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 책은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려
번개공주라 불리며 오래전에, 우리가 12세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한 인간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녀의 수많은 후손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이 세상에 돌아와 잠시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마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날아다니든 기어다니든, 선하든 악하든 도덕 따위에는
무관심이든, 아무튼 온갖 마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2년 8개월 28일 밤, 다시
말해서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 우리가 괴사(怪事)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
시대가 끝난 후 이미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196-197)
진정한 현실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안다. 세상은 평범한 시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사납고 기이하다. 평범한
시민은 진실을 외면하고 베일로 눈을 가린 채 무지한 상태로 살아간다. 베일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워지고, 확신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고, 결국
술이나 종교로 도피하게 된다.
(210)
이븐루시드가 가잘리에게, 티끌이 티끌에게 말했다. “비이성은 비이성인 까닭에 자멸하기 마련이오. 이성이 잠깐 토막잠을
잘 때도 있지만 비이성은 아예 혼수상태에 빠질 때가 많으니까. 결국 비이성은 영원히 꿈속에 갇혀버리고
마침내 이성이 승리할 거요.”
그러자 가잘리가 말했다. “인간이 꿈꾸는 세상은 자기가 만들고 싶은
세상일세.”
(231)
모든 사랑은 두 연인이 내심 스스로와 어떤 약속을 하면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상대의
바람직한 일면을 보았으니 못마땅한 일면은 무시하겠다는 다짐이다. 사랑은 겨울 뒤에 찾아오는 봄이다. 사랑은 인생의 혹독한 추위가 남긴 상처를 치유해준다. 그렇게 마음
속에 온기가 혹독한 추위가 남긴 상처를 치유해준다. 그렇게 마음 속에 온기가 피어날 때 연인의 결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예 무의미하고, 그래서 스스로와의
비밀 약속에 서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의심의 목소리는 침묵시킨다.
나중에 사랑이 시든 뒤 이 비밀 약속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더라도 꼭 필요한
어리석음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연인들의 믿음, 즉 진정한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이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싹튼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322)
역사는 얼마나 불완전한가! 반쪽뿐인 진실, 무지, 속임수, 가짜
단서, 착오, 거짓말 등의 오리무중 어딘가에 진실이 묻혀
있으련만 우리는 믿음을 읽어버리기 쉽고, 그래서 다 허깨비다, 진실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의 절대적 신념이
또 누군가에게는 망언이 불과하다, 그렇게 말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이란 한낱 상대주의 궤변가의 주장만 듣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강력히, 정말
강력히 강조한다. 진실은 반드시 존재한다. 당시 걸음마를
시작한 스톰의 신기한 능력도 진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뚜렷한 증거였다. 스톰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며
우리는 진실이 ‘진실’로 탈바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413)
우리는 이성적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갈등이야말로
오랫동안 인류는 규정하는 서사였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우리
사이의 차이점, 예컨대 인종, 지역, 언어, 관습 따위는 더 이상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오히려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습에 대체로 만족한다. 어쩌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겠다. 우리는-더 넓은 의미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우리는-이 위대한 도시에 살며 이곳을 찬미한다. 강물이여, 흘러라, 그대 사이에서 우리도 흐르듯이, 물줄기여, 어우러져라, 멀리서
왔건 가까이서 왔건 우리 인류의 물줄기가 두루 만나 어우러지듯이! 우리는 여기 물가에서 갈매기떼와 군중과
더불어 즐거워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