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경제학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끼는 방법에 대한 과학이라고 묘사되어 왔다. “사랑은
희소성이 있다”는 것이 이 개념의 기본 전제다. 따라서 사랑은
아껴서 사용해야 하고, 불필요한 곳에 써 버려서는 안 된다. 사랑으로
사회를 움직이면 개인적인 삶에서 사용할 사랑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찾기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경제학자들은 사회를 조직하는
데 사랑 말고 다른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8)
시장이라는 기계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기본적인 감정 같이 단순한 것을 가지고 세계 평화와 모든 이의 행복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따라서 모두가 이 이야기에 매혹된 것도 놀랍지 않다. 착취를
개인적 악감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급 7000원을
받으며 등골이 휘게 일하는 여성도 사악한 누군가가 강요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없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그리고 경제학은 피할 길이 없어. 우리의 본성에 있으니까. 사실 그게 우리의 본질이야.
우리는 모두 경제적 인간이니까.
(53)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은 1950년대 들어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카고대 경제학과 소속의 남성 몇 명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경제학 모델을 이용해 분석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합리적 개인은 상여금을 놓고 남들과 경쟁하고 자동차 구매 시 더 좋은 조건을 취하려고 흥정을
벌일 뿐 아니라, 소파 뒤까지 청소하고, 빨래를 널고, 자녀를 낳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59)
결혼한 여성이 퇴근하면 무엇을 하는가? 부엌을 치우고 다림질을 하고 아이들의
숙제를 돕는다. 결혼한 남성이 퇴근하면 무엇을 하는가?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잠깐씩 아이들과 놀아 줄 것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여가 시간을 집안일에
많이 쓰고,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피곤해진다. 베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여성에게 더 낮은 보수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부엌을 치우느라 여성은 남성보다 더 피곤하다. 따라서 근무 시간에 남성과 동일한 노력을 기울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베커의 생각이었다.
동시에 경제학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설명도 내놓았다.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이유는 그들의 수입이 더 낮기 때문이다. 여성의 수입이 더 낮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여성이 집안일을
하는 것이 가족 전체로 볼 때 손해가 덜하다는 설명이다.
(86)
경제학자들은 자기들이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에 대한 비판은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샅샅이 연구하면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진실 말이다.
(130)
금융계의 혁신은 항상 시간과 돈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져 왔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금융에 회의적이었던 것도 바로 금융이 시간을 가지고 장난친다는 점 때문이었다. 시간은 신에게 속한 것이고 신만이 관장할 수 있는 영역이다. 성경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을 ‘시간을 파는 행위’라고
봤다. 고리대금업자는 돈을 빌려줌으로써 그 사람이 내년이 되기 전에는 살 수 없을 물건을 오늘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빌린 돈에 대한 이자는 대출을 받을 시점과 내년 사이에 경과하는 시간의 값이다.
(152)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루커스가 여왕의 질문(“왜 아무도
이런 일이 생실 줄 몰랐나요?”)에 대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이코노미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경제학자들이 위기를 예측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애초에 이런 일은 예측할 수 없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185)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들이 정당한 보수를 받게 하려 평생을 싸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돈이나 선의 중 한 가지 요인만이 동기가 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성별에 관해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성은 자기 이익 추구라는 본능에 의해 나아가고 여성은 전체적인 그림을 조화롭게 만다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204)
1970년, 미국의 한 CEO는 근로자 보수의 30배 정도를 벌었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이 숫자는 500배가 되었다. 유명한 금융가 J.P. 모건은 미국 기업의 CEO는 평직원 월급의 20배가 넘는 보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7년에는 그 격차가
364배로 벌어졌다. 그리고 미국을 모방삼아 서구 사회에서 CEO 의 보수가 전반적으로 늘어났다. 영국에서는 2002년에서 2012년까지 CEO들의
보수가 3배 증가했다. FTSE 100대 기업의 CEO와 평직원 평균 보수 격차는 1998년 45배이던 것이 2010년 120배로
벌어졌다.
(216)
고전적 자유주의는 시민으로서의 인간과 경제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구분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가지 관계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경제적 관계다. 다시 말하면 시민과 노동자와 소비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모두 동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220)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자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을 간단히 해결한다. 즉, 인간의 삶을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투자 행위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빵 한 쪽과 생선 한 마리로 신도들을 먹이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먹고살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믿는다. 험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그리고 우주가 우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282)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살아가고, 따라서 사회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매체가 필요하다.
현재의 경제학에 인류의 현실적인 경험을 위한 자리는 없다. 주류 경제학 이론은
허구의 인물,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인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286-7)
우리의 관계는 경쟁으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적대적인 상대로 간주할
필요도 없다. 모든 부분을 합친 것보다 전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은 기계 혹은 정교한 기계적 움직임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경제적 인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헛되다 느낄 수 있는 상황은 많지만 이 문제만큼은 헛되다 외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정의
목표는 바뀔 수 있다. 세상을 소유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애쓰는 여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298-9)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신시켜야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임무다. 페미니즘의 관점은 불평등부터 인구 증가, 복지 혜택, 환경, 그리고 노령화 사회가 곧 직면하게 될 돌봄 인력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깊은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 이상의 훨씬 큰 문제에 관한 것이다. 현재까지는 페미니즘
혁명의 절반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성들을 더해서는 젓는 것까지는 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깨닫고, 그
새로운 세상에 걸맞도록 사회, 경제,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해서 작별을 고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더 폭넓게 포용할 수 있는 경제와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