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난설헌(蘭雪軒)은 당호입니다. 초희는 ‘미녀와 재원’을
뜻함이고 경번은 중국의 여성시인 번희를 사모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난설헌의 난은 ‘여성의 미덕을 찬미한다’는 뜻이며 설은 ‘지혜롭고 문학적 재능을 지닌 여성’ 또는 ‘고결하면서도 뛰어난 문재를 지닌 여성’이라는 뜻으로 지은 당호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소망을 마음껏 담은 이름들이라 하겠습니다.
(27)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32)
사는 집이 장간리 마을에 있어
장간리 길을 오가며 살았었지요.
꽃가지 꺾어 님에게 묻기도 했었죠.
내가 더 예쁜가요, 꽃이 더 예쁜가요?
(40-41)
1
이웃집 벗님네와 내기 그네 뛰었어요.
띠를 매고 수건 쓰고 신선놀음 같았지요.
바람 차고 오색 그넷줄 하늘로 높이 오르자
쟁그랑 노리개 소리 버들에 먼지가 일었지요.
2
그네뛰기 마치고는 꽃신을 신었지요.
숨이 가빠 말도 못하고 층계에 섰어요.
매미 날개 배적삼에 땀이 촉촉이 스며
떨어진 비녀 주워달라는 말도 못 하고 말았지요.
(47)
자줏빛 퉁소 소리 붉은 구름 흩어지니
주렴 밖 찬 서릿발 우지짖는 앵무새
깊은 밤 비단 휘장 비추는 그윽한 촛불
때때로 성긴 별이 은하수 건너는 것 바라보아요.
또르륵 물시계 소리 서풍에 묻어오고
이슬 맺힌 오동나무 저녁 벌레 우는데
명주 수건으로 훔치는 깊은 밤의 눈물
내일이면 점점이 붉은 자국으로 남겠지요.
(48-49)
고요해요, 뜨락은.
살구 꽃잎 위에 봄비 내리고
나는 꾀꼬리, 백목련 핀 언덕에서 울어요.
수실 늘어진 비단 휘장에 꽃샘추위 스며들고
박산 향로에서 한 줄기 연기가 올라요.
어여쁜 사람 잠에서 깨어 화장을 고치니
향그런 비단옷 허리띠에 새겨진 원앙 무믜.
겹으로 드리워진 발을 거두고 비취 휘장 치고서
시름없이 은쟁을 잡고 한가락 봉황곡을 타지요.
금 굴레 잡고 안장 위에 계시던 내 님은 어디 가셨나?
다정한 앵무새만 둘이서 창가에 속삭여요.
풀섶에서 노닐던 나비는 뜨락을 날아 사라지고
꽃그네 줄 엮어 난간 밖까지 날아올라요.
어느 집 연못가에서 피리소리 들려오는가.
금 술잔 위로 요요한 달빛만 노니는데
시름 많은 아낙은 밤새 홀로 잠 못 이루어
날 밝으면 비단 수건에 눈물 자국만 가득하여요.
(55)
난간에 기대어 멀리 계신 님 그리워하니
말 타고 창 꼬나잡고 청해 물가를 달리시겠지.
휘몰아치는 모래와 눈보라에 갖옷은 해어졌을 테고
향그런 안방 그리워하며 눈물로 수건 적시겠지요.
(66)
공령 여울 어구에 내린 비 이내 개이고
무협의 어스름 안개 자욱해요.
한스러워라, 님의 마음도 저 물과 같이
아침에 나가더라도 저녁엔 돌아왔으면!
(76)
창가에 놓아둔 난초 화분
난초꽃 벙글어 향기 그윽했는데
건듯 가을바람 불어와
서리 맞은 듯 그만 시들었어요.
어여쁜 모습 비록 시들었지만
여전히 코끝에 맴도는 난초의 향기.
마치도 시든 난초가 나인 듯 싶어
흐르는 눈물 옷소매로 닦아요.
(80-81)
이웃집 살림은 날로 좋아져
높은 다락에 풍악 소리 일어나는데
또 다른 이웃은 입을 옷도 없고요
쑥대밭 어우러진 집 배곯고 있다네요.
그런데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요.
하루아침에 높은 다락 기울어지고
오히려 가난한 집을 부러워해요.
하늘의 운명은 어떨 수 없는 일인가 봐요.
(85)
지난해 귀여운 딸을 잃었고
올해는 또 사랑하는 아들이 떠났네.
슬프고도 슬프다.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오슬오슬 바람이 일고
숲속에선 도깨비를 반짝이는데
지전 태우며 너의 넋을 부르며
너의 무덤 앞에 술잔을 붓는다.
안다, 안다. 어미가
너희들 넋이나마
밤마다 만나 정답게 논다는 것.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기나 바랄 것이냐.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 혼자 삼키네.
(98-99)
1
얼굴이며 맵시, 남들한테 빠지는 게 아니에요.
바느질에 길쌈 솜씨는 또 어떠하구요.
다만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에 자라난 탓에
중매쟁이들 모두 날 몰라라 해서 그래요.
2
춥고 굶주려도 얼굴에 내색을 않고
하루 종일 창가에서 베만 짭니다.
부모님만은 가엾어라 여기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런 나 알겠나요?
3
밤 깊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노라니
베틀 소리만 삐걱삐걱 처량하게 울려요.
베틀에는 베가 한 필 짜여 있지만
이 베가 마침내 누구의 옷감 될까요!
4
손에 가위 들고 옷감 자르면
밤도 차가워 열 손가락이 곱아와요.
남들 위해서 시집갈 옷 짓는다지만
해마다 나는 홀로 잠을 잔답니다.
(106-107)
봄바람 화창하여 온갖 꽃 피어나고
철 따라 만물이 번성하니 감회가 새로워요.
깊은 방에 묻혀서 그리움 끊으려 해도
님 생각 가슴에 머물면 심장이 터질 듯해요.
밤 이슥토록 잠을 이룰 수 없음이요!
새벽닭 우는 소리 꼬끼오 들리네요.
빈방에 비단 휘장이 둘러지고
옥돌계단에 푸른 이끼만 돋았어요.
깜빡이던 등불도 꺼져 벽에 기대어 있으려니
비단 이불 어설퍼 추위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요.
베틀 소리 내며 회문금을 짜 보지만
무늬도 시원치 않고 마음만 어지러워요.
인생 운명을 타고남이여, 사람마다 치아가 많아
남들은 즐기며 살건만 이 내 몸은 쓸쓸하기만 하답니다.
(132)
머나먼 갑산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길 가시는 걸음 바쁘시리다.
쫓겨나는 신하야 가태부지만
상감이야 어찌 초나라 희왕이시겠는지요!
가을 햇살 비낀 언덕엔 강물이 찰랑찰랑
변방의 구름은 저녁놀에 얼굴 붉혀요.
서릿바람 맞으며 기러기떼 날아가는데
걸음마저 더디어 차마 길 가지 못하시리.
(155)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를 넘나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