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특별증보판)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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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내란의 시대에 신경안정제 역할을 해 준, 고마우신 유시민 님의 <청춘의 독서> 특별 증보판이란다. 유시민 님의 <청춘의 독서> 2009년에 이미 출간했던 책으로 유시민 님의 팬인 아빠도 당시에 읽었단다. 그리고 그 책에서 추천해 준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단다. 그럼에도 고마운 마음에 이번 개간본이 나왔을 때 또 구입해서 다시 한번 읽었단다. 특별 증보판이라고 해서, 초판본에 없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포함되어 총 열다섯 권의 책을 소개해 주고 있단다.

이 책들은 유시민 님께서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 때, 그러니까 아주 팔팔하게 젊을 때 읽었던 책들 중에 이삼십 년이 지나고 다시 읽고 젊었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은 책들을 선정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단다. 아빠는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 때 책을 거의 읽지 않아서 같은 책을 다시 읽고 다른 느낌을 받는 경우가 극히 적단다. 아빠는 뒤늦게 책읽기에 뛰어들어 읽어야 할 책은 많다 보니 한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도 드물단다.

이번에 읽은 <청춘의 독서> 16년 전에 읽고 이번에 증보판으로 다시 읽었으니 두 번 읽은 거나 마찬가지겠구나. 아빠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책을 읽고 나서 조금만 지나도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청춘의 독서> 16년 전에도 아빠가 잘 읽은 모양이구나. 이번에 읽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내용들이 하나 둘 떠오르더구나. 아빠가 유시민 님의 책들을 많이 읽은 편인데, <청춘의 독서>는 그의 책들 중에서 아빠가 손에 꼽는 책들 중에 하나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유시민 님이 이야기해준 책들이 마구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단다. 하지만 유시민 님처럼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금물.

2009년에는 독서 일기 형식으로 독후감을 썼는데, 그 때 쓴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는데, 책을 좋게 읽어서 비교적 자세히 썼더구나. 이번에는 너희들에게 들려주는 편지 형식으로 다시 쓰면서 책의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해야겠다.

 

1.

유시민 님이 소개한 책들 중에 유달리 러시아 소설들이 많단다. 열다섯 편 중에 세 권이 포함되어 있어. <죄와 벌>은 아빠도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도스토옙스키탄생 250주년 기념으로 산 책으로 다시 읽어보겠다고 마음만 먹은 지 오래인데 아직 다시 읽기를 못하고 있구나. <죄와 벌>은 유시민 님이 고3시절 밤새워 책을 읽었다고 하는구나. <죄와 벌>을 통해 사회가 개인을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대. 이 소설을 통해 지은이 도스토옙스키는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라는 답을 얻었단다. 하지만 유시민 님은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전제를 부정하였단다. 그보다 선한 목적을 선한 수단으로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단다. 최선의 방법이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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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게 삶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이 아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고 체험한 끝에 경험적, 직관적인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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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의 <대위의 딸>. 이 책은 아빠가 <청춘의 독서>를 읽고 난 후에 읽어 본 책이란다. 재미있었단다. 푸시킨. 반체제 시인으로 유명하고, 차르 전제정치를 비판을 많이 했었대. <대위의 딸>은 푸시킨의 유일한 소설이라는구나. 이 소설은 연애 소설로 위장한 역사소설이자 정치소설이야. 그가 시와 소설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삶은 행복하지 않았대. 바람난 젊은 아내 때문에, 아내의 정부와 결투를 하게 되고, 그 결투에 치명상을 입어 38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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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 책은 아빠도 오래 전에 읽긴 했단다. 수용소라는 좁은 공간, 이반 데니소비치 한 사람의 시선, 하루라는 짧은 시간을 소설로 쓸 수 있다는 단편적인 생각만 했던 기억이 있구나. 존엄을 빼앗긴 수용소에서의 하루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슬픔과 노여움을 자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유시민 님은 소설 속의 수용소는 소비에트 연방을 빗댄 것이라고 하는구나. 솔제니친의 대하소설 <수용소군도>를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구나.

리영희 님의 <전환시대의 논리>. <청춘의 독서> 초판본이 나왔을 때는 리영희 님께서 생존해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셨구나. 리영희. 진보 사상가 중에 한 명이란다. 아빠는 <청춘의 독서> 초판을 읽을 때는 리영희 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 그 이후에 김상웅 님의 <리영희 평전>을 통해

그의 삶을 조금 알게 되었는데, <리영희 평전>을 읽게 된 것도 유시민 님의 <청춘의 독서>를 읽고 난 이후 리영희 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읽게 된 것이란다. 리영희 님이 활약하던 시기와 아빠의 시간은 맞지 않지만, 유시민 님의 세대분들은 리영희 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 미국을 강도 높게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대한민국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구나. 진리, 진실, 끝없는 성찰,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시면서 지식인의 방향을 잡아주셨어. 리영희 님이 살아계셨다면 서울대나 나와서 권력욕에 빠지고 내란을 저지른 이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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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너무나 유명한 선언이기에 아빠도 예전에 한번 읽어본 적이 있단다. 유시민이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 초년생때인 1978년이라고 하는구나. 그는 당시 이 책을 읽으면서, 공산당 선언의 내용이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느꼈대. 1970년대면 군사독재 말기로 암울한 시기였지. 그런 시기에 읽어서 유시민 님은 이 책이 더욱 인상 깊었다고 하는구나. 공산당 선언의 핵심은 이렇다. 계급 투쟁으로 정의된 역사.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역사가 종말하고, 계급도 계급 투쟁도 없는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진다는 내용이란다. 공산당 선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은 설명할 수 없었다고 했어. 공산당 이론에 따르면, 공산주의 혁명도 역사 발전의 하나로 계급투쟁의 역사로 볼 수 있는데,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 투쟁이 없는 사회. , 역사 발전이 없는, 역사 그 자체를 영원히 종식시키게 된다는 모순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또 다른 모순은,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연합체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 추구를 부정하게 되고, 과연 모든 인간이 이기적 욕망을 없앨 수 있을까? 답은 NO라고 하는구나. 이런 모순을 가지고 있어도 공산당 선언은 아직 유효하단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또한 모순이 많이 때문이지. 세계화, 글로벌 시장,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금융 위기, 금융 독점, 산업공황 등등... 공산당 선언의 내용은 원래의 모습이 아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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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아빠는 <맹자>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도올 김용옥 님의 <맹자> 해설서를 읽어보긴 했단다. 맹자는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기에 더욱 빛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단다. 왕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왕은 혁명을 통해 바꿔도 괜찮다고 하였어. 그 일이 쉽지 않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것을 여러 번 해냈단다. 맹자가 우리나라 국민들을 보면 기특하다고 하지 않을까. 맹자는 인의로 다스리는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는데, 실제로는 실천에 옮기지 못해 실패한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대. 맹자의 사단이 유명하단다. 너희들도 학교에서 배우지 않을까 싶구나. 仁의 시작, 측은지심. 義의 시작, 수오지심. 禮의 시작, 사양지심. 智의 시작, 시비지심. 진보주의라고 생각했던 맹자에게 유시민 님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라 평가를 했단다. 보수주의라 함은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라고 볼 수 있어.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하는 것이라면서 맹자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라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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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보수가 이념이 아니라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맹자는 정말 멋진 보수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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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자신이 보수라고 하는 이들은 보수가 아니고, 옛 것을 지켜 이익과 출세만을 탐내는 수구이고 극우세력이란다.

맬서스의 <인구론>. 알면 알수록 충격적이고 무서운 주장을 하는 책이란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이렇게 가다가는 모든 인류는 굶어 죽게 되는데,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전쟁, 기근, 전염병이라는 주장하는 거야. 농담이 아니고 진지하게 말이야. 전쟁, 기근, 전염병을 자연법칙이라 했어. 그래서 맬서스는 기근에 허덕이는 하층민에 대한 자선 사업을 비난하고, 전염병을 치료하려는 의사들을 맹비난하였단다. 나중에 맬서스의 <인구론>은 전쟁 우호가들한테 환영을 받기도 했고 말이야. 맬서스가 <인구론>을 쓰려고 하던 이유 중에 선한 이유도 있다면서 유시민 님이 그를 두둔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인구론 이론이 너무 강렬하게 잔인하여 그 선한 이유가 잘 생각나지 않는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맬서스의 주장은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단다. 인류 스스로 출생률 저하라는 자발적 인구를 억제하게 된 것을 예측 못했던 것이야. 비록 그의 이 잔인한 이론은 모순이라는 데 밝혀졌지만, 지구의 입장에서는 아직 유효하다고 유시민 님은 이야기한단다. 지구의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인류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야. 이미 지구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에너지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인류, 얼마나 버티려나.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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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종의 기원>. 너무 유명한 책이지만, 쉽지 않은 책. 읽지 않은 책이란다. 유시민 님도 이 책을 읽기 전에 해설서를 먼저 읽으면 좋다면서 <이기적 유전자> 등 몇 권의 책을 추천해주었단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배워 알고 있는 적자생존, 자연선택설 등이 사회진화론에 잘못 인용되어 제국주의 국가들이 약소국을 침범하는데 다윈의 진화론을 앞세웠다는 이야기를 했어.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읽어보고 싶지만, 넘사벽이라는 생각에 엄두가 나질 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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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블런의 <유한계급론>. 유시민 님은 베블런을 지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외계인에 비유했어. 그의 삶 또한 실제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는구나.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파브르의 <곤충기>에 비유해서 인간의 습성을 연구하여 적은 책이라고 했어. <유한계급론>에서 던지는 질문. 사람들은 돈을 모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풍족한 사람이라고 해서 더 이상 돈에 관심을 끊는 것이 아니란다. 돈 있는 사람들이 더 돈을 밝힌다. ? 이것은 경쟁에서 이기려는 인간의 습성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원시시대 힘으로 싸워 상대를 이겼지만, 폭력이 불법이 된 오늘날은 상대를 이기는 수단으로 재력이 등장한 것이야. 돈 많은 유한 계급들은 수요공급의 법칙도 무시된단다. 값이 비싸면 비쌀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명품의 경제법칙도 경쟁에서 이기려는 습성에서 나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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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질문. 사회는 계속 진보하는데 왜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가? . 지대, 즉 땅값 때문이래. 땅을 개인이 소유하고, 가치가 있는 땅의 가격은 천지부지로 올라가서 어떤 사람은 땅만 소유하고 있으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많은 돈을 갖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는 지구의 한 특징이란다. 이게 비상식적인 일이지만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한단다. 헨리 조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땅으로 얻은 소득에 높은 세금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걷어들인 세금을 빈곤퇴치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앞서 이야기한 맬서스와 차원이 다른 사람이구나. 땅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조건이기 때문에 소유하면 안 된다고 그는 주장했어. 조지의 이론은 공산주의의 사유제산폐지와는 다른 것이란다. 토지에 대해서만 소유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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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조지의 사상은 사실 그리 과격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토지소유권을 근거로 지주가 취득하는 지대를 공동체의 것으로 만들자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조지의 사상을 가리켜 토지공개념또는 지공주의(地公主義)라고도 한다. 조지는 마르크스와 달리 사유재산제도의 폐지 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토지를 국융화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조세 징수를 통해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근거로 진보의 경제적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해소하자고 했을 따름이다. 자연이 또는 하느님이 준 토지를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라고 보았던 그의 사상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울타리를 넘어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 걸쳐져 있었다. 조지의 지대 이론은 논리적으로 명확하며 누구나 경험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설명의 논리 구조는 리카도의 차액지대론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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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이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기 위해 뉴욕시장에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고 하는구나. 이런 혁신적인 공약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을 텐데, 왜 낙선했을까? 그는 두 번째 뉴욕시장 출마하면서 무리한 선거운동으로 몸이 허약해져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구나.

최인훈 님의 <광장>. 유명한 소설로 아빠도 읽어본 책이란다. 남북 갈라진 땅, 갈라진 이념. 그리고 두 군데 모두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주인공. 남에서 살다가 월북한 아버지로 옥살이를 하고, 다시 북으로 가서 북의 체제에 실망을 하게 되는 주인공. 결국 남북이 아닌 제3국으로 망명을 선택하고, 3국으로 가는 배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주인공. 유시민 님은 <광장>을 북의 체제를 분석 평가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했고, 북한의 체제가 실패할 것으로 예견한 책이라고 했단다. 왜냐하면 북한은 인간 욕망을 억압하고, 개인자발성을 말살하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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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이 책은 <청춘의 독서> 초판본에서 소개한 것을 너무 감명 있게 읽고 찾아 읽어 본 책이란다. 아빠도 재미있게 읽었어. 이 소설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이퉁 신문이 있는데, 그 신문의 왜곡이 한 젊은 여인 카타리나 블룸을 짓밟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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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280)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막혔다.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방식이 너무나도 리얼했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에서 보고 경험했던, 그리고 현재에도 목격할 수 있는 언론의 행태와 정말로 똑같았다. <차이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째는 검찰청 조사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해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명국가의 형법이 금지하는 불법적인 피의 사실 유포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검사나 검찰 수사관 중에 누군가가 <차이퉁> 기자와 정보 밑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국가기관과 언론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르는 불법행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결코 원치 않았던 S의 아파트 방문, 얼마짜리인지도 몰랐던 반지, S의 별장 열쇠 등에 관한 사항을 비롯하여 <차이퉁>이 내밀한 사생활 관련 정보를 왜곡 보도해 자신을 모욕하는 데 대해, 그리고 그런 일을 바로 잡을 방법이 사실상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절망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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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 못한 카타리나는 그 신문사의 기자를 살해하고 얼마 후 자수한단다. 이 소설은 언론의 잘못된 표적 기사, 왜곡 기사에 대한 비판을 한 소설이란다. 지은이 뵐은 신문으로부터 왜곡 보도로 집중 포화를 받고 난 뒤 소설을 통해 그 신문사에 복수한 것으로 하는구나. 언론이 문제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을 하지만, 언론은 마치 왜곡이 그들의 임무인양 오늘날도 여전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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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개간본에서 추가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이 책은 유시민 님이 유튜브에서 진행하는 <알릴레오 북스>에서 소개해 준 적이 있는데 그 방송을 보고 아빠도 읽어 보았단다. 유시민 님이 여러 번 극찬한 책이야. 유시민 님은 12.3 내란 이후 이 책을 다시 읽었다고 하는구나.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자기 보호일 때만 정당하고 했지. 하지만 지난 3년 우리나라는 얼마나 많은 입틀막을 당했니그것도 모자라 모든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고자 내란까지 저지르게 된 것 아니니아직도 그 내란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구나. 밀은 <자유론>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위로를 해 준다고 유시민 님은 말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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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347)

밀은 1859년 그 옛날에 쓴 책에서 그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어리석은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낸 이들에게, 계엄의 밤 국회에서 계엄군을 막아섰던 시민들에게,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젊은이들에게, 눈보라를 맞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을 지새웠던 남녀노소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얹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오늘 우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들은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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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초판본 서문에 보면, 이 책에 소개된 책들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자신의 딸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책들이라는 내용이 있단다. 그래서 나중에 너희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대학에 입학할 즈음, 이 책을 강력히 권해볼 생각이란다. 너희들도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소개된 책들을 파릇파릇한 젊은 시절에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은 자로서 지금까지 낸 책이 적지는 않다.

책의 끝 문장: 내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위대한 작가들에게 감사드린다.

 


너는 지식인이야.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관료화한 정당과 정부 안에서 국회의원,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판적 지성을 상실했던 적은 없었느냐. 성찰을 게을리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아 진실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았느냐. 너는 언제나 너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인식을 실천과 결부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 P51

19세기 유럽 자본주의국가의 노동 대중이 처했던 극단적 빈곤과 전적인 무권리 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에 공감한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그에 버금가는 고난을 겪는 것을 나는 보았다.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할 방법을 모색한 그의 집요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노동권과 사회권은 마르크스와 같은 이상주의자 국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중앙 통제식 계획경제와 일당독재는 사회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연합체"를 만드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다. - P71

푸시킨은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실시되던 동토(凍土) 러시아에서 자유를 노래했다. 인류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휴머니즘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문학으로 꽃피웠다. 당대의 현실에 대해 그가 느꼈을 분노, 환희, 절망,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전해 오기에, <대위의 딸>을 읽으면 가슴 깊은 곳이 아려 온다. 푸시킨은 황제의 권력으로 모독할 수 없었던 고귀한 영혼이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솟아오른 꽃이었다. 두꺼운 먹구름도 빛을 가리지 못한 밤하늘의 별이었다. 그 별은 오늘도 문명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푸시킨! - P113

맹자는 제후의 지위를 가진 자로서 왕을 죽이고 새 왕조를 세웠던 주 무왕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은나라 주왕이 폭정으로 인의를 해쳤고 간언하는 충신을 모두 죽였으며 백성을 도탄을 빠뜨렸으니 군주로서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을 이미 상실했다고 본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무왕은 반역자가 아니며, 주나라의 정통성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사상을 반길 왕이 있을까?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덕으로 선정을 펴라는 맹자의 왕도 정치 이론을 부국강병에 몰두하던 전국시대 왕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 이후 여러 통일 왕조들에서도 맹자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해본다. - P122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다. 설사 한신과 유방이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덕(德)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인의(仁義)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비록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때로 맹목적 욕망과 시기심에 휘둘렸다 할지라도, 그러한 마음과 능력을 발휘하여 결과적으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었지 않은가. <사기>를 덮으며, 한신과 한고조가 겪었던 인간적 고통과 비극적 죽음에 대해, 이 모든 것들이 기록해 인류에게 선사한 역사가 사마천의 삶에 대해 깊은 존경과 높은 찬사를 바친다. - P183

곳곳에서 우생학회가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1926년 결성한 미국 우생학회였다. 이 학회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우수한 유전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도 남부와 동부는 열등한 민족이 살기 때문에 이민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정신병, 발달 장애, 간질 환자들에 대해서는 강제로 불임 시술을 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미국의 수많은 주들이 불임법을 도입했다. 독일 나치 정권은 미국의 불임법을 복제한 법률을 만들었으며, 우생학에 의거해 순수한 독일인 혈통을 보존하는 사업을 벌였고, 유대인과 유색인종과 동성애자 학살을 정당화했다. 진화론은 확실히 오남용의 위험이 큰 이론이다. - P218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신문 방송이 시시각각 전하는 뉴스와 인터넷에서 만나는 정보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을까? 누구도 알지 못한다. 모든 정보의 진실성 여부 또는 ‘진실 함유도’를 정확하게 따지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다, 누가 특별히 허위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분명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대충 어느 정도는 사실이려니 여기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대하는 기본자세이며, 우리네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다. 우리는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숨 쉬고, 왜곡과 거짓을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 P273

인생의 고비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이번이 여섯 번째인 것 같다. 다시 카를 읽으며 사회와 역사의 진보,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생각한다. 카의 말마따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임에 분명하다. 고대사 연구 프로젝트인 소위 ‘동북공정’은 만족할 줄 모르는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영토 확장 욕망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행동은 그들이 미래에도 침략 전쟁의 죄악을 부인하도록 역사 교과서 수정을 강제한 일본 정부 당국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미래에도 침략 전쟁을 벌일 의사가 있음을 증명한다.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유린 범죄를 정당화하려한 형태는 그들의 마음속에 극우 파시즘 사상이 똬리 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시대의 역사는 현대사임에 분명하다. - P313

밀은 1859년 그 옛날에 쓴 책에서 그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어리석은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낸 이들에게, 계엄의 밤 국회에서 계엄군을 막아섰던 시민들에게,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젊은이들에게, 눈보라를 맞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을 지새웠던 남녀노소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얹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오늘 우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들은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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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비현실적이었다고 해야 하나. 겨우 며칠 쉬었을 뿐인데, 온종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대화를 하고 이메일과 문자에 답장을 하며 보내던 모든 일상이 죄다 꿈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그게 나의 삶이었냐? 나의 생활이었나? 그게 진짜 나였나? 혹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내 것을 착각한 것은 아니었나?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불안감이 확 치솟았고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당장 사무실로 돌아가 밤새 커피를 들이키며 일을 하다 약간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81)

끝났구나. 그래. 끝나버렸다. 무엇이? 삶이? 기다림이? 그래. 끝났어. 마음이 가볍다. 평온하다. , 사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 같아. 왜냐하면 지쳤으니까. 그리하여 내 마음도 너무 늙어버렸으니까. 이렇게 힘을 빼고 있으니 모든 것이 편하다. 진작 포기할 걸 그랬다. 이제 드디어 쉴 수 있겠구나. 하지만 조금 억울해. 그리고 아쉬워.


(285-286)

그래. 미련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지.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가장 강렬한 감각은 통증이야. 그렇지 않니? 통증은 모든 걸 정지시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하지. 오르지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그래.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는 거야. 하지만 그건 삶이 아니야. 통증을 인정하는 삶?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통증 이후의 삶? 정말 그걸 믿는 거야? 통증은 통증일 뿐이야. 교훈도 깨달음도 놀라운 반전도 없어. 내 육신이 쇠하는 과정을 절절히 느낄 뿐이야. 나는 덩어리야. 고통을 느끼는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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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로드 7000km - 의열단 100년, 약산 김원봉 추적기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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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약산로드 7000km>라는 책을 이야기할게. 이 책은 아빠가 4년 전에 읽은 <임정로드 500km>란 책이란 같이 샀었는데, 이제서야 읽었구나. <임정로드 4000km>를 읽은 것이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독서기록을 찾아보니 4년 전이었더구나. 참 세월 빠르다. <약산로드 7000km>란 책은 책 제목에 힌트가 있어. 약산 김원봉에 관한 책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단다. <임정로드 4000km>가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여행 가이드라고 하면, <약산로드 7000km>는 약산 김원봉과 그가 이끌었던 의열단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여행 가이드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19년이기 때문에, 이 책에 나와 있는 여행 정보가 지금과는 조금 다를 수 있겠구나. 하지만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활동했던 장소들은 그대로일 테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여행 가이드가 될 수 있겠구나. 그런데 그 길이 7000km라고 하니, 쉽지 않은 길이겠다는 생각은 들었어.

약산 김원봉. 아빠가 약산 김원봉에 대해서 여러 번 이야기를 해서 너희들도 이름은 익히 알고 있겠지. 영화 <암살>에서도 잠깐 등장했던 약산 김원봉. 우리나라가 해방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사람에 손꼽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친일파 고문기술사한테 치욕적인 고문을 당하고 북으로 갔다고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 그런 반면 20년 동안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가 처벌도 받지 않고 잠시 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현충원에 안장되는 현실이런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라는 것이 아주 열 받는구나. 현충원에 묻혀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주변에 친일파들의 무덤이 같이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복장 터지실까. 심지어 공식적인 친일파 명단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도 현충원에 묻혀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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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0)

반 토막 난 독립운동사에 약산의 이름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한 첫 번째 이유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친일파 7인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만주군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인사들이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 다시 국군으로 돌아와 보란 듯이 현역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고 각각 군 사령관과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이 됐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묻힌 일본군 장교 출신 신태영과 이응준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 묘역과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들이 묻힌 장군 제2묘역이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들 친일파의 묘역이 애국지사 묘역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친일파 무덤이 애국지사 무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태다. 더 화가 나는 건 이름 없이 쓰러져간 수만의 독립군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대한독립군 무명 용사 위령탑역시 친일파 묘역 입구 하단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령탑 아래가 의열단 출신 김익상과 김상옥, 박재혁, 곽재기, 최수봉, 이종암 등이 잠든 애국지사 묘역이다. 한마디로 친일파의 무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다 바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보다 더 높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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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무덤을 이장하는 법안이 국회에 여러 번 상정되었지만, 폐기 또는 체류 중이라고 하더구나. 이 책이 2019년에 나왔으니, 그 이후에 진전이 있나 검색해 보니 여전히 현충원에 친일파들의 무덤이 있는 것 같구나. 빨간당이 자신의 색깔에 맞게 여전히 친일 행각을 벌이고 있으니, 이런 일조차 험난한 길이 되는구나. 몇 달 전에도 국회에서 친일파 백선엽을 미화한 영화 시사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아빠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그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런데 그런 일본의 국기를 닮은 빨간당을 지지하는 동네 중에 밀양이라는 곳이 있단다. 아주 높은 지지율로 빨간당을 지지하는 그런 곳이란다. 약산 김원봉의 서훈을 앞장 서서 반대하는 빨간당을 지지하는 밀양이라는 곳이 바로 약산 김원봉의 고향이란다. 자기 고향의 자랑스러운 위인의 업적을 깍아내리는 정당을 눈감고 지지하는 곳. 이 또한 아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

밀양은 약산 김원봉뿐만 아니라 많은 의열단과 독립운동가들이 태어난 곳이라고 하는구나. 김원봉의 고모부로 독립운동을 한 황상규, 윤세주, 김대지, 고인덕 등이 독립 유공 애국지사 80여 명이 이 곳 출신이란다. 밀양은 의열의 도시라 할 수 있어. 그래서 의열기념관과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단다. 그리고 약산 김원봉의 아내에서 독립운동가로 전투 중에 총상으로 운명을 달리한 박차정 지사의 묘도 밀양에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박차정의 묘가 너무 초라하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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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6)

1910년에 태어나, 약산보다 정확히 12살 어렸던 박차정 지사는,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를 지냈던 부친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분노해 자결했다. 숙부 박일형과 친척들, 오빠들도 모두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외가 쪽 역시 독립운동가 김두전과 김두봉이 친척인 집안이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 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박차정 지사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일찍이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독리운동가로 활약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 1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그러나 근우회 사건으로 구금된 다음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박차정 지사를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불렀고, 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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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밀양시는 친일파 음악가 박시춘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건립한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로구나. 이 책이 나올 때는 아직 건립이 안 되었고 여러 시민단체들이 반대하고 있던 중인데, 지금 검색을 해보니, 다행히 아직 건립되지 않은 모양이구나.

 

1.

약산 김원봉은 19살에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중국으로 떠나 텐진, 난징, 센양 등에서 활동하가다 지린이라는 곳에서 고모부 황상규를 만나고 신흥무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단다. 신흥무관학교를 나오고, 1919 11 10일 지린시 광화로 57호에서 의열단을 만들었단다. 의열단 단장인 의백은 김원봉이 맡았지만, 고모부 황상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단다. 의열단의 공약 10조를 읽어보면 그들의 독립투쟁 의지를 엿볼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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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의열단 공약 10>

1.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히 자라야 의열단원이 된다.

4. 단의(團義)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도 급히 실행한다.

5. 의백 일인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케 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招會)(부름)에 반드시 응답한다.

8. 피사(被死)(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며 단의의 전력을 다한다.

9. 하나의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10. 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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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은 박재혁, 김익상 등이 국내외 많은 활동을 해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단다. 아빠가 의열단 활동은 이전에 김원봉 관련 책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박재혁 님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만 책의 내용을 발췌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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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부산 출신 박재혁은 1920 9월 초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1920 9 14일 고서상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와 마주한다. 그리곤 고서 상자 속에서 미리 준비한 폭탄을 꺼내들고 하시모토에게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라고 외치며 폭탄을 투척한다. 폭탄에 맞은 서장은 수일 뒤 사망했다.

박재혁 역시 현장에서 폭탄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체포됐다. 1921 3,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상처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사형 선고 전,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라고 결심한 뒤 곡기를 끊고 단식하다 옥사하였다. 의열단다운 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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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진 김산도 의열단원으로 일했었단다. 김산은 김원봉, 김성숙과 가까웠고 베이징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고 하는데, 당시 베이징에 있던 의열단 본부의 위치를 정확히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구나. 이 책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의열단의 발자취를 쫓던 여행 가이드이기 때문에 의열단과 관련된 장소들을 찾아서 사진도 삽입되어 있단다. 의열단에 도움을 준 이들 중에는 단재 신채호, 이육사도 있어 그들의 흔적도 찾는 노력을 했단다.

아빠가 아는 독립운동가 중에 이태준이라는 분이 계신데, 이 분은 몽골에서 유명한 의사로 활동하던 분이야. 억울하게 러시아 백군에게 죽음을 당하는데, 그가 죽기 전에 폭탄제조 전문가인 헝가리 사람 마자알에게 의열단을 소개해주었고, 이태준이 죽은 이후 마자알은 혼자 의열단을 찾아와 도움을 주었단다. 이 이야기는 아빠가 예전에 읽은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에서 알게 된 이야기인데, 이 책에도 또 나오는구나. 이태준 님에 관한 책을 오래 전에 사두었는데 조만 간에 읽어봐야겠구나.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

의열단의 활동은 전에도 이야기했던 종로경찰서를 공격한 김상옥 의거,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의 황푸탄 의거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어. 불사신 김익상은 끝내 체포되어 21년간 형살이를 하고 풀려났는데, 다시 경찰이 데리고 간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오셩륜은 일제 말기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어.

….

의열단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보면 금륭대학이라는 곳이 있어. 오늘날은 난징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어. 금륭대학 강당에서 민족혁명당이 만들어졌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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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233)

그런데 이곳(금릉대학)이 우리 역사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돼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1935 7,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금릉대학교 강당인 대례당에 모여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면면이 화려했는데 의열단 출신은 약산을 필두로 석정 윤세주, 진이로, 박효삼이 함께 했고, 신한독립당 출신으로 지청천과 신익희, 윤기섭이, 조선혁명당 출신은 최동오와 김학교가 함께 했다. 김두봉과 조소앙, 김규식, 김상덕, 최창익, 허정숙, 안광천 등도 동참했다. 22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김구는 위해 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으나 마지막까지 고사했다.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위원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서기부와 조직부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서기부의 부장은 약산, 조직부의 부장은 김두봉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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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두 거두라고 하면 약산 김원봉과 백범 김구를 들어 있어. 둘은 지향하는 바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의 목표는 오직 조국의 독립이었단다. 임시정부 초창기에 김원봉에 잠시 참여했다가 실망한 후 다른 길을 갔지만, 1940년대에 들어서 그들은 다시 만나고, 당시 김원봉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는 김구의 한국광복군에 편입하게 된단다. 김구와 김원봉은 조선 독립을 위해 듯을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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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303)

두 사람(김구, 김원봉)은 진심으로 화합해 조국 독립을 바랐다.

우리 두 사람은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계속 분투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개의 강적에 대한 투쟁을 통일적으로 강하고 유력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군중을 떠난 우리 두 사람의 특수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는 우리가 민족적 경각성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민족운동 사상의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중국민족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야 매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민족적 총 단결의 교훈을 이전의 착오를 통해 통감한다. 우리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위해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동포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와 현 단계의 우리 정치 주장을 이하에 진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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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임정 세력과 다시 손을 잡았지만, 여전히 임정 내부에서는 김원봉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구나. 그래도 결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조국에 돌아왔지만, 기다리는 것은 경찰이 된 친일파들이었지. 친일파를 청산하기는커녕 그들이 다시 경찰의 요직을 차지하고, 일제 치하에서도 잡혀 본 적이 없는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까지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니. 거기에 여운형 등도 암살 당하는 남한 사회에 치를 떨었을 거야. 고향인 밀양을 뒤로 하고 북으로 가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북에 가서도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결국은 한국 전쟁 후에 숙청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잖니.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아빠가 더 억울하더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나라에서는 이제라고 공식적으로 그의 공적을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참 도발적이게도 난 약산 김원봉을 통해 반 토막 난 우리 독립운동사를 말하고 싶었다.

책의 끝 문장: 김약산을 기억한다.

 


밀양, 약산 김원봉이 태어난 도시다. 약산의 평생지기 석정 윤세주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약산의 고모부 백민 황상규를 비롯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 애국지사만 80여 명이다. 안동과 더불어 인구대비 가장 많은 숫자다. 한마디로 독립유공자의 산실과 같은 장소다. 2018년 봄 약산의 생가터에 밀양시가 의열기념관을 세우고 나서 밀양을 찾아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2019년 들어 밀양시가 친일파 박시춘을 중심으로 한 <가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지사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약산의 생질 김태영 박사와 밀양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가요박물관 건립을 막고 있다. - P17

그러나 백민 황상규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1차 의열단 의거 실패 후 감옥에서 6년여를 보냈다. 출소 후에도 밀양에서 지역 운동을 전개하며 지역 리더로서의 역할을 실천했다. 1927년 12월부터는 신간회의 밀양지회장으로 선출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고문 등으로 이미 몸이 쇠약해진 상태, 한때 관운장이라 불릴 정도로 강인한 그였지만 과로 등이 겹치며 결핵성 복막염을 앓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황상규는 진상조사단이 돼 몸을 돌보지 않고 사건을 알렸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질 못했다. 1930년 초 황상규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9월 황상규는 눈을 감는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한 폐결핵과 복막염 악화. 의열단의 정신적 스승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던 백민 황상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P103

김산은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의열단원 김성숙과 특히 사이가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자주 모임을 가질 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이 만남은 훗날 ‘황포군관학교’라는 공통분모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김산과 약산 모두 책벌레였다. 특히 두 사람이 다 러시아 문학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그만큼 머리도 비상했다. 중앙학교-덕화학교당-금릉대-신흥무관학교를 거친 약산의 비상한 머리야 익히 알려진 바고, 김산 역시 신흥무관학교-난카이대-협화의대-황포군관학교-중산대 등을 거친 수재였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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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6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항일로드도 나왔던데 아직 못읽었네요. 김원봉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게 말이 안되는데도 여전히 그런 현실이..... 그래도 밀양 항일테마거리에 가면 항일기념관과 항일 체험관이 꽤 잘 꾸며져 있습니다. 밀양에는 독립운동가이자 김원봉님의 부인이었던 박차정님의 무덤이 있는데 김원봉님이 해방루 고향에 돌아올때 유골을 가져와 안장했어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산길을 헤매며 찾아간 무덤이 너무 하술하게 관리가 안되어서 많이 부끄럽고 가슴 아팠습니다

bookholic 2025-08-17 08:48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항일로드>는 리스트에 올려 놓겠습니다^^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이념의 색깔을 씌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밀양 여행을 가보겠습니다~~^^
 
















(13-14)

인간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 무엇인가에 열광하게 되면 그 열망을 한 마디 환호성으로 표현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우연의 바람이 불현듯 하나의 이름을 던져준 행운의 날,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울림 좋고 날개가 돋친 듯한 그 낱말을 서슴없이 받아들여 새로 발견한 세계를 아메리카라는 새롭고 영원한 이름으로 맞이했다.


(22)

1200,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묘를 되찾았다가 다시 빼앗겼다. 순례는 헛된 것이었다. 아니다. 헛되지만은 않았다. 이 원정을 통해 유럽은 비로소 깨어났기 때문이다. 유럽은 스스로의 힘을 깨닫고 용기를 시험했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얼마나 새롭고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는지 다시금 알게 되었다. 전혀 다른 하늘 아래 다른 땅, 다른 열매, 다른 물건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동물들, 다른 풍속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놀라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기사들과 시종들, 그리고 농부들은 자신들이 좁고 답답한 서양의 구석에서 얼마나 어리석게 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반면에 사라센인들은 얼마나 풍요롭고 세련되게, 그리고 호화롭게 살아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42)

콜럼버스는 수천 개의 섬을 혼자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낙원에서 발원하는 강물도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인도의 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 모든 섬들과 이 특이한 땅들이 어째서 고대와 아랍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마르코 폴로는 어찌해서 그것들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마르코 폴로가 말한 지팡구와 차이툰은 콜럼버스 제독이 발견한 땅과 얼마나 다른가? 그 모든 것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며 신비로 가득 차 있어서, 서쪽에 위치한 이 섬들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62-63)

베스푸치는 위대한 발견자인 콜럼버스의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어냈다.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앞으로 얼마나 큰 의미를 갖게 될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대륙의 남쪽 부분이 독립된 새로운 땅임을 정확히 인지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스푸치는 사실상 아메리카의 발견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발견이나 발명은 단지 그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의미와 영향을 인식한 사람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얻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탐험과 발견이라는 공적을 세웠다면, 베스푸치는 앞서 언급한 선언을 통해 콜럼버스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라는 공적을 세웠다. 그는 앞선 사람이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하며 발견한 것을, 마치 꿈의 해몽가처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밝혀낸 것이다.


(84-85)

생디에의 인문주의자들은 출판물이 더 많은 관심을 얻을 수 있도록 후원자인 공작 르네를 세상 앞에 높이 기리기 위해 낭만적인 이야기를 꾸며냈다. 그들은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신대륙 발견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마치 자신들의 영주와 친밀한 친구이며 그를 숭배하는 사람인 양 꾸며댔다. <서한들>은 베스푸치가 직접 로트링겐의 영주에게 보낸 것이며, 이번에 출간되는 것이 그의 서한들이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공작에게는 얼마나 극진한 찬사인가! 당대의 위대한 학자로 널리 알려진 베스푸치는 이렇게 해서 스페인 왕뿐만 아니라 작은 공국의 군주에게도 자신의 항해에 대한 보고를 올리게 된 셈이다. 이 경건한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위대하신 분앞으로 쓰인 헌사는 가장 고귀한 레나투스 왕 폐하’(르네 2)께 바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번 판본이 기존의 이탈리아어 원본을 단순히 번역한 것이라는 흔적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다음과 같은 메모가 덧붙여졌다. 베스푸치가 이 저술을 프랑스어로 작성했고, ‘훌륭한 시인인 장 바쟁이 프랑스어에서 우아한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97-98)

지구상에서 북아메리카는 여전히 남아메리카와는 별개의 세계로 존재했다. 당시 사람들의 완고한 믿음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아시아의 일부라고 믿었고, 어떤 사람들은 상상 속에 해협으로 아메리고의 대륙과 분리되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마침내 사람들은 이 대륙이 북쪽 빙해에서 남쪽 빙해까지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땅임을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확인하였고, 이 대륙에는 단 하나의 이름이 붙여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오류와 진실 사이에서 탄생한 이 무적의 단어가 그 불멸의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힘차게 일어섰다. 이미 1515년에 뉘른베르크의 지리학자 요하네스 쉐너는 자신이 제작한 지구의에 덧붙인 글에서 아메리카 또는 아메리겜을 신세계인 네 번째 대륙으로 공언했다.


(113-114)

학자들의 세계에서 베스푸치가 이토록 엄청난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출간한 매우 얇고 신뢰성이 다소 의심스러운 두 권의 책들이 학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권위를 부여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리학 입문>이라는 책이었다. 그러한 책을 최초로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베스푸치는 행동보다 말을 중시하는 학자들에 의해 서슴없이 신대륙의 발견자로 찬양받게 되었다. 지리학자인 쇼녀는 두 사람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그으며 이렇게 말했다.

콜럼버스는 단지 몇몇 섬만을 발견했을 뿐이고, 베스푸치는 진정한 신세계를 발견했다.”


(128)

콜럼버스라는 한 인물이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은 후 수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부당한 처우를 겪었는지를 생각하면, 이는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콜럼버스는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그를 향한 모든 경멸과 그의 이미지에 드리워졌던 모든 그림자는 깨끗이 지워졌다. 사람들은 그의 형편없었던 통치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의 생애를 이상적으로 그려냈다. 그가 겪었던 어려움은 극적으로 부각되었다. 선원들의 모반을 제압하고 배를 끝까지 이끌었던 일, 한 악당의 음모로 쇠사슬에 묶여 고향으로 압송된 일, 굶주림에 처한 자식과 함께 라비다 수도원에 숨었던 일 등 이 모든 사건들은 이전에는 그의 업적을 칭송할 때 별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끊임없는 영웅화 욕구 덕분에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회자되었다.


(158-159)

다행히도 역사는 뛰어난 극작가다. 비극을 쓸 때처럼, 희극을 마무리할 때에도 그녀는 언제나 눈부신 결말을 마련해둔다. 4막 이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으며 최초로 본토에 발을 들인 사람도 그가 아니다. 그를 오랫동안 콜럼버스의 라이벌로 만들어 주었던 첫 번째 항해를 그는 결코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학자들이 무대 위에서 베스푸치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항해들 가운데 몇 번을 실제로 했는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갑자기 한 인물이 무대 위로 올라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32쪽짜리 글은 결코 베스푸치가 쓴 것이 아니며, 그 글은 누군가가 베스푸치의 육필 원고를 멋대로 변형하여 만든 무책임하고 임의적인 조합물이라는 것이다.


(183-184)

4세기에 걸쳐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한 문제 중 하나를 던져준 이 남자는 정작 파란도 위대함도 없이, 소외된 채 조용히 흘러가는 삶을 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베스푸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영역을 넓힌 사람도 아니었다. 위대한 저술가도 아니었고,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위대한 학자도, 심오한 철학자도, 천문학자도 아니었으며 코페르니쿠스나 튀코 브라헤와 같은 인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를 위대한 항해자나 탐험가의 제일선에 놓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라도 모른다. 불운한 운명 탓에 어느 순간에도 주도권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쥐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나 마젤란처럼 함대를 지휘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주역이 아닌 조연에 머물렀고, 늘 다른 이들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185-186)

역사의 전환점을 만드는 것은 발견 자체가 아니라 발견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최초로 그것이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단 하나의 업적이 그의 삶과 이름에 영원히 결부된 것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행위를 이야기하고 설명한 사람이 그것을 실제로 해낸 사람보다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종종 아주 작은 계기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역사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역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종종 역사는 평범한 인물에게 불멸의 업적을 안겨주고, 진정으로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채 던져버렸다.


(18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는 자신의 세례명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 이름은 올곧고 용감한 한 남자의 이름이다. 그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세 차례에 걸쳐 조그마한 배를 타고, 아직 탐험되지 않은 대양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 역시 시대의 모험과 위험 속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수백 명의 이름 없는 선원들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민주주의 국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은 왕이나 정복자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없이 용감했던, 그런 평범한 사람이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는 서인도라든가 뉴잉글랜드, 뉴스페인 또는 성스러운 십자가의 나라 같은 이름보다 분명히 더 공정한 명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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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이건 메리언이 원하는 대로 불러요. 일지도 좋고 일기도 좋고 전능하신 메리언의 마법 연대기라고 불러도 난 상관없어요. 이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그걸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결정하면 돼요.” 그녀는 메리언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흔들며 스스로도 놀랄 만한 열성을 보인가. “나중에 기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해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의미까지도요. 자신에게 지니는 의미.”


(370)

지도에는 수많은 상징이 뿌려져 있었다. 도시. 비행장. 철도와 버려진 철도. 호수와 말라붙은 호수. 경주로를 나타내는 타원형과 유정탑을 나타내는 작은 유정탑. 점멸신호등을 나타내는 붉은 별. 깔끔하고 보기 좋은 단순화. 비행기가 격추되기 전까지는 그도 자신의 기술을, 삼차원의 공간과 인쇄된 지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나는 여기 있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로는 아무리 멀리 여행해도 늘 꼼짝 못하고 갇혀 있는 기분을, 고립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궤도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방정식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지도로 표시될 수 있는 세계의 기저에 또다른, 포착하기 어려운 차원이 있는 것만 같았다.


(371)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거의 모든 걸 놓치고 지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대륙을 종단할 때 우리는 비행기 날개 너비밖에 되지 않는 하나의 길만 따라갈 것이며 오직 한 종류의 지평선만 볼 것이다. 동쪽으로는 아라비아와 인도, 중국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지나갈 것이고 유럽의 주둥이와 아시아의 꼬리를 가진 소련이라는 거대한 동물 또한 그렇게 보낼 것이다. 우리는 남아메리카도, 오스트레일리아나 그린란드, 버마, 몽골, 멕시코, 인도네시아도 전혀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주로 물을 볼 것이다. 우리는 주로 물을 볼 것이다. 액체 상태이거나 얼어붙은 물, 우리의 경로엔 주로 물이 있을 테니까.


(385)

우리는 진짜 두려울 때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고 싶은 갈급한 욕망을 느낀다. 고통과 공포를 체험하게 될 물체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체다. 우리가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으며 우리가 배 자체다. 하지만 비행에서는 두려움이 허용될 수 없다. 자기 안에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며, 그 다음엔 비행기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441)

가넷새의 돌진. 자신의 쓴 말이 떠오른다. 연료가 줄어드는 걸 바라보며 그 말대로 실천하리라 결심한다. 그렇게 결심하지만, 계속 날아간다. 살고 싶다는 걸 깨달은 걸까? 이 기억은 이상하게 빈 채로 남아 진실을 끌어내려는 그녀의 노력에 저항할 것이다. 나중에 그녀는 자신이 상반되는 바람들을 지녔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살고 싶은 동시에 죽고 싶고, 세상으로 돌아가 새 삶을 살면서 모든 걸 바꾸고 싶은 동시에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기도 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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