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마카롱 에디션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곽명단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번 감상은 이렇게 시작해보기로 합니다.


 부모님은 농사꾼이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종종하셨지만 닦달하지는 않으셨고, 당시 유행하던 백과사전을 한 질 들여놓은 걸 빼고는 특별히 책을 사주거나 읽으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첫 독서의 기억은 초등학교 도서관이었고, 선생님을 따라 그림책 따위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소공녀>를 처음 읽은 건.

 

 나중에 알고 나서 깜짝 놀라곤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축약본'의 존재죠. 

어린 기억으로는 얇고 쉬워서 만만히 여긴 책이건만 나중에 보면 얇지도 쉽지도 않아 당황하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레 미제라블>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장발장> 한 권보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더 길었으니까요.

 이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가뿐하게 해치울 요량으로 <소공녀> 읽기를 시작한 건, 참으로 오만한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오만은 이야기 속 '순수함'에 무참히 부서지죠.


 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소공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읽으며 펑펑 우는 꼴 사나운 그런 어른이요.


 줄거리가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아버지를 둔 소녀가 있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애지중지하는 아버지 손자 자라죠. 소녀는 어찌나 어른스럽고 성숙한 지 이제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았건만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프랑스인, 사는 곳은 인도입니다. 아버지는 소녀를 가르치려는 마음에 런던의 기숙학교에 맡기고 인도로 돌아갑니다. 소녀는 홀로 남겨진 순간에도 슬픔을 참고 견디며 눈물을 보이지 않죠. 소녀는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얻습니다. 시기와 질투도 함께요. 하지만 소녀는 꿋꿋이 이겨냅니다. 소녀에게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재주가 있었고, 절망이 닥쳐오더라도 희망적인 상상으로 견뎌낼 수 있는 믿음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소녀에게 불행이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전 재산을 날린 데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게 된 거죠. 소녀는 한순간에 귀한 학생에서 부엌데기로 전락합니다. 온갖 괴롭힘과 멸시, 구박과 수모가 소녀를 덮칩니다. 그러나 소녀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아직은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한 줄로 줄거리를 적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요.

"완벽한 소녀가 있다. 아버지가 죽는다. 시련이 찾아온다. 견딘다. 이겨낸다. 예전보다 더 완전해진다."


이런 이야기의 '어디'가 그렇게 슬퍼서 눈물이 났을까요.

적어보기로 합니다.

완전했던 소녀가 한순간에 세상에 둘도 없는 가엾은 소녀가 됐기에 단순히 불쌍해서 눈물이 난 건 아닙니다. 소녀의 처지가 비참해서도 아니고, 닮은 사람이 떠올라서도 아닙니다. 소녀가 타인을 대하는 모습, 마음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소녀, 사라의 학교에는 베키라는 부엌데기가 있습니다. 교육은 비용이 많이 들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 아이들만이 누리는 특혜였습니다. 부엌데기는 처음부터 '다른 존재'로 여겼기에, 마주 보는 일도, 대화하는 일도, 같이 식사를 하거나, 동등한 잠자리를 얻는 건 불가능했죠. 사라는 그런 베키에게도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기꺼이 베풀죠. 부유할 때나, 가난해졌을 때나 변함없이요. 사라가 부엌데기로 전락한 후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고픔이 극에 달한 데다 날씨마저 추운 날이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기에 사라는 특기인 상상의 나래를 펼쳐 6펜스짜리 동전을 주웠다고 생각하며 배고픔을 달래죠. 그때 정말 기적처럼 4펜스짜리 동전을 줍게 됩니다. 보통의 아이라면 얼른 빵이든 뭐든 사서 먹었을 테지만 사라는 달랐습니다. 누군가 돈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를 걱정하죠. 빵집에 가서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고 가는 길에 자기보다 더 추레하고 배고파 보이는 거지를 보게 됩니다. 사라는 빵집 아줌마에게 돈을 잃어버린 사람을 아는지 묻습니다. 아줌마는 정말 배고파 보이는 아이가 돈을 주웠다며, 찾는 사람이 있었는지를 묻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있다 해도 오래돼서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하죠. 4펜스로는 빵을 네 개 밖에 살 수 없지만 아줌마는 배고픈 아이를 생각해 여섯 개를 담아 줍니다. 소녀는 빵집을 나서죠. 그리고 아줌마는 기이한 풍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배고파 보였던 아이가, 다섯 개의 빵을 거지에게 건네고는 단 하나만 가지고 가는 모습을요. 


 사라의 이런 마음을 이르는 말은 '연민'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라고 풀이돼 있고, 심리학에서는 극복해야 하는 감정적인 약점으로 여기곤 합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했기에 불쌍하게 여기게 되고, 연민을 통해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일종의 과대망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죠. 

 사라는 분명 연민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거지를 도와준 건 단순히 연민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믿음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희생 같은 거창한 걸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대의 도움을 주는 거죠. 그래서 사라는 보답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딱딱하게 설명하자니 감동이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올라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다니다 보면 감동이 큰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옛날에 쓴 이야기라 현대의 상황이나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라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겠죠. 

3개 국어를 하는, 어른스럽고 성숙한 데다 겸손과 배려는 물론 인내와 희생의 덕까지 갖춘 일곱 살짜리 아이라니. 상상할 수 있나요?

 아이를 노예나 다름없이 부리는 어른과 돌아가신 아빠를 대체하는 이상적인 존재가 나타난다는 설정도 억지스러울 수 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 기이한 점들도 감동을 깎아내리지는 못합니다. 물론, 새벽까지 읽었기에 촉촉하고 무른 새벽 감성이 터져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라가 보여준 초인적인 미덕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결말은 분명 아름다웠습니다.


 네,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은' 게 아니라 동화죠. 

빨강머리 앤처럼, 무한한 긍정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실도피, 과대망상 소녀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얘기에 조금 보태자면 연민이 좋지 않은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환상 같은 세계를 꿈꾸다가 더 큰 좌절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현실적으로, 지금의 불행을 최대한 줄이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바람직할 수 있다는 거죠. '미움받을 용기'같은.


 <소공녀>에서 사라가 보여주는 건 값싼 연민이나 허영, 과대망상이 아니라 순수한 자기희생과 인내, 그리고 배려입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기에, 더 많이 가진 자,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자가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게 당연하기에 사라는 그렇게 행동합니다.

 진실과 진심. 

사라를 움직이는 건 마음 깊은 데에 품고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거죠.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동화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소중한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소공녀>는 '악의 평범성'을 외치는 세상에 '선의 가능성'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우는 어른이 되고 말았지만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잃어버리고 말았던 소중한 마음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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