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작가 심훈은 1920~1921년 상하이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다. 심훈 자신이 상하이 망명객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녹여 이 소설을 썼다. 상하이의 거리 풍경에 관한 묘사라든가,
상하이에서 막 발아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 및 단체 활동 양상에 관한 서술 등을 보라. 어떤
사료보다도 생생하게 역사적 진실을 전해준다. 국경도시 신의주를 통해 열차 편으로 잠입하는 비밀 활동
참가자의 행동과 심리 묘사도 압권이다. 그를 색출, 체포하려고
노력하는 경찰, 헌병, 세관 관리 등의 언행도 흥미롭다. 이렇게 <동방의 애인>은 1920년 상하이 한인 망명자 사회의 내면, 특히 사회주의가 처음으로
수용되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형상화한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서술들이 역사학자의 눈길을 붙잡는다.
(70)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립이라는 이름은 혁명에의
헌신을 결단하는, 마음속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마음 맞는 동향 출신 동료 허헌과 함께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대한제국
시절, 두 사람은 ‘입헌’이라는
글자를 하나씩 나눠 갖기로 합의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전체군주제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김익용은 ‘설 립’자를 취하고, 허헌은 자신의 본명에 포함된 ‘법 헌’자에 그 의미를 부여했다. 두
사람은 전제군주가 가지고 있는 국가 주권을 국민의 품으로 옮겨오는 시민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김립의
막역한 친구 허헌은 훗날 인권변호사가 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허헌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3.1운동 피고인들과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들을 변호했으며, 민족통일전선
단체 신간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다.
(80)
김립 암살 사건은 일종의 국가폭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의 결정에 의거하여 경무국이 집행한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위해를 가져온 불행이었다. 임시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 명백한 과오를 범했다. 첫째,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입각해 있었다. 모스크바 자금 40만 금화 루블의
집행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속해 있었다. 둘째, 설혹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형벌의 집행 과정이 적법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계의 폭넓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졌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과오를 바로잡아야 한다. 진상이 규명되어야
하고, 망자에게 국가적 차원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 또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을 자임하는 한국 정보의
마땅한 태도라도 생각한다.
(163)
사형선고를 받은 김익상이 일본 황태자 결혼, 천황
즉위 등을 계기로 하여 세 차례 감형을 받았고, 결국 13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1936년에 출옥했다는 이야기, 출옥 이후에도
예비검속과 요시찰 감시 등으로 고통을 겼었다는 이야기, 1941년 8월에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과 조우하여 격투를 벌이다가 다시 수감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 등을 전해주었다. 김익상의 최후는 아마도 사상전향 및 예방구금제도의 시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2월에 공포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르면,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서 사상전향에 응하지 않는
자는 언제라도 다시 감옥에 수감되어야만 했다.
(289)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이었다. 채그리고리는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의학 연구 재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사후라 할지라도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불효가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시신 기증 캠페인이 사회적으로 널리 수용된 게 수십 년 뒤의 일임을 감안하면,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선각자다운 풍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 하나는 동지들을 만나고
싶으니 다음 날 오실 있는 분들은 모두 모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국경에서 체포되지만 않았다면 의기투합하여
혁명사업을 함께 도모했을 동지들의 면면이 그리웠던 것이다.
(303-305)
101인 사건이란 식민지 시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3개 독립운동 탄압 재판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3대
독립운동 탄압 재판 중 첫 번째는 ‘105인 사건’ 재판으로, 식민지 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비밀결사 신민회 탄압 재판이었다. 두
번째는 ‘48일 사건’ 재판으로, 3.1 운동 때 민족대표를 비롯하여 독립선언 사전 모의에 가담한 인사들에 대한 탄압 재판이었다. 이어서 바통을 넘겨 잡은 것이 바로 ‘101인 사건’ 재판으로, 3.1 운동 이후 들불처럼 타오르던 사회주의운동 대표
단체 조선공산당 재판이었다. 세 재판은 피고인 숫자가 각각 105인, 48인, 101인이었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갖게 됐다. 당대 언론매체들은 이 세 재판을 “식민지 조선 통치 20년래의 대표적 중대 사건”으로 지목했다. 항일운동의 역사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신민회, 3.1 운동, 조선공산당이 나란히 손꼽히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