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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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방구석 미술관>이란 책이 있단다. 세계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 소개와 그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책이었어. 두 번째 이야기를 담은 <방구석 미술관 2>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이번에 읽었단다.

이번에는 한국 편으로 우리나라의 미술가들의 이야기로 꽉 채워져 있단다. 열 분의 미술가를 소개해주고 있는데 모두 현대 미술을 하신 분들이란다. 아빠가 미술에 문외한이라서, 우리나라 현대미술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분들이 한 손으로도 헤아리기 어렵더구나. 이 책에는 모두 열 분과 그들의 작품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기억이 오래가지 못해서 그 분들의 자세한 작품들과 미술 성향에 대해서는 금방 까먹겠지만, 성함은 잘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멋진 미술가들이 계시다고 말이야. 지은이 조원재 님 덕분에 잘 모르고 있던 우리나라 현대미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눈을 뜰 수 있어 좋았단다.


1.

이 책에서 현대미술가들은, 이중섭, 나혜석, 이응노, 유영국, 장욱진,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백남준, 이우환, 이렇게 열 분이란다. 이 열 분 중에서 유명한 몇몇 분들만 알지, 나머지 분들은 잘 모르는 분들이야. 이 열 분에 대해서 간추려서 너희들에게 모두 이야기해주면 좋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너희들이 책을 읽어서 만나길 바라고 아빠는 몇 분만 이야기해 볼게.

먼저 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 님. 얼마 전에 너희들이 보는 책에도 나와서 너희들도 알고 있는 그런 분이잖아.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부잣집에서 태어났대.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접할 수 있었고, 공부도 곧잘 해서 그 유명한 오성고보 출신이라고 하는구나.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분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대. 야마모토 마사코는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고 우리나라에서 생활했다고 하는구나. 부유한 집안에서 일본 유학을 하고, 일본인과 결혼을 한 이중섭이지만, 늘 마음 속에는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 가슴 아파했고, 그것을 소를 통해서 우리 민족을 표현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그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의미로 소를 그렇게 열심히 그리게 된 것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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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 나라를 빼앗긴 슬픈 현실, 말문마저 탄압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이중섭은 민족의 존엄성을 그림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 존엄성을 은밀하게 담아 우리 민족만이 알아챌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할 존재는 소였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틈만 나면 들에 나가 소를 구석구석 관찰하며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기숙사에 있는 그의 방에는 소의 몸통, 앞발, 뒷발, 꼬리, 머리 등을 스케치한 그림들로 가득했고, 중섭은 그 스케치와 함께 잠들었다고 합니다. ‘소를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내겠다는 그의 열정은 주변 지인들이 보았을 때 미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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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어 본격적인 그림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얼마 못 가서 한국 전쟁이 나고 부산과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어. 거기에 아내는 폐렴에 걸리고 아이들은 영양 실조에 걸리게 되자, 이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보냈단다. 그리고 혼자서 힘들게 생활을 이어갔고, 일 년 뒤 어렵게 얻은 배표로 일본에 가서 일주일 간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왔단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다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단다.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열어서 그림을 팔면 돈이 생기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중섭의 그림을 사간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못했어. 거의 도난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지. 일본으로 가족을 만나려 가려던 꿈도 깨지고 말았지.

이런 일을 겪고 난 이중섭은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려서 그림 활동도 거의 하지 못했어. 말년에는 정신병원까지 가기 되고, 무연고자로 삶을 마감했다고 하더구나. 이제 고작 마흔 살인 1956년의 일이었단다. 아빠가 이중섭 님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이중섭 님의 아내 이남덕 님은 아직 생존해 계시더구나.

신여성으로 더 유명한 나혜석 님. 1896년 수원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신식 교육을 받았어. 일본으로 유학 가서 서양화를 공부했단다. 신식 여성으로 자유 연애를 하였고, 최승구라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하지만 최승구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최승구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했어. 최승구는 이혼을 하려고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이혼을 하지 못했어. 그러다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그만 죽고 말았단다.

사랑의 슬픔을 뒤로 하고 나혜석은 1919 3.1운동에도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어. 이때 감옥에 갔을 때 일본에 있는 김우영이라는 변호사가 나혜석을 변호해주겠다고 한국행 배에 몸을 실었단다. 김우영. 이 분은 나혜석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부터 나혜석을 짝사랑하던 분이란다. 나혜석이 감옥에 갇혔다고 하니 다른 일 모두 제쳐두고 온 거야. 하지만 김우영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출옥한 상태였다고 하는구나.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계속 구애를 했단다. 그리고 결국 3가지 조건을 걸고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을 했단다. 그 세가지 조건은 아래와 같았단다.

.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주시오.

신여성의 당당한 요구 조건이구나. 그렇게 김우영과 결혼을 하고, 그들은 아이 셋도 낳았단다. 그러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어. 워킹맘으로써 아이도 키우고 그림도 그리고 한 거야. 김우영이 포상으로 세계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나혜석도 동행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유럽에 가게 되었고, 파리에서 생활하게 되었어. 파리의 나혜석은 그림을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김우영만 한국으로 보내고 파리에 남게 되었단다. 김우영은 혼자 남은 나혜석이 걱정되어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최린에게 나혜석을 보살펴달라고 했는데, 나혜석과 최린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최린이 나혜석을 꼬셨다고 했다나.

이 일을 우영이 알고 나혜석을 귀국시켰단다. 그리고 이혼했어.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을 문예지에 싣는 당시에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단다. 이런 일을 벌이자 식구, 지인마저 그녀를 피했어. 나혜석은 이혼 후 홀로 힘들게 생활하했어. 가난과 싸워야 했고, 보고 싶은 아이들을 보지 못해서 무척 힘들어했어. 그렇게 보니 병이 생기고 53세라는 적은 나이에 무연고자로 어떤 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단다. , 이중섭 님도 그렇고 나혜석 님도 그렇고 불운한 말년이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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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님. 1904년 서당집 아들로 태어났어.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는데,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단다. 집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가서 당시 유명한 화가인 김규진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단다. 김규진으로부터 동양화를 배웠고 나중에 일본 유학을 가서 서양화를 배워서 동양화와 서양화를 접목시킨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단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전쟁으로 인해 또 어려움을 겼었단다. 이응노의 아들이 북에 남겨진 채 전쟁이 끝나고 말았어. 이산 가족의 아픔도 겪어야 했단다. 그가 미술에 더욱 전념하여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단다. 이응노는 미술 공부를 위해 미국에 건너갔다가 다시 파리로 가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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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그것도 목적이 있는 노력. 50대의 나이에도 항상 깨어 있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작품에 반영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이응노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예술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시대에 깨어 있던 그의 작품은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됩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판매되어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됩니다. 곧 이어 자크 라센느(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가 프랑스로 그를 초청하죠. 이미 한국미술계에서 승승장구하며 환갑을 앞두고 있던 거장 이응노. 이제 좀 쉬겠다고  해도 누구도 안 말릴 나이에 그는 새로운 도전에 또 한 번 몸을 내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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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화가의 재능을 꽃피우게 되었단다.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했고, 이곳에서도 동양화와 서양화의 접목을 계속 시도했어. 이런 점들이 파리에서 인정을 받아 그곳에서도 유명한 화가가 되었단다. 파리에 파리동양미술학교도 설립해서 한국서화를 소개했단다. 이렇듯 몸은 타국에 있지만, 민족주의자였던 이응노. 그러던 어느날 고국에서 그런 이응노에게 국내로 초대를 했단다. 그렇게 오랜 만에 고국에 돌아왔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감옥이었단다. 당시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라고 간첩 조작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이란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단다. 얼마 전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에서 이응노에게 아들의 편지가 있으니 오라고 했어.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의 편지라고 하니 안 갈 사람이 어디 있겠니. 그렇게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 갔는데, 다시 북한에 가면 아들을 볼 수 있다고 했대.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다시 파리로 돌아온 일이 있는데, 이 일로 당시 우리나라 중앙정보부는 이응노를 간첩을 몰아 붙인 거야.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간첩 조작하는데 유능한 중앙정보부를 이길 수 없었어. 무서운 시절이었단다. 그렇게 2년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단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화가들이 우리나라 정부에 탄원을 하게 되었고, 결국 출소하여 다시 파리로 돌아갔단다. 그는 결백하지만 오랫동안 간첩 화가로 낙인이 찍혔고, 정부로부터 계속된 감시를 받아야 했단다. 조국의 배신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는 한국서화를 알리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말이야. 이응노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로 귀화를 했지만, 그는 조국을 잊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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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지만 한국에 갈 수도, 작품을 나눌 수도 없던 예술가. 20년 전부터 주변에서 권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이 거절해왔던 그것, 프랑스로의 귀화를 1983년의 응노는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사람이 되나, 나는 한 번도 내 조국을 잊어본 일이 없어요. 비록 조국이 나를 버린다 해도 난 나의 피와 정신 속에 살아 있는 조국을 버릴 수 없지.’ 유럽에 온 이후 끝까지 한국 신문을 놓지 않았던 그. 전시를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저 멀리 보이는 한반도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 프랑스 유수의 미술관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국가사업을 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재능이 외국을 위해 사용되고 있음에 깊은 안타까움을 토론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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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9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하고 만단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독서 편지가 계속 밀리다 보니, 독서 편지의 내용이 점점 부실해 지는구나. 미안하구나. 김환기 님과 김향안 님의 사랑 이야기도 해주고 싶은데 그건 얼마 전에 아빠가 이야기로 했으니 생략할게. 김환기님은 그 분의 미술 세계나 작품 세계의 이야기보다 김향안 님과 사랑 이야기가 더 강하게 남는구나. 그런데 이 분들의 사랑이야기가 낯설지 않아서 생각해보니 예전에 읽은 소설가 이상에 관한 소설, 김연수 님의 <굳빠이 이상>에서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단다. 이상과 변동림(이 분이 나중에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지), 김환기와 김향안. 이 분들의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도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단다.

오늘은 이만 할게. 이 책에 소개된 나머지 분들에 과한 이야기는 나중에 너희들이 커서 이 책을 읽음으로써 만나길 바래. 그 때는 아빠의 기억력으로는 이 책의 내용을 거의 다 까먹을 테니 너희들이 다시 이 책의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 것 같구나.^^


PS:

책의 첫 문장: 얼마 전 일입니다.

책의 끝 문장: 모든 것이 <관계항>속이군요.


우리는 왜 이중섭을 국민화가라 부를까요? 아마도 그의 삶에서 나온 소를 비롯한 모든 그림이 20세기 한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타인의 삶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 자체를 소에 이입해 그렸죠. 그가 겪은 고난과 아픔은 당시 한반도 위에서 생을 이어가던 모든 이의 고난과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과 아픔을 직접 겪어본 적 없지만, 이상하게도 중섭의 그림을 볼 때마다 마치 기억 속에 묻어둔 어떤 파편을 끄집어내 마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마 중섭이 시대의 산증인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그림에 온전히 이입시키고 있기에 가능해진 일일 것입니다. 그 결과, 중섭의 그림은 영원히 살아 숨 쉬며 우리와 감정으로 소통합니다. 중섭과 중섭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와 ‘애달프면서도 따뜻한’ 기억의 조각이 됩니다. 그렇게 중섭은 국민화가로 우리 마음 한편에 남게 되었습니다. - P44

"당시 내 머릿속에는 민족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어요. 모두들 서양화만을 그린다면 동양화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는 동양화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전통 동양화가 아닙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조화롭게 융합시키는 미지의 길을 선택합니다. (사실상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그 길을 ‘개척’하기로 한 것이죠. 동양화로는 이미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응노. 그렇기에 이제 그가 할 일은 서양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가족들에게 논밭까지 장만해주던 간판점 ‘개척사’를 미련 없이 처분하고 말이죠.
- P114

"나는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 옷을 입는 기상 등 깨끗하고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습니다."
-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 중에서
격동의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사. 끝없이 변모하던 시대의 물결을 예민하게 감각하며 자신의 작품을 변신시킨 예술가. 자칫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민족의 예술정신을 현대에 살아 있게 하고자 삶의 모든 것을 던진 예술가. 86년의 생애 수없이 작품의 외형을 변신시켰지만, 그 안에는 오직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을 채웠던 고암 이응노. 시대를 초월해 그의 작품에서 영원히 울려 퍼져 나갈 시는 이것이 아닐까.
모두, 함께, 어울려, 자유와 평화의 춤을.
- P139

그(유영국)에게 사업은 가족을 경제적으로 지키고, 자신이 예술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예술에 대해선 무한한 꿈을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자였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선 돈이라는 수단이 기반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던 현실주의자였죠. 그런데 그는 또 너무 많은 돈을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 P167

"나는 소녀 적부터 가슴속에 커다란 감상의 주머니를 지니고 있다. 그 주머니가 이날 이때까지 나를 살게 하는 것 같다."
소녀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 온 ‘감상의 주머니’. 그 주머니에서 외할아버지와의 행복한 추억이 담긴 <조부>가 나왔듯이 뱀 역시 그 주머니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경자에게 뱀은 행복한 추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화자)가 산나물을 캐다 독사에 물려 죽은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는 만큼 뱀은 ‘저주를 불러오는 악한 것’이었죠. 자신의 삶이 저주의 늪에서 빠져나와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상의 주머니’에서 뱀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대상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저주를 물리치기 위해 뱀을 그리며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합니다. 말이 좋아 예술이지 그녀에게 이 행위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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