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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더라 - 이중섭의 화양연화
김탁환 지음 / 남해의봄날 / 2024년 9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김탁환 님의 <참 좋았더라>라는 소설 한 편을 이야기해줄게. 이 책은 부제 ‘이중섭의 화양연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중섭에 관한 책이란다. 이중섭은 우리나라 현대 화가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한
명이 아닐까 싶구나. 그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가 ‘소’ 그림에 진심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을 거야. 예전에 <방구석 미술관> 2권에서 이중섭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구나. 그의 작품이 고가에 팔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우리나라 불우한 현대사가 폭풍이
되어 그를 덮쳤다고 해야 하나…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러 가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국 홀로 삶을 마감해야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니. <방구석
미술과> 2권에서 이중섭의 관한 짧은 글을 읽고 나서,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지. 하지만 아빠의 게으름으로 인해 계속 뒤로 미루었어. 그러다가 우연히 김탁환 님이 <참 좋았더라>라는 소설이 이중섭에 관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게 된 것이란다. 김탁환
님은 역사적 인물을 소설로 각색하는데 소질이 있으신 것 같아. 그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여 그 인물의
문체로 소설을 쓰시는 것 같았어. 이번 <참 좋았더라>라는 소설도 김탁환 님의 그 전 소설과는 다른 문체로 쓰신 것 같았어. 이중섭의
고단한 삶과 예술가적 재능이 묻어 있는 문체라고 할까.
…
1.
이중섭의 아내는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일본인인데, 이남덕이라는 우리나라 이름을 가지고 있어.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안전을 위해 1952년 아내와 두 아이 태성, 태현을 일본에 보냈단다. 이중섭도 그 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주일간 일본에 다녀왔단다. 당시는
아직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은 상황이라서 오래 있지 못하던 시절이래. 다시 한국에 와서 이중섭은 가족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돈을 벌려고 애를 썼단다. 하지만 어떤 영악한 놈에게 사기를 당해서 빚만 쌓였고, 가족들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단다. 이중섭에게 가족은
그림만큼 중요한 존재였는데, 만날 수 없으니 얼마나 속이 타 들어갔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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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중섭은
날마다 두 가지에 집착했다. 하나는 그림, 또 하나는 가족. 화가들은 대부분 그림과 가족을 한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땐 가족을 잊고, 가족과 머물 땐 그림을 잊었다. 이중섭은
그림 속에 가족을 두고, 가족 속에 그림을 두었다. 아내가
이남덕이기에 가능했다. 그녀 역시 문화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기에, 그림을
향한 남편의 진심을 투명하게 받아들였다. 이중섭이 기쁠 땐 화가로 기쁜 것이고 슬픈 땐 화가로 슬픈
것이며 화날 땐 화가로 화난 것이다. 부부의 대화는 그림에서 시작하여 그림으로 끝났다. 태현과 태성은 부부가 나눈 화담(畫談)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두 아들이 훗날 아빠처럼 그림을 업으로 삼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림을 평생 가까이 둘 것은 확실하다. 네 사람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일궜다. 한국의 예의와 상식도 아니고 일본의 예의도 상식도 아니었다. 사람으로서의 예의와 상식은 너무 거창한 이야기다. 그들은 그림이라는
나라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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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오산학교에서 미술을 시작했단다. 도쿄 유학을 다녀온 이후에는 원산에서
그림을 그렸어. 이중섭의 형 이중석이 원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형이 후원을 해주고 있어서 원산에서 정착하게 된 거야. 그랬다가 전쟁이 나서 부산에 내려왔다가
제주로 와서 지내고, 다시 부산으로 왔다가 식구들을 일본에 보내게 된 거야. 그림에 열중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어. 부산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는데, 함남 북청 출신인 유강렬의 제안으로 통영으로 이사 왔단다. 당시
통영은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던 곳이야. 유강렬은 통영에서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를 차렸는데, 나전칠기 기술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도 가르치고 있었어. 이중섭에게
그곳에서 그림도 그리면서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단다.
…
오랜만에 그림에 몰두할 수 있던
시기가 아닐까 싶구나. 1953년 12월에는 다방을 빌려
개인전을 열었어.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등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방문하여 성황리에 마쳤단다. 이중섭은
서피랑, 남망산 등 통영의 이곳 저곳을 화폭에 담았단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통영 여행을 가서 그런지 더욱 친근하더구나. 이 소설에는 통영을 ‘붉음’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더구나. 그런데 지은이 김탁환 님의 생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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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통영은
붉다. 이렇게 밝히면 대부분 고개를 젓는다. ‘통영은 푸르다’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닌지 묻는 이도 있다. 이중섭도 통영을 방문객으로
오갈 때는 푸르름에 압도되었다. 전혁림의 그림에서 넘쳐나는 파랑이 과장이 아니라며,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부산에서 그림을 싣고 강구안에 내린
다음 날 새벽, 통영이 붉은 항구란 사실을 목도했다. 늦게까지
마신 환영주에 목이 말라 깨지 않았다면, 숙취로 두통이 심해 바람이라도 쐬자 싶어 산책을 나서지 않았다면, 밤길이 서툴러 되돌아오지 못하고 헤매다가 남망산에 닿지 않았다면, 비가
그치지 않았다면, 중절모를 눌러쓰고 목도리까지 두른 사내가 오르막을 경쾌하게 앞서 걷지 않았다면 통영의
새뜻한 붉음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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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우리나라 현대사가 이중섭을
괴롭혔다고 이야기했는데, 좀더 넓게 보면 세계 현대사, 특히
전쟁이 이중섭을 가로막았단다. 2차세계대전은 이중섭의 유학 생활을 중단하게 했단다. 일본 유학 중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원산으로 돌아와야 했어. 원래 이중섭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유럽으로 유학 가려는 꿈이 있었는데 그것이 전쟁으로 중단되고 말았단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국전쟁은 그를 방황하게 만들었고 가족과 헤어지게 했단다. 휴전이 되면서 고향 땅과 원산에도 못하고 타지 통영에서 홀로 지내게 된 거야.
….
2.
이중섭하면 소를 빼놓을 수 없단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해바라기 있다면 이중섭에게는 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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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빈센트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이중섭에겐 단연코 소다. 대작을 그리겠노라고는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밝힌 적은 없다. 화우(畫友)들도 따져 묻기보다는 꼭 그리라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했다. 완성하고 나면 축하주를 마시자는 이도
있었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오랫동안 많이 그렸다. 두 송이부터
시작해서 열다섯 송이까지, 파리에서도 그렸고, 아를에서도
그렸다. 이중섭 역시 소를 계속 그렸다. 맘을 다 쏟아 그림을
그릴 조건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그린 것이 소였다. 도쿄에서도
그렸고 원산에서도 그렸다. 서귀포에서는 그리지 않았고, 부산에서는
그리고 싶어 끼적이긴 했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해바라기를 그린 사람이 고흐 이전에도 많았고 당대에도
많았으며 후대에도 많듯이, 소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화인들이
그린 소가 몇 마리가 될까. 헤아리기 힘들다. 이중섭과 가까운
선배 중에도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함께 만든 진환이 소를 좋아했고 자주 그렸다. 누가 먼저 그렸는가 혹은 얼마나 많이 그렸는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문제는
수준이다. 대작이란 두 글자는 작품의 크기가 아니라 최고의 성취를 가리킨다. 이중섭은 통영에서 소를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리라 결심했다. 고흐가
아를에서 전혀 다른 해바라기를 선보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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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다양한 소 그림을 그렸는데, 이 소설의 지은이는 김탁환 님은 다양한 소를 이야기했는데, 그 표현들이
재미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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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
속삭이는
소, 친구가 많은 소, 여물을 맛보고 찡그리는 소, 코뚜레를 흔들며 나무 그늘에서 조는 소, 우는 소, 되새김질하며 거품 흘리는 소, 기뻐 껑충껑충 뛰는 소, 노리는 소, 송아지를 불러들이는 소, 뒷발질에 열심인 소, 실수하는 소,
떨어진 꽃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소, 교접하는 소, 어미
소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 코를 박고 물을 마시는 소, 올려다보다가
별을 발견하고 놀라는 소, 밭 가는 소, 날아가는 멧비둘기와
참새를 따라 고개 돌리는 소, 외톨이를 자처하는 소, 내달리는
소, 빼앗는 소, 머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 고집부리는 소, 벽을 들이받는 소,
엎드려 기다리는 소,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뒷걸음질하는 소, 앞발을 땅을 파헤치는 소, 꼬리를 흔들어 벌레를 쫓는 소,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서 인사하는 소, 오르막길 앞에서 한숨 쉬는
소, 늙었지만 병들지 않은 소, 멍한 눈으로 세월을 되씹는
소, 웃는 소, 새끼 낳는 소, 먼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소, 어미 소를 싫어하는 소, 숨는 소, 산책을 즐기는 소, 잠든
소, 병들어 마른 소, 절뚝거리는 소, 용서하는 소, 냄새 맡는 소, 멈춰
기다리는 소, 죽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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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에서 머무르면서 진해, 진주 등 주변 도시도 다니면서 예술인과 교류도 하고 그림도 그렸단다. 소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소싸움이 열리는 곳에도 자주 갔어. 이 때 많은 작품을 그렸지만, 그의 마음 한켠에는 늘 가족이 있었단다. 외로운 타향이지만, 가족만 함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이중섭이 그래도 통영에 머무를
수 있던 것은 그를 통영으로 이끌어준 유강렬의 힘이 컸단다. 그런데 유강렬이 국립박물관에서 제의가 와서
서울로 가게 되었어.
유강렬 없는 통영. 이중섭은 고민 끝에 자신도 서울로 가기로 했단다. 그곳에서 개인전을
열어 그림을 팔아서 일본에 가족을 만나려 가려는 계획도 있었지. 하지만 서울 생활은 또 다른 험난한
도전이었단다. 이중섭이 서울로 가면서 이중섭 대신 양성소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것은 김환기가
대신하기로 했단다. 김환기는 도쿄 유학 때부터 친분이 있던 사람이란다.
김환기 또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현대 미술가인데, 그 분의 삶도 궁금해서 사 둔 책이 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먼지가 쌓여가고 있구나. 그 책도 읽게 되면 이야기해줄게.
….
서울로 온 이중섭은 드디어 첫
개인전을 열게 되는데, 소설은 여기서 끝을 맺었단다. ‘작가의
말’에서 지은이 김탁환 님은 이중섭의 이후 삶은 일부러 소설에서 뺐다고 하는구나. 개인전은 나름 성공했지만, 그림이 많이 안 팔려서 일본은커녕 서울에서
생활도 쉽지 않았어. 대구에서 다시 한번 개인전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큰 성과는 없었단다. 그렇다 보니 점점 생활은 어려워지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려서 정신병원까지 가게 되고 쓸쓸히 삶을 마감했단다. 예술가의 삶은 이리 팍팍한 경우가 많은지… 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샘하는
것인지…
….
이 책에는 이중섭의 작품들을
많이 실려 있단다. 그 각 작품에 대한 설명과 평가도 실려 좋았단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아빠에게 도움이 되는 설명들이었단다. 이중섭 님의 그림들은 그 만의
독특한 무엇인가 있는 것은 같은데, 현대 미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는 이중섭의 작품이 정말 뛰어난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더구나. <방구석 미술과> 2권을
읽은 것이 2022년 3월이었는데, 당시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 님이 생존해 계셨었는데, 지금 다시 검색을
해보니 2022년 8월에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이중섭과 이남덕… 오랜만에 다시 만나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계시려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7월의 항구들은 다가오기가 무섭게 멀어졌다.
책의 끝 문장: 피랑에 홀로 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족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가족은 굶주리지 않았고 울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고 춥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평화로웠다. 부산과 서귀포의 참담한 현실과 정반대로 그린 까닭을, 아내와 두 아들은 따지지 않았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들을 일용할 양식처럼 삼키며 하루를 나고 한 달을 나고 일 년을 났다. - P35
밥은 굶어도 담배를 건너뛸 순 없었다. 술 또한 거의 매일 입으로 들어갔다. 이중섭에게 술과 담배는 갈매기의 두 날개처럼 어울리면서도 목적지는 상반된 생필품이었다.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희망은 더 희망적으로 절망은 더 절망적이었다. 과장은 허풍이 술자리의 중요한 안주인 이유였다. 이중섭은 대부분 더 절망적인 쪽이지만, 그 감정을 이야기로 풀진 않았다. 담배는 혼자서는 피우지만, 술은 어울려 마셨다. 벗들이 희망적인 상상에 파안대소하고 절망적인 예감에 호곡성을 터뜨릴 때, 이중섭은 위장병이 도진 듯 우울하고 쓰린 얼굴로 듣기만 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면 울음을 삼키며 눈물만 떨어뜨렸다.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서둘러 마시곤 아무 곳에서나 웅크려잤다. - P46
"시인을 견자(見者) 즉 보는 사람이라 하디. 무슨 것을 봔? 평범한 사람은 아니 보는 걸 본다 이거이야. 기렇게 본 걸, 글로 바꾸문 시인이구 그림으로 바꾸문 화가! 시인은 글 짓는 화가구,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시인이다 이 말입네. 화가는 색깔에서 글자를 읽구, 시인은 글자에서 색깔을 본다! A는 흑색이구 E는 백색이며 I는 적색이구 U는 녹색이구 O는 청색이구, 불란서 시인 랭보래 말햇디. 시인이 모음들의 색깔을 맨들 듯, 화가는 색깔들의 모음으로 이야기를 발명해 왓어." - P89
통영에선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이들을 최하로 친다. 말 대신 행동을 믿으며, 그 손으로 그 사람을 평한다. 재산도 학력도 품성도, 단련된 솜씨 앞에선 하찮다. - P92
두 사람을 묶어 비교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카인과 아벨이 그러하고, 유비와 조조가 그러하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그러하다. 음악가인 베토벤과 모차르트, 작가인 괴테와 실러도 이 범주에 든다. 화가들도 종종 언급되었는데, 대중은 고흐와 고갱을 제일 많이 입에 올렸다. 이중섭과 그의 친구들이 자주 논한 화가는 피카소와 마티스였다.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질투도 하고 경쟁도 한,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인정한 라이벌이었다. 열에 일곱은 피카소를 우위에 뒀고 마티스를 선호하는 화가는 셋이 될까 말까였다. 이중섭은 소수파에 속했다. - P131
이중섭이 가장 오래 가까이 두고 들여다본 화가는 루오였다. 루오를 접한 후부터는 마음의 시소에 얹는 화가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루오가 홀로 한쪽을 차지했고 고흐와 고갱과 마티스를 반대쪽에 묶어 얹었다. 고흐와 고갱과 마티스가 제 뜻을 발산하는 방식이라면, 루오는 그것을 색으로도 누르고 형상으로도 눌렀다. 곡진했다. 타인에게 내뿜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난타해 무너뜨렸다. 이중섭은 고흐처럼도 그려 보고 고갱처럼도 그려 보고 마티스처럼도 그려 보았다. 눌변과 머뭇거림과 내면을 파고드는 자신의 성향과 어울리는 화가는 루오였다. - P246
아우슈비츠 이후, 역사에 대한 낙관을 아예 접은 예술가들도 나왔다. 한국전쟁과 맞닥뜨린 이중섭은 도쿄에서 연애할 때처럼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줄기차게 그릴 수는 없었다. 피란민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만물이 화평하기는커녕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 죽고 죽이는 전쟁터였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러하기에, 아주 가끔은 아비규환을 잊을 만큼 강력한 유토피아를 그려보고 싶기도 했다. 사람은 희망 없인 살 수 없는 족속이다. 도쿄의 엽서화에서 둘만의 꿈을 속삭였다면, 월남 후 그린 유토피아는 끔찍한 체험에 바탕을 두되, 더 많은 이들이 따스함을 느끼고 미소 짓기를 바랐다. 현실엔 없는 행복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부산과 서귀포와 통영을 떠돈 이중섭만이 발견한 ‘신사실’이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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