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 세계적인 뇌과학자가 우울한 현대인에게 보내는 감동과 희열의 메시지
게랄트 휘터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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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인적으로 책의 제목에 "~하는 법", 혹은 "~하는 책"이란 말이 들어가면 경계모드에 들어가게 되는 성향이 있다.

세상만사를 꿰뚫고 있다는 듯 거만하게 느끼는 것은 내 옹졸한 성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과연 "답"이 있기는 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한 자연스런 반동이기도 하다.

 

반대로 책 제목이 내게 질문을 던져올 때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지게 된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을 내놓기 위해.

그 답이 불변하는 진리도, 확정적인 사실도,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의견도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전혀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끝없이 의문을 가지고 자신과 세상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성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책 속 이야기와 상통하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 던져졌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철학의 존재 이유도, 과학의 존재 이유도 결국 인간이 가지는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시작이 좋았던 책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이 책은 먼저 '우리'를 진단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근원을 밝히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진단을 통해 '우리'의 성장 과정을 따라 가 본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 오기도 하고, 현재에서 멈추었다 다시 내려가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어떤 '문제점'들을 발견해 낸 저자는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안도 제시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이것이 정답이다라던가, 이렇게 하면 분명 좋아진다는 확정적인 답안은 아니다.

모든 것은 개개인, 각각의 사회, 그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형태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무엇도 확정적일 수는 없다.

그 누가 말했듯 "변한다는 사실 이외엔 모두 변한다."

 

되도록 책 내용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론 하나는 이야기 하기로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이해'다.

 

무엇으로 인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현재라는 결과는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하지만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말 장난 같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의 책임이라고 꼬집을 수 없지만 모두의 책임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 책만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우리'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개인주의시대, 모든 책임과 의무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당연시 된 시대다 바로 현대다.

그런 이유에서 많은 책들이 개인의 능력 계발이나, 성격의 개선, 성향의 유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한 마디로 꼬집자면 "현재의 상황은 너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니까 해결도 네 손으로 해라!"는 매몰찬 내침이나 다름없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내 경우 처음 그런 책을 마주했을 때 느낀 것은 어떤 '절망'이었다.

아, 내가 이렇게 해왔기에 이 모양이었던 거구나 하는 허탈함과 후회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달라지겠어!"라는 허허로운 다짐이었다.

 

우스운 것은 더 많은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변해갔다는 것이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하는 법'이라는 책을 경계하는 구체적 이유가 바로 현 상황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게 되는 결과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네 책임이 아니야.", "네가 잘못 된 것이 아니야.", "네가 나쁜게 아니야."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해주는 책이 필요하다.

 

모양은 다르지만 이 책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던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이다. 요즘 나온 스마트 폰이 메모장으로 쓰기엔 제격이라 유용히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메모를 전부 이 곳에 적으려고하면 가뜩이나 긴 감상 읽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겐 독이 될 것 같다.

추천하고 싶은 책일 수록 짧게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왠지 우습기도 하다.

 

좋은 책이다.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 인식해야 하는 것, 우리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동기부여의 함정을 일러주는 것, 그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 열광하자. 삶과, 세상과 나에게.

 

책 속에서 발췌한 이야기로 마치기로 한다.

181쪽

혼자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과 맺어져 있고,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한다. 또 적어도 인생 초기에는 누구나 타인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생존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묻는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가 얼마나 남들과 맺어져 있는가에 우선 답해야 할 것이다.

유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그런데 유대는 종속이 아니다. 인간은 상대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유대감을 느끼도록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물이나 식물 관계를 만들어 가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관심을 쏟거나, 아니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들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가령 식량, 생활공간, 관심, 힘, 지식, 능력, 경험들을 말이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유대 속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 우리는 '우리'지만 종속 된 '우리'가 아닌 자유로운 '우리'다. 잊지 말자. '우리'가 진정한 '우리'로 존재 할 때 비로소 진짜 '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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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호의 고전강독 1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최고의 인생을 묻다 공병호의 고전강독 1
공병호 지음 / 해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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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할 때에는 체계와 규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고전을 읽기 시작한 이유가 그러한 체계와 규모를 갖춰나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물론 학문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 삶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믿기에 인류의 오랜 지혜를 빌리고 싶었다.

 

 

그 중 소크라테스는 단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마음을 다잡고 난 후 가장 처음 만난 고전의 주인공이 소크라테스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철학과 인문 역사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비중을 고전을 읽으면 읽을 수록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었고 가르쳐진 고전답게 읽는 이, 가르치는 이마다 조금씩 그 견해가 달라진다.

'실용 인문'분야에서 많은 저서를 내놓았고 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공병호'님은 어떻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읽었을까 궁금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은 먼저 읽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때 내가 느꼈고 깨달았던 느낌과 생각들을 책에 담긴 저자의 느낌과 생각들과 비교해보기도 하고 또 공감하기도 하면서 읽으니 절로 흥이 났다.

그러면서 더 깊이 느껴지고 더 많이 깨달아지는 효과도 누렸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고전에서는 그야말로 아는 것이 힘인 듯하다.

읽어보지 못했던 메논과 알키비아데스I 은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좋은 단서가 되어주었다.

 

 

전공자도 아니고 본격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읽지 않았었음에도 이 책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나, 행동, 이론들에 대한 해석은 무척 탁월하다.

내공이라는 것이 결코 한 분야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의 이해력과 분석력에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는 깊은 삶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까지 물러서지 않고 지켜냈던 그의 신념과 정의를 다루고 있다.

훌륭한 삶 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소크라테스의 삶에서 저자는 최고로 위대한 삶, 훌륭한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시대와 현재 우리 나라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정의'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지난 총선과 12월 19일에 있을 대선을 두고 과연 소신있는 정치가 가능한가에 대해 묻는 저자를 보며 안타까워해야 했다.

정치적 소신을 지킬 수 없는 정치 환경이란 너무나 비극적이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도 소신없이 다수에 이끌렸던 방만한 아테네의 정치였다.

처음부터 불의와 타협하고 싶어하는 정치인이 있겠는가?

공허하게 들리는 물음만 남는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정의와 훌륭한 삶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가면서까지 지켜냈던 소크라테스의 정의는 상황과 조건과 타협할 줄 모르는 변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탈옥을 종용하는 크리톤에게 이야기하는 탈옥이 정의롭지 못한 세가지 이유만 봐도 알 수 있다.

"첫째, 탈옥 자체가 국법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에 나쁜 일이다.

둘째, 자신의 이 같은 행위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불법적인 행동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에 나쁜 일이다.

셋째, 자신이 평생 올바르다고 생각해 왔던 정의의 원칙(보복하지 않는 것, 합의한 것을 지키는 것)을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나쁜 일이다."

 

 

저자는 이와같은 소크라테스의 신념과 정의로운 삶이 비록 사형이라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영원불멸한 이름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흔히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지만 난 이부분을 보면서 "악법도 정의다"란 생각을 했다.

 

 

"악법이라면 그것을 정당한 절차를 거쳐 개정하여라. 하지만 개정되기 전까지는 그 법을 따르라."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문답법과 산파술을 이용해 아테네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치고 다녔다.

어떤 사상을 가르치지 않았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뿐이라고하며 스스로 지자를 칭하고 현자라 일컫는 이들의 무지함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그가 반박하는 것은 반박당하는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의견이었음에도 그들은 자신의 인격이 모욕당했다고 느꼈다.

후에 소크라테스가 아뉘토스에게 고발당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생사관과 정치관도 잘 정리되어 있다.

 

 

만인 중에서 가장 탁월하면서도 진정으로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던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교만하지 않은 겸손함과 순수함이 소크라테스의 삶을 탁월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결국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훌륭한 삶'이다.

정의관, 생사관, 정치관, 인생관, 그리고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는 삶.

무엇 하나 쉬워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의 훌륭함과 탁월함의 본래 형상이 저 세상에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있다는 것은 알지만 단지 볼 수 없을 뿐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믿어볼 일이다.

 

 

제법 찬찬히 내용을 씹듯 읽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감상을 적으려니 막막하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믿음, 그리고 앞으로의 비젼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강한 자신감과 함께 자부심을 보이고 있다.

자신에게 당당하며 자부심을 느끼지만 교만해지지는 않는 성품이 잘 드러나있어 인상적이었다.

 

 

시련은 그것을 넘어선 자에게 큰 축복을 내려준다.

지금이 시련이라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우리 국민이나, 우리 나라에도 그러하다면 진정 제대로 고전을 읽을 때다.

 

 

인문 고전이 어떤 열풍이 되어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시류에 부응하려는 일시적 상술의 주무대가 되어서는 곤란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책이기도 했다.

 

 

자칫 딱딱하고 괴롭게 느껴질 수 있는 인문 고전에 새로운 활력이 되어주길 기대해본다.

 

 

 

 

[이 감상은 북곰 서평 이벤트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주관적 감상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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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0
노자 지음, 이강수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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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網恢恢 疏而不失

천 망 회 회 소 이 부 실

하늘의 그물은 넓고도 커서 성글지만 빠뜨리지 않느니라.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사람이 쳐놓은 그물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건만, 하늘이 쳐놓은 그물이야 오죽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쳐놓은 그물이란 것이라면 법망에서 인망, 욕망 같은 것들 일테지.

사람의 욕심이란 한결 같지 않아 어떤 그물에 갇히기를 소망하고, 어떤 그물은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 발버둥친다.

 

재주 좋은 이들은 빠져나가야 할 것은 용케 빠져나가고 얽히고 싶은 것엔 또 번번히 걸리는 기가막힌 솜씨를 뽑내기도 한다.

하지만 하늘의 그물을 어찌 피해갈 수 있을까? 事必歸正(사필귀정) 하늘의 그물은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을 진저.

 

그러나 부디 인망이여, 욕망이여 나를 놓아주기를.

미련한 미련도 내려놓을 수 있기를.

 

聖人終不爲大 故 能成其大

성 인 종 불 위 대 고 능 성 기 대

성인은 끝내 일이 커지게 하지 아니하는지라, 그러므로 그 위대한 일을 완성할 수 있다.

 

많은 것을 미루고 또 미루다 한꺼번에 하려고 발버둥치다 결국 나가떨어지곤 하는 내겐 뼈아픈 구절이었다.

 

허허, 참.

모두 합하여 81장.

그 중에서 마음에 울린 구절들이 하나같이 현재의 나와 관련된 구절들이라는 것이 이젠 새삼 놀랍지도 않다.

 

그 사람의 경험과 현재의 마음, 기분, 하고자 하는 바램들까지가 책을 읽는 시선을 달리한다는 것을 강렬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 뿐이다.

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졌다고 믿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늘 달리던 제자리를 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처럼 기운이 빠지는 때가 있을까?

 

지혜란 또한 실천인 것을.

모든 것이 모든 앎과 깨달음에서 행함을 빼면 그저 날을 다한 꽃잎처럼 살랑이는 봄 바람에도 흩어지고 만다는 것을 왜 잊었던가.

 

진 꽃잎은 바람이 한 곳에 몰아넣고 한번, 두번 밟히고, 한날, 두날 지나면 찬연한 색을 잃고 흙빛을 머금게 된다는 것을.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민 지 종 사 상 어 기 성 이 패 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거의 이루어질 무렵에 그것을 망친다.

 

왜?라고 물을 것도 없다.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이것은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무엇인가를 인위적으로 하기 위해 자연적인 것을 망치고 만다는 것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본래의 자연스러운 것은 망가져간다.

그리고 이제 되었다. 이루었다 싶은 순간엔 이미 본래 원했던 것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언제나 거의 이루어질 무렵에야 그것이 망가져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는 서글픈 결말을 이름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자 했던가, 무엇을 바랬던가하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

아니, 잃어버렸다면 더 늦어버리기 전에 찾아와야겠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남편의 시계줄을 사기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던 델라와 델라의 아름다운 금발에 어울리는 머리핀을 사기 위해 시계를 저당 잡혔던 짐의 이야기는 분명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그들은 결국 무엇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포기했던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가난이 지겨워 악바리처럼 굴어가며 온갖 모진 일 다하고, 온갖 못된 짓 다해서 부자가 되었지만 사람은 떠나고 깊은 병만 남은 어떤 부자 이야기처럼. 그는 무엇을 위해 돈을 벌었던 것일까?

초심, 처음 그 소망을 가졌던 마음을 잃지 말아야지.

 

知我者希 則我者貴

지 아 자 희 즉 아 자 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적을수록 나는 더욱더 귀중해지는지라.

 

타인을 위해 살아가지 말자.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지 말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지 말자.

 

결국 하늘에서 성인을 거쳐 나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본래의 나를 잃지 않는 것.

사람들이 하는 일이 언제나 이루어질 무렵에 망쳐지는 것도 결국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일테지.

나를 아는 것.

소크라테스도 나를 알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삶이란 참으로 신비롭다.

삶 속에서 만나는 책도 놀랍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책을 발견하는 내 삶이다.

 

삶이 먼저인 것인지 내가 먼저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고, 살아지는 나의 삶이다.

 

망설임이 크면 나아갈 수 없다.

걱정이든, 미련이든, 두려움이든 나를 잃게 만드는 것은 모두 삶을 위협하는 적이다.

하늘은 세세한 것까지 우리를 말리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것이 되어야 할 모습으로 되고, 이루어져야 할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성인이 무위로써 위대한 일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결국 본래의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

노자는 오랜 역사를 지내오며 수 없이 많은 형태로 해석되어 세상에 뿌려졌다.

 

놀라운 것은 서양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동양 서적이 노자라는 것이다.

아마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이렇게 무위와는 거리가 먼 세상에 어째서 노자의 무위사상이 담긴 이 책이 이렇게 많이 팔릴 수 있었던 것일까?

 

물으나 마나 한 물음이겠지만, 결국 다들 자신을 찾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 사람에 얽매이지 않고, 욕망과 재앙을 부르는 욕심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으로의 회귀를 본능적으로 소원하는 것이리라.

 

아쉬운 것은 내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

십분의 일도 아니 백분의 일이나 노자를 이해한 것일까?

욕심내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다시 읽는 노자는 또 어떻게 다가올까?

그 날에는 어떤 구절이 내 마음을 울릴까?

 

이것이 고전의 매력.

끝없이 변화하면서, 끝간데 모를 가능성을 품고있는 나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

금새 해소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정리하며 적어가는 시간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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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죄의식으로 고통받는가
캐럴라인 브레이지어 지음, 유자화 옮김 / 알마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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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애초에 '죄의식'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곳이 어디일까?

최초에 인류의 죄를 논한 것은 누구일까?

왜 그들은 '죄의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는 인간을 구속하기에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이 책은 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성장 소설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작가의 나레이션이 조금 많이 가미된, 그런.

 

 

주인공은 열살 된 소녀 '조안'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빌면 조안은 1960년대 런던 남쪽에서 자라며 본 아이들과 비슷하다고 한다.

배경을 모르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끝까지 모를 이야기도 있는데 이 책이 그러하다.

이야기는 '조안'이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폐차장'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폐차장은 그 시절에는 '갱'들의 주 활동 무대로 위험함과 비행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조안과 아이들의 부모는 그러한 장소에 가지 말 것을 늘 가르친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자신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하고 또 친구들과 공유하는 그들만의 공간에 대한 욕구가 부모의 제한을 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폐차장을 배경으로 어울리는 아이들 중 '조안', '사이먼' 나중에 새롭게 그들의 그룹에 들어오는 '웬디'의 세 아이의 이야기를 '조안'을 중심으로 풀어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어른들이 이해하는 방식과 다르기는 해도 무엇인가 잘 못되었다거나 잘 되었다는 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들이 아이들의 감정을 좌우한다.

 

 

사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죄의식이 정말 죄에 대한 의식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감정의 갈등인지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혼란과 갈등은 성장하고 살아가며 누구나 느끼게 되는 어쩌면 당연한 것임에도 왜 저자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지적하는 것일까?

 

 

먼저 이 책의 저자가 영국이라는 카톨릭 국가에서 성장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저자는 카톨릭 신자는 아니며, 오히려 불교도이다.

하지만 원죄 의식이 깊숙히 뿌리내린 사회에서 성장하다보면 자연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또 하나는 경계하고 싶은 현대의 경향에 대한 것인데, 무엇이든 '병'으로 만들어버리기다.

과거에는 자연스러웠던 것도, 현대에는 어떤 병이나, 신경증이 되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오죽했으면 세상에 치명적인 '질환'을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학습된 죄의식에 대한 것이다.

아이들은 혼란을 느낄 때면 부모나 주위의 어른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부모의 훈계, 경계, 금지와 처벌과 지시에 따라 점점 선악을 분류해간다.

여기서 문제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혼란에 대해 적절한 기준을 세워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분이나 분위기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선악의 판단, 가혹한 처벌, 모호한 태도는 아이들의 혼란을 부추기게 된다.

 

 

책 속의 일화를 들어보면 '사이먼'은 소극적인 아이다. 외동아들이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부모님에겐 조금 위축되어 있다.

어느날 사이먼은 아이들과 '폐차장'에서 놀다 새로 산 재킷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망설임 끝에 재킷을 잃어버린 사실을 부모님께 이야기 했을 때는 이미 절망의 끄트머리에 선 기분이 되어있었다.

"난, 이제 끝이야. 엄마가 날 내쫓을지도 몰라" 뭐,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사이먼이 예상했던 엄마의 훈계도 처벌도 없었다. 엄마 또한 어린 시절에 비슷한 일탈을 경험했고 그 때 느꼈던 아픔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이것이 사이먼에게 큰 고뇌를 안겨준다.

"내가 너무 엄청난 실수를 해버렸기 때문에 엄마가 나를 혼낼 기운조차 잃어버린거야.", "내가 엄마를 망가뜨렸어." 이정도 기분일까?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그 순간이 지난 후에 더 큰 불안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나?

차라리 몇대 맞고나면 후련했던 기억은?

 

이렇게 또 하나의 죄의식이 태어나고 만다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렇게 심각한듯 여겼던 것도 곧 잊혀져 간다.

잊혀져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아이는 안정적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혼란과 다시 마주하면 아이의 평온한 마음은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작지만 깊이 남을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죄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소소히 풀어가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과 판단, 가족들간에 혹은 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죄의식의 연쇄, 아이들의 심리, 무죄방면이라는 기대되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느낄 수 있는 죄의식, 죄의식으로 인해 잊혀지기도 하는 기억, 자신이 겪어야 할 시련을 타인에게 전가했다는 죄의식, 후회를 닮은 죄책감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내겐 이 모든 것이 성장 과정에서의 필연적 과정인 것처럼 보인다.

모든 책임을 내게 지울 필요가 없다. 난 그렇게 되길 원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될 줄 몰랐을 뿐이다.

 

죄의식은 무한히 증식하는 바이러스 같다.

한 사람이 느끼는 죄의식은 마치 감정을 타고 퍼져가듯 급속도로 확산된다.

죄의식에 어떤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있다.

 

 

어쩌면 저자가 의도한 것도 이런 깨달음 인지도 모른다.

독자들도 나름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또 그 과정에서 많은 혼란과 마주하고 또 죄의식도 느끼고 죄책감에 눈물 지어야 했던 날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타인의 감정을 알기란 쉽지 않다.

부모라고 해도 자식의 깊은 심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책은 아이들이 읽을만한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의 아이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아이들의 혼란과 아픔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이 쓰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멀리 간 것이 될까?

 

어린 시절에 깊숙히 각인된 죄의식은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고 자라난 후에도 어떤 심리적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히스테릭하거나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아이들은 분명 어른들과 같이 현상과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섬세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부모와 친구, 주변 사람들의 태도 하나에서도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것이 고통스러워 해야 할 죄의식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또 누구나 거쳐가는 일임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랑을 주고 배려해 나가야겠다.

 

어린 아이가 심각한 죄의식에 시달린다거나, 모든 것에 소극적이어서 천진함을 잃어버리고 너무 일찍 어른처럼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기에 이 책이 도움이 될 것 같다.

 

 

 

ps) 이 책을 읽으며 괴로워 해야 했던 이유는 죄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활자가 가늘어 보인달까?

하여튼 평소에 읽던 크기보다 왜소해보여 가뜩이나 가볍지 않은 내용과 촘촘한 문자들 속을 헤쳐나오느라 제법 고생을 했다.

어이 없는 문제에 대한 지적인지 모르겠지만, 폰트 사이즈가 조금 크거나 글자가 조금 굵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적어본다.

 

 

 

[이 감상은 네이버 북카페의 서평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을 통해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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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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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감상을 적기 전에 먼저 표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표지였던지라 한참을 들여다보며 무엇이 그려져있는지 헤아려보고는 "책을 다 읽은 이후에 잊지 말고 꼭 표지 이야기를 적어보자"고 다짐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직감이랄까 뭔가 아프리카의 현실을 무척 잘 알고 있는 이의 그림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휴대 전화'였다.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느냐고? 아프리카에 휴대 전화가 있다는 거다.

표지 곳곳에 휴대 전화가 널려있다. 들고 있던 놓여있던 휴대 전화가 많다.

본문에서도 언급하지만 아프리카의 휴대 전화 시장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보급 속도가 급증하고 있다는 현실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벌을 서고 있는듯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와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있는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표지에 나오는 수 많은 학생들 중에서 무릎꿇고 있는 아이와 몇몇 아이만이 '신발'을 신지 않고 있다.

줄을 세워놓고 신발을 신지 않은 아이를 벌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본문에서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아프리카의 빈부 격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이야기는 확실히 전해졌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어딘가 혹은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다.

그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그 손짓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본문을 통해 해소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아쉽게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하나만 더 적어보자면 일부 '권위' 있어보이는 이들이 들고 있는 '몽둥이' 또한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일까?

그 몽둥이는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위력을 행사하게 될까?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판단해보자면 그들은 일종의 '유력자'임에 분명하다.

아무리 사소한 자리라도 '공직'에 있으면 상황에 따라 그들은 무한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것 또한 아프리카의 어두운 면이다.

관광인지 뭔지를 위해 온 것 같은 이질적인 버스나, 왁작지껄해 보이는 시장, 거리를 누비는 염소, 선생님 같은 이 둘에 딸린 많은 학생들, 딱 보기에도 열악한 교육 환경들이 한 눈에 아프리카의 현재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예감은 위에 이야기 한 것처럼 본문을 통해 확인 받은 것도 있고 풀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아주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표지를 만난 것 같아 기뻤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각은 크게 '동정'과 '부정'의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극빈국'에 속해있고, 세계의 지원이 없이는 하루 한끼는 커녕 이 삼일에 한끼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발에 채일만큼 많은 나라.

엄청난 출생률과 많은 노동력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질병이 판치는 나라.

특히 최근 몇년 동안은 '소말리아 해적'으로 대표되는 무법지대 혹은 범죄의 나라.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단편적인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였다.

왜 그들이 굶주리는지,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지원이 보내지고 있고, 어떤 발전상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고 지냈다.

그저 가끔 모자 뜨는 일에 참여해볼까?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 최대의 관심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그 관심마저 곧 시들해지고 귀찮아졌다.

아프리카는 많은 시련을 거쳐온 나라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그들에겐 '저주'나 다름 없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노예로 물건처럼 세계에 팔리거나 가축이나 다름 없는 단순한 도구처럼 쓰여졌다.

그들을 지켜주어야했을 지도자와 왕들은 그들에게 제공되는 재보와 신문물에 눈이 멀어 자신의 백성을 망설임도 없이 팔아넘겼다.

그리고 수 백년간 그러한 행위는 아무 거리낌 없는 관행이 되고 민족성이 되어 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수 백년 후 그들은 자신들을 점령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던 나라들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버렸다.

오래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들에겐 뚜렷한 '목표'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그들에게 남은 것은 '비극적 현실' 그것 뿐이 되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프리카를 착취했던 서구인들은 아프리카인이라는 인종 자체에 '결함'을 새겨왔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열등하며 지배를 받고 부림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다방면에서 증명하려 했다.

성경의 해석이 그렇고, 진화의 과정의 이론을 세우는 과정이 그러했다.

인종과 문화적 차별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근원 그 자체를 경멸하고 천시했으며 무시했다.

웃을 수도 없는 일은 아프리카인들의 의식에 그러한 서구인들의 의식이 박혀버렸다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희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비극의 땅. 그것이 아프리카다.

아프리카의 비극을 부추기는 것은 착취와 갈취를 일삼아온 서구의 나라들만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지도층에서 크게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못사는 나라, 가난한 나라가 거의 그렇듯 아프리카의 빈부격차는 경악할 만하다.

어떤 나라의 대통령은 임기(수십년의 임기도 임기라고 할 수 있다면)동안 수억 달러가 넘는 사재를 축적하기도 한단다.

그리고 여전히 독재 상태인 국가가 다수 존재하며, 왕정을 실시하고 있는 국가 또한 적지 않다.

더 문제인 것은 그들 지도자와 지도층의 의식 속에 국가와 국민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굶어죽어가는 국민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풍요로운 삶을 위해 그들을 모른척한다.

국가의 자원과 토지, 개발권을 헐값에 넘기는 일은 부지기수요 말단 공무원부터 고위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국가 발전과 국민에의 봉사보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친척의 편의를 봐주는데 몰두한다.

매년 아프리카에 지원되는 자금과 물품은 정작 필요한 이들의 손엔 닿아보지도 못하고 여기서 새고 저기서 새다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부정 부패의 현실이다.

거기다 아프리카는 분쟁이 끊이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 다 굶어죽어가는 나라에서도 무기의 구입과 무력의 증강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자금이 투입된다.

식량을 살 돈으로, 개발에 투자해야 할 돈으로 그들은 분쟁을 피흐르는 전쟁을 선택한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프리카인들의 갈등과 폭력을 조장한 서구인들의 행태가 조장한 결과라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현재 그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해 내기란 쉽지가 않은 일인 것 같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대를 이어가며 무기력을 피와 뼈와 가슴에 새겨온 그들의 역사는 이제 후손들의 잠재력마저 깍아 내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두고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무법과 분쟁과 부정과 부패 독재와 선진국의 이권 다툼에 피폐해져만 가는 그들의 나라에도 희망이 꽃피는 봄은 오는 것일까?

이러한 현실에도 아프리카에 애정어린 시선을 건네는 저자는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지원된 수억 달러의 자금은 그들을 더더욱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아마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그것으로 이권의 획득을 수월하게 하고자 한 나라들의 흉계였을테지만, 스스로 설계하기보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을 강화하는데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엄청난 금액의 지원의 배경은 아마 그들이 아프리카에 저질렀던 만행에 대한 보상 또는 위로금 명목에 불과했으리라.

자신들의 과오를 씻고자하는 겉치레가 아프리카의 병을 더 깊어지게 했던 것이다.

아프리카에 정말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빵을 만들 수 있는 밀을 생산하는 법'이다.

물을 가져다 주기보다 우물을 파는 법을 가르치고 제분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지원의 방법인 것이다.

그들은 엄청난 자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을 지배했던 서구 나라들의 자원 수탈과 난개발로 많은 천연 자원과 광산들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들에겐 엄청난 숫자의 젊은 인력과 토지가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나라에 대한 높은 투자 의욕을 지닌 나라들이 있다.

최근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 영향을 받아 독재자와 부패한 정부 관료와 왕족들에 대한 개혁의 요구도 높아지고 실제로 성과를 거둔 나라도 나타나고 있다.

혁명적이고 높은 의욕을 지닌 지도자들도 속속 등장하면서 아프리카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빈곤과 질병, 무법과 부패로 악명 높은 검은 대륙에 부는 새로운 바람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애정과 기대를 갖고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과 마음을 믿고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들에게도 해맑은, 행복한 웃음이 피어날 날이 하루 빨리 찾아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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