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 아나르코님의 서평입니다.


 

 

난 항상 조금 느리다는 생각을 해본다. 학교 때 친구들이랑 밥 먹는 속도도 내가 제일 느렸고, 책을 읽는 속도도 느리고, 집을 나서기 전 준비 하는 속도도 느리다. 어떤 영화나 공연, 책을 보고 느끼게 되는 것들 조차 느리게 다가온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로 끝나고 나서 한참이 흘러서야 어떤 느낌들을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듣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진작 겪었어야 할 성인의 성장통을 제대로 치러내지 못한 탓에' 뒤늦게 지금에서 이렇게 많은 방황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읽으면서 잠깐이지만 나를 카오산 로드로 이끌게 했던 박준님의 《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가 떠오르기도 했고, 길위를 걸으면서 한 여행이라는 사실에 얼마전에 읽은 김준희님의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 와는 다른 묘한 느낌이 나를 사로 잡았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읽으면서 실제로 내가 그 길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저자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내가 실제로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미노의 순례자'라고 생각하는 애런, 말많고 친화력 뛰어난 '베드 호퍼' 마틴, 수호천사로 나타난 할아버지와 조지 할아버지, 걱정을 달고 사는 마농 아줌마 등등 ㅡ. 모두 내가 만난, 나의 친구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치, 나의 두 손에는 순례자 증서가 놓여 있다는 듯한 느낌과 함께 ㅡ.

 

“이 길은 처음엔 혼자 시작해도 
거의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끝나게 되는 길
이에요.

행운을 빌어요. 부엔, 카미노! (Buen, Camino!)” - P44

 

카미노란 곳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함께이면서 혼자 걷는 길 ㅡ. 산티아고를 가는 길, 카미노가 그렇듯이 우리의 도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혼자나 함께라는 절대치란 없는 ㅡ.

  

 

여행 중에는 사회적 지위, 직업, 학력, 능력, 소유 심지어 나이나 외모 따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길위에서 만나면 모두가 친구일 뿐이다.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봐주는 많은 친구둘을 만날 수 있는 곳. 그 곳이 어디든, 그 곳이 여행이고, 그 것이 여행이다 ㅡ. 그래서 여행을 하게된다. 그리고 또 여행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 놓여있는 지금, 온전한 나 자신만을 내세울 수 있는 세상에 놓여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가득 담긴 소원아닌 소원도 빌어본다.

 

특별히 구하는 답은 없어요.

다만 카미노가 주는 걸 모두 받아 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 P99

 

정말 멋진 대답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무슨 일(그것이 여행이 될 수도 있는..)을 하든 그것에서 꼭 무언가를 얻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실제 그랬다. 어떤 사소한 일 하나를 하면서도,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여행을 하면서도.. 그 덕분(?)에 그 자체에 흠뻑 빠지지 못하고 뒤돌아서 후회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나 생각해 본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여행의 이야기를 담은 책도 나에겐 크나큰 설렘으로 다가온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이 반반섞인 기분으로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겨가면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생각하는 즐거움이란 요즘 나의 삶에 있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행 이야기라고 해도 기대와 달리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실망스러운 책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그와는 정반대의 책이었다. 아니 오히려 기대 이상의 책이었다고 표현해야 적합할 것이다. 기대이상으로 멋지고, 즐겁고, 때로는 슬프게도 만드는.. 어쩌면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들과 내가 평소에 느끼던 것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어떤 일들이 이 책의 내용과 많이 닮아 있어서 더 그렇게 좋게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ㅡ.

 

좋은 것을 보면 자꾸 가지고만 싶어 진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좋은 책을 보면 자꾸 욕심을 내는 일이 부쩍 많아진  요즘이다. 책에 대한 욕심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그 보다 더한 것은 좋은 곳을 알게되면 정말 가고싶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만난 지금, 가고 싶어지는 곳이 또 한곳 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 당장 떠나고픈 생각은 없다. 산티아고 가는 길, 카미노먼 훗날 좀 더 나이가 들어서 갈 곳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듯이, 그 곳은 내 마음 최후의 안식처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ㅡ.

훗날 언젠가, 
크루스 데 페로에 올라 눈물 흘리고 있을 나를 만나게 되길 소망해 본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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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 원피츠님의 서평입니다.

<비밀이 발각되다> 첫장에서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티보씨와 그의 아들 앙투안은 자크를 찾으러 학교로 달려갔다. 신부님은 짐작했다는 듯이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 화두의 중심에는 회색노트가 있었다. 다니엘과 자크가 서로 주고받은 교환일기일뿐인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의문이였다. 신부님은 무슨 권리로 교환일기를 빼앗아서 그들의 비밀을 들추어 내는것인가?  내가 자크였더라도 신부의 행동에 크게 분노했을 것이다.

파리 대교구에 영향력이 큰 티보씨는 아들의 걱정보다는 자신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에 더욱 화가 치밀어보였다. 한편 다니엘네 집에서는 자크의 집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다니엘의 엄마는 아들이 없어진 사실에 모든것을 떠나 진심으로 아들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다니엘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자크와 함께 사라진것을 알고선 티보씨를 찾아간다. 불안한 마음에 그녀는 용기를 내어 티보씨를 찾아가지만, 그건 용기가 아니라 섣부른 행동일 뿐이였다. 티보씨는 그녀의 아들 다니엘을 비판하며 그녀에게도 심한 모욕을 주었다. 그들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만으로도 티보씨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여실하게 드러내었다.

내일이면 나는 열네 살이 된다. 시간은 마치 붙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환상이기라도 한 듯이 흘러흘러 우리를 시들게 한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인 것이다. 나 역시 기운이 빠지고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아. 내 마음이 메마르지 않기를! 생활에 찌들어 나의 마음과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이 두렵다.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 벌써 신이나 정신, 사랑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내 가슴속에서 벅찬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쏟아버리는 ’회의’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곤 한다. 슬프다. 어째서 이론을 들먹이는 대신 마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 다니엘의 편지 중 - 

고민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기 위해 태어난 나는, 희망하고 사랑하고 고민한다! 내 삶은 딱 두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나에게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 나는 단 하나의 사랑을 가졌을 뿐. 그것은 바로 너다.

                                                                                       - 자크의 편지 중 - 

 여기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잣대에 아이들을 맞추며 지나치게 간섭하고 걱정하는것 같다.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말이다. 우리는 사춘기를 거쳐왔다. 그때는 예민하고 자신의 미래에 불안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한때는 공부가 전부인것처럼 살아왔지만, 세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아이들을 그런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간의 벽만 높아져만 간다.  사춘기를 거쳐온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불안한, 하지 말라는 행동들만 하는, 삐딱하게만 구는, 신경질적인, 감정의 기복이 심한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것만 같다. 하지만 어른들의 모습에선 그런 아이들이 이해불능이다. 자꾸 미운짓만 골라하고  "우리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라는 불필요한 말만 되뇌이곤한다. 정말 그랬을까? 사람의 기억은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대로 남아있고 퇴색시키고 미화시켜 버린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것은 온전치 못한 추억의 파편들뿐이다. 그런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자크는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원하지만, 늘 엄하기만 하시다. 그럴수록 두 사람의 서로에게 엇갈린 시선으로 인해 사이는 멀어질 뿐이였다.  현실에 불만을 품고 두 사람은 집을 나가기로 결정한다. 매사가 삐딱하고 불안하게만 보이는 자크와 달리 다니엘은 모범적인 아이였다. 많이 달라보이는 두 사람이 친해진 것은 의외였다.  자크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신을 보듬어줄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다니엘은 어머니는 다정스럽고 좋은 분이셨으나 그의 아버지는 난봉꾼이였다. 다니엘의 엄마 역시 그동안 회피해왔었던 자신의 아픔과 마주서고 그의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두 사람이 나눈 교환일기를 보면 감성이 풍부하고 소설가나 시인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마다가스카르로 떠나면 새로운 인생이 있을 꺼라 생각하고 길을 떠난다. 하지만 세상은 두람이 생각한만큼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다니엘의 어설픈 거짓말은 들통나버리고 두 사람은 도망치다가 잠시 헤어지게 된다. 서로를 걱정하며 자크는 노숙을 하게 되고 다니엘은 그토록 궁금해 했던 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계기달라보였다.

 그들은 카톨릭 사회의 견고한 인습과 어른들의 묵은 가치관을 부정하고 그것으로의 해방을 위해 가출을 시도한 것이였다. 금방 집으로 끌려 올 수밖에 없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엄마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자크는 그러하지 못했다. 자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의 품속에 안겨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순조롭게 흘러가 주지 않았다. 결국엔 자크의 아버지는 결단을 내리고 아들을 어디론가 보내버리려고 한다. 자크는 다니엘에게 아버지가 우리 둘 사이를 갈라 놓으려 하며 자신을 어딘가로 보내려한다고 편지를 붙이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티보가의 사람들>은 전체가 8부 11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로, 제 1부가 회색노트라고 한다. 마지막장을 읽으면서 이렇게 끝나다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나 역시 요즘 아이들의 위태로움에 안쓰럽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 책에서 카톨릭 사회의 숨막힘이 지금 현실과 크게 다를바가 없는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하다. 지금의 혼란스러운것들이 나중엔 괜찮아 질꺼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 끝이 어디인지 꼭 가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현재의 고민들은 자신만의 아픔이 아닌, 그 어떤 누군가도 다 고민하고 힘들어 했던 문제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재에도 우리는 성장통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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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 느낌,극락같은 님의 서평입니다.  

아지즈 네신의 ’생사불명 야샤르’.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사실 딱 한마디로 정리된다. 이 책을 읽은 후, 국내에서 출간되는 아지즈 네신의 모든 책을 구입했다라는 것. 사실이다.  

터키의 국민들이 왜 이 작가를 사랑하는 지 이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나 역시 터키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가를 사랑하게 됐다. 

아무래도 터키는 우리나라와 처한 상황이 비슷한 것 같다. 소설속에 나오는 상황들이 우리나라에 대입해도 어쩜 그리 딱딱 맞는지. 오히려 일본 소설들은 친근하지만 뭔지 모를 이질감들이 있는데, 터키는 한숨이 푹푹 나올 정도로 참 우리와 상황이 비슷하다.

주인공인 야샤르 야사마즈(터키어로 야샤르는 살다, 야사마즈는 죽음 이런 뜻이란다)는 어떠한 일로 인해 교도소에 감금된다. 말 재주가 있는 야샤르는 매일 교도소 동료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실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온갖 황당무계한 일들이 그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다.

야샤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행정절차를 밟던 중, 자신이 호적상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호적상에서 야샤르는 자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고, 야샤르가 태어나기도 전인 카낙칼레 전투에서 전사된 것으로 돼 있다. 공무원에게 항의를 하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공식 문서상에 전사한 것으로 돼 있는 데 어떻게 인정을 하느냐고 오히려 성을 낸다. 그렇게 야샤르는 주민등록증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주민등록증 없는 삶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삶이다.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취직을 할 수도 없고, 결혼도 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국민으로써의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삶이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에게서 앗아가는 모든 것들은 주민등록증이 없어도 상관없다. 군 입대를 통해 젊음을 앗아가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앗아가고, 심지어는 싸구려 모자까지 앗아간다.

살아있음을 눈 앞에 보이는 존재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공식적인 행정 문서로만 인정하려고 한다. 본인이 전사자가 된 것은 행정상의 실수이지만 그 누구도 그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고 오히려 결과물인 문서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부조리함을 심각하게 전달하지 않고, 그야말로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것이 아지즈 네신의 매력이다.
특히 그가 관공서에 들어가 벌이는 여행(?)은 웃기면서도 씁쓸하게 한다. 

"형님들, 제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학교에 가려고 할 때는 ’넌 죽었어’라고 하더니 군에 입대할 때가 되니 ’넌 살아 있어’라고 했어요. 아버지의 빚을 갚으라고 할 때는 ’넌 살아 있어’라고 하더니 유산을 상속받을 때가 되자 ’넌 죽었어’라고 하네요. 그리고 정신병원에 처넣을 때는 ’넌 살아 있어’라고 하고."

읽는 사람이 애가 탈 정도 너무 순진한 야샤르는 그 온갖 불행 속에서도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자살을 하려고 해도 그것이 야샤르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름 그대로 야샤르는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매일 교도소의 동료들은 야샤르의 이야기를 애가 타도록 기다린다. 그 재미있고 애 타는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당장 ’생사불명 야샤르’를 펼쳐보라고 강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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