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또 나는 부모 형제가 뭐라고 잔소리를 해도, 단 한 번도 말대꾸를 한 적이 없습니다. 별것 아닌 잔소리가 내게는 날벼락처럼 강력하게 느껴지고,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말대꾸는커녕 그 잔소리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인간의 <진리>라는 게 틀림없다, 나는 그 진리를 행할 힘이 없으니 더는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믿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나는 말다툼도 자기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혼을 내면 내가 더없이 그른 생각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언제나 그 공격을 두말 않고 받아들이면서 속으로는 머리가 돌아 버릴 정도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17)

나는 인간에 대한 공포감에 늘 버들버들 떨면서, 또 인간으로서의 자기 언행에 조금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온갖 고뇌를 가슴속 작은 상자에 숨기고, 그 우울과 긴장감을 기를 쓰고 감추며, 오로지 천진난만한 낙천성을 가장하면서 점차 광대 짓만 하는 기괴한 사람으로 완성되어 갔습니다.

 

(94)

나는 신도 두려웠습니다. 신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신의 벌만 믿었습니다. 신앙. 그것은 그저 신의 대답을 얻기 위해 고개 숙이고 심판대에 오르는 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96)

세상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복수(複數)의 인간을 말하는 건가요.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어디에 있는지요. 아무튼 강하고, 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니 불쑥, <세상이란 게 당신 아닌가> 하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의 화를 돋우고 싶지 않아 다시 삼켰습니다.

 

(101)

세상. 어째 나도 이제는 그것을 어슴푸레 알아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고, 그 자리에서의 싸움이며, 그 자리에서 이기면 된다. 인간은 절대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노예조차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 자리에서 단번에 이기지 않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대의명분 따위를 내세우지만 노력의 목표는 반드시 개인, 개인을 뛰어넘고 또 개인, 세상이 난해한 것은 개인이 난해한 탓이요, 너른 바다는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라는 생각으로, 세상이라는 너른 바다의 환영에 떨던 두려움에서 다소는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끝없이 마음을 쓰는 일 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얼마간 뻔뻔하게 해동하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지요.

 

(134)

죽고 싶다, 차라리 죽고 싶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무슨 짓을 해도, 뭘 해도, 더 심해질 뿐이다. 수치에 수치를 더할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새싹이 푸르른 폭포에 가는 일 따위는 도저히 바랄 수 없다. 추악한 죄에 천박한 죄가 겹쳐 고뇌만 늘어나고 강렬해질 뿐이다.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게 죄의 원천이다. 그러나 생각만 그렇게 치달았지 몸은 여전히 아파트와 약국 사이를 반미친 꼴로 오간 뿐이었습니다.

 

(138)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거의 얼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이제 없다, 내 가슴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그 그립고 무서운 존재가 이제 없다고 생각하니, 내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비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내 고뇌의 독이 유난히 무거웠던 것도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의욕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고뇌할 기력마저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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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4-29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곧 열린책들 35주년 세트 완독하실거 같아요~!!

bookholic 2022-04-29 23:08   좋아요 1 | URL
ㅎㅎ 네... 이제 다섯권 남았습니다~~~
시간이 휙휙 지나가네요....
새파랑 님,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