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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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아빠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 서맨사 하비라는 사람의 처음 들어보는 소설 <궤도>라는 책이란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처음 들어보는 소설을 덥석 읽었던 것은 이 책이 작년 2024년 부커상 수상작이었기 때문이란다. 세계 3대 문학상이라고 부르는 부커상은 약 10년 전에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수상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는데, 아빠는 그 이전에 부커상 수상작들을 간간히 읽곤 했었단다. 부커상은 원작이 영어로 된 소설 중에 주는 본상이 있고, 영어로 번역한 작품에 주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이 있단다. 이번에 읽은 <궤도>라는 소설은 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란다. 문학상 수상작을 받게 되면 그 작가를 모르는 경우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읽게 되곤 하지.

몇 달 전에 2023년 부커상 본상을 받은 <예언자의 노래>를 재미있게 읽었으니 더욱 2024년 부커상 수상작에 관심을 갖게 보았단다. 너무 기대를 했던 것인지, 일단 아빠 취향의 소설은 아니었단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부커상을 수상하였다고 하는데, 아빠는 공감할 수 없었단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지내는 여섯 사람의 일상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지구, 우주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영상을 글로 옮겼다는 것 이외에 신선함 마저 느낄 수 없었단다.

시적 언어를 사용하였고, 국제우주정거장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이들의 고독과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소설로 그리긴 했는데, 결국은 반전이나 극적인 사건 없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소설이었단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글로 표현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아빠의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바꿔야 했단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유튜브로 찾아보는 영상보다 나은 지 잘 모르겠더구나.  아무튼 아빠의 취향이 아닌 소설을 활자 하나하나 곱씹어 읽으면서 책의 마지막을 펼쳤단다.

그래도 읽는 내내 어떤 극적 사건이나 반전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읽어서, 책 중반까지는 책에 등장한 멋있는 문구들의 페이지를 꽤 적어 두었는데, 그것이 그것으로 그쳐버린 점이 아쉬웠단다. 읽은 이들의 평가를 보면 여운이 깊다거나 잔잔한 울림을 준다고 하는 글도 있는데, 아빠의 감성 그릇에는 절반도 채워지지 못했단다.

 

1.

그래도 소설의 내용은 몇 자 긁적여 봐야겠구나. 국제우주정거장에 여섯 명이 머무르며 근무하고 있었어. 선장인 로만과 안톤은 러시아 출신이고, 숀은 미국, 피에트로는 이탈리아, 넬은 영국, 치에는 일본 출신의 연구자들이란다. 로만, , 넬은 3개월 전에 합류했단다. 지구를 돌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하루라는 개념은 24시간으로 정의하고 있단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열여섯 번의 일출과 열여섯 번의 일몰을 볼 수 있단다. 멋진 일출과 일몰을 보려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하루에 열여섯 번씩 볼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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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들은 우주가 날짜 감각을 없애려 한다는 것을 느낀다. 우주는 말한다. 날이 대체 뭔데? 스물네 시간의 하루를 지키려 하고, 지상 근무원들도 계속해서 그 점을 일깨워 주지만, 우주는 스물네 시간을 열여섯 번의 낮과 밤으로 돌려준다. 그래도 이들은 악착같이 스물네 시간을 산다. 시간에 매여 사는 허약하고 작은 몸이 아는 게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잠을 자고 변을 누고, 모든 게 거기 묶여 있다. 하지만 첫 주가 지나기도 전에 마음은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 하루 개념이 없는 기이한 영역으로 풀려나가 질주하는 지평선 위를 타고 넘는다. 분명히 낮인데 밀밭에 몰려드는 먹구름처럼 밤이 찾아오는 것을 본다. 그러다 45분이 지나면 또 낮이 찾아와 태평양이 깔린다. 과거에 생각했던 전혀 다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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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구를 하루에 열여섯 번씩 관찰을 하다 보니, 지구의 아름다움 곳곳을 볼 수 있단다. 그런 지구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해주고 있는데, 읽는 이는 다시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변환시켜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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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처음에 이들은 밤 풍경에 매료되었다. 화려한 도시 불빛을 외피에 두른 지구는 인간이 만든 것들 것 황홀하게 빛난다. 도시 태피스트리가 두껍게 수놓인 밤의 지구는 또렷하고 선명하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유럽 해안지대에는 1마일이 멀다 하고 사람이 산다. 유럽 대륙 전체가 도시 별자리들과 황금빛 도로 실들로 아주 정교하게 엮여 윤곽을 드러낸다. 황금 실들은 눈이 내려 가의 언제나 회청색으로 보이는 알프스산맥까지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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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풍이 발생하면 태풍의 정보를 지상으로 전해주어 태풍의 피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기도 해.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자신들이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지구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우주 속에서 바라봐 보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티끌 같이 작은 지구 안에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겠냐 말이야. 아빠가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아빠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우주를 생각하곤 한단다. 이 광활한 우주의 공간과 시간을 생각하다 보면 아빠의 스트레스는 너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야. 그런 것들을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생활하다 보면, 금방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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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30)

그러다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이들은 지구를 보다가 진실을 마주한다. 정치가 정말로 촌극인 게 아닌가. 정치는 그저 터무니없고 어리석고 가끔은 정신 나간 쇼일 뿐이며, 그걸 제공하는 인물들은 어느 구석이라도 혁명적이거나 혜안이 깊거나 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세고 과시에 능하고 뻔뻔하게 권력 싸움을 갈망했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자들 아닌가.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해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들은 정치가 촌극이 아님을, 촌극에만 그치지 않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정치는 아주 거대한 힘이어서, 우주에서 봤을 때는 인간의 힘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지상의 모든 것을 일일이 다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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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 그 힘이 모든 걸 바꿨다. , 극지방, 저수지, 빙하, , 바다, , 해안선, 하늘을, 욕망에 따라 윤곽이 그려지고 조경된 행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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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식의 글로 소설은 끝을 맺는단다. 초반부에는 내심 우주정거장 내에서 한 사람이 피살당하고 다섯 명 사이에서 범인을 찾는 심리스릴러를 기대했다가, 중간을 넘어 가면서, 그들이 생활하던 곳은 사실 작은 원자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이었다는 반전을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겼지만, 끝내 다큐멘터리로 끝이 났단다. 아빠가 SF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영화 <그래비티>가 많이 생각났단다. 우주정거장에서 사고가 나서 살아남은 한 명의 우주의 생존 투쟁을 그린 영화로 스토리 상으로는 이 소설과는 상관성이 전혀 없지만, 우주에서 바로 본 지구의 영상들이 많이 등장하여 그런 생각이 든 것 같구나. <그래피티>라는 영화를 너희들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조만간 한번 같이 보자꾸나.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다 보면 너무 함께이고 또 너무 혼자여서 생각과 내면의 신화조차 이따금 한데로 모인다.

책의 끝 문장: 짧은 순간에 모여 하나가 되고는, 거칠고 경쾌한 세상의 잡음 은하계 목관 악기 트랜스 음악으로 요란하게 뒤죽박죽 다시 흩어진다.

 


외계 문명이 본다면 아마도 의아할 것이다. 저것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왜 맴돌기만 하는 거야? 모든 질문의 답은 지구다. 지구는 환희에 찬 연인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구가 잠들었다 깨어나고 자기 버릇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지구는 이야기와 기쁨과 그리움을 잔뜩 안고서 아이들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다. 이들은 뼈의 밀도가 조금 낮아지고 팔다리가 조금 가늘어진다. 눈에는 뭐라 말하기 힘든 광경들이 가득하다. - P10

몽골이나 러시아 동쪽 끝 황무지에 사는 사람이라거나 이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누구도, 싸늘한 오후인 지금 비행기가 다니는 길보다도 더 높은 하늘에 우주선 한 대가 지나고 있으며, 거기 타 있는 인간이 무중력의 유혹에 굴복해 근육을 잃지 않기 위해, 새처럼 떠다니며 뼈를 다 소실하지 않기 위해 다리 힘으로 열심히 리프트 바를 들어 올리고 있다고는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렇게 힘쓰지 않으면 가엾은 우주여행자는 지구로 되돌아가 다리라는 게 다시 중요해졌을 때 온갖 문제를 겪게 된다. 열심히 들어 올리고 땀을 흘리고 밀어내지 않으면, 재진입할 때의 맹렬한 열기와 충격은 이겨 내더라도 캡슐에서 내릴 때는 한 마리 종이학처럼 맥을 못 춰 끌어내려질 것이다. - P24

우주에서 6개월을 보내고 나면 엄밀히 말해 지구에 있는 사람보다 0.007초 덜 늙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5년, 10년은 더 늙는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이해할 따름이다. 시력이 약해지고 뼈가 삭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데도 근육이 위축될 것이다. 피가 엉기고 뇌액의 흐름이 달라진다. 척추가 늘어나고 T세포는 재생에 애를 먹는다. 신장 결석이 생긴다. 이곳에서는 입맛도 잘 돌지 않는다. 부비강은 죽을 맛이다. 고유감각이 흐려져 눈으로 보지 않고는 신체 부위가 어디 달렸나 알기 힘들다. 몸이 이상하게 생긴 체액 자루가 된다. 체액이 상체에는 너무 쏠리고 하체에는 부족해진다. 안구 뒤쪽에도 몰려 시신경을 압박한다. 수면이 반란을 일으킨다. 장내미생물군이 새로운 박테리아를 키운다. 암 발병 위험이 올라간다. - P49

50년 넘도록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곳, 우리의 달은 인간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리운 마음에 지구를 향해 밝은 면을 내보이고 있는 걸까? 우리의 달 그리고 다른 모든 달과 행성과 태양계와 은하계도 알려지기를 갈망하고 있을까? 떠난 지 사흘이 채 되지 않은 내일이 오면, 이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힌 인간 존재들이 가루로 덮인 달 표면에 귀환할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세상에 나부끼는 깃발을 꽂고 싶어 하는 존재들, 집요한 마시멜로들, 두둥실 하늘을 떠다니는 선원들은 자기네 깃대가 쓰러지고 성조기가 해진 것을 발견하리라. 50년 동안 자리를 비우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세상은 당신 없이 계속 돌아간다. 우주비행사 네 명은 그렇게 해변 막사에서 잠을 청했다. 눈을 뜨면 새 시대가 도래하리란 것을 알고서. - P57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하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재사용하고 공유한다. 우리는 갈라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그럴 수 없으므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오줌을 재활용해 마신다. 서로가 뱉은 숨을 재활용해 숨 쉰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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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계경제는 축소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건 우리가 어떤 재주를 부려도 피할 수 없는 물리적 현실이다. 모건의 분석은 주로 화석연료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설령 재생가능에너지 시대가 도래한다고 해도 사정이 별로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재생에너지는 가장 질이 좋지 않은 화석에너지보다도 에너지 밀도가 낮기 때문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은 같은 단위의 에너지를 생산한다고 했을 때 석탄, 석유보다 10배나 더 많은 땅이 필요하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탈탄소와 탈성장은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앞으로 도래할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탈탄소와 탈성장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34)

시장에 맡기면 자본에 예속된다. 정부에 맡기면 독재에 신음한다. 현대사회가 채택했던 두 가지 굵직한 시스템이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벨록은 그 답은 분산에서 찾았다. 시장주의는 생산수단을 자본가에서 맡겼다. 사회주의는 그 생산수단을 독재권력의 손에 쥐어줬다. 벨록은 자본가와 권력이 독점했던 농지나 상점, 기술, 기계를 가정과 지역 단위로 분산해서 소유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벨록은 이를 작은 소유자들의 나라라고 불렀다.


(45-46)

시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구매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 해 전의 일인데, ‘아벤티스라는 제약회사(현재는 사노피아벤티스)에플로니틴이라는 화합물을 개발했습니다. 이 물질은 아프리카 수면병을 일으키는 병원충(트리파노소마)을 죽일 수 있다고 밝혀졌습니다. 아프리카 수면병을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 심신을 쇠약하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기력이 없어서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요. 그런데 700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 병에 걸리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약회사가 에플로니틴으로 수면병 약을 만들었을까요? 그들은 우선 시장수요가 얼마나 되는지 따져봤어요.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7000명만 명이나 되지만 이 약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구매력)이 거의 없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시장수요가 없으니 그 약을 생산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래서 국경없는의사회에서 그럼 자신들이 직접 약을 생산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할 테니까, 에플로니틴의 지식재산권을 달라고 요청했어요. 아벤티스는 거절했습니다. 이미 그 화합물의 특허권을 브리스톨마이어스퀴브라는 화장품 회사에 넘겨준 뒤였거든요. 에플로니틴은 여성들의 얼굴에 난 털을 없애는 데에도 효과가 있었던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적 필요를 완전히 무시한 채, 부유한 여성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화장품을 생산하는 쪽으로 자원을 할당하는 방식, 바로 정확히 이것이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47)

특허(지식재산권)는 독점입니다. 우리의 세금을 사용하면서 정부가 정보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정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통산 어떤 의료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할 때 평균적으로 특허권 50개 정도를 침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럼 그 기술은 임상에서 사용될 수 없고 연구하는 데도 이용될 수 없습니다. 뉴턴은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본다면, 그건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기술이든 이미 존재하는 정보(지식)로부터 발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보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들어 놓으면 연구는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허제도는 인류가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54)

비슷한 예가 실제로 있어요. 인제 양양군의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례인데, 예산의 한 90%를 양양군이 대고 10% 정도를 강원도에서 대거든요. 이런 구체적인 수치가 나오기 전에는 케이블카 건설을 지지하는 양양군민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전체 예산의 일부이긴 해도 양양군의 돈으로 케이블카가 만들어진다고 하니까 생각이 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케이블카가 사실은 완전히 적자 사업이거든요. 케이블카에 쓸 예산 1,500~1,800억 원으로 양양군에서 다른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들 생각이 좀 바뀌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 양양군수가 구속되기도 했고, 다른 영향도 있겠지요.


(72)

요즘 우리는 탄소중립이라든지 에너지전환이라는 이야기를 매일 듣고 있지요. 이제 기업들도 모두 생산공정에서 탄소중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에너지전환을 한다고 하면서도 세계경제는 석유도, 석탄도 갈수록 더 많이 태우고 있어요. 천연가스 수요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어요. 목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고 하지만, 종래의 에너지원들에 더해서 추가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거예요. 현재 전 세계 에너지믹스(전력원 구성 비율) 80% 이상이 화석연료입니다. 목재에서 얻고 있는 전력도 핵발전의 2배나 됩니다.


(75)

그렇습니다. 물질이 아닌 기술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착시가 일어난 거예요. 증기기관을 버리고 디젤엔진으로 바꾼 전환은 기술적 변화일 뿐입니다. 물질적 측면에서 보면 전환이 아니지요. 석탄은 디젤기관이 상용화된 뒤에도 오히려 더 많이 소비되었습니다. 기술의 경우에는 새로운 것이 개발되면 옛것은 쓸모가 없어질 수 있지만, 원자재의 원료에 대한 수요는 끊임없이 팽창해왔습니다. 이건 중요한 사실이에요. 물질적 역사는 한마디로 확장의 역사입니다. 모든 원자재 사용량이 증가해왔고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원자재의 소비가 줄어든 사례는 (어떤 이유에서든) 사용이 금지되었을 때뿐입니다.


(82)

탄소포획저장 기술은 탄소를 흡수하면서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이고, 요즘 이야기하는 바이오에너지 탄소포획저장 기술이란 바이오매스를 태우고 이산화탄소를 포집하여 땅속에 저장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서 생산되는 에너지보다 투입되는 에너지가 더 많고, 사실상 온실가스 감축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미친 짓으로 여겨졌습니다. 1980~1990년에는 전망 있는 기술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IPCC 2001년 보고서에서는 탄소포획저장 기술에 의한 발전(發電)은 경제성이 없다고 했어요.


(101)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크게 퇴행하고 있다. 두 개의 큰 적대적 정당과 진영이 서로 상대 진영을 혐오하는 적대정치에 빠져 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시민에 의해 저지된 후에도 윤석열을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궁정쿠데타에 가까운 그 계엄을 지지하는 비율이 낮지 않았고 계엄령을 계몽령으로 부르며 망국적 선동을 했다. 이를 반영하듯 최근 한 연구는 한국에서 이념적으로 극우인 사람들이 20%에 이른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퇴행적 정치와 극우적 선동이 난무하는 적대정치 상황에서는 서로 상대 진영이 주도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 정책, 당선자의 존재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103)

시민의회가 구성되면 우선적으로 상대를 적으로 보는 적대정치에서 상대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인정정치로 전환하도록 관련법들로부터 개정할 필요가 있다. 정치의 기득권세력인 거대 양당의 특권을 없애고, 실질적인 다당제를 보장하여 양당의 적대정치를 청산하고, 모든 정치지망생이 국민 앞에서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정당법, 국회법, 선거법 등 정치 관련법들을 개정해야 한다. 이 개정안들을 시민의회에서 발의하고 국민투표에 회부하면 국민주권 실현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 이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시민들이 자유롭고 제한 없이 국민발안, 국민투표를 요청하고 실시하는 주권적 권리를 확보한다면 한국 정치를 도약시킬 수 있을 것이다.


(112-113)

모든 계획이 규제의 성격을 띠고 하향식으로 집행되어, 중앙이나 계획권을 가진 쪽이 주도권을 행사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농촌, 특히 대도시 주변의 농촌지역들이 오늘날 폐기물 처리시설이나 오염을 일으키는 산업시설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는, 의사결정권을 중앙과 정부가 독점하고 피해를 입는 당사자인 주민들은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공모와 지원으로 진행되는 많은 지역개발사업도 주민의 필요와 요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금이 필요한 지역개발사업도 주민의 필요와 요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금이 필요한 지방정부와 기업들의 욕망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성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131)

강매역

- 류근

강매역은 아득했다

봄과 가을 사이에 있었다

새들과 맨드라미가 와서 자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할 일도 없고 한 일도 없이 배가 고파지면

나는 강매역 개찰구에 서 있는 사람이 궁금해져서

아득히 논밭 사이를 건너 강매역에 가서 표를 끊었다

백마나 송추쯤에 내려서

다시 강매역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강매역은 아득했다

새들과 맨드라미와 내가 자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일도 생겨나지 않았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138)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는 핵심어 가난의 다의적이다. 먼저 가난은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재화의 결핍 상태를 뜻한다. 이 가난은 생명 유지와 성장을 저해하며 비인간화와 죽음을 초래한다. 있어서는 안될, 극복해야 할 일종의 이다. 이 가난의 반대는 생명을 지속하고 사회를 재생산하는 풍요다. 한편, 이 가난은 대개 착취와 수탈의 사회적 관계에서 생겨난다. 누군가 부유해지려면 누군가 그만큼 가난해져야 한다. 부를 위해 가난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가난의 반대는 정의다.


(143)

이상(理想)은 존중되기보다 외면당하기 쉽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이지만 경원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의 급진적 가난과 보편적 형제애가 너무 이상적으로 보여 사람들에게 충격과 부담을 준 탓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으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가 진정한 평화, ‘샬롬을 누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었다. 전환이 화두인 우리 시대에 전환을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불평등과 기후위기 극복에 필요한 근본적인 전환이나 정의로운 전환을 꺼내면 비현실적인 이상이라며 무시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상은 실현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갈 방향을 제시하여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154)

20세기 중반에는 전후(戰後) 세계를 주도했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조합, 즉 국가와 자본의 조합이 시너지를 발생시켰지만, 그 세기의 끝자락에 이르자 더 많은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본+국가보다 자본|도시의 조합이 부상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민주주의적 제도들을 후퇴시켰고, 또한 도시들은 점점 더 세계화에 밀착되면서 자본의 공간운동이 일으키는 부가가치를 쫓아 부유하는 유민(流民)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국가 단위로 발전한 민주주의적 특권, 국민이 누리는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아다녔다.


(160)

그러나 이런 착시를 걷어내고 보면, 최근의 극우 쓰나미 현상에서도 개신교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물론 일부 극우적 분파의 활동이 막대한 사회적 파급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ㅇ리다. 전관훈 현상과 손현보 현상이 대표적이다. 전광훈은 글로벌 보수 헤게모니에 의해 개신교가 재편되면서 교회에 초래된 위기적 요소가 심화되자 그것을 자양분 삼아서 성공한 자다. 교회에서 소외된 노인들을 아스팔트 우파로 흡수함으로써, 그는 개신교를 너머 한국 극우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한기총의 시대가 저물고, 개신교 내에서 극우 혹은 강경보수의 자리가 줄어들자 그 불만세력이 전광훈에 합류하게 된 측면도 있다.


(164)

할머니 집은 오지 중의 오지에 있다. 방문진료센터에서 소양호를 빙둘러 차로 두 시간을 꼬박 달려야 도착한다. 이곳에서 살았던 20여 년의 시간 동안 할머니는 아마도 자연스레 겨울마다 물을 아꼈을 것이다. 도토리를 쌓아놓고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처럼 수십 개의 플라스틱병에 물을 넣어놓고 겨울을 나야만 했던 할머니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물을 적게 먹는 습관이 들었다. 물 많이 마셔야 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얘기를 당당하게 했던 나는 그날 센터로 돌아가 하수구 수리업체 연락처를 열심히 뒤적거렸다.


(166)

와 이런 게 가능해?”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인공지능(AI)이 환자 간호, 간병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던 발표회 자리였다. 다인실 병실 천장에 설치된 어안렌즈 감시카메라(CCTV)는 환자와 의료진을 구분해 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을 정확히 감지했다. 낙상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면 간호사가 있는 스테이션에서 이 시스템을 도입하려면 최소 수십억의 비용이 추가로 들 텐데 경영자가 이걸 도입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간병인이 필요 없어지고 간호인력도 많이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170)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오뚜기 같다. 삶이, 세상이 아무리 쓰러트리려 해도 다음 번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어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 매번 한 공간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사는 어떤 식으로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바뀌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바뀌지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나와 할머니는 어떻게든 서로에게 응답한다. 할머니가 당신의 혈당에 실린 삶에 무게를 조금이라도 나누어 지고 싶은 의사로 나를 기억해준다면, 그것이 혈당이 좋아지는 것에 비할 수는 없어도 의미는 있을 거라 믿는다. 내가 나이 들어 아픈 노인이 되었을 때 만나고 싶은 의사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는 현대의학의 엄밀함과 성실함을 믿지만 나의 노년을 그 믿음에 기대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가 만나고 싶은 의사가 되고 싶다.


(178)

기술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피하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기술이 인간을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 기술이 대체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우리가 진정 염려해야 할 것은 인간 고유의 능력을 확인하고 안심하게 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철저히 자본가가 마구 가져다 써도 될 능력으로 포획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자연의 지원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인공지능을 위시한 기술의 발전이 노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한 예측에 있어서 대체될 노동 대 대체되지 않을 노동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한다. 그것은 또다른 망각을 초래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노동이 지는 특성이 어떤 변화 속에 놓일지가 가장 중요하다. , 무엇을 잉여가치의 주된 대상으로 보느냐가 핵심이다. 이것이야말로 첨단기술 시대에 노동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다.


(189)

자본주의 가치 원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주는 가장 핵심적 메시지는, 단순히 자본(생산수단)의 소유관계나 지도층 개인 특성(리더십)이 핵심이 아니란 것! , 자본관계가 가치관계로 표현되는 물신주의가 근본문제다. 이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건강하고 활기찬 관계가) 사물관계로 왜곡된 것이다. 인간관계나 생명관계가 아닌, 상품관계나 가치관계가 삶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 물신주의다. 일단 우리가 상품가치 내지 자본가치를 내면화하고 나면 그다음은 거의 자동으로 돌아간다. 맑스가 가치를 자동 주체라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19)

과학은 그 자체로는 재난에 과학이 되지 못한다. 재난에 맞서는 과학은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헌신한 수많은 과학자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공학자의 양심으로 PAR의 위험성 문제를 제기한 공익신고자 같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개별적이고 특정한 현상일 수 있다. 재난을 유발하는 과학도 있고, 재난을 무마하는 과학도 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돌아보면 여러 국면에서 과학은 그러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과학이 불확실성을 이야기할 때, 정부가 정치인, 시민이 나서서 안전한 방향으로 과학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여 그 판단의 기준과 방향성을 명확하게 하여야 한다.


(228)

사람들도 알고 있기는 하다. 이 행성의 자연이 죽어가고 있고, 더불어 그 안에 살아가는 존재들도 절멸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당장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거나 자기 삶의 터전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맹목적으로 이 위기는 기술로 자본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미디어세선 끊임없이 재생에너지나 탄소포집 등의 탄소 감축 및 활용 기술이 장미빛 미래로 그려진다. 심지어 화성 식민지 개척론 등 기술과 자본에 대한 맹목적 신뢰가 선전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결코 경제성장을 가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에어컨이 잘 작동하는 쾌적한 공간에서 다른 사람의 고된 노동으로 이루어진 안락한 소비의 일상이 지탱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득이 필요하므로, 마이너스 성장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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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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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다소 자극적인 책표지에, 다소 구호 같은 제목으로 인식될 수 있는 중국 작가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소설이란다. 아빠는 이 소설을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통해서 알게 되었단다. 몇 년 전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좀 야한 영화가 개봉되었나 보다 했는데, 개봉 즈음에 원작이라면서 인터넷 서점에서 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자주 노출되었단다. 그래서 무슨 소설인가 싶어 책소개를 읽었던 기억이 있단다. 그러다가 몇 달 전에 인터넷 중고 서점에 보이길래, 어떤 내용인지 급 궁금하고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도 받았다고 해서 한번 읽어보려고 구입했단다.

이 책은 출간 당시 중국에서 금지로 지정될 정도로 소위 문제작이었대. 읽다 보면 그냥 야한 소설이 아니고, 그런 야함과 주인공의 성적 욕망이 중국 공산당과 그들이 벌인 혁명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단다. 책 제목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도 마오쩌둥의 어록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구나. 소설 속에서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고 새겨져 있는 나무판이 있는데, 이것이 소설 속에서는 특별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단다. 그러면 어떤 내용인지 수위를 좀 낮추어 너희들에게 간단히 이야기를 해줄게.

 

1.

주인공은 우다왕이라는 하위 계급의 군인이란다. 우다왕은 시골 출신으로 고향에 아내와 어린 아이가 있는데, 지금은 승진을 목적으로 가족과 따로 떨어져 군대에서 일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날 사단장 사택에 취사병으로 파견 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잘 하면 사단장에게 잘 보여 승진할 수 있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곳에는 사단장과 사단장의 어린 아내, 단 둘이 살고 있었단다. 사단장의 아내 류롄는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사단장보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단다. 류롄은 원래 군병원 간호사였는데, 사단장과 결혼한 이후 5년 동안 사택 안에서 주로 지냈단다.

그들의 집 부엌에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구호가 적인 나무팻말이 있었단다. 우다왕은 취사병과 집안 관리로 사단장의 사택에서 하루종일 일하다가 저녁에 자신의 관사로 퇴근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단다. 그런데 사단장이 출근을 하고 나면 우다왕과 류롄 난 둘이 남게 된단다. 어떤 스토리가 펼쳐질 지 눈에 선하구나. 그러다가 사단장이 두 달 넘게 출장을 가게 되었어. 아빠 같았으면 가능하다면 아내도 데리고 가거나, 친정에 가 있으라고 했을 텐데, 젊은 취사병과 단 둘이 집에 나두고 두 달 동안 출장을 갈 정도로 자신의 아내를 믿고 사랑했던 것일까. 소설의 초반 흐름을 보면 사단장과 아내 사이에 사랑을 찾아볼 수는 없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둘이 남은 사단장 사택. 어느날 사모님 류롄은 우다왕에게 한 가지 지시사항을 내린단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팻말이 제자리에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볼 일이 있어 우다왕을 찾는다는 의미이니 이층의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어. 그런데 사단장이 출장을 가기 전에 위층에는 절대 올라가지 말라고 했거든. 하지만 현재 사택에서는 사모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 처음으로 그 팻말이 사라진 옷을 단정히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전등 스위치 줄이 위에 걸렸다고 내려달라는 일상적인 일이었단다. 스위치 줄을 내려 불을 켰는데, 실크드레스 차림의 사모님이 보였어. 류롄은 나이차이가 얼마 안 나니, 둘이 있을 때는 자신을 누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어. 우다왕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지. 몇 마디 질문을 더 답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지만, 우다왕도 남자인지라 얼굴이 붉어지고 사모님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릴 수밖에 없었지.

 

2.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팻말은 또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우다왕은 이층으로 올라가게 되었어. 류롄은 노골적으로 우다왕을 유혹했지만, 우다왕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선을 지키려고 자리를 떠났단다. 그러자 류례은 우다왕을 근무태만으로 상위에 보고했고, 사택에서 인민은 사모님이 사모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라며 우당왕은 심한 질책을 받았단다. 잘못하면 사택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했어. 우다왕은 류롄에게 반성문을 쓰고 깊이 사과를 하며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단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단다.

이후 류롄은 우다왕의 상사에게 우다왕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했단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밤에 사택에서 여자 혼자 자는 것이 무서우니, 우다왕을 밤에도 사택에서 머물게 하겠다고 했어. 이제 우다왕은 하루 종일 사택에서 머물 수 있었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팻말은 자주 다른 위치에 있었고, 우다왕은 이층에서 살다시피 했단다. 류롄도 더 이상 사모님이 아니었어. 그저 사랑하는 남자의 애인이었어. 어떤 날은 류롄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자신이 만든 음식을 우다왕에게 먹여주기도 했어. 류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사단장이 남자 능력을 상실해서 사랑을 나눈 지 아주 오래되었다는 이야기도 했어.

둘은 집의 창문을 모두 가리고 문도 안으로 잠근 채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며칠 동안 벌거벗고 지내기로 했단다. 그들은 눈만 마주치면 사랑을 나누고 집 곳곳이 침실이었어. 그러다가 주석 석고상을 산산조각 내고 사고를 치고 말았어. 그것 때문에 잠깐 말다툼도 했지만 그들은 그 일을 계기로 그들의 우상의 상징들을 파괴하는 일을 벌였어. 마오쩌둥의 어록이 적힌 팻말들을 발로 밟고, 마오쩌둥의 책들을 찢어 발로 밟았단다. 온 집안이 마오쩌둥의 관련된 물건들이 파괴되어 널부러져 있었어. 이 때 사단장이 들이막치면 어쩌나, 읽는 아빠가 불안했단다. 하지만 다행히 사단장은 일정에 맞춰 돌아왔단다. 그 전날 류롄과 우다왕은 마지막 사랑을 나누었고, 그들의 사랑은 마음 속에 담아 영원할 것을 다짐했어. 류롄은 우다왕에게 돈을 충분히 챙겨주며 휴가를 다녀오라고 했단다.

우다왕은 고향집에 가서 한 달 동안 휴가를 보냈는데, 아내가 이전의 아내와 다르게 보였어. 그저 다른 여자 중에 한 명처럼 보였어. 우다왕의 마음에는 류롄이 가득 차 있었지. 한 달의 휴가를 마치고 사택으로 돌아온 우다왕. 한 달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어. 사단장은 돌아와 사단을 해체한다는 선언을 하고, 사단의 군인들은 모두 제대를 해야 한다고 했어. 이 모든 일들이 사실 류롄과 우다왕 사이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어. 류롄과 우다왕 사이의 일을 아는 사람들도 여럿 되었지만 그들은 겉으로는 모른 척 하고 그것은 사단장도 마찬가지였단다. 어떻게 해서 그 일이 알려지게 되었는지는 몰랐어. 우다왕이 그곳을 떠나면서 사택에 들렀을 때, 문 앞에서 류롄을 잠깐 볼 수 있었는데 류롄은 임신 중이었어.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선물만 건네주고 길을 떠났단다. 그들이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한 번 사는 인생에 그들은 비록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함께 할 수 없다니 한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로구나.

세월이 흘러 15년이나 지났어. 그 사이에 우다왕은 한번도 류롄을 보지 못했어. 류롄은 이제 사령관 부인이 되었어. 용기를 내어 우다왕은 사령관 집에 가서 대문을 지키는 초병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류롄에게 이야기해달라고 했어. 하지만 류롄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쪽지만 전달해 주었단다. 그 쪽지에 우다왕도 답글을 써서 초병에게 전달하면서 소설은 끝이 났단다.

누군가는 류롄을 비난할 거야.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류롄을 이해하고, 그녀가 잘 되길, 행복하길 빌게 되더구나. 한 번 사는 삶인데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이혼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거기에 거의 모든 시간을 집안에서 지내야 한다면 그것은 결혼 생활이 아니라 감옥생활일 듯 하구나. 그렇게 만든 것이 중국 공산주의 군사 시스템일 수도 있고 말이야. 어쩌면 짧은 시간이지만 류롄에게 우다왕이 있어줘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야. 그 시간 이후 긴 시간을 우다왕과 있었던 추억으로 견뎌내지 않았을까 싶구나. 옌롄커의 문제작,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옌례커의 다른 작품들도 함 살펴봐야겠구나.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소설은 삶의 많은 진실을 유일하게 대변한다.

책의 끝 문장: “이걸 류롄 누님에게 좀 전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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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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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소개할 책은 몇 달 전에 아빠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이란다. 책 제목은 인터넷 서점을 서핑하다가 본 적이 있는 <불안의 책>이라는 책이야. 지은이는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포르투갈 사람인데, 아빠는 처음 알게 된 사람이란다. 이 사람은 잡지를 출간하기도 하고, 번역가로 일하기도 하고 출판사 겸 무역회사를 차리기도 했대. 자신이 만든 출판사를 통해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 있다는 작가들의 작품을 출간해서 나라로부터 경고를 먹기도 했대. 정작 자신은 살아 생전에 책을 많이 출간하지는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출간하지 않은 그의 원고가 발견되었는데, 그 양이 2 7500장이나 된다고 하더구나. 페르난두 페소아를 연구하던 이들이 그의 글들을 정리하여 출간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죽은 후에야 포르투갈의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대.

아빠가 이번에 읽은 <불안의 책>도 그가 남긴 원고들 중에서 미완성 원고들을 엮은 책이란다. 그래서 편집본마다 글의 수와 순서가 조금씩 다르다고 하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이 책이 번역 출간된 이력이 있는데, 모두 중역본이었고, 아빠가 이번에 읽은 책이 리처드 제니스의 포르투갈어 편집본 원전을 완역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다른 이름으로 글을 쓴 것처럼 글을 썼다고 하는구나. <불안의 책>도 지은이가 우연히 알게 된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사람의 글을 알게 되어 소개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지은이 페르난두 페소아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불안의 책> 1913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 약 20년 동안 틈틈이 썼던 글을 모은 것이란다. 앞서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가상의 인물의 글로 설정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책의 부제는 회계사무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작품이란다.

 

1. 촌철살인

이 책을 너희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주어야 할지 조금은 막막하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20년 동안 틈틈이 적은 글이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481개의 글들은 각각 독립적인 글들이란다. 굳이 순서를 두고 읽을 필요는 없으며, 읽다가 나랑 맞지 않으면 다음 글로 건너뛰어도 된단다. 정말 짧은 글은 한 줄로 끝나는 것도 있고, 긴 글은 몇 장에 걸친 글들도 있단다. 그렇다고 짧은 글이 가치도 없는 것이냐? 그것은 아니고 오히려 짧은 글들은 촌철살인의 글들이었어.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짧으면서 완벽한 글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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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사랑이라면 죽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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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주체는 지은이 페르난두 페소아가 만들어낸 가상인물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란다. 그의 직업은 회계사이고 그의 회사가 있는 곳은 리스본 도라도레스라는 거리란다. 그는 늘 도라도레스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으로 하면서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세상을 여행하고 삶을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 그의 글들 내면에는 아빠가 느끼기에 약간의 비관주의와 약간의 염세주의가 담겨 있었단다. 그런 글들 내면에 불안이 조금씩 담겨 있었기 때문에 책제목을 <불안의 책>이라고 하지 않았나, 싶구나.

....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한 인간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는 동시에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단다. 아빠가 책을 읽을 때 좋은 구절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책의 앞면지에 적어두곤 한단다. 그리고 그 글들을 키보드로 두들기면서 다시 한번 음미한단다. 그런데 이 책의 앞면지에 정말 수많은 페이지들이 적혀 있단다. 아마 아빠가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적은 페이지 개수 신기록을 세웠을 거야. 그리고 그 페이지의 글들을 다시 키보드로 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단다. 그런데 이걸 키보드로 치는 것이 아니고 직접 손으로 써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단다. 그의 글들이 약간은 불안을 담고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라서 배우고 싶었거든. 그의 글을 따라 적다 보면 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어.

이 책의 좋은 부분이 많지만, 몇몇 더 좋았던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오늘 독서 편지를 대신하련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책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단다. 그냥 천천히 정독하면서 책 전체를 그대로 느껴보는 것을 추천해 본다. 물론 너희들은 이다음 큰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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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

완성을 미루고만 있는 우리의 작품이 형편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시작하지도 않은 작품은 그보다 더 형편없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적어도 남아는 있게 된다. 초라하지만 그래도 존재한다. 다리를 저는 내 이웃의 정원에 놓인 하나뿐인 화가에 핀 조그마한 식물처럼. 그 화분은 내 이웃에게 기쁨을 주며, 때로는 나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글 덕분에 상처받은 슬픈 영혼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고, 혹시 충분하지 않다 해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생사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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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독서로 자유를 얻는다. 독서로 객관성을 획득한다. 나는 내가 되기를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 내가 읽는 것은 때로 나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의복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명료함이고, 만물을 비추는 태양이고, 고요한 대지에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고,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간이고 녹색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의 견고함이고, 농장 연못에 깃든 평화이고, 포도나무 덩굴이 우거진 해안이 비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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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 내 안에 살아 있고 내 안이 아니면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죽은 과거여! 들판의 작은 집 정원의 꽃들은 오직 내 안에만 있구나! 뜰의 채소와 과일나무와 소나무들은 오직 내 꿈속에만 있구나! 내가 상상한 전원생활과 시골 산책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어라! 길가의 나무와 오솔길과 돌 들, 지나가던 시골 사람들…… 모든 것은 단지 꿈이었을 뿐, 내 기억에 새겨진 채 나를 아프게 한다. 그것들을 꿈꾸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던 나는 지금은 꿈꾸던 순간을 회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사실은 나의 진정한 그리움이자 나를 눈물짓게 하는 과거이고 죽어버린 진정한 삶이다. 나는 그 삶이 엄숙하게 관에 누운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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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나는 국가와 인류에 종속되길 거부한다.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한다. 국가는 나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꼼짝 않는 이상 내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 오늘날 사형제도도 폐지되었으니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나를 귀찮게 하는 정도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영혼을 더욱 단단히 무장하고 내 꿈속 더 깊은 곳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국가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운명이 나를 봐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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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오늘 나는 거리를 걷다가,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었던 두 친구를 따로 마주쳤다. 각자가 왜 상태에게 화났는지 내게 말해줬다. 둘 다 진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둘 다 자신의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둘 다 옳았다. 둘 다 틀림없이 옳았다. 한 명은 이것을 보고 나머지 한 명은 다른 면을 보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발생한 일의 진상을 정확히 보고 있었고, 모든 같은 기준에 근거해 사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둘은 뭔가 다른 것을 보았고, 결국 둘 다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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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나를 찾는 순간 나는 나를 잃어버렸고, 내가 찾아낸 것은 의심스러우며, 내가 얻었던 것은 이미 내게 없다. 나는 길을 걷듯 잠을 자지만 사실은 깨어 있다. 나는 잠을 자듯 깨어 있고, 나는 내게 속해 있지 않다. 결국 삶이란 근본적으로 거대한 불면이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의식이 또렷한 인사불성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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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여행은 독서와 같고, 독서는 다른 모든 것과 같다…… 나는 고전과 현대물이 고요히 공존하는 박학다식한 삶을 꿈꾼다. 그 삶에서 나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통해 내 감정을 새롭게 할 수 있고 명상하는 이들과 대체로 생각만 했던 자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한데, 그들 사이의 모순에 기반한 사고로 나 자신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에 대한 이러한 꿈은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집어들자마자 사라져버리고, 책을 읽는 실제 행위는 읽고 싶다는 모든 욕구를 없앤다…… 마찬가지로 어쩌다 기차역이나 항구 같은 출발지에 가까이 가는 순간, 여행에 대한 모든 상상은 창백하게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확실한 두 가지, 나처럼 아무 가치 없는 두 가지로 돌아온다. 바로 아무도 모르는 나그네 같은 나의 일상, 그리고 잠들지 못한 자의 불면증 같은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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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

시간이란 무엇인지 모르겠다. 시간을 재는 정확한 척도가 무엇인지.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시계로 시간을 잰다는 건 외부에서 시간을 공간으로 나누는 것이므로 가짜다. 감정으로 시간을 잰다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감각을 재는 것이므로 역시 가짜다. 꿈에서 시간을 재는 건 역시 잘못됐다. 꿈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급하게 시간을 스칠 뿐이고,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흐름 속의 무언가로 인해 바쁘거나 느리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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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

인생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는 실험적인 여행이다. 물질을 통해 떠나는 정신의 여행이고, 여행하는 것은 정신이므로 우리는 정신 안에 산다. 그러므로 외향적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더욱 강렬하고 폭넓고 격동적으로 사는, 관조하는 영혼이 있다. 중요한 건 마지막 결과다. 살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그가 살았던 삶이다. 육체노동을 한 다음처럼 꿈을 꿀 때도 사람은 피로해진다. 어느 누구도 머릿속으로 깊이 생각할 때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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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신문을 읽는 것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항상 불쾌한 일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종종 그러하다. 심지어 도덕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전쟁 아니면 혁명이 항상 신문에 나오는데, 전쟁이나 혁명이 미치는 영향을 신문에서 읽다보면 공포보다도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읽다보면 우리의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그 모든 죽음과 부상의 잔인함이나 싸우다 죽은 자들 또는 싸우지도 못하고 죽은 자들의 희생이 아니다.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들 때문에 인명과 재산을 희생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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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리스본에는 제법 품격 있는 주점 이층에 자리잡고 꽤 알찬 가정식 식사를 내놓는 식당이 몇 군데 있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일, 내가 느끼고 살아왔던 모든 것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 일상의 거리에서 사라진 한 명의 행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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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래된 책을 정기적으로 펼쳐 읽는 행위는 생의 곁길로 빠지면서 즐기는 잠깐의 군것질이 아니라 정신의 식탁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즐기는 정찬의 의례에 가까웠다. 묵은내가 폐부 끝까지 전해지는 도서관을 에어포켓 삼아 숨 쉬어보는 몽상을 거듭한 나는 수은을 삼키고 불가사의하지만 흡족한 미소를 짓는 표정으로 귀가하곤 했다. 일회적이지 않고 영원성을 간직한 책들을 내 안에 꾹꾹 눌러 담고 나오는 날의 노을빛은 아름다웠다. 생활인으로서, 한 명의 독자로서 그것은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책은 누군가의 삶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86)

켄 리우는 이 소설에서 먼저 과거의 정보와 기억을 그래도 체험할 수 있는 기술의 발견을 언급한 뒤, 그 기술이 인간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했습니다. 반일 소설만은 아니고, 중국과 미국까지 동시에 비판한 작품입니다. 소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켄 리우의 단편 14편이 실린 <종이 동물원> 맨 끝에 수록됐는데, 일본에서는 이 소설만 빼고 작품집을 펴냈습니다. 그의 책은 중국에서 4권 이상 출간됐는데, 중국어판에는 공산당을 비판한 대목이 곳곳에서 삭제된 채 출간됐다고 전해집니다. 한중일 가운데 이 소설을 온전한 형태로 읽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123)

해외의 한 출판사 편집장이 국내의 유명 평론가에게 해준 이야기를 떠올려옵니다. 이 평론가가 좋은 책의 조건을 편집장에게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고 하네요. 저도 사석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옮겨봅니다. “첫째, 흥미진진할 것. 둘째, 새로울 것. 그리고 셋째가 가장 중요한데, 바로 독자를 불편하게 할 것. 별생각 없이 드러누워 보다가 엇, 하고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입니다.” <인비저블 몬스터>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 전에 없던 새로움까지 있는데, 독자에게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남기기 때문이지요.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의 참된 자아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나 자신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척 팔라닉은 바로 그 점을 묻습니다.


(137)

셀라의 문학적 위상은 독특합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두 가지 아이러니를 형성합니다. 셀라는 스페인 내전을 겪은 시민들의 무의식을 건드려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는 프랑코의 군부에 참전한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폭력의 원인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작가 스스로가 폭력의 가담자였다는 예기지요. 또 그는 금서의 작가였지만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가 검열관으로 일한 이후에도 그의 다음 소설 <벌집>은 또 금서가 됩니다.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의 작품이 금서가 되는 아이러니라니 인생이든 문학이든 참으로 복잡한 요물입니다. 셀라가 논쟁적인 인물일지라도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 가진 사회문화적 위상까지 부정하진 못할 겁니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작품은 작가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자와의 공동 소유물이 되니까요. 어쩌면 어머니를 살해한 소설이 아직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을 둘러싼 가장 큰 아이러니일 테지만요.


(157)

예술가의 창작이란 당이 추구하는 이념적 지평 위에서만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었지요. 일체의 낭만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주의 예술의 엄숙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쿤데라는 간파했습니다. 예술의 도구화는 사회주의 예술, 좀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실체이자 한계점입니다. 핸드리흐와 같은 사회주의 당직자들은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로써 예술의 한계를 규정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예술의 한계를 규정하는 순간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한계가 노정된다고 쿤데라는 확신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예술은 스스로를 도구화하지 않는 무한한 자유 위에서의 진보적 창조이며, 문학이란 자유와 옹호를 위한 인간의 총체적인 언어활동이 아니던가요. 현실의 의미를 밝혀내고 해석하는 것이 언어예술로서 문학의 유일하고도 입체적인 목적이며, 예술에 굴레를 확정하는 순간 이는 죽어버린 예술이자 예술의 종막이 됩니다.


(170-171)

한탸라는 인물의 하층민적 지위, 그리고 작가 흐라발이 한탸를 그려낸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보후밀 흐라발과 밀란 쿤데라는 같은 체코 출신 작가이면서 여러 면에서 대조적 위상을 지닙니다. 위기의 시대를 문장으로 견뎌낸 작가라는 점에서 둘은 동질적이지만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고, 흐라발은 끝까지 체코에 체류하며 체코어를 고집했습니다. 이는 단지 거주지 차이만이 아닙니다. 쿤데라와 흐라발의 소설 속 주인공도 차이를 보이니까요. 쿤데라가 창조한 문학적 인물이 시대를 내려다보며 고뇌에 빠진 허무주의적 지식인인 반면, 흐라발의 피조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사회에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바보로 묘사됩니다. 또 쿤데라의 소설에는 성적 자유를 획득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이 줄곧 등장하는 반면, 흐라발의 소설에는 성적 불구의 인물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도 차이점입니다. ‘()의 실현이 한 인물의 자아를 형성하는 강력한 증거라고 볼 때 흐라발의 남성상은 좌절된 동시대인들의 정서를 대변합니다.


(173)

여러분에게 책이란 무엇이었나요. 이제 종이책 고유의 물성은 가치가 사라져가고, 집이 좁아진다는 이유로 책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한탸와 같은 사람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책이라는 형식에 삶을 바쳤던 작가들, 책과 함께한 공간에서 삶의 한때를 보냈던 독자들을 위한, 고요하고도 빛나는 걸작입니다.


(206)

문학은 정치와 동떨어진 예술로 간주되곤 합니다. 문학이 현실과 괴리되었다는 반감은 독자와 문학 사이의 거리를 멀게 만듭니다. 그러나 문학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예술 장르이며 때로는 정치 그 이상일 수 있음을 이스마일 카다레는 삶으로 또 작품으로 증명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러므로 영원히 빛날 겁니다.


(277)

참된 종교란 자기 종교의 완전무결함을 주장하지 않고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마음 위에서 건립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종교적 자기비판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종교보다는 교의의 불완전성과 미흡함을 수용하면서 그 자장 속에서 인간을 포용하는 것이 좋은 종교라고도 감히 생각해봅니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종교의 이름 뒤에서 희생됐던 연민까지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사라마구의 작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룹니다. 인간의 고통에의 연민, 그리고 신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그가 대신 수행한 것이지요.


(289-290)

선배 작가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학적 성취를 당대 후배 작가들은 모르지 않았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아홉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1957년 단 한 표 차이로 수상 기회를 놓쳤는데, 그해 수상자는 <페스트> <이방인>을 쓴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였습니다. 카뮈는 수상 이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나보다 노벨상을 받을 이유가 수백 배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은 동시대 최고의 작가임을 인정받는 일이지만 그걸 받지 못했다고 해서 동시대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는 일이지만 그걸 받지 못했다고 해서 동시대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는 진실을 카잔차키스와 카뮈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은 인간이 처한 생래적 조건과 불안한 현실,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모순을 고민한 선구자들이 받는 상입니다. 하지만 때로 이러한 합의는 빗나가며, 저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카잔차키스라고 생각합니다. 신에게 더 다가가기 위하여 신을 모독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유죄일까요, 무죄일까요. 크레타섬에 안치된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 소설가이자 구도자로서의 카잔차키스의 삶 전체를 움켜쥐는 문장입니다.


(320)

이슬람교도 충분히 관용의 종교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경전이 아니라 이를 악용하거나 오독했던 인간 아닐까요. 다카에서 벌어진 학살처럼 말입니다. 경전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근본주의 광신도가 출몰하기 마련이고, 그건 비()종교인이 종교와 신앙을 경멸하는 치명적인 근거가 되곤 합니다. 경전은 그 문구가 집필했던 당대의 시대상과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니 시간이 흐름에 다라 재해석되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것이 경전을 대하는 바람직한 독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힌두교인의 바브리 마스지드의 철거도, 무슬림들의 방글라데시 다카에서의 학살도 종교적 관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333)

<눈먼 부엉이>를 읽은 일부 독자의 우울증과 자살은 이 책에 담긴 문장들로 생()의 근원을 염탐했다는 좌절과 막막함 때문이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기 삶에서 유의미성을 발견하지 못한 영혼들은 영영 삶을 포기한 것이겠지요. 물론 이 책도, 이 글도, 삶을 지양하고 죽음을 찬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으며, 세상에 주어진 모든 삶에는 섭리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적 죽음은 문학 바깥에서는 제한되어야 하며, 죽음을 다룬 문학은 삶의 깊이를 고민할 기회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쳐야 합니다. 다만 삶의 이유가 모두에게 다르더라도,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삶으로부터 죽음을 격리하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좀더 삶 가까이에 두고 정확하게 통찰하면서, 삶의 유의미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만큼은 영원히 불변할 것입니다.


(380)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이런 차이가 무척 흥미롭지요. 러시아에서는 <1984> 출간과 독서가 권장될 정도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소설이 러시아 등 동유럽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윈스턴의 국적이 오세아니아이고, 오세아니아는 미국과 영국의 서구 문명 복합체라는 논리이지요. 하지만 오웰이 생각한 오세아니아가 미국이나 영국을 닮았는지, 구소련과 러시아를 닮았는지의 답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미국 역사상 딱 한 명의 지도자만이 <1084> 속 오세아니아 독재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푸틴과 트럼프, 한때 스트롱맨으로 불렸던 국가 지도자의 시대에 <1984>가 소환된 것이다.


(384)

런던에 세워진 조지 오웰의 동상의 벽면에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선과 악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갈망했던 오웰의 이 한마디를 저는 오래 간직할 생각입니다. 그의 이름은 필명으로, 오웰(orwell)은 그의 부모가 사는 지역에 흐르는 강의 이름입니다. 책의 바다에서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의 강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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