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 싱싱합니다, 싱싱해요! 재앙은 오지 않았어. 여름의
풍요로움이 만발하네!(환희의 외침) 봄은 막 지나갔어. 어느새 하늘을 향해 빠른 속도로 튀어 오른 여름의 황금빛 오렌지는, 계절의
정점에서 터지며 스페인의 머리 위에 꿀과 같은 과즙을 쏟아내지. 그때 녹진한 과즙을 품은 포도가, 버터 빛깔의 멜론이, 핏빛의 새빨간 무화과가, 불꽃의 색과 같은 살구가, 온 세상 여름이 품어낸 온갖 과실들이
한꺼번에 우리 시장의 진열대로 몰려들어. (환희의 외침) 오, 과실들이여! 버드나무 가지로 광주리에서 너희들의 조급했던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구나. 여정의 출발점이었던 시골에서 과실들은 여름의 청량함으로 물든 초원의 물과
당분을 먹고 실하게 자랐네. 햇빛으로 물든 무수한 샘에서 솟아나는 깨끗한 물들은 뿌리와 줄기를 통해
하나로 모아지고, 과실의 중심부로 전해지고, 그 속에서 마르지
않는 꿀의 샘과 같이 유유히 흐르며 과실을 단단하게 만들고 더욱 무겁게 만들었지.
(38)
디에고 : 도대체 무엇으로 얼굴을 씻기에 아몬드처럼
새하얄까?
빅토리아 : 깨끗한 물로만 씻는걸, 사랑이 아름다움을 더해 주지!
디에고 : 머리카락은 선선한 밤처럼 상쾌해!
빅토리아 : 그건 매일 밤마다 창가에서 너를 기다리기
때문이야.
디에고 : 깨끗한 물과 밤 때문에 네 몸에서 레몬과
같은 향이 나는 걸까?
빅토리아 : 아니야, 당신의 사랑이 보내는 바람이 나를 단 하루 만에 꽃으로 뒤덮어 주어서 그런 거야!
디에고 : 꽃들은 시들면 지는데!
빅토리아 : 그다음은 열매가 기다리지!
디에고 : 겨울이 올 텐데!
빅토리아 : 그래도 당신과 함께인 걸. 당신이 처음 내게 불러준 노래 기억해? 그 노랫말처럼 항상 변함없는
거지?
디에고 : 나 죽고 백 년 뒤에
대지가 내게 묻겠지
내 너를 결국 잊었냐고
그럼 나는 아직이라 답하리
(75)
그러니 명심해라, 내가 도착하는 순간 감동적인 것은
더 이상 없다. 그 따위 감동은 금지된다. 그 밖의 몇 가지
쓸데없는 것들, 예컨대 행복을 원하는 우습기만 한 초조함, 사랑에
빠진 이들의 얼굴, 풍광에 취하는 이기적인 작태, 불경한
풍자 행위 등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의 빈자리에 나는 조직을 이식한다. 처음에는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끝에 가서는 탁월한 조직이 너절한
감동 따위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듯 탁월한 생각을 실행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는 조치를 시행할 것이다. 나의 명령은 법률이
규정하는 것과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105)
판사 : 내가 법을 지키는 것은 법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네. 그것이 법이니까 지키는 거지.
디에고 : 그 법이 범죄를 가리킨다면요?
판사 : 범죄가 법이 된다면 그건 더 이상 범죄가
아닌 것이지.
디에고 : 그렇다면 미덕을 단죄해야 할 판이군요!
판사 : 분명, 그렇게
해야겠지, 만일 미덕이 건방지게 법을 검토하려 든다면.
빅토리아 : 아버지, 아버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두려움인 거예요.
(109)
아니, 빅토리아,
엄마는 닥치지 못하겠다. 내 평생 입 닫고 살아왔다. 내
명예를 위해서 그랬고, 신의 자비를 위해 그랬다. 그런데
명예란 게 이제 하나도 남지 않았어. 내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올이 하늘에 계신 신보다도 귀중하단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입 닫고 살지 않으련다. 이 사람에게 적어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당신 같은 사람 편에는 권리가 함께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잘 알겠지만, 권리란 고통받고 신음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편에 있으니까요. 권리는, 약삭빠른 자나 돈에 눈이 먼 자와는, 함께하지 않아요.
(157)
디에고 : 싫어.
그런 방식은 나도 알아. 살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죽이지 않을 수 없고,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도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 따위
논리가 수백 년을 버텨온 것이지! 지난 수백 년간 너와 같은 권력자들은 이 세상에 난 상처를 치료한다는
구실로 오히려 약화시키기 일쑤였어. 그리고 그런 방식을 대단한 것인 양 치켜세웠지, 왜냐면 아무도 그들의 면전에 대고 코웃음 친 적이 없었으니까!
페스트 : 나는 실천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비웃지
않는 거야. 나는 효율적인 사람이거든.
디에고 : 효율적이라, 그럼 그렇지! 그리고 실용적이지.
마치 도끼처럼!
페스트 : 인간들을 살펴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해. 그러면 어떤 정의라도 그들에게 쉽게 먹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디에고 : 이 도시의 성문들이 모두 봉쇄된 이후로, 나는 그동안 모두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었어.
페스트 : 그렇다면 그들이 언제나 너를 고립시킬
것도 잘 알겠군. 혼자 남은 사람은 무너져 내리는 법이지.
디에고 : 아니,
틀렸어! 만일 혼자였다면 모든 것이 쉽게 풀렸겠지.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나와 함께 한다고.
(159)
내가 경멸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려 드는 자들뿐이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저 사람들은 너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만일 저들이 어쩌다 딱 한 번 사람을 죽였다 해도, 그것은 잠시
광기에 사로잡혀 그랬던 걸 거야. 그런데 너는, 그 잘난
법이니 논리니 들먹이며 대학살을 자행하고 있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저들을 비웃지 마. 그건 이미 수백 전부터 공포를 불러오는 혜성들이 저들의 무리를 수도 없이 지나갔기 때문이니까. 저들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 비웃지 마. 수백 년 전부터 저들은 죽어갔고
저들의 사랑은 너덜너덜하게 찢겨 왔어. 설령 저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원인이 존재하는 거야. 그러나 저들을 상대로 너희들이 저질러온 죄악에는, 네가 고안해 낸
그 따위 역겨운 질서에 맞춰 이 세상을 체계화하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저질러 온 죄악에는, 나는 그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어. (페스트가 데이고 쪽으로 걸어온다) 네가
다가온다고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