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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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 며칠, 마음이 어지럽고 머릿속이 복잡해 무엇을 제대로 읽는 것도, 가지런하게 옮기는 것도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어제도 감상을 적어야지 하고 자리에 앉아 한 시간은 멍하니 있다 횡설수설해둔 것을 버려두고 잠들어 버렸다. 


 오늘 문득 감상을 적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불쑥 질투심이 마음 틈을 파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두 도시 이야기> 속,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평화를 차지한 남자, 시드니 카턴에게 부러움을 넘어 질투를 느꼈던 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카턴의 희생을 숭고하게만 느꼈던 걸 생각하면 변덕도 보통의 변덕이 아니다. 그러나 부러웠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의 희생의 기회가, 누구보다 평화로운 얼굴로 마치 구원이라도 얻은 것 같은 얼굴로 마지막에 웃었던 그 남자가 그저 부러웠다.


 고전 속 인물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 

카턴과는 정반대로 분노를 이끌어낸 인물도 있었다. 

 그 인물의 이름은 파우스트 박사다. 메피스토 펠레스와 함께 다니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향락을 누리다 결국 구원받은 남자, 파우스트 박사 말이다. 여러 번 읽는 동안 파우스트 박사가 왜 구원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납득할만한 단서를 얻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파우스트 박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왜 신이 그를 구하기 위해 메피스토 펠레스의 정당한 몫을 가로챘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다. 

 타락한 인간이, 고작 '애썼다'는 이유 하나로 구원을 받다니.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 도시 이야기> 속 카턴 역시 어떤 의미에서 파우스트 박사와 몹시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신념, 스스로 의미를 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을 잃더라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있다. 

 그러므로 나의 분노나 질투는 이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스스로의 작은 그릇을 들키게 하고 부끄러움을 자처할 뿐인 거다.


혼란과 광기의 시대에 더 빛나는 사랑이 있다. <두 도시 이야기>는 그런 사랑이야기이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사랑이 삶의 의미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담겨있다.


 19년, 아무런 예고도 징조도 없는 상태에서 사라진 한 의사가 바스티유의 북탑에 갇혀 있던 시간이다. 이야기는 그 의사가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멈추었던 시계가 돌아가듯이, 정체되었던 역사가 나아가듯이, 이 의사의 삶과 맞물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의사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성을 잃어버린 듯하던 의사를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들은 찰스 다네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알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뻔한 전개다 싶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한다. 

 의사의 이름은 알렉상드르 마네트다. 딸 이름은 루시 마네트이다. 마네트 부녀와 찰스 다네이 외에 중요한 인물이 두 명 더 있다. 한 사람은 자르비스 로리라고 하는 은행의 사무원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시드니 카턴이다.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실패한 인생 정도일까.


 이 이야기는 의사 마네트 씨가 바스티유에서 나와 영국으로 옮겨간 후로부터 프랑스 혁명군이 바스티유를 습격하고, 로베스 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 파가 집권하던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기요틴'이라는 여자의 이름을 붙인 단두대가 가장 왕성한 활약을 벌였던 시절이자, 공포와 혼란의 시대, 광기의 폭풍 속에서 무수한 생명이 흩어지던 시절이었다. 

 마네트 씨의 사위인 찰스 다네이는 본래 프랑스의 후작 가문의 후계자로 지위와 재산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해 나가던 남자였다. 그러나 혁명의 광기는 그의 의지나 뜻과 무관하게 그를 '도망자'로 취급해 감옥에 가둬버린다. 감옥에 가뒀을 뿐 아니라 간단히 그 생명을 박탈하려고 일을 꾸며나간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그의 가문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는 언제나 사랑 앞에 완벽히 패배하고 만다. 


 파리의 광기가 극에 치달았을 때의 상황을 보며 문득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떠올랐다. 그 피리를 불고 다니며 쥐와 아이들을 함께 홀려서 데리고 사라지는 남자 말이다. 이 사나이의 피리 소리는 쥐를 불러서 바다로 뛰어들게 만들 뿐 아니라 아이들을 이끌어 자신을 따라오게 만든다. 아이들의 의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사나이가 피리를 부는 대로 따라다닐 것이기에. 

 혁명 당시의 프랑스가 그렇게 보였다. 미워하는 자, 원한이 있는 자는 고발하여 교수대 혹은 단두대로 보낸다. 재판은 공정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오직 피를 부르는 전야제나 다름없는 형식적인 과정으로 전락해버린다. 제정신인 사람들은 자신들까지 그 피의 축제에 말려들까 두려워하며 광기를 흉내 낸다. 모두가 멈추기 전까지는 그치지 않는 무질서 속의 혼란. 그것이 혁명의 정체처럼 보였다. 

 이런 살풍경이 과거 프랑스만의 일일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세계는 어떤가? 

좀 더 이성적인가?

대단히 합법적인가?

특별히 공평한가?

두려워하게 만들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이 자유로운가?

누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 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고, 그런 것처럼 보려고 애써왔을 뿐이다. 

엄혹한 현실은 다수의 대중을 침묵시킨다. 소수의 목소리 내는 자를 매장해 버린다. 

어느 시대나 그래 왔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그래 왔다. 

 이 시대가 특별히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다르지 않은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아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는 있는 것 같다.

이 시대는 순교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순교자가 태어날 수 없는 불임의 시대인 셈이다. 

희생자는 무수하지만 순교자는 없다는 것은 얼핏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이 시대의 특징이다. 

순교자의 제 1 조건은 목적이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목적이 아무리 순수해도 그를 순수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마치 때가 묻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혹은 때 묻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카턴과 같은 숭고한 희생이 있을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이 소설 속 '두 도시'는 프랑스의 파리와 영국의 런던이다. 

구체적으로 이 두 도시가 18세기 후반 서로의 도시에서 무엇을 꾸몄는지는 알지 못한다. 관심도 없다. 다만 비슷한 나이였던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을 통해 두 도시 모두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것만을 예상해 볼 뿐이다. 


 체제와 주의의 충돌은 언제나 희생을 동반한다. 이상한 것은 이 희생의 대가를 가장 많이 누려야 할 사람들에게 거의 어떤 이익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언제나 '협조'와 '도움'을 구하며 '양보와 기다림'을 청한다. 인내심이 강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들은 언제나 얌전히 기다린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기다림의 대가로 받는 것은 이전과 다름없는 생활이거나 더 나빠진 생활이다. 


 <두 도시 이야기> 이후의 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혁명을 일으켜 왕과 귀족을 숙청했던 세력이 반대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키요틴 아래서 무수한 피를 다시 흘리게 된다는 것이다. 민중은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죽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느라 시달렸을 뿐 처음과 다름없는 생활, 혹은 더 나쁜 생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만 바뀌었을 뿐, 피리 소리는 여전하고 그 피리 소리에 이끌리는 어린 백성들 역시 여전하다.

<두 도시 이야기>는 한 남자의 깊은 사랑과 놀랍도록 숭고한 희생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희생은 분명 의미를, 실감할 수 있는 무게감과 살아있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몹시 여리고, 위태로운 것이기에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도시 이야기>는 세 번은 읽어봐야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이 났으니 말이지만, 내년 봄, 추위가 풀릴 때쯤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오늘도 횡설수설이 그치지 않는걸 보니, 이번엔 제법 중증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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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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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제'라는 이름은 이 책에 담긴 아홉 편의 단편 가운데 한 편의 여자 주인공 이름이다. 동시에 프랑수아즈 사강이 자신의 소설 속에서 종종 주인공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조제라는 이름을 쓰는 주인공의 본명은 야마무라 구미코다. 하지만 어느 날 '그냥' 자신의 이름을 바꿔버린다. 

별다른 이유나 설명도 없이 이렇게 말한 게 전부다. 

"이유는 없어. 그냥 조제가 내게 꼭 어울리니까. 구미코라는 내 이름, 이제부터 안 쓸래."

정말 엉뚱한 여자다.


 내게도 이름에 얽힌 짤막한 일화가 있다. 지금의 이름이 아닌 '동만'이라고 이름을 지으려고 하셨다는 이야기다. 이름에 따라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스무 살이 넘은 이후에는 사람들이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이유는 '내 이름은 내가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부르고 싶은 사람이 부르기 편한 걸 부르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조제라는 여자와는 정반대인 셈이다. 

 조제는 자신을 '조제라 부르라'고 했고, 나는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했으니.


 사실 이름이나 호칭은 무척 중요하다. 그것이 좁게는 관계부터 넓게는 존재까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쓰레기'니 '도둑'이니 '악마'니 하는 이름으로 불려 온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자신이 그렇게 불렸다고 상상해보자.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이름은 중요하다. 조제가 자신의 이름을 정하고 그렇게 부르겠다고 하는 행동에서는 존재에 대한 갈구가 느껴진다. 사회적인 약자이자 흐릿한 존재로 평생을 살아왔다면 언제나 어떤 위기감에 시달려오지 않았을까? 


조제에게는 소아마비가 있어서 하반신을 거의 쓰지 못한다. 그런 조제에게도 한 가지 소원이 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진짜 호랑이를 보는 것' 

그의 소원이다. 


 연애가 흔한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진짜 사랑'이란 더 모호하고 불분명해졌으며 희귀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시대였기에 몸까지 불편한 조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진짜 호랑이를 보러 가는 것을 꿈으로 간직했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조제에게 기적처럼 찾아든 인연이 츠네오다.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이상하지만 츠네오는 '어쩌다 보니, 그냥, 조제 곁에 머물게 된' 남자다. 물론 조제에 대한 마음의 정체는 분명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하고 있다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과 이끌림이 어떻게 다르냐고, 한 번 설명해보라고 해도 솔직히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냥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조제는 이야기의 말미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66쪽

 '우리는 죽은 거야. 죽은 존재가 된 거야.'

죽은 존재란, 사체다. 

물고기 같은 츠네오와 조제의 모습에, 조제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츠네오가 언제 조제 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한 행복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는 물고기야. 죽어버린 거야.'


 솔직히 이 문장은 마음을 끌기에 눈여겨보기는 했지만 다시 읽어봐도 그 의미를 또렷이 떠올릴 수 없었다. 물고기의 어떤 생태가 '죽음'과 연결되고 그 죽음이 행복과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마냥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는 이야기와 이어진 걸까? 

분명한 것은 조제가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만족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호랑이를 보러 가고 수족관에 들러 사람의 얼굴을 닮은 말간 눈을 한 물고기를 보는 것으로 조제의 삶은 풍부해지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라는 말에는 아직은 동의하지 못하겠다.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므로, 그 상태가 행복한지 어떤지 살아 있는 인간은 알지 못한다. 조제처럼 물고기에 이입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역시 내게는 무리다. 그러나 '곁에 있는 한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영원히 소유하는 것, 그 사랑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 행복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더 현실적이라 마음에 든다. 


 이 책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홉 편 담겨 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저마다의 행복과 존재의 의미를 연애, 사랑, 이별 등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거의 모든 이야기가 여성의 입장에서 적은 것이라 쉽사리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통하는 것은 있는 법이다.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까.


 거창한 행복, 완벽한 사랑을 꿈꾸지만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권하면 너무한 처사가 될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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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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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웃기다. 

제목은 그냥 던져 본 말이다. (본래 이 글의 제목은 이 책이 웃기다고? 삶이 우스워? 였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웃음은 '폭소'라기보다 '쓴웃음'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100년을 살고도 끝나지 않은 삶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그 모든 순간에 담겨있었을 몸부림에서 느껴지는 충실한 삶에 대한 갈망이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진 탓이다.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가볼까?" 


요나스 요나손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것은 분명 놀라운 것이지만 단지 웃음을 주려고 썼을 것 같지가 않다. 웃음은 덤, 100세 노인의 삶이 주는 교훈이 본 아닐까.

그래서 이 감상에서는 그 교훈이 뭔지 아주 잠깐 생각해보려고 한다. 

깊이 말고 얕게, 길게 말고 짧게.


 이야기는 100세를 맞은 칼손 알란이라는 노인이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는 마치 타임머신으로 오가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노인의 100년 인생을 중계한다. 이 노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해서 세계 역사의 곳곳에 발자취와 인연을 남긴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들과 절친이었다거나 핵폭탄의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거나 하는 것도 그 경력 가운데 일부다. 한 번은 히말라야를 걸어서 넘기도 했다. 분명 보통 노인은 아닌 게 분명하다. 


 이 노인은 100년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걸까?

100세나 되어서 창문 밖으로 도망쳐야 할 만큼 간절히 하고 싶었던 것은 뭘까?

이 우스운 이야기는 이런 흔한 주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100년을 사는 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죽어버렸다. 무엇인가 간절히 하고 싶다거나 이루고 싶다는 것도 없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

죽지 않는 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니다. 

노인에게는 죽지 않은 것과 살아가는 것은 엄연히 달라 보인다. 


일체의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계획된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반복하는 것은 노인의 '삶'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다. 당연히 창문이라도 넘어서 도망쳐야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100년이 넘는 노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이상하게 느낀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노인에게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없다."는 거다.

노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100년 동안이나 '목표' 없이 살아간다. 이런 삶은 보통의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삶이다. 

 보통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 즉 성취가 삶의 목표일 때 비로소 그 삶이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노인은 그런 것이 없다. 거의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뿐이다. 치명적인 실수에 대한 후회나 반성도 없다. 사람 하나를 차와 함께 날려버렸을 때조차 "뭐, 어쩔 수 없지." 식으로 생각해버리고 만다. 


 안달복달하지 않는 이런 성품이 장수의 비결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런 삶을 따라 하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번째는,

"노인이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는 거다.

어떤 상황에서도 노인은 당황하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았기에 서두르지 않는 것인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당황하지 않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며,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붙잡는다. 이러한 '통찰'이라고 할 만한 뛰어난 감각은 언제부턴가 노인의 삶에 저절로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쁘다'거나, '서두르라'거나, '빨리'라는 말을 달고 사는 우리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노인은 느긋한 삶을 산다. 처음부터 자신이 100년이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에도 인도네시아의 해변에서 10년 넘는 시간 동안 파라솔에 누워 술만 마시고 있을 정도로 느긋하다. 

 노인에게는 이 시간이 '아깝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시간을 몰아세운다고 빨리 흘러가거나 위협한다고 늦게 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노인의 태도가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기이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세 번째는,

"노인이 사랑에 빠지는 여자가 없다."는 거다.

이 말은 사실 이야기의 말미에 가면 다르게 적어야 하는 말일 거다. 그러나 노인의 100년 삶에 격정적인 '사랑'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감정, 사랑이라는 달콤한 고통이 없었다는 것 또한 장수의 비결이었을까?

 노인에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있었다. 결코 노인이 우정이나 사랑을 거부하거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더 기묘하게 느껴진다. 

 "왜 노인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아마도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 거다.

아무렴 어떤가.


네 번째는,

"모든 것이 적도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만든 태평양의 태풍 같은 나비효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대통령과 일반인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노인에게는 그 대통령이나 일반인이나 동등한 존재로 인식된다. 더 존중할 필요도 없고, 더 업신여길 필요도 없이 그냥 다를 것 없는 거다. 노인은 세계를 다니며 사소하지만 커다란 '가능성'들을 심어 놓는다. 예광탄 하나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불바다로 만든다거나, 한 번의 거짓말이 어린 김정일에게 치명적인 불신을 심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런 가능성들이다. 

 모두가 이 노인처럼 100세 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이 노인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라고 해도 가치가 덜 하다거나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의도적으로든 우연히든 실수로든 많은 사람을 '날려'버린다. 이렇게 날아가버린 사람들의 삶 역시 본인에게는 유일한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렇게 날아간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함부로 하는 사람, 무례한 사람, 잔인한 사람들이 주로 날아갔으니 말이다. 

 노인의 한 마디가 핵폭탄을 낳았다는 설정은 사소한 존재의 무신경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른바 적도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태평양의 섬에서는 태풍이 되는 것 같은 나비효과다. 


 노인의 삶은 온갖 파란을 거쳐 안정에 닿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 노인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창문을 넘을 것이다. 노인의 삶은 얼핏 목적이 없어 보이지만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한 가지 의지는 엿보인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노인은 누구에게 의지하지도, 간섭받을 생각도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그런 노인을 막는 존재들을 노인은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 삶이다. 방해하지 마라."


 노인과 일당의 이야기는 황당한데다 웃기다. 거기에다가 그럴듯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딘가 따뜻한 게 느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인은 누구든 날려버릴 수 있지만 아무나 날려버리거나 함부로 죽여버리지는 않는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갈등을 누그러뜨리는 능력 또한 갖고 있는 거다. 


 노인처럼 세계를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다. 

유명인들과의 친분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나 역시 살아있는 동안 내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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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7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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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는 쪽수다.

473페이지,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끝나는 쪽수다. 


 파우스트를 읽고 싶지만 정말 읽히지 않는다는 고민을 종종 접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고민을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는데 8시간쯤 걸렸다면 <파우스트>는 오히려 그보다 적게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파우스트를 2~3번 읽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해도 파우스트를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재밌게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부리는 익살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화 속 인물들의 모습, 마녀들의 축제와 파우스트의 고뇌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흘러간다 

 파우스트와 같은 작품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희곡이라는 장르가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말투가 낯설다고도 한다. 장면의 설명이나 배경이 이해하기 어렵다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더 전에 쓰인 것이다. 게다가 배경이 외국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어색하거나 낯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 처음 파우스트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읽는데 고생했었다. 단테의 <신곡>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끝까지 읽었었다.


 "왜 파우스트 박사는 구원받는가?"

처음의 궁금증은 '이론적'으로는 풀렸다. 그러나 아직도 감정적으로는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버럭 화가 나는 걸 느꼈을 정도다. 가련한 메피스토펠레스라며 사탄을 동정했을 정도다. 


 파우스트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지만 알고 들어가도 조금 마음이 편해질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하느님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다. 마치 성경 속에서 '욥'을 사탄의 손에 내어주었던 것처럼 여기서 하느님은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내어주며 시험해보라고 부추긴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파우스트는 구원받을 것이고, 통과하지 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질 거다. 

물론 이 내기에 파우스트 박사의 의지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대로 내기를 정하고 시험당하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 말을 던진다.

18쪽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니라.


 이 문장을 납득할 수 있게 되면 <파우스트>를 읽기는 대단히 수월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그것은 읽는 이의 마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방황'이 파우스트 속 내용의 전부라는 것은 기억해두는 게 좋겠다. 파우스트가 어떤 노력을 했고, 방황 속에서 무엇을 깨달아가는지 그것이 이 책 <파우스트>를 통해 괴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인간이 노력하는 한 방황할 뿐 아니라 거듭 시험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신을 탓하거나 인간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 속의 자신 사이의 부정할 수 없는 '차이'의 실감 말이다.


  파우스트 박사는 뛰어난 학자다. '초인'이라 불릴 정도로 지혜로운 동시에 학문에서 마법까지 다방면에 걸쳐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탄한다. 자신은 너무 늙었으며, 여전히 이상은 멀리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을 유혹하는 줄 알면서도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한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영혼을 버릴 각오를 다진 것이다. 

 이 계약을 끝내는 주문은 이렇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이 말을 하는 순간 계약은 끝나고,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것이 되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인간의 사랑에서부터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환락, 신화 속 미녀 헬레네와의 시간과 왕과 같은 삶까지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파우스트에게 그야말로 종처럼 봉사한다. 자신이 가진 보물과 능력을 몽땅 뽑아내어 파우스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또 손에 넣고도 파우스트는 여전히 공허함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근심이 찾아와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한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눈이 멀면서 오히려 빛을 발견하게 되고 넓은 궁성에서 좁은 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최후의 역사를 지시한다. 그 역사란 수백만 명을 위한 토지를 일구어 내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지혜가 내리는 최후의 결론'이라고 명명한 이 마지막 역사는 마치 인간의 삶을 빗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53~454쪽

날마다 자유와 삶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그것을 느릴 자격이 있네.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이곳에서 위험에 둘러싸여 

알찬 삶을 보내리라.

나는 사람들이 그리 모여 사는 것을 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말할 수 있으리라.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


솔직히 <파우스트>에 대해서 나부터도 이해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몇 번인가 파우스트를 읽고 인간의 노력과 방황, 삶의 목적과 구원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를 해봤을 뿐이다. 뒤편에 해석이 적혀 있지만 고집스럽게 읽지 않기로 결심한 터라 앞으로도 읽을 생각은 거의 없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말,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라는 말은 지극히 인간적인 소망처럼 보인다. 잊히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 사람들이 위험 속에서, 그러나 자유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 얼마나 인간적인가.

  

 모든 것을 잃고 그동안의 노력에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이를 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모습 역시 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악마, 사탄이라 불리는 메피스토펠레스야말로 인간을 가장 잘 아는 가장 인간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파우스트 역시 메피스토펠레스와 거의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때로는 더 지나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목적에 있어서 둘은 너무나 달랐다. 하나는 다른 영혼의 타락을 위해 봉사했지만 다른 하나는 더 나은 어떤 것을 꿈꾸고 갈구했다는 거다. 


 이렇게 감상을 적어보니 아직도 누군가에게 파우스트라는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멀고도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다만 나 스스로 믿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파우스트 박사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더 나아지기를, 궁극적인 가치 혹은 목적을 발견하기를 꿈꾸며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 노력이 좌절될 때마다 실망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으며,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악마가 나타나 영혼을 두고 계약을 하자고 한다면 나 역시 그 계약을 받아들이겠다고도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다. 


'더 나아진다'는 말은 무척 모호한 말이다. 그러나 저마다 다른 그 나아짐이 간절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든다. 파우스트를 읽으며 화가 났던 것은 파우스트 박사의 도덕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구원에 이른다는 결말 때문이었다. 그런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처럼 보였다. 메피스토펠레스를 동정하고 파우스트 박사를 질투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말이었던 거다. 

  

 이번에도 완전히 그런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다. 때로 인간은 이기적이 된다. '완성'은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교환의 결과물인 것 같다. 파우스트 박사가 걸었던 자신의 영혼과 자신이 타락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여자와 아이의 영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었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시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이 생각이 그치지 않았다. 

무책임한 파우스트,

이기적인 파우스트,

음란한 파우스트,

욕심쟁이 파우스트, 

잔인한 파우스트, 

쉽게 화내는 파우스트,

다른 사람을 탓하는 파우스트.

파우스트의 결점은 너무나도 많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부추긴 결과인 것처럼 된다.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파우스트도, 그로 인해 죄에 빠진 여자도 모두 구원받는다. 그러나, 정말 최선이었을까.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많을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 적지 않을 것이란 것은 당연하다.

수십 년, 수백 년을 연구한 학자들도 모든 비밀을 풀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 파우스트를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읽어도 좋겠다.

실제로 이야기는 막장 요소가 다분하니 말이다.

모든 용어나 배경을 이해하려고 생각하고 읽는다면, 이 생에 이 작품을 다 읽기는 글렀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요구가 있는 법이다.

과거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필요도 있는 법이다.

일단은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도 좋지 않을까. 더 멀리 보는 것은 그다음이다.


 말하는 것을 잊었지만, <파우스트> 속 '호문쿨루스'는 너무 욕심을 부리다 자신이 들어있는 플라스크가 깨지는 바람에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욕심은 경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적당한 욕심이고,

어디부터가 지나친 욕심인지 가릴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실수해도 어쩔 수 없겠다.


잊지 말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한다. 

지금의 방황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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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12-30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내년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을 읽게 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라고 적으면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어떤 책이 어느 순간, 

집의 책장에서든, 서점에서든, 도서관에서든, 인터넷에서든, 어디서든,

눈에 띄었을 때 "이거 한 번 읽어볼까?"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보통은 읽을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칼의 노래>를 다시 읽게 된 계기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원래는 이 책을 누군가에게 줄 생각으로 책장에서 꺼냈던 거였다. 

그랬던 것이 눈에 들어왔으니 오랜만에 한 번 더 읽어볼까? 가 되어서 결국 읽어버리고 말았던 거다.

 뭐, 그런 경험들 한두 번씩은 하지 않았을까?


10년도 전에 <칼의 노래>를 처음 읽었었다.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좋았다'는 여운만은 분명히 남아있었다. 아쉽게도 어떻게 좋았었는지 기억나지를 않는다. 결국 두 번째 읽은 기분과 비교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말았다.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끝내고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역사를 뼈대로 해서 새롭게 해석해 적어낸 소설이다. 

 

 '안타깝다'라고 적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성웅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아니다.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며 애태우는 것이 사실이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 역시 진짜지만 그것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이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부는 바다의 파도가 칼날처럼 일어나는 것, 

마음의 칼이 우는 것처럼 느끼는 것, 

스스로를 적의 적이라거나 타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몹시 철학적이다. 

 무인이라고 하기보다 철학자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작가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은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 나라의 흥망성쇠가 자신의 손에 달려있을지 모른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무능력할 뿐 아니라 변덕스럽고, 성마른 왕에 대한 냉엄한 평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뿐 아니라 당쟁으로만 치닫는 정치에의 환멸. 

 서로의 이익을 좇아 거리낌 없이 타협하는 인간군상에 대한 분노 역시 내면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관찰과 생각의 끝에는 자신이라는 '존재의 규정'이 있다. 

간신이 있기에 충신이 있고, 난세가 있기에 영웅이 태어나며, 죽음이 있기에 삶을 갈구하는 것 혹은 살아남았기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이순신의 생각하게 만드는 외부 요인들이다. 


아, 여기까지 30분간 적은 내용은 혼잣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이 아래에서부터가 감상인 걸로. 


 이 소설의 제목이 <칼의 노래>인 이유는 뭘까? 

단순히 생각해보면 이야기 속에서 칼이 노래를 부르기 때문일 거다. 그렇다면 그 노래는 어떤 노래일까?

이순신 장군의 성품이나 인격을 통해 생각해보면 이 노래가 흥에 겨운 것, 당시에도 있었을 유행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먼저 이 '칼'은 어떤 칼을 말하는 걸까?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칼刀'이다. 

이야기 속에는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여러 사람의 칼에 새겨진 검명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의 검명은 이렇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이 추구하는 '칼'은 전쟁을 끝내는 종결의 칼이다. 

또한 자신의 죽음의 자리와 순간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칼을 찬 장수'로서 승리하고 돌아오겠다고 백성들에게 약속하는 장면에서 이순신 장군이 듣고는 하는 '칼의 노래'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아 올 방법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순신과 반대로 일본군의 검명은 난폭하고, 폭력적인 것을 '즐기는' 문구로 되어있다. 그들은 죽이고 약탈하는 것이 목적인 존재들이다. 자신을 찾기 위한 것도, 살아남기 위한 것도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아니다. 맹목적인 충성과 살의가 그들을 지배한다.


둘은 칼날 같은 파도다. 

 바다는 많은 것을 삼킨다. 마치 인명을 도륙하는 칼날처럼 바다에 떨어진 자들의 숨을 끊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 속 전쟁의 주된 배경으로써 무수한 전투가 시작되고 끝난다. 

 바람이 잘 때는 칼날 같은 파도도 잠잠해진다. 그러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떤 칼보다 날카롭고, 잔혹하게 변하는 것이 바다인 것이다. 

 전쟁이 끝나던 날 그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숨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 바다 위가 아니면, 칼날 같은 파도 위가 아니면 이순신 장군이 죽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셋은 잃어버린 마음이다.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면은 꿈에서 자신의 칼을 찾아달라며 아버지를 찾아온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다고 한다. 

 죽음으로써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살아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잃어버린 자들이 무수했던 시절이었다. 오로지 이순신 장군의 마음에서 울리는 칼의 노래가 간신들, 조정의 대신들, 왕의 마음에서는 울렸을 리가 없다. 그들은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칼은 잃어버린 강토라고 말이다. 

대신들은 전쟁을 끝내고 백성을 환란과 도탄에서 구하며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중요시한다. 그런 그들만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명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역시 애처로울 지경이다. 그들은 '자기애'에 함몰되어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간신과 매국노는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잘 벼려진 칼이 없었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이기적인 칼만 품고 있었을 거다.


이번에 읽은 <칼의 노래>는 한 인간의 고독한 투쟁기처럼 읽혔다.

사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지만 이 소설은 첫 문장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런 아름다운 첫 문장을 품고 있는 소설이 이렇게 고독하게 읽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타인이 있기에 자신이 있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적의 적'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외로운 까닭은 자신이 누구의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왕의 편도 아니고, 대신들의 편도 아니며, 명이나 일본의 편도 아니고, 심지어는 백성의 편도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은 자아와 대립하거나 보완하는 위치에서 이순신이라는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만 같다. 

자신이 휘두른 칼이 적을 쓸어버리고, 피가 강산을 물들일 때 그 피에 자신의 피까지를 섞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영웅적인 면모는 4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은 장엄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외부로 드러난 외적인 유지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의지가 얼마나 많은 마음을 물들였을지는 알 수 없다. 


 <칼의 노래>는 소설이다. 소설 속의 인물의 내면을 너무 깊이 파고들며 시대와 사람들에게 투영하는 건 무리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음을 알고 죽을 자리를 찾아가려고 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고향을 잃어버린 피란민들, 나라를 빼앗긴 백성과도 겹쳐진다. 

 전쟁을 승리로 끝내더라도 이순신 장군에게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이순신 장군이었다. 전쟁이 두려운 것은 전쟁의 참혹함보다 혼란과 광기 때문이다. 혼란은 너무나 많은 것을 무마시킨다. 광기는 책임조차 물을 수 없게 한다. 잔혹함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언제나 차고 넘치던 부덕이기에 오히려 무감각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스스로를,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떠드는 소식이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고,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귀에 들린다. 

그들의 마음에는 칼이 없다. 그들의 마음에는 노래하는 칼이 없다. 그들의 마음에는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칼만이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 

 칼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아프게 울어대는 칼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열려있는 마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끊어내야 할 고리는 끊지 못하고, 끊어서는 안 되는 것만을 끊고 찢어대는가.

 벨 수 없는 것을 앞에 두고 마음의 칼이 우우웅하고 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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