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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죄의식으로 고통받는가
캐럴라인 브레이지어 지음, 유자화 옮김 / 알마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애초에 '죄의식'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곳이 어디일까?
최초에 인류의 죄를 논한 것은 누구일까?
왜 그들은 '죄의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는 인간을 구속하기에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이 책은 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성장 소설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작가의 나레이션이 조금 많이 가미된, 그런.
주인공은 열살 된 소녀 '조안'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빌면 조안은 1960년대 런던 남쪽에서 자라며 본 아이들과 비슷하다고 한다.
배경을 모르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끝까지 모를 이야기도 있는데 이 책이 그러하다.
이야기는 '조안'이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폐차장'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폐차장은 그 시절에는 '갱'들의 주 활동 무대로 위험함과 비행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조안과 아이들의 부모는 그러한 장소에 가지 말 것을 늘 가르친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자신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하고 또 친구들과 공유하는 그들만의 공간에 대한 욕구가 부모의 제한을 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폐차장을 배경으로 어울리는 아이들 중 '조안', '사이먼' 나중에 새롭게 그들의 그룹에 들어오는 '웬디'의 세 아이의 이야기를 '조안'을 중심으로 풀어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어른들이 이해하는 방식과 다르기는 해도 무엇인가 잘 못되었다거나 잘 되었다는 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들이 아이들의 감정을 좌우한다.
사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죄의식이 정말 죄에 대한 의식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감정의 갈등인지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혼란과 갈등은 성장하고 살아가며 누구나 느끼게 되는 어쩌면 당연한 것임에도 왜 저자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지적하는 것일까?
먼저 이 책의 저자가 영국이라는 카톨릭 국가에서 성장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저자는 카톨릭 신자는 아니며, 오히려 불교도이다.
하지만 원죄 의식이 깊숙히 뿌리내린 사회에서 성장하다보면 자연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또 하나는 경계하고 싶은 현대의 경향에 대한 것인데, 무엇이든 '병'으로 만들어버리기다.
과거에는 자연스러웠던 것도, 현대에는 어떤 병이나, 신경증이 되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오죽했으면 세상에 치명적인 '질환'을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학습된 죄의식에 대한 것이다.
아이들은 혼란을 느낄 때면 부모나 주위의 어른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부모의 훈계, 경계, 금지와 처벌과 지시에 따라 점점 선악을 분류해간다.
여기서 문제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혼란에 대해 적절한 기준을 세워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분이나 분위기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선악의 판단, 가혹한 처벌, 모호한 태도는 아이들의 혼란을 부추기게 된다.
책 속의 일화를 들어보면 '사이먼'은 소극적인 아이다. 외동아들이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부모님에겐 조금 위축되어 있다.
어느날 사이먼은 아이들과 '폐차장'에서 놀다 새로 산 재킷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망설임 끝에 재킷을 잃어버린 사실을 부모님께 이야기 했을 때는 이미 절망의 끄트머리에 선 기분이 되어있었다.
"난, 이제 끝이야. 엄마가 날 내쫓을지도 몰라" 뭐,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사이먼이 예상했던 엄마의 훈계도 처벌도 없었다. 엄마 또한 어린 시절에 비슷한 일탈을 경험했고 그 때 느꼈던 아픔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이것이 사이먼에게 큰 고뇌를 안겨준다.
"내가 너무 엄청난 실수를 해버렸기 때문에 엄마가 나를 혼낼 기운조차 잃어버린거야.", "내가 엄마를 망가뜨렸어." 이정도 기분일까?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그 순간이 지난 후에 더 큰 불안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나?
차라리 몇대 맞고나면 후련했던 기억은?
이렇게 또 하나의 죄의식이 태어나고 만다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렇게 심각한듯 여겼던 것도 곧 잊혀져 간다.
잊혀져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아이는 안정적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혼란과 다시 마주하면 아이의 평온한 마음은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작지만 깊이 남을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죄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소소히 풀어가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과 판단, 가족들간에 혹은 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죄의식의 연쇄, 아이들의 심리, 무죄방면이라는 기대되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느낄 수 있는 죄의식, 죄의식으로 인해 잊혀지기도 하는 기억, 자신이 겪어야 할 시련을 타인에게 전가했다는 죄의식, 후회를 닮은 죄책감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내겐 이 모든 것이 성장 과정에서의 필연적 과정인 것처럼 보인다.
모든 책임을 내게 지울 필요가 없다. 난 그렇게 되길 원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될 줄 몰랐을 뿐이다.
죄의식은 무한히 증식하는 바이러스 같다.
한 사람이 느끼는 죄의식은 마치 감정을 타고 퍼져가듯 급속도로 확산된다.
죄의식에 어떤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있다.
어쩌면 저자가 의도한 것도 이런 깨달음 인지도 모른다.
독자들도 나름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또 그 과정에서 많은 혼란과 마주하고 또 죄의식도 느끼고 죄책감에 눈물 지어야 했던 날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타인의 감정을 알기란 쉽지 않다.
부모라고 해도 자식의 깊은 심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책은 아이들이 읽을만한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의 아이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아이들의 혼란과 아픔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이 쓰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멀리 간 것이 될까?
어린 시절에 깊숙히 각인된 죄의식은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고 자라난 후에도 어떤 심리적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히스테릭하거나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아이들은 분명 어른들과 같이 현상과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섬세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부모와 친구, 주변 사람들의 태도 하나에서도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것이 고통스러워 해야 할 죄의식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또 누구나 거쳐가는 일임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랑을 주고 배려해 나가야겠다.
어린 아이가 심각한 죄의식에 시달린다거나, 모든 것에 소극적이어서 천진함을 잃어버리고 너무 일찍 어른처럼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기에 이 책이 도움이 될 것 같다.
ps) 이 책을 읽으며 괴로워 해야 했던 이유는 죄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활자가 가늘어 보인달까?
하여튼 평소에 읽던 크기보다 왜소해보여 가뜩이나 가볍지 않은 내용과 촘촘한 문자들 속을 헤쳐나오느라 제법 고생을 했다.
어이 없는 문제에 대한 지적인지 모르겠지만, 폰트 사이즈가 조금 크거나 글자가 조금 굵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적어본다.
[이 감상은 네이버 북카페의 서평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을 통해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