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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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로 말하기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나로 말하려면 '나'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를 알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보게 되죠.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요.

 '나'를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노력'이라고 적을 수밖에 없는 '정말 많은 노력'이 말이죠. 하나를 꼽자면, '나'를 비춰보는 일입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일도 필요하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타인' 들, '관계'에 '나'를 비춰보는 일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흔히 '페르소나'라고 하는 가면을 쓰고, '나라고 믿는 나', '되고 싶은 나', '나일 수밖에 없는 나', '어쩌면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는 거죠. 연기하는 게 나쁘다거나, 페르소나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나'는 하나인 동시에 여럿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거죠. 많은 '나'가 있을 겁니다.

자,  '진짜 나'는 무엇입니까?


 사랑, 갈등, 미움, 바람. 

'나'는 많은 걸 경험합니다.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성장하면서도 다시 경험을 거듭하죠. '같은 경험'은 두 번 찾아오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영원히 같아질 수 없으니까요. 유일한 경험들이 모여 '나'를 만듭니다. 물리적이고 감정적인 경험들이요.

 

<가면의 생>은 에밀 아자르가 '나'를 찾는 과정에서 던지는 무수한 질문을 모아둔 상자였습니다.

 '나'를 만드는 과정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없을 때 분열과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균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나이지만 내가 아닌 나, 내가 나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나, 나인 줄 알았지만 아닌 나, 나지만 세상이 부정하며 나와 떼어 놓으려는 나.

 하나의 존재, 한 사람의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기이기도 하죠.


<가면의 생>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가면의 생> 중

많은 사람이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를 꿈꿉니다. 하지만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게 하나 있죠.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태어나기 위해서는 '나' 이전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빼고 싶다고 뺄 수 없는 '더해진 존재'이기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나에게서 타인과 세계를 빼는 게 아니라 더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밀 아자르는 '소설을 쓰는 과정'을 '더하는 과정'으로 삼습니다. 자기를 찾을 때까지, 무엇이 더해졌는지 모두 밝혀질 때까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숙명을 스스로 짊어진 사람.

 에밀 아자르는 스스로 바위를 지고 산을 오르는 시시포스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모두가 어그러진다'는 말이 있죠. 

'나'를 찾는 일에도 첫 단추가 중요합니다. 


'나'는 서툰 사람입니다. 

"무엇에?"하고 묻는다면, "많은 일에"라고 모호하게 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죠.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이 한 문장을 타인에게 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느냐?"하고 물어도, 다만 "어려웠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어려웠고, 어려웠던 이유에 '나'를 몰라서가 있었으니까요.


벌써 7년이나 된 이야깁니다. 

너무너무 늦게 찾아온 사춘기는 '나를 찾아내라!'라고 매일 아우성이었죠. 

많은 경우 '나여야 하는 나'와 '나이길 바라는 나'의 페르소나를 연기하던 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제가 재밌었겠지만, 제게는 그들이 무척 흥미로웠는데, 그 이유는 그들 안에서는 '나'를 연기하지 않아도 '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색한 연기를 거듭 지적받았죠. 

 진정 흥미로운, 인상적인, 어쩌면 기적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들과의 첫 단추는 단추를 채우는 게 아니라 푸는 것에서 시작한 셈이죠. 

 덕분에 지금도 그들과 만날 때면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나'가 됩니다. 그렇다고 지킬박사처럼 인격이 달라진다는 건 아닙니다. 보통의 경우 하지 않는 말, 할 수 없는 말, 하고 싶지 않은 말,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할 수 있게 되고, 하게 되고, 듣게 된다는 거죠.


 무엇보다 좋은 건 언제나 '더해진다'는 겁니다. 

그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나'에 더해져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뚜렷하고 분명한 '나'가 되는 경험. 이 경험은 무척 귀하고, 소중합니다.


 <가면의 생> 감상을 적으면서 다른 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이유는 아무리 많은 가면의 생을 살아간다고 해도 가면 뒤에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이면서 더해졌으므로 순수한 하나라고 할 수도 없기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죽음이 아니면 멈추지 못하는 혼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로 말해야 합니다. 

'나'를 발견하게 하는, 사람들과 만나야 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우리가 '나'가 되어하는 말을 반박하거나, 비난하거나, 비웃거나, 무시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될 겁니다. 

지겨울 만큼 많은 지독한 타인을 경험할 겁니다. 

오만해지기도 하고, 나약해지기도 하고, 비겁해지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그 모든 과정이 더하기입니다. 그 모든 순간이 '나'입니다.


저는 여전히 '나'로 말하기에 서투른 편입니다. 하지만 노력을 하고, 애쓰는 중이죠. 

더 나은 나가 되고 싶다고 적고, 진짜 나를 찾고 싶다고 말하며, 가짜인 나를 연기하는 모순을 반복합니다.

무엇이 진짜 '나'입니까?


 다시 적지만, 그 모든 게 '나'입니다.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아마, 당신도 그런 사람일 겁니다. 

혹시나, 어쩌면, 아마도 말이죠.


오늘은 묘한 걸 적어버렸군요. 

그렇게 해서, 여기 한 페이지의 '나'가 더해집니다.

지금부터 '나'는 '오늘의 나'입니다.

가면을 쓰고 있죠. 

가면의 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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