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사업이 기대도 받고 논란도 일으키고 있지만 이 사업으로 인해 드디어 우리나라
농어촌에도 숨통이 트이고 희망이 생겼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우리 농어촌은 역사 이래로, 특히 산업화 이래 소외와 착취와 배제의 대상이었다. 2000년 이후
본격적인 농어업, 농어촌 정책들이 추진되었지만 성과보다 부작용이 훨씬 컸던 제 사실이다. 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정책에도 불구하고 농어촌지역은 인구감소가 더욱 격화되어 감소를 넘어 인구 멸절의 상황에
접어들고 있다. 농어촌의 소멸은 단순히 인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의 생명과 지속성의 소멸을 의미한다. 농어촌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인류의 생존은
지속될 수 없다. <녹색평론> 발행인이자 기본소득론자였던
고 김종철 선생님이 평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런 일을 하는 농부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14)
부동산 세제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은 무엇일까? 보유세다.왜냐하면 보유세가 지대(임대) 수입을
일정부분 환수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부동산 가격을 낮추고, 결과적으로 시세차익의 규모를 줄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양도소득세를 높이는 경우에는 투기목적으로 보유한 부동산을 안 팔고 버틸 수 있고, 또 가격 상승기에는 가격을 떠넘길 수 있지만, 보유세를 강화하면
버티기도, 떠넘기기도 불가능하다. 보유세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한데, 그러나 2023년 현재 한국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0.15%로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인 0.33%의 절반 이하이며,
30개중 중에서 20위에 머물러 있다. 상위권
국가들(이스라엘 1.24%, 그리스 0.94%, 미국 0.83%)과 비교하면 5~8배 현저한 격차를 보인다.
(18)
국민주권정부인 이재명 정부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만든 정부인가.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항쟁, 길게
보면 3년, 짧게는 6개월
동안 더위와 추위, 비바람을 무릅쓰고 광장으로 나온 위대한 주권자 국민들의 항쟁으로 만든 정부다. 전 세계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에 놀라워하고 부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에게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야 한다. 그래서 부동산이다. 당장 큰 변화가 없더라도 국민들에게 이렇게 몇 년 지나면 “나도
주거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겠구나”하는 전망을 줘야 한다. 그래야
청년과 신혼부부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지방도 살아날 수 있다.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면 한국사회의 수많은 개혁과 추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동산 문제 해결에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다고.
(20)
초고령사회 문턱을 넘은 대한민국에서 ‘나이 듦’은 더 이상 소수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마주한 거대한 질문이
되었다. 그 질문의 한가운데에 “노인은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자리한다. 시가 8억이
넘는 아파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노인의 비극은, 이 질문이 단순히 주거빈곤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은
가졌을지언정, 사회적 관계망이 단절된 채 고립된 삶은 존엄한 노후라 부를 수 없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고령 1인 가구는 급증하고 있으며, 이들의 일상은 외로움과 돌봄 공백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48)
앞으로 수년 이내에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세계의 환경을 과열시킴으로써 불러온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가 우리에게 닥쳐올 때, 인류는 다만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지난 500년 동안 지구를 지배해온-그리고 기후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인-정치와 경제 시스템을 둘 다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성정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근본원리, 그리고 이것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국가시스템은 물러나고, 규모가 작고 오염을 일으키지 않으며 공격성이 없는 ‘사회들’로 구성된 세계가 들어서야 할 것이다. 이 사회들은 자원을 많이 소비하지
않고, 인간적인 규모의 자치정부로 유지될 수 있다.
(63-64)
이렇게 인류 대다수가 바라는 일을 어찌하여 각국을 대표하는 자들이 모인 국제회의는 의결하지
못하는 것일까. 기대와 결과의 간극은 충격적일 정도로 크다. 지구
주민들은 이미 ‘지구의 이익’이라는 원리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발언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이 있는가? 가끔 실시되는
여론조사 외에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니까 다자주의 외교가 기후에 관한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편파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재계나 산업계는 물론이고, 큰 시민사회단체들도 COP 협상가들과 만날 기회가 있지만 수십억 명의 보통사람들은 바로 자기자신의 미래가 달린 문제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82)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트럼프의 이번 결정이 즉흥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APEC 회의가 열리기 전인 8월에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한미 정상회담 주의제는 관세협상이었으나, 어쩌면 그보다 더 중대했던, 관세협상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것은 한국 핵잠수함 건조와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에 관한 합의였을 가능성이 있다. 관세협상이 타결됨으로써 핵잠수함 승인과 원자력협정 개정 문제가 타결됨으로써 관세협상도 마무리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93)
이스라엘은 2025년 9월 9일 사전 통보도 없이 하마스 지도부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카타르
수도 도하 소재의 하마스 건물을 탄도미사일로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카타르의 반발에 놀란 미국은
서둘러 카타르 안보 보장을 약속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요
비나토 동맹국’으로 받아들였다. 카타르 공습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이스라엘은 미국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10월 8일
하마스와 기자 휴전에 합의했다. 휴전은 3단계로 나뉘어 진행
중이지만, 휴전 이후에도 가자 주민이 무려 300명 이상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113-114)
2025년 11월 8일 오전 10시, 산황동 417번에 우리는 모였다.
청량한 산소를 내쉬는 나무들 사이에서
생명의 종을 울리기 위해.
경종이며, 다시 시작하자는 초대의 울림이다.
우리는 나무와 새, 흙과 비와 바람의 이름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다시 부른다.
민주주의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지상의 모든 존재에게 참여할 권리가 있음을 알린다.
생존 네트워크의 형제자매인 숲 생명들.
우리는 그들의 권리를 대신해
종을 들었다.
오늘의 종소리는
한 그루 나무, 한 마리 새, 한 송이 꽃, 한 조각 차돌의 소리다.
개발이라는 미명, 경제라는 사탕발림으로 생태민주주의의
목에
도끼를 대는 자들이여, 함께 살아가자.
‘벨 데모크라시’는
폭력이 아닌 울림으로,
침묵이 아닌 공명으로,
학살 방조가 아닌 생명 껴안기로,
파괴가 아닌 회복으로 세상을 움직일 것이다.
-
벨 데모크라시 선언문
(154-155)
우리가 집단적으로 인간으로서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병든 사회가 맞습니다. 인류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학대하고 공격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신적 장애가 있다고 진단하잖아요. 우뇌가 가능하지 않는 사회는 기계적, 관료적으로 과부하가 걸리게 됩니다. 감정이나 영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극히 피상적인 것이 되고, 예술은 기괴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물론
나는 지난 세기의 미술이나 음악, 시(詩)가 모두 끔찍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최고의 예술작품도
그 시기에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우리의 우뇌가 기능을 아예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비유하자면, 우리가 라디오 수신기를 하나 샀다고
해봅시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보지만 결국 두어 개 방송밖에 안 듣게 될 거예요. 그러나 내가 수신을 하지 않는다고 다른 채널들에서 방송을 안내보내는 건 아니잖아요. 이것솨 똑같아요. 우리는 얼마든지 우뇌가 제공하는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57-158)
우뇌는 실재하는 것과 직접 접촉하지만, 좌뇌는 사물을
유형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재현합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가짜의 세계를 인식하는 거예요. 시인 워즈워스가 바로 그것을 지적했어요. 자신이 소년이었을 때에는
산들이 말을 걸었고, 폭포, 새, 나무와 대화할 수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살아있는 존재들을 그 표상이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좌뇌가 지배하는 우리 문화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런 살아있는 존재들을 모두 제거했고, 그래서 우리는 극히 빈약한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177-178)
며칠 전 서울에 가는 길에 지하철을 탔다. 퇴근시간이어서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일이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문자만 오갈 뿐, 얼굴도 목소리도 사라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미디어가 깊숙이
들어와버린 것이다. 전화기가 발명되었을 때만 해도 얼굴은 보지 못해도 목소리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관계의 폭이 오히려 넓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문자의
시대다. 과연 문자메시지가 눈빛과 온기를 대신 할 수 있을까. 관계는
약해지고 외로움은 더 깊어지고 있다. 협동은 제도나 계약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나누며 관심과 책임을 공유할 때 비로소 ‘우리’가
생긴다. 관계가 무너지면 협동도 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복잡한 정책과 이론이 아니다. 미디어 대신 사람에게 시선을 돌릴 때, 새로운 협동의 씨앗이 싹튼다.
(194)
우리는 아이들이 그들의 삶의 테두리를 넘을 수 있게 돕고자 했다. 농촌마을과 생명, 자연의 신비로움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가게가 없어서 간식을 사 먹기 어렵고, 문화적 혜택도
전무하며, 부모와 떨어져서 낯선 할머니 집에서 생활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아이들이 이곳에서 지내는
것을 행복해하고 도시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참새 소리에 아침을 맞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시골마을, 공동체의 진가를 오히려 도시 아이들이 농촌 주민들에게 알려주는 듯하다. 아이들은 안다. 온몸으로 느낀다.
인간의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렇게 아이들은 자유롭고 자존감 높고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