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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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대신하여.
한 남자가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의 사랑을 독차지할 운명을 타고난 남자죠.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여자의 내면은 임계점까지 분노로 가득합니다. 신화 속 비극의 여주인공들. 키르케, 메데이아, 안티고네를 잇는 저주받은 운명이 만들어낸 분노를 형벌처럼 품고 살아가죠. 여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불타버리거나 불태우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죠. 여자는, 태우는 쪽을 선택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요. 그런 여자가 사랑에 빠집니다. 오직 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지금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여자는 모든 것을 걸죠. 사랑이 여자를 구원할지 아니면 완전히 파괴시킬지. 신이 부여한 운명에 맞서는 한 인간의 분노가 600페이지에 이르는 지면을 뜨겁게, 순식간에 불살라 버립니다.

<운명과 분노>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였던, 누구보다 서로에게  충실했던 두 남녀의 운명과 분노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미리 경고하자면, 완벽한 사랑, 순수한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결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사랑은 한 사람의 전부 혹은 그 이상을 내놓기를 요구할 때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목숨까지도 요구하죠. 그래서 겁쟁이들은 사랑에 빠지지 못합니다.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 사람도 그러하죠.

 

 두 사람은 예외입니다. 너무나 똑똑한 두 사람이 사랑 앞에서는 눈이 멀어 버리죠. 주인공 남자와 여자, 로토와 마틸드는 그야말로 '미친 사랑'을 합니다. 어리석다고 말하는 세상도, 타협을 권하는 사람도 외면한 채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죠. 

 하지만 이 사랑의 이면에는 여자, 마틸드에게 내려진 저주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세상의 모두가 마틸드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저주 가요. 마틸드는 사랑으로 빛나는 존재인 로토를 이용해 저주를 풀고자 합니다. 그렇게 될 테고, 그럴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고 살아가는 거죠.


역사와 신화 속 무수한 이야기가 증거 하듯, 인간은 운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이루지 못할 꿈이었던 거죠. 모든 인간은 병들고, 나이 들어 죽음에 이릅니다.  언제든, 덜컥, 불쑥 들이닥쳐 깜짝 놀라게 하죠.


 사랑받은 적 없는 마틸드와 사랑으로 가득했던 로토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몹시 '고독하다'는 거죠.

고독.


 어떤 이들은 나이 들면 고독에도 익숙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고독은 결코 나이 들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 건 사람뿐이죠. 때문에 사람은 고독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고독 앞에 무력해져 갈 뿐인 거죠. 

 더 좋지 않은 건 고독이 나이 들지 않듯 분노 역시 사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존재가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은 물론 주변의 존재들도 분노에 휩쓸리게 되는 거죠. 통제되지 않는 분노는 재앙 혹은 저주가 되어 모두를 파멸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나이들 지도 사멸하지도 않는 고독과 분노만큼이나 어려운 상대가 있습니다. 

그 상대의 이름은 '기억'입니다. 

기억은 망각에 덮여 흐려지거나 지워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국 저절로 흐려지거나 병 혹은 사고로 지워지기 전까지는 고되고 치열한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숨을 곳조차 없는 내면에서 매일 기억과 마주치는 일은 작고 왜소한 자아를 피폐하게 하죠. 이 피폐함, 고통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용서하는 거죠.

  말은 쉽지만 용서하기란 간단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타인을 용서하는 일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더 힘이 듭니다. 타인이 모르는 것까지 '나'는 알고 있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왠지 어렵고 복잡하게 적고 말았는데 사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모든 건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사랑은 주기만 할 수도, 받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말도, 먼저 사랑을 주지 않으면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말도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운명'의 장난이라고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큐피드의 화살 이야기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갑자기 이 무슨 낭만주의인가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낭만적인 상상도 없이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운명과 분노>를 먼저 읽어본 지인은 제게 "이 얘기는 딱 네 얘기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솔직히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온통 물음표 투성이었죠. 

'이 소설의 어디가 내 얘기란 말인가?' 

 초반을 넘기고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제 모습이 있더군요.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 한쪽이 아니라 둘을 합쳐둔 모습. 분명 제 이야기였습니다.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저주나 운명을 이겨내는 방법은 완전히 무시하거나, 철저하게 믿거나 하는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운명이, 나 자신조차 무시하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거죠.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죠.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걸 무시한다면 삶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남은 건 '믿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친구를 믿고, 가족을 믿는 거죠. 이 방법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믿는다고 해도 어디까지, 어떻게, 누구를 믿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큐피드의 화살이 주는 내 눈에 콩깍지도 필요하죠. 


고독은 '나' 홀로 존재할 때 생겨납니다. 

'나'를 그 혹은 그녀에게 준다면, '나'가 없기에 고독도 생겨날 수 없죠. 

사랑이라면 그런 낭만, 환상, 불가능을 꿈꿔도 좋을 겁니다. 

삶 동안 한 번쯤이라면요.


이번에는 기필코 정리해서 적겠노라 마음을 먹었건만, 사랑 이야기라면 젬병이라 역시 정리되지 않은 혼란과 어수선함만 잔뜩 늘어놓고 말았네요. 


 한 번쯤은 "너는 내 운명"이라 믿는 사람을 만났거나,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운명의 사람인 그에게도 "참을 수 없이 분노하게 되는 날"이 찾아올 거예요. 

그럼에도 "너는 내 전부"라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사랑 아닐까요.   


역시, 사랑해야 합니다.


+ 더하여.

<운명과 분노> 곳곳에 삽입된 셰익스피어 희곡과 신화를 읽다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질 겁니다. 이번 기회에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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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마카롱 에디션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곽명단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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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번 감상은 이렇게 시작해보기로 합니다.


 부모님은 농사꾼이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종종하셨지만 닦달하지는 않으셨고, 당시 유행하던 백과사전을 한 질 들여놓은 걸 빼고는 특별히 책을 사주거나 읽으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첫 독서의 기억은 초등학교 도서관이었고, 선생님을 따라 그림책 따위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소공녀>를 처음 읽은 건.

 

 나중에 알고 나서 깜짝 놀라곤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축약본'의 존재죠. 

어린 기억으로는 얇고 쉬워서 만만히 여긴 책이건만 나중에 보면 얇지도 쉽지도 않아 당황하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레 미제라블>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장발장> 한 권보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더 길었으니까요.

 이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가뿐하게 해치울 요량으로 <소공녀> 읽기를 시작한 건, 참으로 오만한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오만은 이야기 속 '순수함'에 무참히 부서지죠.


 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소공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읽으며 펑펑 우는 꼴 사나운 그런 어른이요.


 줄거리가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아버지를 둔 소녀가 있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애지중지하는 아버지 손자 자라죠. 소녀는 어찌나 어른스럽고 성숙한 지 이제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았건만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프랑스인, 사는 곳은 인도입니다. 아버지는 소녀를 가르치려는 마음에 런던의 기숙학교에 맡기고 인도로 돌아갑니다. 소녀는 홀로 남겨진 순간에도 슬픔을 참고 견디며 눈물을 보이지 않죠. 소녀는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얻습니다. 시기와 질투도 함께요. 하지만 소녀는 꿋꿋이 이겨냅니다. 소녀에게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재주가 있었고, 절망이 닥쳐오더라도 희망적인 상상으로 견뎌낼 수 있는 믿음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소녀에게 불행이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전 재산을 날린 데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게 된 거죠. 소녀는 한순간에 귀한 학생에서 부엌데기로 전락합니다. 온갖 괴롭힘과 멸시, 구박과 수모가 소녀를 덮칩니다. 그러나 소녀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아직은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한 줄로 줄거리를 적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요.

"완벽한 소녀가 있다. 아버지가 죽는다. 시련이 찾아온다. 견딘다. 이겨낸다. 예전보다 더 완전해진다."


이런 이야기의 '어디'가 그렇게 슬퍼서 눈물이 났을까요.

적어보기로 합니다.

완전했던 소녀가 한순간에 세상에 둘도 없는 가엾은 소녀가 됐기에 단순히 불쌍해서 눈물이 난 건 아닙니다. 소녀의 처지가 비참해서도 아니고, 닮은 사람이 떠올라서도 아닙니다. 소녀가 타인을 대하는 모습, 마음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소녀, 사라의 학교에는 베키라는 부엌데기가 있습니다. 교육은 비용이 많이 들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 아이들만이 누리는 특혜였습니다. 부엌데기는 처음부터 '다른 존재'로 여겼기에, 마주 보는 일도, 대화하는 일도, 같이 식사를 하거나, 동등한 잠자리를 얻는 건 불가능했죠. 사라는 그런 베키에게도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기꺼이 베풀죠. 부유할 때나, 가난해졌을 때나 변함없이요. 사라가 부엌데기로 전락한 후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고픔이 극에 달한 데다 날씨마저 추운 날이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기에 사라는 특기인 상상의 나래를 펼쳐 6펜스짜리 동전을 주웠다고 생각하며 배고픔을 달래죠. 그때 정말 기적처럼 4펜스짜리 동전을 줍게 됩니다. 보통의 아이라면 얼른 빵이든 뭐든 사서 먹었을 테지만 사라는 달랐습니다. 누군가 돈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를 걱정하죠. 빵집에 가서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고 가는 길에 자기보다 더 추레하고 배고파 보이는 거지를 보게 됩니다. 사라는 빵집 아줌마에게 돈을 잃어버린 사람을 아는지 묻습니다. 아줌마는 정말 배고파 보이는 아이가 돈을 주웠다며, 찾는 사람이 있었는지를 묻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있다 해도 오래돼서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하죠. 4펜스로는 빵을 네 개 밖에 살 수 없지만 아줌마는 배고픈 아이를 생각해 여섯 개를 담아 줍니다. 소녀는 빵집을 나서죠. 그리고 아줌마는 기이한 풍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배고파 보였던 아이가, 다섯 개의 빵을 거지에게 건네고는 단 하나만 가지고 가는 모습을요. 


 사라의 이런 마음을 이르는 말은 '연민'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라고 풀이돼 있고, 심리학에서는 극복해야 하는 감정적인 약점으로 여기곤 합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했기에 불쌍하게 여기게 되고, 연민을 통해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일종의 과대망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죠. 

 사라는 분명 연민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거지를 도와준 건 단순히 연민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믿음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희생 같은 거창한 걸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대의 도움을 주는 거죠. 그래서 사라는 보답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딱딱하게 설명하자니 감동이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올라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다니다 보면 감동이 큰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옛날에 쓴 이야기라 현대의 상황이나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라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겠죠. 

3개 국어를 하는, 어른스럽고 성숙한 데다 겸손과 배려는 물론 인내와 희생의 덕까지 갖춘 일곱 살짜리 아이라니. 상상할 수 있나요?

 아이를 노예나 다름없이 부리는 어른과 돌아가신 아빠를 대체하는 이상적인 존재가 나타난다는 설정도 억지스러울 수 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 기이한 점들도 감동을 깎아내리지는 못합니다. 물론, 새벽까지 읽었기에 촉촉하고 무른 새벽 감성이 터져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라가 보여준 초인적인 미덕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결말은 분명 아름다웠습니다.


 네,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은' 게 아니라 동화죠. 

빨강머리 앤처럼, 무한한 긍정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실도피, 과대망상 소녀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얘기에 조금 보태자면 연민이 좋지 않은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환상 같은 세계를 꿈꾸다가 더 큰 좌절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현실적으로, 지금의 불행을 최대한 줄이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바람직할 수 있다는 거죠. '미움받을 용기'같은.


 <소공녀>에서 사라가 보여주는 건 값싼 연민이나 허영, 과대망상이 아니라 순수한 자기희생과 인내, 그리고 배려입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기에, 더 많이 가진 자,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자가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게 당연하기에 사라는 그렇게 행동합니다.

 진실과 진심. 

사라를 움직이는 건 마음 깊은 데에 품고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거죠.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동화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소중한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소공녀>는 '악의 평범성'을 외치는 세상에 '선의 가능성'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우는 어른이 되고 말았지만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잃어버리고 말았던 소중한 마음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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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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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로 말하기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나로 말하려면 '나'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를 알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보게 되죠.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요.

 '나'를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노력'이라고 적을 수밖에 없는 '정말 많은 노력'이 말이죠. 하나를 꼽자면, '나'를 비춰보는 일입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일도 필요하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타인' 들, '관계'에 '나'를 비춰보는 일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흔히 '페르소나'라고 하는 가면을 쓰고, '나라고 믿는 나', '되고 싶은 나', '나일 수밖에 없는 나', '어쩌면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는 거죠. 연기하는 게 나쁘다거나, 페르소나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나'는 하나인 동시에 여럿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거죠. 많은 '나'가 있을 겁니다.

자,  '진짜 나'는 무엇입니까?


 사랑, 갈등, 미움, 바람. 

'나'는 많은 걸 경험합니다.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성장하면서도 다시 경험을 거듭하죠. '같은 경험'은 두 번 찾아오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영원히 같아질 수 없으니까요. 유일한 경험들이 모여 '나'를 만듭니다. 물리적이고 감정적인 경험들이요.

 

<가면의 생>은 에밀 아자르가 '나'를 찾는 과정에서 던지는 무수한 질문을 모아둔 상자였습니다.

 '나'를 만드는 과정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없을 때 분열과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균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나이지만 내가 아닌 나, 내가 나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나, 나인 줄 알았지만 아닌 나, 나지만 세상이 부정하며 나와 떼어 놓으려는 나.

 하나의 존재, 한 사람의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기이기도 하죠.


<가면의 생>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가면의 생> 중

많은 사람이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를 꿈꿉니다. 하지만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게 하나 있죠.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태어나기 위해서는 '나' 이전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빼고 싶다고 뺄 수 없는 '더해진 존재'이기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나에게서 타인과 세계를 빼는 게 아니라 더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밀 아자르는 '소설을 쓰는 과정'을 '더하는 과정'으로 삼습니다. 자기를 찾을 때까지, 무엇이 더해졌는지 모두 밝혀질 때까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숙명을 스스로 짊어진 사람.

 에밀 아자르는 스스로 바위를 지고 산을 오르는 시시포스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모두가 어그러진다'는 말이 있죠. 

'나'를 찾는 일에도 첫 단추가 중요합니다. 


'나'는 서툰 사람입니다. 

"무엇에?"하고 묻는다면, "많은 일에"라고 모호하게 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죠.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이 한 문장을 타인에게 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느냐?"하고 물어도, 다만 "어려웠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어려웠고, 어려웠던 이유에 '나'를 몰라서가 있었으니까요.


벌써 7년이나 된 이야깁니다. 

너무너무 늦게 찾아온 사춘기는 '나를 찾아내라!'라고 매일 아우성이었죠. 

많은 경우 '나여야 하는 나'와 '나이길 바라는 나'의 페르소나를 연기하던 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제가 재밌었겠지만, 제게는 그들이 무척 흥미로웠는데, 그 이유는 그들 안에서는 '나'를 연기하지 않아도 '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색한 연기를 거듭 지적받았죠. 

 진정 흥미로운, 인상적인, 어쩌면 기적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들과의 첫 단추는 단추를 채우는 게 아니라 푸는 것에서 시작한 셈이죠. 

 덕분에 지금도 그들과 만날 때면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나'가 됩니다. 그렇다고 지킬박사처럼 인격이 달라진다는 건 아닙니다. 보통의 경우 하지 않는 말, 할 수 없는 말, 하고 싶지 않은 말,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할 수 있게 되고, 하게 되고, 듣게 된다는 거죠.


 무엇보다 좋은 건 언제나 '더해진다'는 겁니다. 

그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나'에 더해져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뚜렷하고 분명한 '나'가 되는 경험. 이 경험은 무척 귀하고, 소중합니다.


 <가면의 생> 감상을 적으면서 다른 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이유는 아무리 많은 가면의 생을 살아간다고 해도 가면 뒤에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이면서 더해졌으므로 순수한 하나라고 할 수도 없기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죽음이 아니면 멈추지 못하는 혼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로 말해야 합니다. 

'나'를 발견하게 하는, 사람들과 만나야 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우리가 '나'가 되어하는 말을 반박하거나, 비난하거나, 비웃거나, 무시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될 겁니다. 

지겨울 만큼 많은 지독한 타인을 경험할 겁니다. 

오만해지기도 하고, 나약해지기도 하고, 비겁해지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그 모든 과정이 더하기입니다. 그 모든 순간이 '나'입니다.


저는 여전히 '나'로 말하기에 서투른 편입니다. 하지만 노력을 하고, 애쓰는 중이죠. 

더 나은 나가 되고 싶다고 적고, 진짜 나를 찾고 싶다고 말하며, 가짜인 나를 연기하는 모순을 반복합니다.

무엇이 진짜 '나'입니까?


 다시 적지만, 그 모든 게 '나'입니다.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아마, 당신도 그런 사람일 겁니다. 

혹시나, 어쩌면, 아마도 말이죠.


오늘은 묘한 걸 적어버렸군요. 

그렇게 해서, 여기 한 페이지의 '나'가 더해집니다.

지금부터 '나'는 '오늘의 나'입니다.

가면을 쓰고 있죠. 

가면의 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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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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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

총, 칼은 무력 혹은 위력을 상징하고, 펜은 무력과 위력으로 억누를 수 없는 자유를 상징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펜을 지지할 겁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니까요. 

 표현의 자유 뒤를 '알 권리'가 따라갑니다. 그 결과 때로는 누군가의 자유와 권리가 치명적으로 침해되기도 합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의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의 불행처럼 말이죠.


 카타리나 블룸은 가정부이자 프리랜서 관리인으로 일하는 매력적이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전문 여성입니다.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자기 능력에 대한 신뢰를 두루 갖추었고,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어린 시절의 불행을 털어내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었죠. 하지만 카니발에서 만난 한 남자가 도주하는 걸 돕게 되면서 생활은 물론 존재에 까지 위기가 찾아옵니다. 

 검사는 '고의적으로 도주를 도운 것이 아니냐?' 혹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공범은 아니냐?'라고  거듭 추궁하며 카타리나 블룸을 몰아붙입니다. 

 '매력적인 여성', '뛰어난 능력', '공범'

 언론은 이 매력적인 사냥감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재고, 자르고, 오리고, 붙여서 지면으로 옮겨 놓죠. 

한 번 시작된 파문은 범위와 위력을 더해가며 퍼져갑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과거가 폭로되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유죄의 증거라고 보도되며, 이웃과 지인들의 말은 토막 난 후 모호하고 자극적인 기사에 덧붙여집니다. 급기야는 큰 수술 후 안정을 취해야 하는 엄마를 찾아가 사건 정황을 전하며 의견을 묻기도 하죠. 

 카타리나 블룸을 돕고자 하는 선의를 지닌 사람들도 언론의 표적이 되기 시작합니다. 별 것 아니었던 것들이 도덕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처럼 보도됩니다. 

결국 추측과 폭로와 모함. '아님 말고'를 넘어 '아닌 것도 되게' 만들려는 언론의 폭력적인 보도 행태는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삶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카타리나 블룸은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젊고, 예쁘며, 능력도 뛰어나죠. 가정 사정으로 일찍 결혼하지만 결국 이혼하게 됐고, 이후 스스로 노력한 끝에 겨우 안정을 찾았던 겁니다. 유혹도 많았습니다. 부유한 고용인과 지인들이 호시탐탐 카타리나 블룸을 노렸던 거죠. 하지만 카타리나 블룸은 이런 유혹도 모두 뿌리칩니다. 

 그랬던 카타리나 블룸이었기에 카니발에서 처음 만난 남자를 집으로 들이고, 그 남자는 범죄자였으며, 도주를 도왔다는 사실이 무수한 추측과 억측의 빌미가 됩니다. 사실이건 진실이건 그건 상관없었죠.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사건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카타리나 블룸은 자신을 기삿거리로 삼은 기자를 살해하고 자수하죠. 


범죄자의 탄생.

언론이 성실하고 선한 한 사람을 몰아세운 끝에 일궈낸 성과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언론에서 쏟아내는 기사를 신뢰해서 의견을 갖거나 행동한다는 생각에 회의적입니다. 실제로는 언론에서 뭐라고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을 거니까요. 

 예를 들어 이웃에 사는 정말 착한 사람이 있는데, 다음 날 그 사람이 어떤 범죄에 관련됐을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합시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 사람을 생각해볼 겁니다.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그 범죄와의 연결 고리가 있었는지 되짚어 보는 거죠. 

 생각 끝에 어떤 의혹이 발견된다면 이제는 착한 이웃이 아니라 위험한 이웃이 될 테고, 의혹이 없다면 잠재적인 경계 혹은 의심에 머물게 될 겁니다. 


 '에이, 그런 걸 누가 믿어?'라는 말을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 자신부터 그 말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는 걸 아니까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는 언론의 폭력적인 태도를 주요 문제로 다룹니다. 하지만 언론만 사람들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일깨우죠. 

 언론은 대중을 부추깁니다. 대중의 반응은 언론을 부추기고요. 거기에 피해 당사자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희생당하거나 실제 가해자가 되거나 하는 선택지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정치적 이슈를 앞둔 시기가 되면 언론은 이후의 권력 구도를 따라 움직이거나, 스스로 권력 구도를 재편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누군가 '그랬다더라'거나, '하려고 한다'거나, '잘했다'거나, '잘못이 있다'거나 의혹과 추측과 비방이 난무하죠.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게 만들겠다'는 질투심도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서 두드러진 감정입니다. 남자들이 '원하는' 여성인 카타리나 블룸이었기에 자신이 아닌 범죄자를 선택한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다고 믿어버린 거죠.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하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쩌면 너무 자주 말입니다.


 권위자, 가진 자, 높은 자들의 말은 너무 간단히 신뢰를 얻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 블룸처럼 가진 것 없고, 가난하며, 배우지 못했고, 다만 자기 삶에 성실하고 열심이었던 사람들의 말은 좀처럼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라면 더욱 더요. 

 사람들은 권력과 부와 명예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과 같은 걸 원한다고 생각하곤 하죠. 경쟁하고 질투하는 이유도 사실은 같은 걸 원했지만 자신은 얻지 못한 열등감에 기인합니다. 

 가정부로 일하는 하찮은 여자가 부유한 남자의 애정 공세를 거절했다고 누가 믿을까요? 가정부가 부유한 남자를 유혹했다는 말이 더 합리적으로 들리겠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속의 비극과 비참은 황색 언론만의 소행이 아니라 그에 동조한 대중들과 외면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한동안 '가짜 뉴스'로 소란스러웠고, 앞으로도 얼마간 더 소란스러워질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것이 정말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믿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믿고 싶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것인가의 구분입니다. 

 

 바람은 다만 불어갈 뿐입니다. 

바람이 나무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나무가 바람에 휘둘리는 것뿐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갈대입니다. 흔들릴 수 있고, 흔들리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흔들리는 것과 휘둘리는 건 다릅니다. 

흔들림은 유연함이라면 휘둘림은 혼란스러움이라는 거죠.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해서 흔들리지도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중심을 잃지 않기에 오래 굳건할 수 있죠.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중심을 잃지 마시길, 중심이 없다면 이제는 찾아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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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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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이름을 붙이자면 '부끄러움'이 어울리겠습니다. 

 솔직히는 이 부끄러움이 진심에서 나온 거라면, 어제나 그제 쓰던 방법과 다르지 않을 '오늘의 쓰기'를 포기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를 조금 잘 아는 분들이라면 이쯤에서 '얘가 오늘은 또 왜 이런대?'하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뜸 들이는 건 성미에 맞지 않으니 밝히기로 합니다. 

 오늘 부끄러움이 시작된 건 여기에서였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정확한 말을 찾고 그 문맥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려 한다. 체를 치는 것처럼 섬세하게 가다듬는 과정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 과정을 피할 수 없다. 글 쓰는 직업의 정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중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 몰라도 저는 글을 고쳐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글을 쓰는 방법이란 게 이런 식이죠.

"자, 써볼까?"로 시작합니다.

"끝, 다 썼다."로 끝납니다.

개요도, 퇴고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휘갈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제 문제를 찾아봅시다.


 네. 줌파 라히리가 밝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제 쓰기 과정에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글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하고 다만 배설하듯 쏟아내기만 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건 '쏟아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뒤처리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책을 읽고 정리를 해나가다 보면 생각이 전복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5년 전까지는 이지성 작가의 글 어디가 문제인지 몰랐습니다. 4년 전까지, '아프니까 청춘'인 줄 알았습니다. 그즈음에도 연금술사의 '우주가 도와주는 기적'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2년 전까지 김훈 작가의 글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요?

전부 뒤집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어제 한 말, 쓴 글을 '오늘의 나'가 부정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계기'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형성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글을 휘갈겨놓고 수습하지 않았던 데에는 그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어제의 '불완전한 나'가 쓴 글을 굳이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불완전했던 모습을 증거로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 어떻게 고쳐 쓰면 좋은지 모른다는 대안의 부재가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가 되겠군요.


 그렇게 5년 혹은 6년을 써오는 사이에 어쩌면 오만해졌던 거라는 생각이 부끄러움을 더 키웠습니다. 오만할 수 없는, 오만해서는 안 되는 존재의 오만만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또 있을까요.

 그래서였습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습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퓰리처 상 수상자 줌파 라히리가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에 도전한 기록이자 도전의 결실입니다. 줌파 라히리는 벵골 출신 이민자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며 벵골어에도 영어에도 애착을 갖지 못한 채 거부당하고 소외당한 마음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이탈리아어에 매료되면서 처음으로 '주어진 언어'가 아닌 '갈망하는 언어'를 갖게 된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에 그야말로 '몰두'합니다. 마침내는 로마에서 살면서 이탈리아어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죠. 

 이런 질문을 아주 여러 번 받았다고 합니다.

 "퓰리처 상 수상자, 영어 사용자의 최대 영광을 차지한 실력자가 왜 낯설고 생소한 언어에 도전하는가?"

명시적인 답이 없었던 건지, 가볍게 읽은 탓인지 정확한 대답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얻고자 했던 건지는 알만 합니다.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를 통해 줌파 라히리를 얻고자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자신 있게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 서툴고 더디며, 기교도 수식도 없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 진실된 자기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죠.

 줌파 라히리는 분명 이탈리아어를 배움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얻었다고 느꼈을 겁니다. 처음으로 '나'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겠죠.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건너기'로 시작합니다. 

하나의, 제법 큰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 한쪽에서 다른 쪽을 수영으로 충분히 가로지를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늘 호수의 얕은 부분에서만 헤엄칩니다. 언제든 헤엄치기를 멈출 수 있는 안전한 곳에서요. 어느 날에 이 사람은 한계를 느낍니다. 더는 얕은 데서만 헤엄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마음을 먹고 이쪽 편에서 저쪽으로 헤엄쳐 나가기 시작합니다. 150번쯤 팔을 저었을 때 호수의 가장 깊은 중심을 지나고 또 그만큼 팔을 저었을 때는 반대쪽에 닿습니다. 너무 쉽게, 간단히 호수를 가로지르는 데 성공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좀 자신이 생깁니다. 다시 한번, 이 사람은 호수를 가로질러 저쪽 편에서 이쪽 편으로 헤엄쳐 옵니다. 이쪽이었던 건 저쪽이 되고, 저쪽이었던 건 이쪽이 됩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모든 게 달라졌음을 이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줌파 라히리는 이런 식으로 이탈리아어와의 거리를 좁혀나가지만 여전히 한계를 느낍니다.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변신'


한 때 추방당했던 존재는 이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부딪힌 벽도 언젠가는 허물거나 뛰어넘게 될 겁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자발적인 변신에의 의지이고, 의지를 뒤따르는 노력입니다. 


 이미 충분히 뛰어난 작가인 줌파 라히리는 자기를 둘러싼 벽을 뛰어넘기 위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변신을 선택합니다. 불안해하면서도 끊임없이 더 완전하게 자기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갑니다. 

 진정 '글을 쓰는 사람'의 모범이 되어줍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는 제목은 줌파 라히리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포켓 사전 이야기 마지막에 적은 문장입니다. 

원제는 IN ALTRE PAROLE, 영어 제목은 IN OTHER WORDS인데 '다른 말로', '다시 말해서'쯤 되는 의미인데 책 내용에 비춰보면 '다른 언어로'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지 싶습니다.

 한국어 제목이 더 멋지긴 한데, 원제 쪽이 더 담백하고 명료합니다.


 뭐, 부끄러움으로 시작해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끝났군요. 

올해 목표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가장 적절한 표현을 고르고, 글을 가다듬는 일을 조금씩이나마 익혀나가야겠네요.


아, 이렇게 적었으면서도 쓰기를 마치면 들여다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올려버리겠죠. 

 구제불능성이 또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나아져 가겠습니다. 처음에는 호수의 얕은 데서 헤엄치던 줌파 라히리처럼, 어느 순간에는 호수를 가로지를 수 있게 된 줌파 라히리처럼, 조금씩 그러나  순간에 변신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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