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사랑,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사랑의 불길과 불꽃은 1년이면 꺼져 버리고 이후 30년은 그 재로 살아간다.


(108-109)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저녁에 인사를 나누었던 구름들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죄가 크지 않아 진노한 신이 가혹하게 벌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 버렸다. 별들은 흐릿했고 별빛은 더운 공기를 뚫고 나오려 애를 썼다. 돈 파브리초의 영혼은 별들을 향해, 손으로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별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기쁨을 주며 거래 따윈 하지 않는 별들을 향해. 그는 수없이 그랬듯이 공상에 빠졌다. 순수한 지성인이 자신이 계산용 수첩을 들고 곧 차디차고 광활한 공간으로 가는 상상이었다. 수첩에 풀어야 할 계산은 어렵고 복잡하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잘 풀릴 터였다. ‘별들만이 순수하지. 유일하게 선량한 피조물들이지.’ 그는 세속적인 공식에 따라 생각했다. ‘어느 누가 플레이아데스성단의 지참금을, 시리우스의 정치 경력을, 베가의 부부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쓰겠는가?’ 그날은 운수가 좋지 않았다.


(134)

하지만 총으로 토끼를 죽이고, 찰디니의 대포가 나폴리 왕국 병사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정오의 열기가 사람들을 잠들게 했지만 개미 떼를 막을 수는 없었다. 돈 치초가 뱉어버린 썩은 포도 알 몇 개에 이끌린 개미들이 오르간 연주자의 침이 뒤범벅된 살짝 썩은 포도 알에 달라붙으려고 희망에 들떠서 새까맣게 떼를 지어 달려왔다. 대담한 개미 떼들은 무질서하지만 단호하게 앞장을 섰다. 서너 마리로 이루어진 몇몇 무리는 잠시 멈춰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몬테모르코산 정상의 4번 코르크참나무 아래 2번 개미집에 터잡은 조상 이래 이어진 영광을 개미들은 다른 개미들과 함께 확실한 미래를 향해 다시 행진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개미의 등들이 기쁨으로 떨렸다. 틀림없이 개미들 위로 찬가가 울려 퍼졌으리라.


(191)

돈 파브리초는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둘 다 빨간 새우처럼 붉고 허름한 셔츠를 입었던 걸 기억했다. “이제 자네들, 가리발디 부대원들은 붉은 셔츠를 입지 않나?” 두 사람이 독사에 물린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맞아요. 가리발디 부대원이었죠. 외삼촌!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요. 카브리아기와 저는 몇 달 전부터, 지금은 사르데냐 국왕이지만 얼마 후 이탈리아 국왕이 되실 폐하의 정규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어요. 가리발디군이 해산될 때 집으로 가든지 왕의 군대에 남든지 선택할 수 있었어요. 제대로 된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이 친구와 저도 진짜군대에 들어갔죠. 가리발디 부대원들과 함께해야 했다면 남지 못했을 거예요. 안 그런가, 카브리아기?” 물론이지, 대단한 패거리였어요! 기습 공격이나 하고 가끔 총격전이나 벌이는 데에 딱 맞는 자들이죠. 그게 전부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진짜 장교인 거죠.” 그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짧은 콧수염을 추켜세웠다.


(206-207)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배경으로 죄 많은 인생을 살게 될 탄크레디와 안젤리카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구름과 바람으로만 이루어졌을 뿐인데, 구체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미래를 뒤쫓았다. 늙고 부질없이 지혜로워졌을 때 두 사람은 끊임없이 그 시절을 돌이켜 보았으며, 그리움과 후회를 떨칠 수 없었다. 그때는 욕망이 존재했으나 항상 패배하던 시기였고, 잠자리 기회가 수없이 주어지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했다. 억제된 관능적인 충동이 잠시 체념으로 변하기도 하는,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기도 하는 때였다. 그때는 성()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결혼 준비기간이었다. 하지만 절묘하면서도 간결한, 완전체 같은 기간이었다. 잊힌 오페라, 그러니까 은근한 암시와 익살로 수치심을 가리고 공연 중에 조화롭게 연주되지 않아 실패한 아리아들이 담김 오페라의 서곡 같았다.


(224-225)

제 말을 계속 들어 주세요. 슈발레. 이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시칠리아인은 우리와 종교가 다르고 우리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통치자들에게 오랜 세월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나치리만큼 신중하게 행동하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비잔틴의 세금 징수관, 베르베르인의 아미르, 스페인의 총독들 치하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일이 그렇게 됐고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참여가 아니라 동의라고 했습니다. 최근 여섯 달 동안, 당신네 편 가리발디가 마르살라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구체제의 지배 계급에 속했던 사람에게 그 일을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는 무리일 정도로 말입니다. 지금 나는 잘잘못을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상당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우선은 당신이 우리와 1년은 살아야만 이해가 가능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시칠리아에서는 잘하거나 못하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시칠리아인이 절대 용서하지 않는 죄는 그저 하는것뿐입니다. 우리 시칠리아 사람들은 늙었어요, 슈발레, 너무 늙었어요. 외부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어 들어온 눈부시고 이질적인 문명을 우리 어깨에 짊어지고 산 지가 2500년은 되었어요. 우리에게서 싹트지 않았고 우리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문명을 말입니다. 우리는 슈발레 당신처럼, 영국 여왕처럼 백인입니다. 하지만 2500년 전부터 우리는 식민지에 살았어요. 불평하는 말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잘못은 우리에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지쳤고 공허합니다.”


(226-227)

슈발레, 의도는 좋아요.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게다가 제가 이미 말했듯이 대부분은 우리 잘못입니다. 당신은 조금 전에 경이로운 현대 세계에 새로운 모습을 보일 젊은 시칠리아를 이야기했지요. 내가 보기에는 휘체어에 앉아 런던 만국박람회에 끌려 나온 백 살 먹은 노파처럼 보여요. 노파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셰필드의 철강 공장에도 맨체스터의 방적 공장에도 관심이 없어요. 그저 침으로 얼룩진 베개와 요강을 밑에 둔 침대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지요.”


(235-236)

슈발레는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새롭고 민첩한 현대적인 행정부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영주는 우울했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이렇게 지속되게 놔두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늘 지속되겠지. 물론 인간사라는 시각으로 볼 때의 이다. 100, 200….. 그후에는 달라지겠지. 하지만 더 나빠질 게 분명해. 우리는 표범, 사자였다.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은 자칼, 하이에나가 될 것이다. 이들 모두, 그러니까 표범, 자칼, 양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슈발레는 토사물 색깔의 바퀴 네 개가 지탱하는 우편 마차에 올라탔다. 굶주리고 상처투성이인 말이 긴 여정을 시작했다.


(303-304)

다른 순간에는, 모래알이 사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시간의 입자들이 그의 삶에서 벗어나 영원히 떠나는 걸 느끼려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되었다. 게다가 그런 감각은 처음부터 어떤 불쾌감과 관련해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지각할 수 없는 생명력의 손실은, 말하자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뒷받침하는 증거이자 조건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바깥 공간을 면밀히 조사하고 광활한 내면의 심연을 살펴보는 데 익숙한 그에게는 전혀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특성이 지속적으로 미세하게 붕괴한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어딘가 다른 곳에 덜 의식적이면서 더 큰 개성(하느님 감사합니다)을 다시 만들어 내리리라는 막연한 예감과 결합되었다. 그 모래 알갱이들은 잃어버린 게 아니다. 사라지기는 하지만 우리가 모를 어딘가에 축적되어 더 오래 지속되는 덩어리로 굳어진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덩어리는 실제 무게에 걸맞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모래 알갱이도 마찬가지인데, 좀 더 비슷한 것은 좁은 연못에서 증발하는 수증기 입자다.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 가볍고 자유로운 큰 구름이 된다. 때때로 그는 생명이라는 저수지가 수십 년간 내용물을 유출했음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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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더라 - 이중섭의 화양연화
김탁환 지음 / 남해의봄날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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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김탁환 님의 <참 좋았더라>라는 소설 한 편을 이야기해줄게. 이 책은 부제 이중섭의 화양연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중섭에 관한 책이란다. 이중섭은 우리나라 현대 화가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한 명이 아닐까 싶구나. 그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가 그림에 진심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을 거야. 예전에 <방구석 미술관> 2권에서 이중섭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구나. 그의 작품이 고가에 팔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우리나라 불우한 현대사가 폭풍이 되어 그를 덮쳤다고 해야 하나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러 가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국 홀로 삶을 마감해야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니. <방구석 미술과> 2권에서 이중섭의 관한 짧은 글을 읽고 나서,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지. 하지만 아빠의 게으름으로 인해 계속 뒤로 미루었어. 그러다가 우연히 김탁환 님이 <참 좋았더라>라는 소설이 이중섭에 관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게 된 것이란다. 김탁환 님은 역사적 인물을 소설로 각색하는데 소질이 있으신 것 같아. 그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여 그 인물의 문체로 소설을 쓰시는 것 같았어. 이번 <참 좋았더라>라는 소설도 김탁환 님의 그 전 소설과는 다른 문체로 쓰신 것 같았어. 이중섭의 고단한 삶과 예술가적 재능이 묻어 있는 문체라고 할까.

 

1.

이중섭의 아내는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일본인인데, 이남덕이라는 우리나라 이름을 가지고 있어.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안전을 위해 1952년 아내와 두 아이 태성, 태현을 일본에 보냈단다. 이중섭도 그 이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주일간 일본에 다녀왔단다. 당시는 아직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은 상황이라서 오래 있지 못하던 시절이래. 다시 한국에 와서 이중섭은 가족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돈을 벌려고 애를 썼단다. 하지만 어떤 영악한 놈에게 사기를 당해서 빚만 쌓였고, 가족들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단다. 이중섭에게 가족은 그림만큼 중요한 존재였는데, 만날 수 없으니 얼마나 속이 타 들어갔겠니.

=================

(34)

이중섭은 날마다 두 가지에 집착했다. 하나는 그림, 또 하나는 가족. 화가들은 대부분 그림과 가족을 한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땐 가족을 잊고, 가족과 머물 땐 그림을 잊었다. 이중섭은 그림 속에 가족을 두고, 가족 속에 그림을 두었다. 아내가 이남덕이기에 가능했다. 그녀 역시 문화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기에, 그림을 향한 남편의 진심을 투명하게 받아들였다. 이중섭이 기쁠 땐 화가로 기쁜 것이고 슬픈 땐 화가로 슬픈 것이며 화날 땐 화가로 화난 것이다. 부부의 대화는 그림에서 시작하여 그림으로 끝났다. 태현과 태성은 부부가 나눈 화담(畫談)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두 아들이 훗날 아빠처럼 그림을 업으로 삼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림을 평생 가까이 둘 것은 확실하다. 네 사람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일궜다. 한국의 예의와 상식도 아니고 일본의 예의도 상식도 아니었다. 사람으로서의 예의와 상식은 너무 거창한 이야기다. 그들은 그림이라는 나라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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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오산학교에서 미술을 시작했단다. 도쿄 유학을 다녀온 이후에는 원산에서 그림을 그렸어. 이중섭의 형 이중석이 원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형이 후원을 해주고 있어서 원산에서 정착하게 된 거야. 그랬다가 전쟁이 나서 부산에 내려왔다가 제주로 와서 지내고, 다시 부산으로 왔다가 식구들을 일본에 보내게 된 거야. 그림에 열중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어. 부산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는데, 함남 북청 출신인 유강렬의 제안으로 통영으로 이사 왔단다. 당시 통영은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던 곳이야. 유강렬은 통영에서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를 차렸는데, 나전칠기 기술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도 가르치고 있었어. 이중섭에게 그곳에서 그림도 그리면서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단다.

오랜만에 그림에 몰두할 수 있던 시기가 아닐까 싶구나. 1953 12월에는 다방을 빌려 개인전을 열었어.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등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방문하여 성황리에 마쳤단다. 이중섭은 서피랑, 남망산 등 통영의 이곳 저곳을 화폭에 담았단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통영 여행을 가서 그런지 더욱 친근하더구나. 이 소설에는 통영을 붉음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더구나. 그런데 지은이 김탁환 님의 생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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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통영은 붉다. 이렇게 밝히면 대부분 고개를 젓는다. ‘통영은 푸르다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닌지 묻는 이도 있다. 이중섭도 통영을 방문객으로 오갈 때는 푸르름에 압도되었다. 전혁림의 그림에서 넘쳐나는 파랑이 과장이 아니라며,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부산에서 그림을 싣고 강구안에 내린 다음 날 새벽, 통영이 붉은 항구란 사실을 목도했다. 늦게까지 마신 환영주에 목이 말라 깨지 않았다면, 숙취로 두통이 심해 바람이라도 쐬자 싶어 산책을 나서지 않았다면, 밤길이 서툴러 되돌아오지 못하고 헤매다가 남망산에 닿지 않았다면, 비가 그치지 않았다면, 중절모를 눌러쓰고 목도리까지 두른 사내가 오르막을 경쾌하게 앞서 걷지 않았다면 통영의 새뜻한 붉음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

앞서 우리나라 현대사가 이중섭을 괴롭혔다고 이야기했는데, 좀더 넓게 보면 세계 현대사, 특히 전쟁이 이중섭을 가로막았단다. 2차세계대전은 이중섭의 유학 생활을 중단하게 했단다. 일본 유학 중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원산으로 돌아와야 했어. 원래 이중섭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유럽으로 유학 가려는 꿈이 있었는데 그것이 전쟁으로 중단되고 말았단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국전쟁은 그를 방황하게 만들었고 가족과 헤어지게 했단다. 휴전이 되면서 고향 땅과 원산에도 못하고 타지 통영에서 홀로 지내게 된 거야.

….

 

2.

이중섭하면 소를 빼놓을 수 없단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해바라기 있다면 이중섭에게는 소가 있다.

=================

(64)

빈센트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이중섭에겐 단연코 소다. 대작을 그리겠노라고는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밝힌 적은 없다. 화우(畫友)들도 따져 묻기보다는 꼭 그리라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했다. 완성하고 나면 축하주를 마시자는 이도 있었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오랫동안 많이 그렸다. 두 송이부터 시작해서 열다섯 송이까지, 파리에서도 그렸고, 아를에서도 그렸다. 이중섭 역시 소를 계속 그렸다. 맘을 다 쏟아 그림을 그릴 조건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그린 것이 소였다. 도쿄에서도 그렸고 원산에서도 그렸다. 서귀포에서는 그리지 않았고, 부산에서는 그리고 싶어 끼적이긴 했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해바라기를 그린 사람이 고흐 이전에도 많았고 당대에도 많았으며 후대에도 많듯이, 소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화인들이 그린 소가 몇 마리가 될까. 헤아리기 힘들다. 이중섭과 가까운 선배 중에도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함께 만든 진환이 소를 좋아했고 자주 그렸다. 누가 먼저 그렸는가 혹은 얼마나 많이 그렸는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문제는 수준이다. 대작이란 두 글자는 작품의 크기가 아니라 최고의 성취를 가리킨다. 이중섭은 통영에서 소를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리라 결심했다. 고흐가 아를에서 전혀 다른 해바라기를 선보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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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다양한 소 그림을 그렸는데, 이 소설의 지은이는 김탁환 님은 다양한 소를 이야기했는데, 그 표현들이 재미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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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

속삭이는 소, 친구가 많은 소, 여물을 맛보고 찡그리는 소, 코뚜레를 흔들며 나무 그늘에서 조는 소, 우는 소, 되새김질하며 거품 흘리는 소, 기뻐 껑충껑충 뛰는 소, 노리는 소, 송아지를 불러들이는 소, 뒷발질에 열심인 소, 실수하는 소, 떨어진 꽃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소, 교접하는 소, 어미 소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 코를 박고 물을 마시는 소, 올려다보다가 별을 발견하고 놀라는 소, 밭 가는 소, 날아가는 멧비둘기와 참새를 따라 고개 돌리는 소, 외톨이를 자처하는 소, 내달리는 소, 빼앗는 소, 머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 고집부리는 소, 벽을 들이받는 소, 엎드려 기다리는 소,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뒷걸음질하는 소, 앞발을 땅을 파헤치는 소, 꼬리를 흔들어 벌레를 쫓는 소,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서 인사하는 소, 오르막길 앞에서 한숨 쉬는 소, 늙었지만 병들지 않은 소, 멍한 눈으로 세월을 되씹는 소, 웃는 소, 새끼 낳는 소, 먼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소, 어미 소를 싫어하는 소, 숨는 소, 산책을 즐기는 소, 잠든 소, 병들어 마른 소, 절뚝거리는 소, 용서하는 소, 냄새 맡는 소, 멈춰 기다리는 소, 죽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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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서 머무르면서 진해, 진주 등 주변 도시도 다니면서 예술인과 교류도 하고 그림도 그렸단다. 소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소싸움이 열리는 곳에도 자주 갔어. 이 때 많은 작품을 그렸지만, 그의 마음 한켠에는 늘 가족이 있었단다. 외로운 타향이지만, 가족만 함께 있으면 좋았을 텐데이중섭이 그래도 통영에 머무를 수 있던 것은 그를 통영으로 이끌어준 유강렬의 힘이 컸단다. 그런데 유강렬이 국립박물관에서 제의가 와서 서울로 가게 되었어.

유강렬 없는 통영. 이중섭은 고민 끝에 자신도 서울로 가기로 했단다. 그곳에서 개인전을 열어 그림을 팔아서 일본에 가족을 만나려 가려는 계획도 있었지. 하지만 서울 생활은 또 다른 험난한 도전이었단다. 이중섭이 서울로 가면서 이중섭 대신 양성소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것은 김환기가 대신하기로 했단다. 김환기는 도쿄 유학 때부터 친분이 있던 사람이란다. 김환기 또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현대 미술가인데, 그 분의 삶도 궁금해서 사 둔 책이 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먼지가 쌓여가고 있구나. 그 책도 읽게 되면 이야기해줄게.

….

서울로 온 이중섭은 드디어 첫 개인전을 열게 되는데, 소설은 여기서 끝을 맺었단다. ‘작가의 말에서 지은이 김탁환 님은 이중섭의 이후 삶은 일부러 소설에서 뺐다고 하는구나. 개인전은 나름 성공했지만, 그림이 많이 안 팔려서 일본은커녕 서울에서 생활도 쉽지 않았어. 대구에서 다시 한번 개인전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큰 성과는 없었단다. 그렇다 보니 점점 생활은 어려워지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려서 정신병원까지 가게 되고 쓸쓸히 삶을 마감했단다. 예술가의 삶은 이리 팍팍한 경우가 많은지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샘하는 것인지

….

이 책에는 이중섭의 작품들을 많이 실려 있단다. 그 각 작품에 대한 설명과 평가도 실려 좋았단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아빠에게 도움이 되는 설명들이었단다. 이중섭 님의 그림들은 그 만의 독특한 무엇인가 있는 것은 같은데, 현대 미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는 이중섭의 작품이 정말 뛰어난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더구나. <방구석 미술과> 2권을 읽은 것이 2022 3월이었는데, 당시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 님이 생존해 계셨었는데, 지금 다시 검색을 해보니 2022 8월에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이중섭과 이남덕오랜만에 다시 만나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계시려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7월의 항구들은 다가오기가 무섭게 멀어졌다.

책의 끝 문장: 피랑에 홀로 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족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가족은 굶주리지 않았고 울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고 춥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평화로웠다. 부산과 서귀포의 참담한 현실과 정반대로 그린 까닭을, 아내와 두 아들은 따지지 않았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들을 일용할 양식처럼 삼키며 하루를 나고 한 달을 나고 일 년을 났다. - P35

밥은 굶어도 담배를 건너뛸 순 없었다. 술 또한 거의 매일 입으로 들어갔다. 이중섭에게 술과 담배는 갈매기의 두 날개처럼 어울리면서도 목적지는 상반된 생필품이었다.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희망은 더 희망적으로 절망은 더 절망적이었다. 과장은 허풍이 술자리의 중요한 안주인 이유였다. 이중섭은 대부분 더 절망적인 쪽이지만, 그 감정을 이야기로 풀진 않았다. 담배는 혼자서는 피우지만, 술은 어울려 마셨다. 벗들이 희망적인 상상에 파안대소하고 절망적인 예감에 호곡성을 터뜨릴 때, 이중섭은 위장병이 도진 듯 우울하고 쓰린 얼굴로 듣기만 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면 울음을 삼키며 눈물만 떨어뜨렸다.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서둘러 마시곤 아무 곳에서나 웅크려잤다. - P46

"시인을 견자(見者) 즉 보는 사람이라 하디. 무슨 것을 봔? 평범한 사람은 아니 보는 걸 본다 이거이야. 기렇게 본 걸, 글로 바꾸문 시인이구 그림으로 바꾸문 화가! 시인은 글 짓는 화가구,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시인이다 이 말입네. 화가는 색깔에서 글자를 읽구, 시인은 글자에서 색깔을 본다! A는 흑색이구 E는 백색이며 I는 적색이구 U는 녹색이구 O는 청색이구, 불란서 시인 랭보래 말햇디. 시인이 모음들의 색깔을 맨들 듯, 화가는 색깔들의 모음으로 이야기를 발명해 왓어." - P89

통영에선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이들을 최하로 친다. 말 대신 행동을 믿으며, 그 손으로 그 사람을 평한다. 재산도 학력도 품성도, 단련된 솜씨 앞에선 하찮다. - P92

두 사람을 묶어 비교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카인과 아벨이 그러하고, 유비와 조조가 그러하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그러하다. 음악가인 베토벤과 모차르트, 작가인 괴테와 실러도 이 범주에 든다. 화가들도 종종 언급되었는데, 대중은 고흐와 고갱을 제일 많이 입에 올렸다. 이중섭과 그의 친구들이 자주 논한 화가는 피카소와 마티스였다.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질투도 하고 경쟁도 한,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인정한 라이벌이었다. 열에 일곱은 피카소를 우위에 뒀고 마티스를 선호하는 화가는 셋이 될까 말까였다. 이중섭은 소수파에 속했다. - P131

이중섭이 가장 오래 가까이 두고 들여다본 화가는 루오였다. 루오를 접한 후부터는 마음의 시소에 얹는 화가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루오가 홀로 한쪽을 차지했고 고흐와 고갱과 마티스를 반대쪽에 묶어 얹었다. 고흐와 고갱과 마티스가 제 뜻을 발산하는 방식이라면, 루오는 그것을 색으로도 누르고 형상으로도 눌렀다. 곡진했다. 타인에게 내뿜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난타해 무너뜨렸다. 이중섭은 고흐처럼도 그려 보고 고갱처럼도 그려 보고 마티스처럼도 그려 보았다. 눌변과 머뭇거림과 내면을 파고드는 자신의 성향과 어울리는 화가는 루오였다. - P246

아우슈비츠 이후, 역사에 대한 낙관을 아예 접은 예술가들도 나왔다. 한국전쟁과 맞닥뜨린 이중섭은 도쿄에서 연애할 때처럼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줄기차게 그릴 수는 없었다. 피란민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만물이 화평하기는커녕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 죽고 죽이는 전쟁터였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러하기에, 아주 가끔은 아비규환을 잊을 만큼 강력한 유토피아를 그려보고 싶기도 했다. 사람은 희망 없인 살 수 없는 족속이다. 도쿄의 엽서화에서 둘만의 꿈을 속삭였다면, 월남 후 그린 유토피아는 끔찍한 체험에 바탕을 두되, 더 많은 이들이 따스함을 느끼고 미소 짓기를 바랐다. 현실엔 없는 행복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부산과 서귀포와 통영을 떠돈 이중섭만이 발견한 ‘신사실’이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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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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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 가을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한강 작가님이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던 일이 있단다. 그런데 그날 러시아에서도 또 하나의 문학계의 좋은 소식이 들려왔단다. 우리나라 출신 미국 교포인 소설가 김주혜 님이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작품이 러시아 최고의 문학상인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그냥 한국계 미국인이 톨스토이 문학상을 탔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할 텐데, 수상작인 <작은 땅의 야수들>이 우리나라 일제 시대 역사를 다룬 소설이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단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작품으로 일제 시대의 우리나라 역사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단다. 아빠도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이미 몇 년 전에 읽었단다. 아빠가 읽은 책이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아빠도 무척 기뻤단다.

김주혜 작가님이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하신 이후 한국에 오셔서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신 것을 보았는데, 어렸을 때 미국 이민을 가셨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계셨고, 본인 스스로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했어. 그리고 털털하신 것 같으면서 말도 솔직하면서 시원하게, 그러면서 조리 있게 잘 하시더구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터뷰를 봤어. 그래서 김주혜 작가님의 다른 인터뷰들을 여럿 찾아보고, 팬이 되었단다. 당시 두 번째 작품이 미국에서는 출간되었다고 했었는데, 얼마 전에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단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서 읽었단다. 두 번째 장편 소설은 발레에 관한 이야기란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발레에 전문지식이 없다면 쓸 수 없는 깊이의 소설이었단다. 아빠는 발레에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발레의 전문 용어와 발레의 사람들의 생활 패턴 등을 깊이 있게 이야기를 하셨어. 김주혜 작가님이 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렸을 때 발레를 조금 하셨다고 하지만, 커서도 따로 발레 전공을 하셨나 싶을 정도였단다. 아빠는 발레에 관한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 듯 하구나.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발레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어려우면 어쩌나 싶었는데, 김주혜 작가님의 글발로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텍스트로만 되어 있지만 발레를 본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발레단의 일원으로 옆에서 그들의 공연과 사랑을 본 듯한 느낌도 들었단다.

 

1.

주인공은 나탈리아 레오노바 니콜라예브나. 러시아 이름은 참 길고 어려워. 아빠는 그냥 애칭인 나타샤로 부를게. 사고를 당하고 발레를 그만 둔 지 2. 정말 오랜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단다. 오래 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발레를 했었어. 나타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이유는 돌아가신 엄마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함이었어. 그런데 오래 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함께 일했던 드미트리 아나톨리예비치를 우연히 만나고, 드미크리는 나타샤에게 복귀를 제안하면서, 지젤 역할을 제안했단다.

상대 남자는 한국인 김태형이란 사람인데, 지은이 김주혜 작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의 이름을 따왔다고 했어. 나타샤도 다시 발레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연습장에서 클래스를 해 보는데 아직 다리와 발에 통증이 느껴졌단다. 드미트리는 나타샤에서 재활을 위한 개인 교습과 물리치료를 제안했단다. 개인 교습은 스베타 이모가 해주기로 했단다.

….

, 이제 나타샤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자꾸나. 1992년 일곱 살이던 나타샤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었어. 엄마는 남자에게 버림 받은 미혼모였고, 재봉사로 일하고 있었어. 나타샤의 이모 스베타가 발레리나인데, 나타샤의 점프 능력이 타고난 것을 알고 발레를 배우라고 해서 발레를 시작하였어. 나타샤의 점프 능력과 발레에 특출한 재능이 있어서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바가노바 발레학교 오디션에서 합격을 했단다. 이 때 단 두 명만 합격했는데, 베레지나(니나)와 나타샤가 그들이었어. 이 일로 둘은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후 계속 친하게 지냈단다.

나타샤는 소피아라는 사람이 룸메이트였어. 나타샤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경쟁 관계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단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세료자도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나타샤, 니나, 세료자는 학교 대표로 경연 대회에 참석했는데, 안타깝게 그랑프리를 놓쳤지만, 나타샤는 여자 금메달을 수상하였단다. 그랑프리는 니쿨린이라고 하는 우크라이나 발레리노였여.

나탸사는 발레학교를 마치고,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했어. 세료자도 같이 입단했는데, 둘이 우정은 이제 사랑으로 발전하여 함께 지냈단다. 그들의 사랑은 3년간 유지되거나 다시 우정으로 돌아갔단다. 나탸사의 발레 실력이 타고나기도 했지만, 정말 열심히 했단다. 그리고 모스크바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드디어 그랑프리를 수상했단다. 그러자 볼쇼이 발레단에서 섭외 제안이 들어왔단다. 그것도 수석 무용수 대우를 해준다면서 말이야. 아빠가 발레를 잘 모르지만, 볼쇼이 발레단은 워낙 유명하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발레단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 나탸샤는 세계 최고의 발레단에 입단하게 된 거야. 그 볼쇼이 발레단에는 오랜 전 참석했던 경연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탔던 니쿨린도 있었어. 니쿨린의 애칭은 샤샤이니 이제 샤샤라고 부를게. 나타샤는 샤샤와 친해지게 되면서 동료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어.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중에 올가라는 사람이 있는데, 발레로서는 전성기가 지난 서른일곱 살이었어. 그래서 새로운 시즌이 되면서 주인공 자리를 놓치게 되었는데, 그러자 시골로 잠적하는 일이 일어났어. 남자 수석 무용수 드미트리, 샤샤, 나타샤는 직접 올가를 찾아가 설득을 했단다. 여자 주인공의 역을 나타샤와 올가가 나누어서 하기로 하고, 나타샤는 드미트리와 짝을 맞추고, 올가는 샤샤와 짝을 맞추기로 했어. 나타샤는 발레리라로서는 최상의 나이대로 들어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단다. 돈도 가장 많이 받는 발레리라 중에 한 명이었어.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나타샤에게 새로운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단다.

 

2.

또 하나의 세계 최고 발레단인 파리 발레단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단다. 당시 샤샤와 사귀고 있던 나타샤는 샤샤도 함께 입단하는 조건으로 파리 발레단에 입단하기로 했단다. 그렇게 나타샤와 샤샤는 파리로 오게 되었어. 계속된 발레 공연과 연습 때문인지 나타샤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발에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이로 인해 휴식 기간을 갖게 되었어. 샤샤는 발레뿐만 아니라 모델 일도 같이 해서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어. 그 즈음 샤샤는 나타샤에게 공식적으로 청혼을 하여 약혼식을 치렀고, 그들은 이제 공식 커플이 되었단다.

샤샤는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했잖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군사 긴장 상태에 대해 친러시아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어. 친우크라이나 성향은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그런 발언을 했으니 더욱 논란이 되었지. 언론은 그에게 해명 요구를 했고, 그 불똥은 나타샤에게까지 튀었어. 이 일로 나타샤와 샤샤는 말싸움을 벌였고, 급기야는 주먹질까지 했단다. 샤샤와 관계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어.

어느날 아버지의 친구라면서 파벨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어. 그러면서 나타샤의 아버지의 지난 이야기를 했단다. 나타샤의 아버지 이름은 니콜라이고, 그가 어떻게 살았고, 마리아 칼라스의 찐 팬이라는 것도 이야기하고 어떻게 엄마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이야기를 해주었어. 지금은 어딘가에서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어. 하지만 어디서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나타샤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단다. 우연히 샤샤와 드미트리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거야. 샤샤가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배신감에 충격을 받은 나타샤. 우연히 그 장면을 보았기에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단다.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일어나서인지, 공연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자전거를 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발과 정강이 골절이 일어나고 말았단다. 아무리 힘든 개인적인 일이 일어났지만, 프로정신이 좀 부족했던 것 같구나.

이번 부상은 엄청 큰 부상으로 1년 넘게 치료를 하다가 결국은 은퇴까지 고려하게 되었단다. 안 좋은 일에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그 와중에 고향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까지 전해졌어. 어머니 장례식장에 가려고 했으나, 예전에 러시아 정부 인사와 접촉했다는 의혹으로 출국금지까지 내려져서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참석하지 못했단다. 나타샤에게는 파리 생활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을 것 같구나. 부상과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어머니의 죽음더 이상 발레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잠시 발레계를 떠나게 된단다.

 

3.

2년이 지나고, 소설의 첫 장면처럼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게 된 거야.

오랜 만에 연락이 닿은 니나가 호텔로 찾아왔단다. 니나는 결혼하여 아이도 두 명이 있는데, 여전히 발레를 하고 있었어. 나타샤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지젤 공연을 6일 앞두고 상대역인 김태형이 폐렴에 걸리고 말아서 대역이 필요하거나, 대역을 찾지 못하면 공연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었어. 드미트리는 태형의 대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샤샤 밖에 없다고 했어. 샤샤가 안 된다면 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단다. 나타샤가 샤샤와 안 좋게 헤어졌지만, 사랑은 사랑이고, 발레는 발레라고 생각하고 나타샤는 결국 같이 하기로 했어.

나타샤와 샤샤 모두 이런 대작의 주인공을 맡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어. 둘은 발레에 있어 전성기를 지난 나이였으니까 말이야. 다시 만난 나타샤와 샤샤. 샤샤는 지난 일을 진심으로 사과했어. 드리트리와 일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성이었다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타샤라면서 재결합의 의사를 보였단다. 나타샤도 샤샤의 진정성을 알았지만, 나타샤는 샤샤와 재결합은 거절했단다. 하지만 발레 파트너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전성기 마지막 공연을 잘 마무리한 것 같았단다. 5년이 다시 흐르고, 나타샤는 이제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었단다. 그렇게 소설은 마무리되었단다.

책을 읽고 기억력이 가장 좋을 때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주고, 아빠의 기억도 더 정확하고 오래 저장할 수 있을 텐데, 책 읽고 한참 있다가 이야기를 해주다 보니, 헛갈리는 내용들이 많구나. 나중에 너희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아빠가 이야기해 준 부분 중과 다른 부분이 있더라고 이해 바란다. 아빠의 잘못된 기억력으로 잘못 이야기한 것 같으니 말이야.

이 책은 지은이가 한국계 미국인이었지만, 러시아가 주무대이고, 주인공들이 러시아 사람이라서 러시아 소설 같은 기분이 들었단다. 지은이 김주혜 작가님도 그런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는구나. 이 소설의 주요 무대인 상테페테르부르크를 검색해 보니 이국적인 모습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데 여전히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여전하지? 하기야 전쟁이 아니더라도 가기는 쉽지 않겠지만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얼른 끝났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그리스 조각상들이 양쪽으로 전시된 갤러리에서 걸음을 멈춘다. 조각상 사이에 놓인 초록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본다. 코발트빛 하늘이 점점 보랏빛과 장밋빛으로 물들어 간다. 황혼은 일출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느려지는 것을 느낀 곳은 여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밖에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객차처럼 순서대로 흐르지 않고 서로서로 반투명하게 겹쳐져 있다. 몇 년 전의 일은 어제처럼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고, 내일은 몇 년 뒤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 P19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생각나는 사람 아닌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멋진 남자, 멋진 여자들과 친밀함을 나누고, 웃고, 서로 호의를 보였으며, 좋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러나 다음 극장에서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고 나면 더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몇 달 동안 내 상상을 완전히 사로잡은 이들도 있었지만, 헤어지고 나면 더는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내 안에 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내 머리와 가습에 큰 공간을 차지한 채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기 때문에 나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그들을 떠나보낼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자주 떠올리는데, 그렇다고 그때의 관계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친구들을 그리워하던 나조차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 P77

모든 것은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더욱 강해진다. 두려움도, 슬픔도, 욕망도, 꿈도. - P148

그러나 진짜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로는 나조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곳, 우주의 중심에 있으니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내 기억이 존재할 때부터 항상 억눌러 왔던, 암석도 녹이는 뜨거움이 피부 아래서 온몸을 약동하고 있었다. 이제 댐의 수문을 열어 모두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 P159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우아함이, 모스크바에는 감동이 있다. 그러나 유혹을 하는 도시는 오로지 파리뿐이다. 파리에 살다 보면 도시의 구석구석이 언젠가 내 눈에 발견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믿게 된다. 이를테면 구불구불해진 벽으로 몇 세기나 더 늦게 지어진 이웃 건물에 기대어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중세 건물, 부르주아지들이 모인 몽마르트 한가운데 숨겨진 비밀 돌길 옆으로 나란히 들어선 작은 집들. - P312

내가 말했듯이, 아무리 멀리 날아가는 새도 결국엔 고향으로 돌아온다. 최대 수년간 땅에 발 한 번 딛지 않고 공중에서 잠자며, 같은 종을 한 번도 보지 않으면서 홀로 바다 위를 나는 앨버트로스도 결국은 영겁의 서식지, 이들 모두가 태어난 바로 그곳으로 돌아온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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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그가 문득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바람은 말로 꺼내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아주 세심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져서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조차 없었다. 가령 어느 날 그는 귀중한 판화 작품집을 훑어보며 램브란트 판화에 경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미 그 판화 복사본이 그의 책상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또한 친구에게 어떤 책을 추천받았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기만 해도, 며칠 뒤 그 책이 책장이 꽂혀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방이 마음에 들며 편안해졌다.

 

(42-43)

그는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의 내부에 있는 치밀한 열정의 그물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색이 바래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으려면 땅의 영양분은 물론, 하늘의 새로운 빛이 늘 필요하다. 식물이나 모든 구성물이 그렇듯, 우리가 꾸는 꿈도 마찬가지이다. 얼핏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꿈조차도 모종의 감각적 양분의 필요하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감각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연의 특징과 광채도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50-51)

그러나 그날 밤, 낯선 호텔 방에 홀로 있게 된 그는 가슴속 심장이 옆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보다 더 격렬하게 뛰는 바람에 전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러고는 다시 끄고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입술만 떠올랐다. 그 입술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친밀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 이렇게 느긋하게 담소만 나누는 것은 거짓이라는 걸.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그는 예민함과 산만함, 불안과 열정으로 혼란스러운 얼굴 위에 우정이라는 가면이 가식적으로 씌워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71)

둘은 말없이 언덕길을 올라갔다. 벌써 그들 아래 보이는 집들이 희미한 빛 속에 잠겨버렸고, 황혼의 빛을 받아 가물거리는 계곡의 출렁이는 강물은 둥글게 휘어져 흐르며 점점 더 밝아졌다. 그러는 사이 언덕 위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냈다. 두 사람 머리 어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들과 마주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림자만이 말없이 그들을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가로등이 그들을 비스듬히 비출 때면 언제나 앞서가던 그림자는 마치 서로 포옹이라도 하듯이 합쳐졌다. 길어진 그림자는 서로를 바라보고, 하나로 합쳐졌다가 떨어지고는 또다시 포옹하려 했다. 한편 그 옆에 선 그녀는 힘없이 긴 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74)

저 그림자는 길 위에 늘어뜨린 그들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그들만의 고유한 말을 다루면서 그 이상의 뭔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그 인식의 두렵고 참된 뜻을 깨달았다. 시는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과거를 찾아 헤매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던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87-88)

이 말에 나는 상당히 불쾌해졌다. 게다가 독일인 부인도 남자들의 주장을 거들었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여자다운 여자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춘부들이 있을 수 있는데, 자기가 볼 때 앙리에트 부인은 분명히 후자의 부류에 속할 것이라며 나를 훈계하려 들었다. 이런 식의 아전인수 격 발언에 나의 인내심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나는 즉시 공격적인 태도로 반격에 나섰다. 나는 여러분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여자가 한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의 의지나 지식과는 상관없이 신비로운 힘에 사로잡히기도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런 여자는 자신의 본능, 인간의 천성에 내재한 악마적 요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쉽게 유혹당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강하고 도덕적이며 순결하다고 느끼면서 만족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남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질끈 감고 남편을 속이는 그런 여자보다는 열정적으로 본능에 충실한 여자가 더 정직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90)

나는 그녀의 명료하고 쾌활한 말투에 매우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사무적인 어조를 따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국가의 사법기관은 이 사태를 저보다는 당연히 더 엄격하게 결정하지요. 사법기관은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보편적인 윤리와 관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따라서 용서하는 대신에 판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으로서 검사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는 것이 제 마음에 더 들기 때문입니다.”

 

(140-141)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은 법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요. 그들은 당황해하며 침묵하거나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이런 감정을 숨기려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조작가와도 같은 신은 감정의 모든 동작을 감각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조형적으로 빚어냈나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사람의 감사함의 표현은 마치 열정적인 몸짓처럼 육체의 깊은 곳에서부터 환한 빛을 냈습니다. 그는 제 손등 위로 고개를 속였습니다. 그러더니 소년처럼 갸름한 머리를 겸손하게 낮춘 후, 거의 1분 동안이나 그렇게 있다가 제 손가락에 정중히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제 안부를 묻고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147)

폭풍우가 요란하게 퍼붓는 사나운 밤이 지난 후 이런 감동적인 날이 밝아왔습니다. 깨끗하게 씻긴 거리와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초록 덤불이 횃불처럼 붉은 꽃송이를 빨갛게 피워내고, 햇살에 습기가 날아가 가벼워진 대기 속에서 먼 곳의 산들이 갑자기 우리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산들이 깨끗이 씻겨 반짝이는 도시를 향해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둘러보는 곳곳마다 자연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며 다가와서는, 슬며시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저는 그에게 마차를 타고 코르니시 해변을 달려볼까요?”라고 말했습니다.

 

(172)

한순간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고통으로 인해 저는 벤치로 몸을 던졌습니다. 벤치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멍하니 있자니 죽음에 대한 예감에 사로잡혀 오히려 황홀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방금 말했듯이 고통은 비굴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은 삶을 향한 요구는 우리의 정신에 내재한 죽음의 열망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육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감정이 부서져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벤치에서 일어섰습니다. 물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174-175)

하지만 결국 시간은 심오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나이는 모든 감정의 골을 희석하는 특이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면, 그 그림자가 길 위에 어둡게 드리울 때면 사물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힘을 잃고, 더는 우리에게 내적인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물들은 그것은 지닌 위험천만한 위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됩니다. 저는 천천히 그 충격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175)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느 모임에서 저는 오스트리아 공사관의 주재원인 폴란드 청년을 만나게 되어 그의 가족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자기 친척의 아들인 한 남자가 10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거의 고통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기주의가 작용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직한 기억 외에 제게 불리한 증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늙어간다는 과거에 대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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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판소리 - 조선의 오페라로 빠져드는 소리여행 방구석 시리즈 3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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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인터넷 서점에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알게 된 책 이서희 님의 <방구석 판소리>란 책을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음악에 관련된 교양서적을 가끔씩 읽는 편인데, 주로 교향곡, 오페라, 서양의 음악가를 다른 책들 인 것 같았어.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래, 우리나라에도 고전 음악들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판소리에 관한 책이라니아빠는 처음 보는 것 같고, 물론 판소리에 관한 책도 처음이었단다. 그래서 기대를 가득 안고 책을 펼쳤단다. 판소리에 대한 역사와 판소리의 이론적인 내용을 예와 함께 쉽게 설명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이 책은 아빠의 예상과 다른 성격의 책이었단다. 판소리의 이론에 대해서는 앞부분에 판소리 용어 해설이라는 코너로 짧게 마치고, 판소리 작품에 초점을 맞추었단다. 읽다 보니 판소리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판소리의 원작인 고대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 주는 책 같았어. 물론 우리나라 판소리 다섯 마당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헛갈려 하는 아빠에게 판소리 다섯 마당은 <심청가>, <흥부가>,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라고 명확히 알려주기도 했지만, 굳이 심청가, 흥부가, 춘향가의 줄거리와 심첨가의 주제가 효와 유교정신이라는 것을 알려주기까지야아무튼 책의 방향은 아빠가 생각했던 내용과 좀 달라서 실망스러웠단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판소리는 이런 것이다, 라고 너희들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별로 없구나.

 

1.

Part1 에서는 판소리 다섯 마당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각 판소리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었고, 간간이 각 판소리 마당의 특징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런 부분들을 이야기해줄게. <심청가>는 네 시간짜리 판소리로, 슬픈 대목이 많아 계면조의 소리가 많다고 하는구나. <흥보가>는 당시 고통 속에 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을 노래하여 정의나 부조리를 청산하자는 사회비판의 담겨 있다고 했어. <춘향가>는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사회적 계급, 권력 문제, 불평등 등 부조리를 노래하여 더욱 인기가 좋았다. 소설 <춘향전>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구나. <수궁가>는 판소리 마당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작품이 까다롭고 통성과 우조를 사용하고 다양한 기교가 들어가 있다고 했어. <적벽가> 19세기에 양반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군사들의 목소리가 많이 담겨 있다고 하는구나.

..

Part2에서는 잃어버린 조선의 아리아들을 소개해 주었어. 네 개의 타령을 이야기해주었는데,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고 하여 안타깝더구나.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옹고집 타령>, <장끼 타령>, <변강쇠 타령>, <숙영낭자전>은 아빠가 줄거리를 잘 몰라서, 타령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 줄거리를 읽는 재미가 있었단다. 이 책에서 요약해준 것이 아닌 원작 전체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숙영낭자전>은 아빠가 예전에 사 두었는데, 아직 읽지 못했구나.

Part 3, Part 4, Part 5는 판소리와 좀 무관한 이야기란다. 우리나라 고전 음악이라고 퉁치면, Part 3 삼국시대의 향가, Part 4고전 시가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뜬금없이 Part 5에서는 고전 소설을 소개해주고 있단다. <이생규장전>, <옥단춘전>, <금방울전>, <정수정전>을 소개해주었는데, 아빠 생각에는 페이지 채우려고 포함시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구나. 짧게 영화 소개해주는 콘텐츠처럼 Part 5는 우리나라 고전 소설을 소개해주는 것 이상은 없었단다. Part 3은 향가들을 소개해주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향가들이 많지 않아서 이 책에 소개해준 향가들은 예전에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 배운 향가들이 대부분이구나. 그리 새로운 향가는 없었어. Part 4에서는 고전시가인데,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시를 소개해 주었단다. 이 또한 엄격히 이야기하면 판소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판소리에 대해 알고 싶었던 아빠로서는 조금 실망한 책이 되었단다. 오늘은 그래서 짧게 마칠게. 이상.

 

PS,

책의 첫 문장: 한 발만 더 내디디면 허공입니다.

책의 끝 문장: 정수정의 기개와 용기, 담대함과 능력을 읽고 계속 상기하다 보면 자신에게도 어느 순간 그 단단함이 깃들 수도 있으니까요.


용왕의 병은 다름 아닌 술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봉건국가의 무능한 왕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를 두고 대립하는 별주부와 토끼는 왕을 옹호하거나 왕을 비판하는 각각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교 사회의 규범 중 하나인 ‘충’을 드러내는 별주부와 임금을 조롱하는 토끼 중,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마 토끼에게 더 마음이 끌릴 것입니다. 별주부가 임금의 무능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노력이 부족함을 스스로 한탄하는 모습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별주부가 답답하거나 미련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지금 시대에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지혜로 스스로를 지키는 토끼 같은 인물에 더 쉽게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지요. - P84

<도솔가>에서 월명사가 부르는 노래는 신과 인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노래는 인간의 고통과 해탈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요소를 포함합니다. 도솔천은 신적인 존재가 사는 곳으로, 이 노래를 통해 인간은 신과 소통하려 하며, 구원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신라시대는 불교가 널리 퍼져 있던 시기였으며, 사람들은 인생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불교적 구원을 열망했지요. <도솔가>의 가사는 불교적 해탈의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노래는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신성한 존재의 자비와 구원을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죠.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신과의 소통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 노래는 당시 신라 사람들에게 종교적 소망의 길을 제시한 중요한 철학적 의미였을 것입니다. - P180

<원가>에서 잣나무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잣나무는 변하지 않는, 견고한 존재로 나타나며, 왕과 신하 간의 굳은 약속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효성왕이 신충을 잊고 뜻하지 않게 배신한 것은, 잣나무가 말라죽어간다는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약속의 무효화와 신하의 원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잣나무가 변치 않은 푸르름을 유지하는 것처럼, 왕도 신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이어가야 한다는 교훈을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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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8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예전에 변강쇠타령 너무 궁금해가지고 진짜 힘들게 구해서 변강쇠전 읽으려고 했거든요. 아 그런데 진짜 극기의 인내심이 아니면 불가능했어요. 무슨 장면하나에 비유를 몇십개씩 해놨는데 실감이 나는게 아니라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다가 장면들이 다 날아가는.... 그리고 한자말 너무 많아서 진짜 어렵더라구요. 전 어릴 때 TV에서 창극 많이 보고 큰 세대인데도 판소리는 내용을 따라가는 것도 어려워요.

bookholic 2025-09-20 00:4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군요~~ 변강쇠전이라고 하면 야한 생각부터 떠오르는데, 장벽이 높은 작품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