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시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
지그프리트 렌츠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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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를 들어 보셨는지, 문학작품 속에서 거론되는 북해는 마치 안개 짙은 바다처럼 몽환에 잠겨 있다. 가끔씩 신문기사에서 사진과 함께 올라오던 북해함대라는 것, 역시 귓전으로 듣기만 했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시계 밖에 있는 어떤 아련한 공간이었다. 그 북해를 끼고 있는 반도의 한 지방인 루크뷜은 물론 가상의 공간이지만 렌츠의 세밀한 묘사 덕분에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를 그곳에 머물게 한다.

소설을 읽는 일은 가장 쉬운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며칠동안 북해 언저리를 맴돌면서 그곳의 추운 날씨와 갈매기떼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 화가, 그 화가를 감시하는 파출소장곁에 머물면서 2차 대전 말기의 독일을 호흡했다. 가끔씩 머리위로는 영국의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심심한듯이 그 전투기에서 사격이 가해지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남의 일을 보듯이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도무지 이 루크뷜에 사격을 가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한 소년의 서술을 통해 그 모든 상황은 소설속의 등장인물들과는 별 관계도 없는듯 객관화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렌츠 소설의 묘미일지도 모른다. 치밀하고 사실적인 자연풍경 묘사는 우리를 선뜻 북해의 바닷가로 데리고 가지만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저 일어날만하니까 일어났다는듯이 덤덤하다. 그 덤덤한 문체의 매력에 빠져 나는 소설속의 화자인 지기의 회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 소설은 그림도둑으로 몰려 엘베강의 한 섬에 유폐된 지기의 회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시점의 지기와 11년전 과거 시점의 지기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간을 왕래한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못 믿을 것인지를 안다면 지기의 기억이란 것도 순전히 자신이 믿고 싶고, 보고 싶었던 것들뿐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창작금지를 당한 루크뷜의 화가 막스 루드비히 난젠은 실제로 창작금지 처분을 받았던 북독일의 화가 에밀 놀데를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자유주의자이며 휴머니스트인 난젠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루크뷜의 파출소장인 예프젠으로부터 창작금지와 동시에 감시를 받기 시작한다. 예프젠은 맹목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며, 그 명령에 ‘왜’라는 질문을 할 줄 모른다. 명령은 부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그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의무감은 전쟁터에서 탈출해 온 자신의 큰 아들을 당국에 넘기기에 이른다. 오랫동안 예프젠의 큰아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었던 난젠은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는다. 예프젠의 아들인 지기는 타고난 감수성과 정의감으로 난젠을 따르며 그를 도운다. 아버지로부터 난젠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지기는 요령껏 그 명령을 수행하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자신의 의무감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아버지로부터 난젠의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난젠의 그림을 숨기기 시작한다. 결국 그것이 그림 도둑으로 몰리게 되고 아버지와 난젠으로부터 외면당한 지기는 감옥에서 ‘의무의 기쁨’이란 제목으로 창작의 형벌을 받는다.

이 이야기는 지기가 감옥에서 형벌로 받은 ‘의무의 기쁨’이란 제목으로 써내려간 작문을 구성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지기가 본 아버지가 행하는 의무의 기쁨, 난젠의 예술가로서의 의무의 기쁨 따위가 이어지는데 우리의 삶에서 우리도 모르게 행하고 있는 이러한 의무의 기쁨은 없는지, 이러한 나의 의무의 기쁨으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한 적은 없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또한 예술과 권력의 관계를 절묘하게 파헤치고 있는데 예술창작을 금지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물음을 묻게 한다. 난젠의 그림을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한 베를린 당국은 난젠에게 창작금지를 명령하지만 난젠은 ‘보이지 않는 그림’으로 맞선다. 그림은 응당 보이는 것으로 말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난젠은 그런 체제를 한껏 조롱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작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을 현상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세상에는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현상이 있다. 보이는 것이야 당연히 현상이 되겠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현상이라고 말한다면 아이러니인가. 그러나 사물의 본질을 추적해 들어가는 현상학은 현상을 인식하는 관계에서 또 다른 현상을 찾아낸다. 즉 보이지 않는 현상이 보이는 현상으로 매개되는 그 관계성을 현상이라고 일컫는다면, 난젠의 ‘보이지 않는 그림’에는 국가 권력에 대한 조롱이라는 현상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이 예술을 억압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멀리 나아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권력은 자주 예술을 억압했고, 예술은 그에 저항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그림보다는 언어로 표현되는 문자예술이 억압을 많이 당했는데, 그것은 그림기호로 세계를 해석해내는 것에는 자의성이 많아 해석 자체가 어렵지만 언어는 지시하는 대상 자체를 바로 인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언어 해석 역시 자의적인 해석이 많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의 대부분이 언어생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언어는 그림보다 훨씬 쉽게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리나라의 예술억압에 대한 역사를 상기하면서 읽어내려 가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렌츠의 서술방식에 있을 것이다. 렌츠는 이쪽이나 저쪽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지기의 눈을 통해 사건자체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러므로 파출소장을 이해하는 것도, 화가를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은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에 독자는 굳이 파출소장을 미워할 이유도, 화가에게 동정을 가질 이유도 없다. 쉽게 말하자면 둘은 그럴만하니까 그랬을 것이라는 이해가 가능하고, 이것이 이 소설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읽어 갈 수 있는 힘이 된다. 이런 류의 소설에서 흔히 보게 되는 서로간의 적대감이나 증오는 찾아 보기 어렵다. 서로의 의무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화가와 파출소장 둘은 만나면 악수를 하고 ‘예프젠인가’, ‘난젠인가’라는, 수십년동안 변하지 않은 인사를 나눈다. 그 인사법에는 이미 서로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또한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북독일의 풍경묘사는 역마의 기운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렌츠는 뛰어난 묘사력으로 마치 그림을 보듯이 북독일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이 소설을 읽는 큰 재미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독일문학은 왠지 낯설고 어색하고 건조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이 소설 역시 그 느낌에서는 자유롭지 않으나, 역으로 그것이 독일문학의 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거기에다 현상학적인 철학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어서 작품 자체가 가지는 무게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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