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 - 3천년 동안 철학자들을 난감하게 만든 시간에 대한 수수께끼들
스튜어트 매크리디 엮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읽는 보람이 있는 책. 들이있다.

 무엇인가 묵직하게 머리나 가슴에 남아서 밑거름이 되고, 기초가 되어 남을 것 같은 책 말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시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을 싣기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책이다.

스튜어트 매크리디와 또다른 일곱 명의 시간과 관련된 분야(두뇌, 고고학, 과학, 언어, 목사, 심리학, 신학)의 전문가들의 글을 함께 엮어 만들어진 이 책은 우리가 '시간'하면 떠올릴 궁금증들을 깊숙히 파고들어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전문적인 용어와 배경 과정들을 이해하며 읽기위한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정말 통쾌하게 웃으면서 읽은 부분도 있었을 만큼 재밌는 책이기도 하다.

 편하게 책의 앞에서 뒤로 이어지는 내용을 조금씩 들어가며 이야기를 해나가기로 하자.

 

1장과 2장은 조금은 진부하고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으로 여기게 되는 시간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인간, 식물, 곤충, 동물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체 시계와 시계유전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론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니고 밝혀진 것도 있고 앞으로 밝혀내야 할 것도 있다는 얘기라 그냥 술술 읽어버리고 넘어갔다.

 

선사 시대 사람들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3장부터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웃음이 나온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3장의 결론이 결국 선사 시대 사람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들의 용도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들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고,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연의 일치에 의한 착각이었다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일들이 종종 생긴 것이 기억났던 거다.

 

간단한 예로 요강에 대한 오해를 들어보자.

 참 예쁜 요강이 많다. 그렇기에 요강을 모르는 사람들은 요강을 분명 장식품이나 귀한 도자기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단순한 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에 대한 무모한 추측이 불러올 수 있는 난감한 상황을 떠올리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리요.

 

4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부분이기도 한데 현재의 달력 시스템이 어떤 과정과 역사를 거쳐 언제부터 통용되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레고리력이고, 1년은 열두 달, 365일, 일주일 7일, 하루 24시간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열두달이 되었는지, 왜 1년이 365일이어야 하는지, 일주일이 왜 7일인지, 하루가 24시간으로 되어있는지 궁금해 한 적은 없었나?

 윤달, 윤달하지만 여전히 생소한 윤달이 왜 생기는지, 타원형 궤도를 가지고 공전하고 자전축이 기울어 있는 상태로 불규칙적인 회전을 하고 있는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원리에서 매년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절기, 같은 계절을 맞이 할 수 있는지 궁금했던 적은 없었나?

 

그 모든 물음의 대답이 여기 적혀있었다. 오, 신기해라.

 

가장 신기했던 것을 적어보면 우리가 익히 쓰고 있는 토, 일, 월, 화, 수, 목, 금요일의 요일명이었다.

 이 7요일의 기원은 '로마의 공화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본래는 지구에서 먼 행성부터 가까운 행성 순으로 요일을 정했기에 토, 목, 화, 일, 금, 수, 월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공화력에서는 주를 7일로하고 각각의 날을 24시간으로 나눈 후 각각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을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토요일의 1시는 토성신(말하자면) 2시는 목성 3시는 화성 4시는 태양 5시는 금성 6시는 수성 7시는 달 8시는 다시 토성 9시는 목성 10시는 화성 11시는 태양 12시는 금성 13시는 수성 14시는 달 다시 15시는 토성신 16시는 목성 17시는 화성 18시는 태양 19시는 금성 20시는 수성 21시는 달 다시 22시는 토성 23시는 목성 24시는 화성이 되고 다음날 1시가 화성의 다음인 태양 즉, 일요일이 되는 식으로 쭈욱~ 적어나가면 토, 일, 월, 화, 수, 목, 금요일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미리 짜놓은듯 탁탁 맞아들어가는 것을보며 짜릿함을 느꼈다.

 

오 놀라워라! 역시 로마! 하는 생각을 한건 나 뿐일까? 

 내가 이렇게 뭉뚱그려 적어놓은 것이 되려 책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릴까 두렵다. 참 재밌는 책인데.

 

그럼 이런 것은 어떨까?

 불과 60년 전까지도 중국은 그레고리력이 아닌 자신들의 구달력을 사용했었다는 사실.

 그들은 그 때 우리와 같은 날을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시간을 살면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아면 조금 생각해볼 일이다.

 가까운 북한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주체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 않은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5장에서는 고대의 다양한 시간 개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류의 위대함이 엿보였던 부분은(흥! 위대하신 인간님) 타원형 궤도와 기울어진 지구의 축의 영향으로 달력이 자꾸 어긋나자 내놓은 방안을 적어놓은 부분이었다.

 현명하게도 인류는 "가상의 평균적 태양의 운동을 가정하는 단순한 해결법"을 적용한다.

 단순한 해결법이란 일단 공전 궤도를 완전한 원형으로 한다.(이때는 천동설이었기에 지구를 중심으로 다들 돌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구가 기울어 있는 축을 똑바로 세워 공전궤도와 수직이 된 상태를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하면 계절력과 태양력이 어긋남없이 잘 돌아갈 수있다나? 거기에 오차를 보완하기 위한 윤달을 넣은 것이 위대한 그레고리력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오차에 집착해야 했나 궁금했는데 그들의 나름의 사정은 나중에 설명되기는 하더라.

 

아무튼 나를 무척이나 흥분시켰던 현대의 현재 형태의 달력과 시간이 '정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는 것은 유쾌했다.

 

6장부터 8장까지는 시간과 시계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시간의 기원과 형태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들이 담겨져 있었다.

 우리에게 시계가 없을 때 수탉이 우는 소리가 시계역할을 했던 것을 떠올린 것이 제법 우스웠다.

 

9장과 10장 11장은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돌아봄의 장이었지 싶다.

 특히 11장은 우리가 목을 매는 '시간'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시간을 준다.

 과거는 지나갔기에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없으며 현재는 무엇인가 남기기엔 너무 짧다.

 결국 우리가 목숨을 거는 현재라는 시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처럼 정확하게 짜여지고 정해진 시간을 살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미개하고 하찮은 부족들도 별다른 불편함없이 잘 살아가고 있더라.

 시간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또 깊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깃들어있는가하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은 참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가 꿈꾸는 타임머신은 그저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가 과거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미래에 간다고해도 현재가 달라지지 않는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과거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날아가서 그 과거를 바꾸면, 현재의 내가 과거로 날아가서 그것을 바꿀 필요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비효과'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수 없이 과거로 되돌아가던 남자 주인공이 결국 어머니 뱃속에서 스스로 탯줄로 목을 조이는 장면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참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많은 공을 들여 완성시켜놓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결국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시간인지 알 수 없게 된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발견해내야만 하는 때가 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늘 미래를 쫓는다. 우리의 현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수 많은 철학자들이 지난 3000년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해왔다고 한다.

 그만큼 어렵고 복잡하다는 뜻이겠지? 싶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인걸.

 

진정 우리가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참 많은 것이 담겨있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러면서 즐거웠던 시간 보낼 수 있게 해준 책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본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겼던 곳은 자연 세계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69~70쪽

한 해 안에서의 계절 변화와 한 해에서 다음 해로 넘어가는 과정을 규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태양력의 장점은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테네는 중앙화된 제사와 축제를 통해 동맹시들을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111쪽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사회들을 우리 사회에 비추어 판단 하거나, 우리가 이룬 업적을 잣대로 삼아 다른 사회들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 발상은 근거를 가지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현대의 토착민 사회들이 볼 때 사고 체계도 그 나름대로는 철저하게 일관적이고 타당하며, 해당 사회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단느 사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인간 사회들이 각기 나름대로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토대로 환경에 어울리는 최선의 행동을 결정하는 다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된다. 비록 그들의 사고방식이 서구 세계에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다 하더라도 다양한 환경 속에서 그 사회들이 발전하고 번영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57쪽

 

 

이 책을 읽는 동안 고등학교 시절 아무 것도 모르면서 친구가 가지고 온 '나비효과'에 대한 책이나 '상대성이론'에 대한 책을 깝죽대고 읽고서는 나름의 견해를 나누던 기억과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를 두고 다른 것은 다 진화론이라고 쳐도 그렇다면 최초의 빅뱅을 일으킨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서 왔느냐?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은 어디서 생긴 것이냐? 하는 답도 없는 이야기를 쉬는 시간이면 지치지 않고 해대던 때가 떠올랐다. 후후. 참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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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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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신경숙 작가님의 모르는 여인 출간 기념 낭독공감에 다니러 갔을 때 싸인 받으며 구입한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 

 11월 29일 그날 지하철에서 50쪽 정도를 읽고서는 그냥 미뤄뒀던 것.

 왠지 냉큼 손이 가질 않았다.

 작가를 너무 가까이서 만났던 것이 잘못이었다.

 정말 작가와 독자는 큰 강을 두고 마주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까운듯 멀리 있었어야 했을 것을.

 

나를 멀어지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작가를 가까이서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야기를 듣고보니 그 작품에 대한 어떤 고정된 견해가 생겨버린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선입견이랄까?

 책 속의 이야기를 음미하기 전에 내 미숙한 독서력은 작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들 예를 들면 "등장인물의 이름은 최대한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것으로 지으려 한다."는 얘기와 같은.

 모든 것이 아직 내가 올바른 독서라는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음이 원인이라 누굴 원망할 수도 없으니 그 이야기들이 조금 잊혀질 때까지 미뤄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로 들어가자.

 이야기는 '정윤'이라는 여자에게 걸려온 '이명서'의 전화 한통화로 시작된다.

 그들의 은사 '윤교수'가 위독하다는 내용의.

 

굳이 말해보자면 이 이야기는 '정윤'과 그녀의 대학 친구 '이명서', '정윤'의 소꿉친구 '단이', '이명서'의 소꿉친구 '윤미루', '윤교수'의 사랑과 좌절과 기억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참 많은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해왔는데 요즘들어 소설 읽기가 힘이 든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많이 본 것으로 기억되는 말이 아마 '언젠가'인 것 같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가장 의미를 두고 행하는 것이 '걷기'

 가장 의미심장한 말은 '크리스토프'

 이 이야기 속에서는 참 많은 죽음이 그려져있다.

 '정윤'의 엄마는 병으로, '정윤'의 소꿉친구 '단이'는 군에서 사고로, '윤미루'의 언니는 분신 후 투신 자살, '윤미루'는 굶어죽었고, '윤교수'도 병으로, '윤교수'의 과거 여자친구는 목을 매 자살했으며, '윤미루 언니의 '그사람'은 실종(죽은 것으로 추측)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죽음'은 이렇게 눈에 띄게 그려져 있음에도 젊은이들 사이에 흔할 것 같은 '사랑'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날 듯 드러날 듯 어떤 희망적이지만 분명하지 않은 공허한 약속 '언젠가'라는 말들로 그 열기를 희석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있지만 그것이 청춘남녀의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열기있는 사랑은 아닌 아련하고 공허한 그래서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약속들만 두드러져버리는 그런 쓸쓸한 느낌 말이다.

 

이 이야기 속에 사랑은 분명 담겨있다는 것을 안다.

 여러가지 형태의 여러 사람의 사랑이 등장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랑이야기를 하자니 알송달송하기만하고 아득하니 허허로운 기분이 되는 것 같아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라는 사람을 아시는가?

 '윤교수'의 질문이다.

 

그는 힘이 장사로 어린 예수를 업고 강을 건넜던 사람이라고 한다.

 처음엔 어린 아이라 가볍게 업고 강으로 들어간 크리스토프는 갑작스럽게 불어난 강물에 힘겨워한다.

 거기에 갈 수록 무거워지는 예수를 간신히 강 건너편에 내려놓았단다.

 

다시 '윤교수'의 질문이다.

 우리는 크리스토프일까 그 등에 업힌 아이일까?

 

'윤교수'는 답한다.

 우리는 크리스토프 일 수도 있고 그 등에 업힌 아이 일 수도 있다.

 

이것은 역설이라고하며 '차안과 피안'을 이야기 한다.

 

왠지 알송달송한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해답이 될 것 같은 부분이라 기억이 난다.

 

'윤교수'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모두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강은 물살이 거세고 깊기에 우리는 무엇에든 의지해야만 건너갈 수 있다고도 한다.

 

나의 곤란과 힘겨움을 지탱해주는 어떤 사람과, 그 어떤 사람의 곤란과 힘겨움을 지탱해주는 내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일까.

 

왠지 죽음이 그득한 이야기 속에 사랑, 사랑만 찾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죽음이 단순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 같은 확신이 있다.

 사랑했다.

 

정리가 되지 않는 갑갑함에 그냥 생각나는 단편적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이야기를 끝내련다.

 업어주기, 걷기, 언젠가, 우리 오늘을 잊지말자, 크리스토프, 소나무에 쌓인 눈털기, 귀머거리 고양이 에밀리, 에밀리 디킨슨.

 죽음 죽음 죽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만큼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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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분 기적의 독서법 - 인생역전 책 읽기 프로젝트
김병완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보는 순간 이것이 나를 위한 책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위한 책이었음을 확인했다.

 

이 책속에는 책에 미쳐 집중적으로 독서를 했던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성공담을 추가로 적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장담하기를 "그들만큼의 독서를 한 후에도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사실을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다.

 그리고 거기에 현실적 증명이 따라붙는다면 이것은 더이상 도박이 아니라 확실한 지름길이라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을만큼 저자는 많은 책을 단기간에 읽었다.

 그리고 그 집중적인 독서를 통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오전 48분, 오후 48분 더하여 하루 100분 정도씩 꾸준히 독서에 미치면, 3년이면 1000권의 책을 읽을 수있으며 그 이후에는 전혀 달라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해본 것은 내가 읽었던 책을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대략 고등학교 때 3년간 200권, 대학교 다닐 동안 250권, 군대에서 150권, 이후에 150권정도 읽었나보다.

 전부 합쳐도 800권이 채 되지 않았다.

 14년간 그것밖에 못읽었다니 의외로 너무 빈약한 독서량에 실망해버렸다. 아아  OTL.

 

그건 그거고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어떻게 3년동안 1000권의 책을 읽을 것인가 그 비법을 전수 받으면 되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눈시울을 붉혀야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책에 빠져 살 수 있음을 보면서 부러움과 아쉬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비등점'이라는 말이 몇번이고 등장한다.

 독서를 이야기하는데 난데없이 뭔 '비등점'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비등점'은 중요하다.

 

왜 집중적인 독서 즉, 3년동안 1000권의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좋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물을 끓이기 위해서는 비등점을 넘어설 때까지 계속해서 가열해야 한다.

 중간에 불을 껐다가 켜거나 99도에서 불을 끈다면 결국 물은 끓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서도 이와 성질이 같아서 999권의 책을 읽었어도 1권을 더 읽지 않으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1000권을 읽어도 그 기간이 너무 길어져버리면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저자가 비록 1000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숫자 그대로의 1000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최소한의 목표로써의 기준을 이해하기 쉽게 써놓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목표가 분명할 때 전진하는데 망설임이 적어진다.

 3년동안 하루 한권씩 1000권. 왠지 간단명료하고 단순명쾌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기적의 독서법, 집중적 독서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행복'을 위해서다.

 우리는 나빠질 것을 두려워해 더 나아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을 망설이곤 한다.

 한마디로 "나빠지지도 않지만 나아지지도 않는" 정체된 생활을 택해서 아무 것도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것이 불행이면 불행이었지 '행복'은 될 수 없었다.

 

난 오래 방황해야했다.

 공부를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항상 마음은 길을 찾지 못해 헤메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최초의 절망과 충격을 느꼈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내가 타인으로 '대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나를 절망하게 했다.

 하지만 내겐 현 상태를 멈추는 것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늘 그렇게 변명해왔다.

 

하나뿐인 나를 찾아다녔던 것 같다.

 무엇을 통해 하나뿐인 나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늘 고민해왔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책 속에 있다.

 방황의 끝에서 항상 책이 내 손에 잡혔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답을 원했고, 책이 내게 답해주려 했던 것이었나 보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최근에 와서다.

 

참 오래 책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한달에 한권 두권 읽거나 말거나 한 달도 많았다.

 부끄러운 이야기다.

 

지난해 여름 어떤 책에서 그 동안 품어왔던 애매한 의문 중 하나의 답을 얻었다.

 그 때부터 다시 책을 파고 들었다.

 책을 파고 들 수 밖에 없었다. 내게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책 뿐이었으니까.

 조금씩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책 속에서 기쁨을 찾고 즐거움을 느끼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1000권이라고 하면 무척 많은 책이다.

 하루에 한권도 읽지 않던 사람에겐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불친절하지 않다.

 정말 친절히 1000권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전해주고 있다.

 

처음엔 한권도 힘들겠지만 그 시간을 견뎌내면 독서에도 가속이 붙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요령, 요점을 발견해내는 요령을 얻고나면 더 즐겁게 수월하게 책을 읽어나가게 되고 그것이 나아가 여러가지 분야의 책들에 관심이 확장되는 단계에 이르면 생각과 의식 자체가 진화하는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막연하고 아득한 이야기 같을 수 있겠지만, 난 분명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꾸준히 집중적으로 여러분야의 여러 견해를 접하고 익히다보면 분명 그것은 하나의 개인을 완전히 개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 기쁜 마음에 들떠 좀처럼 진정되지를 않는다.

 너무 단숨에 읽어버린 것 같아 진정이 되면 찬찬히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그 책이 가진 효과의 수혜자가 한정된 복권과는 전혀 반대라는 것이다.

 되려 많은 사람이 읽고 접할 수록 그 책의 효용과 가치가 커지는 신기한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면 나 혼자 알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욕심이 난다.

 이 책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렇기에 좋은 사람들에게,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좋은 책을 만나는 일은 늘 영혼이 즐거워 노래하는 것 같은, 봄날 겨우내 푸실해진 흙을 밟는 것 같은 두둥실한 느낌을 준다.

 이것이 행복이라면 내가 행복을 느끼기 위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독서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너무 행복한 책과의 시간이 또 기다려진다.

 

 

『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은 독서를 하는 것이다."

 

독서는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것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돈이 없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책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몸소 체험한 바 있다.

 지혜가 없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책 속에 지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고 싶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위대한 상인이 되는 비법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발명가가 되고 싶다면 그래도 책을 읽어야 한다. 책속에 세상의 모든 것을 발명할 수 있는 원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가 되고 싶다면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 그 속에 위대한 사상들이 숨죽이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기업가가 되고 싶다면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 속에 위대한 기업가가 되는 방법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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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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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제부턴가 내 영혼이 책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된 것 같다.

 계획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그저 '그냥' 고른 책에서 최근에 읽었던 다른 책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이 느낌은 참 신기해서 마치 '지난 밤 꿈 속에서 그 책을 고르고는 보이지 않는 실을 이어둔 것 같은',  물고기를 낚은 강태공을 멀리서 보면 투명한 낚시줄은 보이지 않아서 끌려오는 물고기가 마치 허공을 날아 강태공을 향해 헤엄쳐가는듯 보이는 마법을 보는 것 같다.

 

어제 읽었던 책에서 이야기 하기를 양서를 골라서 읽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양서를 고르기란 쉽지 않고, 타인이 추천해준 책이라해도 내게 꼭 맞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기에 무조건 많이 읽는 사람에게 더 많은 양서가 찾아간다고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난 행운아다.

 소 뒷걸음질에 쥐잡듯 골라잡는 책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드는 것 뿐이니 말이다.

 

사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의 특가 코너에서 무더기로 샀던 책 중의 한 권이다.

 사두고 2개월은 족히 지나버린 지금에야 읽게 된 것이 참 미안하지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시기가 지금이었기에 지금서야 내 손에 닿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이 책의 저자인 포리스트 카터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고 한다.

 원제가 '할아버지와 나'였다고 하는데 그 제목도 어울리긴 하지만 지금의 제목이 더 어울리는 이야기였다고 생각된다.

 

이야기는 '작은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체로키 인디언이 부모님을 여의고 난 후 음, 5년? 정도의 기간에 걸쳐 체로키 인디언으로 숲에서 자연과 함께 공생하는 삶을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 윌로 존, 파인 빌리 그리고 유대인 보따리상 와인씨를 통해 배우고 경험한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왜 제목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인지 알 수 밖에 없게 된다.

 

'인디언',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기 전에 그 땅에서 낭비도 사치도 부의 축적도 없이 숲과 동물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문자 그대로 평화롭게 살던 무던한 종적을 이르는 이름이다.

 백인들의 무자비함을 적나라하게 적어 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 책 속에는 그들을 적나라하게 원망하는 이야기는 없다.

 되려 자신들을 그토록 괴롭히고 차별하고 멸시하는 백인들을 인디언들은 가엾게 여겼던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백인들에 대항해 칼과 활로 저항하고 전쟁에 참여했던 부족도 있었지만 많은 인디언들은 '순응'하고 그 원수같은 백인마져 용서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 '순응'이 무력과 강압이라는 폭력에의 무력한 '순응'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통해 이어져 내려온 천성적인 '순응'이라는 것은 기억해야겠지만 말이다.

 

'체로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체로키'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그 영혼을 감지했고, 그 영혼과 소통을 통해 풍족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는 자신들에게 있어 필요한 만큼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자연을 존중하고 생명을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고 가르쳐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물질문명에 물들어버린 우리들은 그들을 볼 때 미개하고 가엾고 미련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배운 것, 교육의 관점 자연과 사람 세상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인디언' 그들만이 가진 신비한 영적 능력들(나무, 바람, 물,  산짐승, 들짐승 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밤 하늘의 별을 통해 수백리 거리를 뛰어넘어 약속된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은 본래는 우리도 지녔던 것이었으나 물질 문명에 물들어 완전히 잊혀져 버린, 잃어버린 능력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었다.

 

'인디언'들은 특별히 정규적인 교육체계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무엇을 강요하거나 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 자체를 통해 배우고, 어울려간다.

 

그들의 배움의 과정만큼 신기했던 것은 고난을 대하는 태도였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정말 죽을만큼 괴롭고 힘들어하게 되는 이유는 그 일을 나라는 존재와 동일시 해버리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돈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난 슬프다.

 

사실 생각해보면 '돈'을 잃어버렸다고 내가 기분 상할 이유는 없다. 뭐, 그 돈이 정말 중요한 수술비라든가 급히 갚아야하는 빚을 갚기위한 돈이었다면 안타깝고 슬플 수 있겠지만 그것은 돈을 잃어버려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수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인디언의 영혼을 분리하는 방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의 마음이 있고, 영혼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의 고통과 영혼의 고통을 분리할 수 있었고, 몸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심지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영혼은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이번 생이 끝나더라도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열살도 되자 않은 어린 '작은나무'가 백인 목사에게 모진 매를 맞게 되는 일화가 나오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엉엉 울다 기절해버렸을 것이다. 등에서 피가 흘러 신발에 고일 만큼 맞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작은나무'는 울지도 기절하지도 않는다. 몸에서 영혼을 떼어 놓는 비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단적 예일 것이고, 우리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재주는 익히기 힘들 것이다.

 

다만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슬픔, 고난, 곤란, 시련을 본래의 나와 겹쳐놓고 생각해서 괴로움에 빠지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자.

 우리 영혼의 짐을 굳이 무겁게 만들지 말자.

 

인디언들은 '교육'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기술, 다른 하나는 가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는 가치라고하면 돈의 가치를 중시할 뿐 진정한 가치는 외면해버리고 그런 자세로 기술을 배우다보니 문제가 자꾸 불거지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가치를 무시한 채 현대적이 되면 사람들은 그 현대적인 것을 오용하게 된다."고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발전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빠른 성장에 치중하다보니 균형을 잃고 올바른 가치를 견지하지 못한 상태로 기술을 운용하다보니 사회는 패륜으로 물들고 정치는 부패의 연속선 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부는 편중되고 집중되어 빈부의 격차가 날로 커지는 가지면 가질 수록 불행해지는 삶을 향해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무시무시한 열차에 올라버린 모양새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자연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 세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작은나무'와 체로키 인디언 그리고 '작은나무'를 사랑한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에 담긴 영혼을 따스히 해주는 온기가 추운 겨울 우리들의 영혼도 따뜻이 안아주길 바래본다.

 

"그게 이치란 거야.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 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거야. 흑표범인 파코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너도 꼭 알아두어야 하고." 26쪽

 

반면에 링거는 예전에는 뛰어난 사냥개였지만 지금은 너무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꼬리를 질질 끌고 다녀 볼꼴 사나운데다 옛날만큼 잘 보거나 듣지도 못했다. 할아버지가 링거를 모드와 짝지어준 것은, 링거가 모드를 도울 수 있게 하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이 일은 링거에게 뿌듯한 자신감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옥수수밭에서 일하는 계절이 되면 링거는 목을 한껏 치켜세운 채 네 다리를 씩씩하게 내딛으면서 주위를 돌아다니곤 했다. 43쪽

 

나는 자연에서, 어머니인 모노라에게서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산에 온 첫날 밤에 할머니가 노래하신 것처럼 자연 속의 모든 것을 형제자매로 가질 수 있었다. 230쪽

 

선물을 받는 쪽은 자신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받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선물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하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었다.  238쪽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하면 받는 사람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허세와 우월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해야 할 일은 받는 사람의 자립심을 일깨울 수 있는 작은 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252쪽

 

만일 이런 가치들을 배우지 않으면 기술면에서 아무리 최신의 것들을 익혔다 하더라도 결국 아무 쓸모도 없다, 사실 이런 가치들을 무시한 채 현대적이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그 현대적인 것들을 잘못된 일, 부수고 파괴하는 일에 더 많이 쓴다고 하셨다. 261쪽~262쪽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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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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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소통하고 말겠다! 라는 외침을 내놓은지 4개월이 되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늘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과 말들로 나를 괴롭게 만드는 존재들로 늘 거북하거나 혹은 귀찮은 존재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깨닫고 보니 내가 그들을 떼어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서 떨어져나간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결국 괴롭고 슬픈 것은 나 혼자. 외톨이가 되어 갔다..

그리고 결국 그런 삶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소통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낯 바꿔서 어제와 전혀 다른 나~! 쨘! 하기는 또 어색하고 무안해서 내 안에서부터 바꿔나가기로 했다.

 그 이후로 다시 시작한 것이 독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를 안에서부터 바꿀 수 있는 자극과 가르침이 될만한 것은 '책' 이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무슨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벽에 부딪혀 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머리를 굴렸다.

 오랜만에 안쓰던 쪽으로 생각의 물고를 터보려했더니 그 물고 뒤에 잡다히 걸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좀처럼 트이지를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해보기로 했다.

 소셜네트워크의 시대. 인터넷 속에는 내공이 깊은 독서가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주워들었었다.

 그러고보면 뭐든 주워듣고 볼 일이다. 그 것으로 막혔던 물고가 시원하게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으니 말이다.

 

이제 조금 시야를 넓혀보기로 하고 보니 다시 막막하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왜 읽어야 효율을 감동을 기쁨을 배움을 깨달음과 변화를 더 크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요즘 낯설지만 점점 자주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통섭』이라는 말이 바로 그 것이다.

 내 가진 깜냥으로 해석해보면 조화, 융합과 비슷한 의미인 것 같다.

 

이 책 '통섭의 식탁'을 간단히 말하면 '생각했다, 노렸다, 얻었다, 읽었다, 알았다'의 과정의 연쇄였다.

 생각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였고, 노린 것은 인터넷의 서평 이벤트였고, 읽은 것은 물론 '통섭의 식탁'이었고 알게 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할 것인가 였다.

 이만하면 참 잘한 독서 아닐까싶다.

 

나름의 질문을 가지고 읽었고, 그 나름의 질문에 답을 얻었으니 내게 있어 최고의 독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겠다.

 

지은이인 최재천 교수님은 스스로를 '책벌'이라고 칭할 만큼 책을 가까이하고 욕심내는 사람이다.

 파벌, 재벌, 학벌 등의 말이 가지는 '벌'의 부정적 이미지를 넘어서 책을 즐기고 아끼고 욕심내는 새로운 '벌'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인 만큼 독서의 내공이 얕을리가 없다.

 

본래 생물, 동물과 관련된 연구를 업으로 삼는 교수인 그는 "알면 사랑한다!"라는 알듯 말듯 한 좌우명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말하길 "자연도 알아야 사랑하고 보호하게 되는 법이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섭의 식탁'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사람들이 알고 아끼고 사랑하게 될 수 있도록 해줄 책들에 대한 '추천사'를 모아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제목도 제법 특이하지만 구성도 특이하다.

 마치 만찬을 즐기듯 코스로 나누어 둔 독특한 모양으로 책들을 모아두고 분류해 둔 것이다.

 이런 형식의 책이 모든 사람의 식성에 맞을런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 페이지 배경에 사각형이나 줄무니가 들어가서 활자와 겹쳐보이는 페이지들을 제외하고는 제법 식성에 맞았었다. 하긴 내가 잡식성이라 어지간해서 식성에 안맞을리가 없지만 말이다.

 

책 머리에서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 책은 '과학자의 서재'라는 책에서 미처 진열하지 못한 다른 책들의 소개가 모아져 마련된 책이다.

 '과학자의 서재'라는 책을 읽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지만 지금은 '통섭의 식탁'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서론이 무척 길어져버렸지만 나의 감상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얻은 결론은 "알아야 사랑하겠구나."였다.

 

 나름대로 독특한 구성을 통해 책을 묶어두었는데 이런 조금은 식상하고 진부하기까지한 감상이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다.

 정말 말 그대로 "알아야 사랑하겠구나."라고 생각했으니.

 

통물과 생물을 주로 연구하는 분야에 계신 교수님이라 그런지 자연과 생태 생물들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뜨겁고 무척이나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예사로 치부하는 일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나, 우리가 보호해야 할 생물들과 그 정당성을 일깨울 수 있는 이유들을 이 책 속에 소개된 책들을 통해 배울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잡식이라고 해놓고선 극도의 편식을 일삼아 왔던 나의 빈약한 독서의 영역 문제였다.

 '통섭의 식탁'에 소개된 150권이 넘는 책 중에 "아, 이 책~ 나 읽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이 다섯권이 되지 않았다.

 아, 안타깝다. 그래서 전부 메모했다. 이 책 속에 한번이라도 이름이 나오는 책 제목 전부를.

 

사실 메모했다고 당장 읽기 시작하게 될 것 같은 만만해보이는 책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떠오른다.

 '기획 독서'

 

우리는 보통 취미, 혹은 취향에 따라 책을 고르고 읽는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사고 영역을 제한하게 되는 족쇄가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나도 그랬다.)

 독서가 괴로움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불과 두달 전까지도.

 그럼에도 저자인 최재천 교수님은 '기획 독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획 독서'가 통섭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통섭'을 쉬운 말로 하면 '짬뽕'혹은 '비빔'이 될 것이다.

 갑자기 뭔가 없어보이는 말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사과 말씀을 전하며, 우리나라의 비빔밥과 우리가 밥상에서 밥과 반찬을 먹을 때의 그 불규칙적인 조합을 들어 "우리 나라가 어쩌면 섞는 것 하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 최재천 교수님의 말을 더해본다.

 

책은 효용성에 따라 읽는 사람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그치는 책이 있는가하면, 그 책을 읽고 그 책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효용성에 급격한 격차가 발생하는 특별한 책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유형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잠재능력을 가진 책일 수도 있고, 에이 뭐 이런 책이었어? 하며 어딘가에 처박히는 처량한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은 책들을 추천하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고 주로 생물학과 과학에 관계된 서적들임을 이야기해두기로 한다.

 조금 전문적인 내용도 들어있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 대부분이겠구나 싶은 제목들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은이의 말을 조금 적어본다. 

 "과학의 대중화 보다 대중의 과학화" 

 

요즘 서투르게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단순히 교양 위주의 과학 서적들이 판을 치고 있어 궁극적으로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효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기에 섣불리 수준을 낮추어 과학을 대중화 하기보다 대중의 수준을 조금 높여 대중을 과학화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긴 한데, 이 말에 대한 호응이 뜨거울지 비난이 뜨거울지는 잘 모르겠다.

 

이쯤에서 슬슬 결론을 생각해야겠다.

 

이제 세상은 새로운 형태의 인재를 원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인재가 바로 '통섭형 인재'다.

 하나의 학문에 그치지않고 다른 학문들에도 조예를 가져야만 두루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인재가 된다는 것이다.

 한창 산업이 발전하던 시대에는 이른바 '평생 직장'이 모두의 목표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십년 직장'을 목표로 해야 하는 상태고, 이 후에는 그보다 더 짧은 기간에 직장, 직업이 달라질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지은이는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발전과 개발을 명목으로 행하는 환경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 행위를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찾아올 재난, 재앙들도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영원하지 않은 유한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에게 너무 가혹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 기준에서, 우리 위주로, 현재 상태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러다보니 오래도록 이어지던 조화가 깨어지고 생태계도 생물의 다양성도 깨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재해, 혹은 재난, 기상이변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보내는 것은 자연일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일까?

 그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만들고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신기한 책이었다.

 

 "알면 사랑한다!"라는 그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우리와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해도 일체의 해가 나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함 때문이다.

 

우리는 조금 더 자연과 생명과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생판 모르는 남을 사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알아야 사랑하던 미워하던 할 것 아닌가? 모르는 것이 약이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아는 것이 힘이고 아는 것이 사랑인 시대인 것 아닐까?

 

고대의 학자들을 보면 철학과 의학과 건축 미술을 두루 익히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세분화 되고 자신의 분야에만 정통하면 최고가 될 수 있는 시대로 변화했다.

 어느 시대에나 필연적인 변화에 대한 요구가 있다.

 서서히 떠오르는 '통섭'이라는 화두가 그 필연적 요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던 책이었다.

 나의 무관심의 영역에 잠들어 있던 것들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는 좋은 계기가 된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제 우리 "알고 사랑해보자."

 

 

시애틀의 추장의 연설문 :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온 것들을 당신들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가르치십시오. 이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ㆍㆍㆍㆍ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지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가 대지의 일부라는 것을. ㆍㆍㆍㆍ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 땅의 아들딸 모두에게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의 그물을 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 그물을 이루는 하나의 그물코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의 그물에 저지르는 일은 곧 우리 자신에게 저지르는 일입니다." 236쪽~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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