색이 아닌 빨간색 펠트가 깔렸고, 당구공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저쪽 모퉁이에는 높은 바 테이블과 스툴 대여섯 개가 있고, 벽에 조지 디켈 테네시 위스키라고 적힌 대형 거울이 걸려 있었다. 거울 앞 빈 선반에는 한때 술병이 줄줄이 진열되어 있었을 테지만 다 마시고 버린 지 오래였다.

찾아야 할 물건이 뭔지는 몰라도 보면 알 거야.

조지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작은 침실 두 개를 훑어보며 최근 그 방에 살았던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도 같은 생각이었을 테니 조금이라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증거는 모두 가져갔으리라. 그래도 조지는 직접 와서 찾아봐야 했다. 분명 무언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그녀가 무언가 두고 갔을 것이다.

마침내 거실 책꽂이의 눈높이쯤 되는 선반에서 그걸 찾아냈다. 하얀색 양장본으로, 마치 도서관에서 빌린 책처럼 비닐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보트 사용설명서라든가 가이드북, 오래전에 출간된 아동용 백과사전 같은 실용서들 속에서 단연 두드러졌다. 같은 선반에 다른 소설도 있었지만 모두 대중적인 스릴러 소설 문고본이었다.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톰 클랜시의 책 같은.

그는 책등을 쓰다듬었다. 가늘고 우아한 빨간색 글씨체로 제목과 작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책. 그들이 처음 만난 대학 1학년 때 그녀가 선물로 주기도 했다. 추운 겨울밤에는 기숙사 방에서 이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그는 책 속의 몇 구절을 아직도 외우고 있었다.

책을 꺼내 책장이 우둘투둘하게 잘린 옆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갑자기 책이 6페이지에서 벌어졌다. 두 문장 주위로 깔끔하게 그린 네모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책에 표시를 해두던 게 기억났다. 형광펜을 쓰지도, 밑줄을 긋지도 않고 그냥 단어와 문장, 문단 주위로 깔끔하게 네모를 그릴 뿐이었다.

처음에는 네모 안의 글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이 6페이지에서 펼쳐진 건 우연이 아니라 거기에 엽서가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엽서 뒷면은 오래되어 살짝 누렇게 바랬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엽서를 뒤집었더니 폐허가 된 마야 시대 유적지 사진이 인쇄돼 있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관목이 우거진 절벽 위의 허물어진 유적인데 옛날 엽서라서 바다와 잔디가 촌스러울 정도로 새파랬다. 그는 다시 엽서를 뒤집었다. 맨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멕시코 킨타나로 주, 툴룸의 마야 유적지.”

* 2회. 첫사랑이 돌아왔다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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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25&aid=0000007140

 


우리 시대 가장 무모한 그러나 행복한 여행자


연합르페르 | 기사입력 2009-09-30 09:24




미약하게 시작한 일이 창대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민희 씨가 두 번에 걸쳐 단행한 유럽 음식 여행이 그러했다. 처음에는 치즈가, 그 다음에는 파스타가 목적이 되어 여행을 이끌었다. 두 번의 여행 이후 도합 700페이지에 이르는 두 권의 음식 기행 서적이 출간됐다. '민희, 치즈에 빠져 유럽을 누비다'와 '민희, 파스타에 빠져 이탈리아를 누비다'이다. 치즈와 파스타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행가는 어느새 베스트셀러 여행작가로, 인터넷 파워 블로거로, 문화센터 인기 강사로 지경을 넓혔다.

◆캐나다로 가출하기

이민희식 여행법은 낯설다. 유명 관광지의 고색창연한 건축물이나 예술품은 뒷전이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보다 뒷골목 시장의 치즈 가게에 더 큰 의미를 둔다.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에 들렀을 때도 명품 브랜드나 화장품 코너가 아닌 지하층 식품 매장으로 향했다. 목적이 이끄는 여행은 관광 명소 순례의 일반적인 여행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녀의 남다른 여행법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첫 해외여행이 가출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4남매 중 막내이고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몸집인지라 집안에선 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겁이 많아 불을 켜놓고 잠자리에 드는 막내딸이 혼자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가족 전체가 심사숙고할 문제였다.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예약해놓은 항공권 출발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결국, 어느 가을날 책상 위에 장문의 편지를 올려놓고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하루 뒤 캐나다 밴쿠버 공항에서 공중전화로 집에 연락을 취한다. '파란만장 미스 리'의 여행기가 첫 페이지를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손엔 김포공항에서 출국하며 구입한 가이드북 '캐나다 100배 즐기기'와 20만 원이 전부였다. 노숙을 하지 않는 한 열흘도 버티기 힘든 금액이었다. 여행보다도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다행히 평소 닦아놓은 영어 구사력 덕분에 카페 점원으로 채용돼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일과 여행을 병행하며 다섯 달을 보낸 후 유럽으로 향했다. 한 달 남짓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를 여행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거의 반년 만의 귀환이었다. 통 크게 결행한 가출은 몇 가지 수확을 남겼다. 식구들은 자급자족하며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막내에게 성인식에 준하는 환영식을 베풀어주었다. 그야말로 '막내의 재발견'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치즈에 관한 여행 책을 써보고 싶었어요. 파리 콩코르드 광장 부근의 치즈 가게가 계기가 됐죠. 진열대 위 치즈들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구경했어요. 별천지 같았어요. 치즈를 테마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만 4년. 거듭난 막내딸이 스스로 하고픈 일을 이루기 위해 쏟아 부은 준비 기간이다. 계절이 16번 바뀌는 동안 사진과 운전을 배우고 유럽 문화와 치즈에 관한 책을 읽었다. 또 카메라와 노트북을 장만하고 은행 계좌에 3천만 원을 모았다. "그래, 이쯤 하면 됐지?" 서른 살 생일날 아침에 사표를 썼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치즈 여행을 떠나겠다는 선언에 식구들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 당시 파리에서 생활하던 선배 언니도 "치즈 농장이 어디 붙어 있는 줄 알고 찾아가겠다는 거야?"라며 극구 말렸다. 하지만 거사는 망설임 없이 단행됐다.

◆치즈와 파스타에 빠져들다



유럽 치즈 탐사는 2006년 1월 시작됐다. 한겨울 새벽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렸다. 불어는 전혀 몰랐고 손에 쥔 것은 주한 프랑스,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받아 온 두 나라의 치즈 공장 리스트뿐이었다. 가출 여행 후 4년이 흐르는 동안 무모함도 무르익었다.

파리에선 석 달을 머물렀다. 선배 언니의 소개를 받아 교민 가정의 베이비시터로 일하면서 불어 학원을 다녔다. 또 보물찾기하듯 파리 곳곳의 치즈 가게를 매일 찾아다녔다. 그중 좁고 긴 골목에 형성된 무프타(Mouffetard) 시장은 치즈 가게 주인들이 귀찮아할 만큼 자주 들렀다.

불어와 프랑스라는 나라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본격적인 치즈 여행 채비를 꾸렸다. 처음에는 기차와 버스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치즈로 이름난 마을 중 상당수가 자가용이 아니면 찾아가기 힘든 위치였다. 결국, 예정에 없던 자동차 캠핑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자동차 캠핑은 지금까지의 결정 중 가장 무모한 축에 속했다. 어떤 날은 추위에 손이 곱아 일기조차 쓸 수 없었다. 고단함에 향수병이 더해져 사흘 중 이틀은 울면서 보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몸도 마음도 빠르게 적응해갔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하루 600~700㎞ 운전이 대수롭지 않았고 10분이면 텐트를 칠 수 있었다.

치즈에 이은 파스타 탐사는 2008년 3월에 시작됐다. 계기는 치즈와 동일했다. 2007년 어느 여름날 동네 마트에 진열된 파스타에 홀려 30분간 넋이 나가는 경험을 한 후 이탈리아 여행을 구상했다. 첫 여행에서 겪은 고된 시간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다시 한 번의 모험을 선택했다.



"이번에도 목적은 분명했어요. 이탈리아 시골의 허름한 부엌에서 양손 가득 밀가루를 묻힌 할머니가 만든 진짜 파스타를 보고 싶었어요. 파스타가 그것을 함께 만들어 먹는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직접 확인해 전해주고 싶었어요."

'무모한 호기심 대장'이 치즈와 파스타 이후 탐사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답은 ‘레스토랑 주방’이다. 치즈가 어떻게 음식에 접목되는지, 한국인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파스타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샐러드, 뷔페, 브런치, 디저트 등 음식에 대해 꼬리를 무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서울 강남 파크 하얏트 서울의 양식당 코너스톤(Cornerstone)에 주방 출입 비자를 신청했다. 그리고 총지배인, 총주방장과의 인터뷰를 거쳐 비자를 얻어냈다.

호텔 주방 여행은 일정에 빈틈이 없었다. 매일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음식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주방복을 입은 종군기자는 요리사들의 곁에서 음식이 탄생하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물론,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 음식 재료를 다듬는 일도 맡았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날, 가냘픈 팔목에는 뜨거운 오븐에 데인 화상 자국들이 선명했다. 손바닥에도 날카로운 랍스터 껍질에 찔린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 일이든 처음에는 많이 두렵고 실수도 있어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용기가 나지 않을 때도 있고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할 때 제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은 '우선 해 보자'예요.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사진/김주형 기자(kjhpress@yna.co.kr)ㆍ글/장성배 기자(up@yna.co.kr)

(대한민국 여행정보의 중심 연합르페르, Yonhap Repere)

<실시간 뉴스가 당신의 손안으로..연합뉴스폰> <포토 매거진>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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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10-0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에게 미안한 일이 있어 편지를 썼어요.
예전 생각하면 잘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엄마의 욕심때문에 쉽지 않네요.^^
http://blog.aladdin.co.kr/junhwan/3128791

dooc5 2009-10-05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din.co.kr/753952193/3136856
전 저희 엄마에게 항상 고마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서요
엄마에게 편지를 썼어요^^

김햇님 2009-10-0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din.co.kr/dalki51/3145285
사랑하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어요. 정말 편지 써본지 오래된것같은데 이번에 기회덕분에 부모님께 편지를 씁니다. 항상 부모님은 제 가슴 한쪽의 아련한 기억으로, 그렇게 남아요. 제가 잘못한게 너무 많아서요^^; 받은 것도 너무 많고, 오랫만에 써서 참 많이 어색하네요^^;;
 

블로거 아나르코님의 서평입니다.


 

 

난 항상 조금 느리다는 생각을 해본다. 학교 때 친구들이랑 밥 먹는 속도도 내가 제일 느렸고, 책을 읽는 속도도 느리고, 집을 나서기 전 준비 하는 속도도 느리다. 어떤 영화나 공연, 책을 보고 느끼게 되는 것들 조차 느리게 다가온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로 끝나고 나서 한참이 흘러서야 어떤 느낌들을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듣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진작 겪었어야 할 성인의 성장통을 제대로 치러내지 못한 탓에' 뒤늦게 지금에서 이렇게 많은 방황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읽으면서 잠깐이지만 나를 카오산 로드로 이끌게 했던 박준님의 《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가 떠오르기도 했고, 길위를 걸으면서 한 여행이라는 사실에 얼마전에 읽은 김준희님의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 와는 다른 묘한 느낌이 나를 사로 잡았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읽으면서 실제로 내가 그 길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저자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내가 실제로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미노의 순례자'라고 생각하는 애런, 말많고 친화력 뛰어난 '베드 호퍼' 마틴, 수호천사로 나타난 할아버지와 조지 할아버지, 걱정을 달고 사는 마농 아줌마 등등 ㅡ. 모두 내가 만난, 나의 친구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치, 나의 두 손에는 순례자 증서가 놓여 있다는 듯한 느낌과 함께 ㅡ.

 

“이 길은 처음엔 혼자 시작해도 
거의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끝나게 되는 길
이에요.

행운을 빌어요. 부엔, 카미노! (Buen, Camino!)” - P44

 

카미노란 곳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함께이면서 혼자 걷는 길 ㅡ. 산티아고를 가는 길, 카미노가 그렇듯이 우리의 도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혼자나 함께라는 절대치란 없는 ㅡ.

  

 

여행 중에는 사회적 지위, 직업, 학력, 능력, 소유 심지어 나이나 외모 따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길위에서 만나면 모두가 친구일 뿐이다.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봐주는 많은 친구둘을 만날 수 있는 곳. 그 곳이 어디든, 그 곳이 여행이고, 그 것이 여행이다 ㅡ. 그래서 여행을 하게된다. 그리고 또 여행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 놓여있는 지금, 온전한 나 자신만을 내세울 수 있는 세상에 놓여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가득 담긴 소원아닌 소원도 빌어본다.

 

특별히 구하는 답은 없어요.

다만 카미노가 주는 걸 모두 받아 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 P99

 

정말 멋진 대답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무슨 일(그것이 여행이 될 수도 있는..)을 하든 그것에서 꼭 무언가를 얻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실제 그랬다. 어떤 사소한 일 하나를 하면서도,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여행을 하면서도.. 그 덕분(?)에 그 자체에 흠뻑 빠지지 못하고 뒤돌아서 후회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나 생각해 본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여행의 이야기를 담은 책도 나에겐 크나큰 설렘으로 다가온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이 반반섞인 기분으로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겨가면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생각하는 즐거움이란 요즘 나의 삶에 있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행 이야기라고 해도 기대와 달리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실망스러운 책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그와는 정반대의 책이었다. 아니 오히려 기대 이상의 책이었다고 표현해야 적합할 것이다. 기대이상으로 멋지고, 즐겁고, 때로는 슬프게도 만드는.. 어쩌면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들과 내가 평소에 느끼던 것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어떤 일들이 이 책의 내용과 많이 닮아 있어서 더 그렇게 좋게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ㅡ.

 

좋은 것을 보면 자꾸 가지고만 싶어 진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좋은 책을 보면 자꾸 욕심을 내는 일이 부쩍 많아진  요즘이다. 책에 대한 욕심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그 보다 더한 것은 좋은 곳을 알게되면 정말 가고싶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만난 지금, 가고 싶어지는 곳이 또 한곳 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 당장 떠나고픈 생각은 없다. 산티아고 가는 길, 카미노먼 훗날 좀 더 나이가 들어서 갈 곳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듯이, 그 곳은 내 마음 최후의 안식처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ㅡ.

훗날 언젠가, 
크루스 데 페로에 올라 눈물 흘리고 있을 나를 만나게 되길 소망해 본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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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 원피츠님의 서평입니다.

<비밀이 발각되다> 첫장에서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티보씨와 그의 아들 앙투안은 자크를 찾으러 학교로 달려갔다. 신부님은 짐작했다는 듯이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 화두의 중심에는 회색노트가 있었다. 다니엘과 자크가 서로 주고받은 교환일기일뿐인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의문이였다. 신부님은 무슨 권리로 교환일기를 빼앗아서 그들의 비밀을 들추어 내는것인가?  내가 자크였더라도 신부의 행동에 크게 분노했을 것이다.

파리 대교구에 영향력이 큰 티보씨는 아들의 걱정보다는 자신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에 더욱 화가 치밀어보였다. 한편 다니엘네 집에서는 자크의 집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다니엘의 엄마는 아들이 없어진 사실에 모든것을 떠나 진심으로 아들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다니엘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자크와 함께 사라진것을 알고선 티보씨를 찾아간다. 불안한 마음에 그녀는 용기를 내어 티보씨를 찾아가지만, 그건 용기가 아니라 섣부른 행동일 뿐이였다. 티보씨는 그녀의 아들 다니엘을 비판하며 그녀에게도 심한 모욕을 주었다. 그들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만으로도 티보씨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여실하게 드러내었다.

내일이면 나는 열네 살이 된다. 시간은 마치 붙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환상이기라도 한 듯이 흘러흘러 우리를 시들게 한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인 것이다. 나 역시 기운이 빠지고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아. 내 마음이 메마르지 않기를! 생활에 찌들어 나의 마음과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이 두렵다.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 벌써 신이나 정신, 사랑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내 가슴속에서 벅찬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쏟아버리는 ’회의’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곤 한다. 슬프다. 어째서 이론을 들먹이는 대신 마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 다니엘의 편지 중 - 

고민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기 위해 태어난 나는, 희망하고 사랑하고 고민한다! 내 삶은 딱 두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나에게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 나는 단 하나의 사랑을 가졌을 뿐. 그것은 바로 너다.

                                                                                       - 자크의 편지 중 - 

 여기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잣대에 아이들을 맞추며 지나치게 간섭하고 걱정하는것 같다.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말이다. 우리는 사춘기를 거쳐왔다. 그때는 예민하고 자신의 미래에 불안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한때는 공부가 전부인것처럼 살아왔지만, 세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아이들을 그런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간의 벽만 높아져만 간다.  사춘기를 거쳐온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불안한, 하지 말라는 행동들만 하는, 삐딱하게만 구는, 신경질적인, 감정의 기복이 심한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것만 같다. 하지만 어른들의 모습에선 그런 아이들이 이해불능이다. 자꾸 미운짓만 골라하고  "우리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라는 불필요한 말만 되뇌이곤한다. 정말 그랬을까? 사람의 기억은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대로 남아있고 퇴색시키고 미화시켜 버린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것은 온전치 못한 추억의 파편들뿐이다. 그런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자크는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원하지만, 늘 엄하기만 하시다. 그럴수록 두 사람의 서로에게 엇갈린 시선으로 인해 사이는 멀어질 뿐이였다.  현실에 불만을 품고 두 사람은 집을 나가기로 결정한다. 매사가 삐딱하고 불안하게만 보이는 자크와 달리 다니엘은 모범적인 아이였다. 많이 달라보이는 두 사람이 친해진 것은 의외였다.  자크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신을 보듬어줄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다니엘은 어머니는 다정스럽고 좋은 분이셨으나 그의 아버지는 난봉꾼이였다. 다니엘의 엄마 역시 그동안 회피해왔었던 자신의 아픔과 마주서고 그의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두 사람이 나눈 교환일기를 보면 감성이 풍부하고 소설가나 시인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마다가스카르로 떠나면 새로운 인생이 있을 꺼라 생각하고 길을 떠난다. 하지만 세상은 두람이 생각한만큼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다니엘의 어설픈 거짓말은 들통나버리고 두 사람은 도망치다가 잠시 헤어지게 된다. 서로를 걱정하며 자크는 노숙을 하게 되고 다니엘은 그토록 궁금해 했던 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계기달라보였다.

 그들은 카톨릭 사회의 견고한 인습과 어른들의 묵은 가치관을 부정하고 그것으로의 해방을 위해 가출을 시도한 것이였다. 금방 집으로 끌려 올 수밖에 없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엄마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자크는 그러하지 못했다. 자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의 품속에 안겨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순조롭게 흘러가 주지 않았다. 결국엔 자크의 아버지는 결단을 내리고 아들을 어디론가 보내버리려고 한다. 자크는 다니엘에게 아버지가 우리 둘 사이를 갈라 놓으려 하며 자신을 어딘가로 보내려한다고 편지를 붙이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티보가의 사람들>은 전체가 8부 11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로, 제 1부가 회색노트라고 한다. 마지막장을 읽으면서 이렇게 끝나다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나 역시 요즘 아이들의 위태로움에 안쓰럽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 책에서 카톨릭 사회의 숨막힘이 지금 현실과 크게 다를바가 없는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하다. 지금의 혼란스러운것들이 나중엔 괜찮아 질꺼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 끝이 어디인지 꼭 가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현재의 고민들은 자신만의 아픔이 아닌, 그 어떤 누군가도 다 고민하고 힘들어 했던 문제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재에도 우리는 성장통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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