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출판이나 회화 분야의 특정 예술가들은 태아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활약한다. 그들의 제한된 주제는 사람들에게 당혹감이나 실망감을 줄 수도 있다. 18세기 신사 계급의 연애, 돛 아래서의 삶, 말하는 토끼, 조각된 토끼, 뚱뚱한 사람을 그린 유화, 개 초상화, 말 초상화, 귀족 초상화, 비스듬히 누운 누드, 백만 점쯤 되는 예수 탄생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성모승천, 과일 그릇, 화병 옆에 나이프가 놓여 있거나 놓여 있지 않은 네덜란드 빵과 치즈. 어떤 이들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산문을 쓰는 일에 헌신한다. 과학 분야에서도 누구는 알바니아 달팽이에, 누구는 바이러스에 인생을 바친다. 다윈은 따개비에 팔 년을 바쳤다. 그리고 현명한 만년에는 지렁이에 헌신했다. 힉스 입자라는, 어쩌면 하나의 사물이라고조차 할 수 없을 그 미세한 것의 연구에 수천 명이 생애를 바쳤다. 호두껍데기에 갇혀 5센티미터 크기의 상아판 속, 모래 한 알 속 세상을 보라. 가능한 것들의 우주에서 모든 문학, 모든 예술, 인간 노력이 점 하나에 불과한데 그게 왜 안되겠는가. 게다가 이 우주조차 무수히 실재하는 가능한 우주들 중에서 점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96)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어. 사랑이 식고 결혼이 무너지면, 그 첫 희생자는 정직한 기억이지. 과거에 대한 온당하고 공정한 회상. 그건 너무 불편하고, 현재를 지나치게 비난하니까. 실패와 슬픔의 연회장을 떠도는 옛 행복의 유령이지. 그래서, 난 망각의 바람에 맞서 진실의 작은 촛불을 켜고 그 빛이 얼마나 멀리까지 닿는지 보고 싶어.

 

(223)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면 내가 얻는 건 무엇일지 나는 다시 자문한다. 그들은 파멸할 수도 있다. 그럼 난 트루디를 갖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가 감옥에서는 아기를 키우는 엄마가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고 말하는 걸 들어왔다. 하지만 감옥에 가면 나는 내 생득권이자 모든 인간의 꿈인 자유를 잃을 것이다. 반면 클로드와 어머니가 팀워크를 발휘한다면 간신히 위기는 모면할 것이다. 그럼 그들은 나를 버릴 것이다. 어머니는 없지만, 나는 자유로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편이 나을까? 전에도 몇 번 해본 고민이고, 늘 같은 신성한 지점에, 원칙에 입각한 유일한 결론에 이른다. 나는 물질적 안락을 포기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동안 너무 오래 갇혀 있었으니까, 나는 자유를 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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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12-30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즐친 이어가길 바라며, 복많이 받으세요~~

bookholic 2017-12-31 01:0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munsun09님 덕분에 좋은 책도 많이 알게된 것 같아요.. 2018년에도 부탁드리고요... munsun09님도 행복한 2018년 되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