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전 읽기, 정석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역사 토픽 읽기
지금까지 어린이 역사책 대부분은 크고 중요한 사건과 인물을 위주로 서술해 왔다. 물론 역사의 큰 줄기를 만들어 온 사건과 인물 들을 통해 그 흐름을 파악하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왕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서술한 ‘위로부터의 역사’가 전부는 아니며, 당시 사람들의 삶이 담긴 작은 이야기 또한 역사임을 아는 것 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통한 기록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를 찾는 시도를 통해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이 역사책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다. 코에 쭈글쭈글하고 긴 살덩이를 매단 코길이(11쪽), 먹물 통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꺼먼 물소(49쪽), 약주 한잔 걸친 것처럼 얼굴이 발그레한 원숭이(71쪽), 몸뚱이에 솜뭉치를 두른 것 같은 양(96쪽), 열두 띠 짐승들 모습을 모두 지닌 낙타(115쪽) 등 조선 사람들에게 요상하게만 보이는 동물들이 나타나, 사람을 밟아 죽이는 사고를 치고(코길이, 25쪽) 천방지축으로 날뛰어 골머리를 썩게 하고(물소, 56쪽), 시름시름 죽어가 애간장을 태운다(양, 104~106쪽). 그리고 이 낯선 생명체들과 이 땅에서 함께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레 조선의 생활상과 문화, 사회 구조를 알 수 있게 했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코끼리, 28~29쪽), 활을 만들기 위해 정책적으로 물소를 수입한 일(물소, 59쪽), 나라의 중요한 제사 때 제사상에 올린 짐승(양, 103쪽) 등의 역사적 사실이 이야기 곳곳에 잘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통해 조선 사회의 요모조모를 읽어 나갈 수 있게 해 준다.
역사를 …… 발견하고, 상상하고, 그리고 탐구한다!
코길이가 한성(서울의 옛 이름)땅에 첫발을 디딘 건 1411년 음력 2월 22일, 조선의 3대 왕인 태종 때였어. 왕 앞에 도착한 일본 사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이 커다란 선물을 바쳤지.
"불교에서 상서러운 동물이라 일컫는 코길이이옵니다. 우리 국왕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오니 물리치지 마옵소서."
뜻밖의 선물을 받은 태종은 떨떠름하게 웃었어. 일본 사신을 물린 뒤, 태종은 신하들을 불러 모았지. (중략)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햇던가......
궁에서 코길이 먹이 때문에 씨름을 하는 동안, 코길이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팔도 사방으로 퍼져 나갔어. 이 소문이 경기도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코길이는 본디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
"한성에 코길이란 짐승이 나타났는데, 몸뚱이는 집채만 하고, 거죽은 환갑이 넘은 늙은이처럼 자글자글 주름살투성이고, 눈은 초승달같이 가늘고, 코는 엄청 길어서 꼭 다리가 다섯 개 같더라니까. 게다가 다리통도 어찌나 굵은지 족히 한 아름은 될 듯싶더구먼."
하지만 충청도를 지나면서 코길이의 모습은 달라지기 시작했지.
"한성에 코길이란 짐승이 나타났대유. 몸뚱이는 남산만 허구, 거죽은 백 살 넘은 노인네처럼 쪼글쪼글 주름살투성이구, 눈은 반달처럼 갸름허구, 다리는 다섯 개나 달렸는디, 코는 다리에 붙어 있다지 뭐예유. 게다가 다리통은 어찌나 굵은지 꼭 아름드리 낭구가 걷는 것 같대유."
전라도에 이르러서는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짐승이 되고 말았어.
"아, 한성에 시방 쾨길이란 즘생이 나타났는디, 아, 몸집은 겁나게 커서 태산만 허고, 거죽은 천 살 넘은 산신령처럼 짜글짜글 주름살투성이고, 눈구녕은 보름달처럼 둥그렇고, 다리는 다섯 개나 달렸는디, 아, 글씨, 코는 발바닥에 붙어 있다는구만이라. 그라고 다리통은 월매나 굵직한지 꼭 천 년 묵은 낭구가 걷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시." (본문 15-17쪽)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사복시에서 청하기를, 잔나비를 위해 흙집을 짓고, 또 옷을 주어서 입히자 하옵니다. 잔나비처럼 상서롭지 못한 짐승에게 감히 사람의 옷을 입히다니요. 전하, 이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
"짐이 그리하라 일렀소."
성종의 말 한마디에 주위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지. (중략)
"그렇다면 추위에 떠는 잔나비를 전하께서 모른 척 지나치시는 게 옳다, 이 말씀이오? 사람의 목숨만큼, 짐승의 생명 또한 소중하다는 걸 왜 모르시오." (중략)
"예판 대감 말씀대로 짐승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왜 잔나비에게만 옷을 내리십니까? 말이나 개, 소 등 다른 짐승들도 추위를 타긴 매한가지일 터인데요." (중략)
보다 못한 성종이 "어험!" 하고 큰기침을 했지. 그제야 두 사람은 이야기를 멈추고 성종을 바라보았어.
"연어가 목숨을 걸고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것도, 철새들이 해마다 옛 둥지를 찾아오는 것도 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오. 고향을 더나 홀로 이곳에 온 것도 불쌍한데, 추위에 얼어 죽게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본문 77~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