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 상품이란 하나의 서비스도, 여러 서비스의 집합도 아니다. 심지어 즐거운 시간이라고도 딱히 말할 수 없다(크루즈 감독과 스태프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확인시키는 일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느낌에 가깝다. 그래도 진정한 상품이기는 하다. 그 느낌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니까. 여유와
자극의 혼합, 스트레스 없는 방종과 광적인 관광의 혼합, 굽실거리는
태도와 얕보는 태도가 특수하게 혼합된 느낌이. 그리고 이 느낌은 ‘만족시키다’라는 동사를 통해서 마케팅된다. 모든 메가라인의 이런저런 홍보물에는
이 단어가 반드시 박혀 있다. “…평생 경험해본 적 없는 수준으로 당신을 만족시키는” “…자쿠지와 사우나에서 자신을 만족시키세요” “우리가 당신을 만족시키도록
해주십시오” “바하마 제도의 훈훈한 미풍을 맞으며 자신을 만족시키세요”.
(28)
죽음에 대한 이상한 갈망, 그리고 나 자신의 시시함과 쓸모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에서 비롯한 죽음에 대한 공포.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이 불안이나 고뇌라고 말하는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같지 않다. 최소한 정확히 같지는 않다. 절망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 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
(35)
이것은 내가 관찰했던 바와는 다르다. 내가 관찰했던 바에 따르면, 네이디어는 아주 엄격한 배였다. 냉혹한 그리스 장교들과 감독관들로
구성된 엘리트 간부단이 배를 운영했고, 하급 직원들은 늘 자신을 또랑또랑한 눈으로 관찰하는 그리스 상사들이
무서워서 겁에 질려 있었고, 승무원들은 진심으로 쾌활하기는 힘들어 보일 만큼 디킨스풍으로 중노동을 했다. 아마 ‘쾌할함’은 그리스
상사들이 클립보드에 끼워 다니면서 수시로 체크하는 직원 평가지에 ‘민첩함’과 ‘고분고분함’과 함께
평가 항목으로 올라 있으리라. 많은 직원은 손님이 아무도 안 본다는 걸 확인하면,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들이 일반적으로 드러내는 초췌한 피로함과 공포 어린 분위기로 금세 바뀌었다. 내가 볼 때 승무원들은 사소한 과실로도 잘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무서운 그리스 상사들에게 잘린다는 것은 티끌 하나 없이 반들반들한 상사의 구두로 엉덩이를 뻥 차여서 무지무지 오랫동안 헤엄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할 것 같았다.
(71)
예술인 척하는 광고는-아무리 훌륭하더라도-말하자면 당신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따스하게 미소 짓는 사람과 같다. 이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은 그런 부정직이
우리에게 미치는 누적적 영향이다. 진정한 선의 없이 선의의 완벽한 복사물이나 모조품만을 제공하는 그런
것을 자주 접하면, 우리는 차츰 혼란스러워져서 나중에는 진실된 미소와 진짜 예술과 진정한 선의마저 경계하는
태도로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우리에게 혼란과 외로움과 무력함과 분노와 두려움을 안긴다. 절망을 일으킨다.
(106)
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한다. 그리고 이 절망은 항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난간에 서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 무리를 내려다볼 때.
이 위에 있든 저 밑에 있든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상 크고, 살찌고, 벌겋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솟과 육식동물이다.
(185)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 아우구스티누스
(309)
랍스터는 그 자체로도 먹기 좋다. 적어도 요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만 해도 랍스터는 말 그대로 하층 계급의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만 먹었다. 초기 미국의 감옥
환경이 가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식민지는 수감자들에게 랍스터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는데, 왜나하면 그것은 꼭 사람에게 쥐를 먹이는 것처럼 잔인하고 지난친 고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랍스터의 비천한 지위는 옛 뉴잉글랜드에 랍스터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322~323)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이 점부터 인정하고 넘어가자. 동물이 통증을
느낄 줄 아는가. 느낄 줄 안다면 어떤 방식으로 느끼는가, 우리가
그들을 먹기 위해서 그들에게 통증을 가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정당화되다면 어떤 이유로 되는가
하는 질문들은 극도로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들이다. 비교신경해부학은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통증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정신적 경험이므로, 우리는 자신 외에 다른
인간이나 다른 동물의 통증을 직접 알아볼 수 없다. 게다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인간도 통증을 경험하고
따라서 그도 통증을 겪지 않으려는 타당한 이해를 갖고 있다고 추론하도록 이끄는 원칙들은 본격적인 철학의-형이상학, 인식론, 가치 이론, 윤리학의-영역이다. 아무리 고도로 진화한 비인간 포유동물이라도 자신의 주관적인
정신적 경험을 우리에게 언어로 소통할 줄은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가 통증과 도덕에 관한 논증을 동물에게까지
확장될 때 부딪히는 추가의 어려움 중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고등 포유루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즉 고등 포유류에서 소와 돼지와 개와 고양이와 쥐로 갔다가, 그다음에는 새와 물고기로 갔다가, 이윽고 랍스터 같은 무척추동물로
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애매해지고 점점 더 뒤엉킨다.
(352)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리고 이 점은 틀림없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어떤 예술은 온갖 장애물을 넘는 추가의 노력을 들이고서라도 감상할 가치가 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단연코 그런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서구 고전문학을
압도하는 거물이라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과 필수 교과로 추앙됨으로써 오히려 가려지는 사실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할뿐더러 재미있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의
소설에는 거의 늘 좋은 플롯이 있다. 강렬하고 복잡하고 철저하게 극적인 플롯이 있다. 살인과 살인 미수와 경찰과 문제 있는 집안의 반목과 스파이가 나오고, 터프
가이와 아름답고 타락한 여인과 간지러운 사기꾼과 소모성 질환과 뜻밖의 유산과 반드르르한 악당과 흉계와 창녀가 나온다.
(366)
정보의 억압, 국가의 검열, 특히
그가 소중하게 여기고 글을 쓰고 싶어 했던 자신의 신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경우가 많았던 계몽주의 이후 유럽 사상이 인기를 끄는 현실. 내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정말로 놀랍고 감동적이라고 느끼는 점은 그가 천재였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용감하기도 했다. 그는 문학적 평판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놓지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은 굳게 믿되 세상에서는 인기 없는 신념을 세상에 퍼뜨리는 작업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에게 불친절한 문화적 환경을 무시하는 방식이 아니라(요즘은 이런 방식을 “초월한다”거나
“전복한다”고 표현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그것에 대항하고 그것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해냈다.
(379)
이 윔블던 결승전에는 복수의 내러티브가, 왕 대 제왕 살해의 구도가, 극단적인 인물 대조가 갖춰져 있다. 이것은 남유럽의 열정적인 남성상과
북유럽의 섬세하고 임상적인 예술성의 대결이다. 디오니소스 대 아폴론이다. 식칼 대 메스다. 왼손잡이 대 오른손잡이다. 세계 이인자 대 일인자다. 나달은 현대적인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을
최대한 밀어붙인 선수이고… 그 상대는 속도와 발놀림 못지않게 뛰어난 정확도와 다양성으로 이 현대적 게임을
또 다르게 바꿔놓은 인물이지만, 앞의 선수에게만큼은 유난히 맥을 못 추는, 혹은 기가 눌리는 선수다. 영국의 어느 스포츠 기자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기자단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번이나. “이
시합은 전쟁이 될 거야.”
(384)
페더러의 서브 속도는 세계 정상급이고, 서브의 위치와 다양성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서브를 넣는 움직임은 유연하고 딱히 별난 점은 없는데, (TV로 볼 경우) 특징이라면 공을 때리는 순간 온몸에 뱀장어처럼
스냅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다. 페더러는 공을 예상하는 능력과 코트 감각이 비현실적인 수준이고, 발놀림은 이 게임의 역사상 최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릴 때
축구 신동이었다. 이 모든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중 어떤
말도 이 선수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을, 그의 시합에 담긴 아름다움과 천재성을 직접 목격한 경험을
제대로 묘사하거나 환기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미학적인 것에는 비딱하게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에둘러 말하는 수밖에 없다. 혹은-아퀴나스가
자신의 형언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그것이 무엇이 아닌가를 말함으로써 그것을 정의하는
수밖에 없다.
(395)
강한 서브로 넘어온 테니스공을 성공적으로 받아넘기는 데는 이른바 ‘운동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여러 작업들을
재빠르게 수행함으로써 육체와 그 인공적 연장을 잘 통제해내는 능력을 뜻한다. 영어에는 이 능력의 다양한
측면을 뜻하는 용어가 한 무더기는 된다. 느낌, 터치, 기량, 자기 수용 감각, 신체
조화 능력, 손과 눈 조화 능력, 근육 감각, 우아함, 통제력, 반사신경
등등. 이 운동감각을 다듬는 것이야말로 유망한 주니어 선수들이 매일 실시하는 극단적으로 힘든 연습의
주목적이다. 이때 훈련은 근육적인 것이기도 하고 신경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수천 번씩 스트로크를 연습하다 보면, 보통의 의식적인 생각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을 ‘느낌’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다. 외부인의 눈에는 이런 반복 연습이 지루하거나 심지어 잔인해 보이겠지만, 외부인은
선수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선수의 몸속에서는 미세한 조정이 벌어지고 또 벌어지며, 각각의 변화가 주는 효과에 대한 감각은 설령 의식에서는 멀어지더라도 점점 더 예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