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백시나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지난번 안도현 님의 <백석 평전>을 이야기해 주면서, 백석의 시집도 같이 읽었다고 했잖아. 오늘은 그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 책 표지는 백석 인생의 전성기 시절일 것 같은 시기의 사진으로 꾸몄단다. 잘 차려 입은 양복에, 개성 넘치는 헤어 스타일, 뒤에는 칠판에 직접 쓴 것 같은 필기체 영어함흥 영생고보에서 선생님 시절의 사진이란다. 신문 기사에도 실린 사진으로 알고 있는데, 흑백 사진임에도 싱싱한 젊음이 느껴지는구나. 백석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번 <백석 평전>에서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생략하고 바로 그의 시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1.

젊은 시절은 모던 보이로 살았던 백석하지만 그의 시는 우리 고유의 언어들과 고유의 감정들이 가득 담겨 있었단다. 현대적인 감성은 옷과 외모에만 있었고, 그의 영혼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우리나라 시골에 있었단다. 일제 시대 핍박 받고 힘든 시간을 잠시 잊을 정도의 아름다운 서정시들이었단다.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저항시로 자신의 뜻을 이야기하는 시인도 있지만, 백석처럼 엉망인 세상을 외면하고 순수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시를 통해 아픈 세상을 달래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가 사용하는 말들이 아빠가 몰랐던 순수한 우리말인지 그의 고향 사투리인지 모르겠지만,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말들도 많았단다. 책 밑에 어려운 단어의 뜻들을 적어 주었어. 그런데 뜻도 잘 모르는 우리말들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감칠맛이 난다고 할까, 만들어지는 소리들이 재미있단다. 다음의 시를 한번 보자꾸나.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라는 시의 일부야. 제목부터 무슨 말인가 싶지? 넘언집은 산 너머, 고개 너무의 집이라는 뜻이고, 노큰머니는 노() 할머니라는 뜻으로 늙은 할머니라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산 고개 너머에 계신 범 같은 늙은 할머니가 시의 제목이 되는 거야. 노큰마니라는 말도 아빠도 처음 보는 말인 것 같구나. 이 시의 첫 부분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단다.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보렴. 얼럭궁, 덜럭궁, 뜯개조박, 뵈짜배기, 끼애리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왠지 정겨운 말들의 연속이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재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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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궁 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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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무나무는 누릅 나무과의 속하는 활엽수이고, 뜯개조박은 뜯어진 헝겊조각이란 뜻이고, 뵈짜배기는 베쪼가리, 즉 천조각이란 뜻이고, 오쟁이는 짚으로 작게 엮어 만든 섬, 끼애리는 짚으로 길게 묶어 동인 것, 꾸러미라는 뜻이고, ‘소삼은성글게 엮거나 짠이라는 뜻이고, 엄신은 엎집신이라고 하는데 상제가 초상 때부터 졸곡(卒哭) 때까지 신는 짚신을 말하여, 딥세기는 짚신이고, 국수당은 마을의 본향 당신을 모신 집, 그러니까 서낭당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영동(楹棟)은 기둥과 서까래라는 뜻이란다. 얼럭궁 덜럭궁의 뜻한 책에 적혀있지 않았지만, 얼룩덜룩이라는 뜻을 것 같구나.

아빠가 이 책에서 읽은 시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를 고르라면 수라(修羅)’라는 시란다. 수라(修羅)는 아수라(阿修羅)의 준말로 불교에서 나오는 악귀 중에 하나란다. 여기서 수라는 누구일까. 읽어보면 누가 수라인지 바로 알 수 있단다. 이 시는 한 편의 짧은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데, 그 상황이 재미있으면서도 안타깝더구나. 그 때 백석이 쓸어 보낸 거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미 가족들이 다시 만났을까? 이런 생각이 한 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단다. 이 시가 너무 재미있어서 너희들에게도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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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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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힘든 시절을 살았지만, 용기만은 잃지 않은 생활을 이야기한 것 같은 아래 시도 좋았단다. 오늘날 그의 시를 읽는 이들도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시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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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은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 <선우사(膳友辭)>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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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 쓰기 좋아하는 이가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시를 못 쓰고 지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니. 아빠가 <백석 평전> 이야기할 때 한 것처럼, 그의 미발표 시들이 어딘가 잔뜩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오늘은 짧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책의 끝 문장 : 짐짓 그의 등뒤에 심지를 불끈 도두고 화미한 여심을 산 너머로 훔처보는 태양의 연정을 나는 동정해도 좋다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북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화골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에 쩨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솥 적은솥을 모조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러선 잿다리 아래로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외갓집>
- P33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웅 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넘언집 범 같은 노큰머니> 中에서…
- P38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현재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北方)에서> 中에서…
- P59

빨간 물 짙게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뇨
빨간 정(情) 무르녹은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十月)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실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十月)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 <단풍>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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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29 1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시는 언제 읽어도 좋습니다.
[북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한국어의 이렇게 토속적인 의성어가 있다니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한국어를 잊고 살고 있을까요
북홀릭님 주말 가족 모두 멋지게 보내세요 ^ㅅ^

bookholic 2021-05-29 18:02   좋아요 1 | URL
불과 백년도 안 된 시절의 시들인데, 모르는 말들이 너무 많아요..
그만큼 한글의 아름다운 말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백 년 후에는 또 어떤 말들이 사라져 있을까요?
좋은 우리말들 많이 써야겠어요..
고맙습니다~~ scott님도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