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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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밀린 숙제를 해놓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나간다는 것이 내겐 좀처럼 맞지 않는구나 하는 일을 이런 형태로 다시금 깨닫게 될 줄야.

 

왠지 왕성한 여행가는 아닐 것 같은 박완서님의 기행 산문집이라기에 사봤다.

 왕성한 여행가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따져 물을 필요도 없이 그냥 느낌이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런 분은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보려하고, 느끼고 어떤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을까하는 궁금증에 샀던 것 같다.

 

뭐 일일이 책을 살 때 이유를 달지 않는 것이 내 습성이니 굳이 이유를 적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세상에 있을 때 그분의 작품들을 많이 읽지 못하다 세상을 떠나신 후에야 이렇게 읽게되는 것에 대한 대상도 없는 송구스러움 탓은 아닐까 싶어진다.

 왜 떠나서 없어진 뒤에 찾게 되는가?하는 허허로운 질문과 함께 첫 장을 넘겼던 것 같다.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

 책 앞머리에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여행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되도록 목적지에의 가장 빠른 교통편을 강구하고, 주변 풍경을 가능한 빨리 스쳐 도달하는 것.

 그러고는 여행이 갖는 휴식과 전환의 의미를 잃고 단지 일정에 끌려다니다 지쳐서 돌아오게 되는.

 소소하지만 살아있는 여행을 하지 못했음을 두고 바보 여행이었다고 그녀는 이야기하고 있다.

 

뭔가 이런저런 의미의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이야기로 기억 될 것 같다.

 다른 이야기는 미뤄두고 그녀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티베트 이야기나 적어보련다.

 

알고 있겠지만, 티베트는 독립국가가 아니다.

 과격한 의미로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듯,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

 이 사실은 그녀가 티베트를 여행하는 동안 그 나라에 보내는 시선과 그 나라에 발견하게 되는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빈번히 등장하는 티베트 안의 한족에 대한 삐딱하기까지 한 시선이 일제 시대 지배층인 일본인을 대하듯 하던 것처럼 말이다.

 

뭔가 흐름을 쉽게 타버리는 나는 그만, 그 감정의 흐름에마저 훌렁 올라서는 괜시리 중국이 미워지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구걸하는 티베트인들의 이야기다.

 조금 번화한 시내라는 곳엔 어디든 구걸하는 티벳인들이 있다.

 그 구걸을 견디다 못해 한 사람에게 돈을 건넸다가는 몰려드는 구걸부대에 둘러싸여 오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티벳에서 연민은 약점이 된다.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약점이 된다는 것은 참 서글펐다.

 

구걸티벳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마지막 즈음에 전환을 맞이하지만 그렇다고 서글픔마저 전환되지는 않았다.

 

야크똥 이야기나 조금하다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티베트는 고산지대다 보니 나무가 적다못해 없단다.

 수목한계선을 넘어선 시점에서 나무는 커녕 풀도 구경하기 어려워 적나라한 바위와 흙이 티베트의 전경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난방에 사용할 연료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야크똥이다.

 

야크는 황소가 조금 더 크고 북실한 것 같은 생김이라는데 화려하게 치장한 것도 황소와는 다른 점일 것 같았다.

 그 야크의 배설물 야크똥은 집집마다 담장이란 담장엔 찰싹붙어서 잘 말려져서 저장했다 연료로 쓰인단다.

 온 담장마다 틈도 없이 붙어있을 야크똥을 상상하는 재미가 제법 찰졌다.

 

아아, 왠지 읽었다고 이야기하기가 부끄러울만큼 머릿속에서 정리되질 않는다.

 무슨 르포를 읽은 것 마냥 티베트의 현재 현실도 아닌 몇 년 전의 이야기만 전해 들어 애잔함과 씁쓸함 서글픔만 남은 것처럼.

 먹먹하고 막막하고 쓸쓸하다.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에서 인도로 망명한 14대 달라이 라마는 그런 서글픔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음을 떠올려본다.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운동에 군대까지 동원해 유혈진압도 서슴지 않고, 티베트 인들은 가진자에 대한 당당한 요구든 단지 구걸이든 관광객들을 쫓아다니고, 한족들의 이주로 이젠 티베트인보다 한족이 더 많아지고, 그럼에도 그들의 깊은 신앙은 변함없고.

 달라이라마는 무엇에서 희망을 보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있던 것일까?

 나이든 여류작가의 눈을 통해 본 티베트는 희망적 풍경에도 너무나 황폐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들은 십수년 후에도 한족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들의 문화를 기억하고 독립된 나라로 존재했던 시대를 그리워할까?

 

옴마니반메훔을 풀면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말이 된다고 한다.

 암울한 시대에 읇는 옴마니반메훔은 어떤 바램을 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연꽃이고 무엇이 보석인가.

 진흙속에서도 고결한 꽃을 피우는 연꽃이 지금 그들이 처해있는 진흙탕같은 세상에서 기다리는 희망이라도 된다는 것일까?

 그 연꽃 속의 보석이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조예도 없는 염불에 괜히 골몰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인이 한국말로 쓴 여행기가 나를 이토록 당황스럽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조차 떠올릴 수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그만 마쳐야겠다.

 

그냥 "옴마니반메훔"

 

 

가서 또 한 번 놀란 것은 그들이 그동안에 더 잘살게 돼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종이와 일회용품의 낭비가 이젠 조금도 놀랍지 않은 나자신에게 놀라고 만 것이다. 25쪽

 

아무의 눈치도 볼 거 없다 해도 자연의 눈치만은 봐야 하는 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법도다. 흐르는 큰 강물에는 양심의 가책 없이 오줌을 깔길 순 있지만, 하루 한 통이나 고일까 말까 한 옹달샘물에 오줌을 누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짓이다. 25쪽

 

이방인이 티베트에서 장려한 사원과 수많은 불상을 보는 일은 눈에는 최고의 사치요 충격이었지만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마음의 평화나 기쁨은 못 느꼈다. 호화와 사치를 극한 불상과 이 땅의 극빈층하고 저절로 대조가 되니까 불상에서 느끼고 싶은 자비를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5~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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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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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내가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공지영님의 딸 위녕양이 읽어야 할 편지들이라 꼭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소한 이야기들 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발췌되어온 책들의 제목을 적는 것에 더 열심이었던 책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딸에게 보낸 응원의 편지들이 책이 되어 우리들까지 응원하는 메세지가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만의 '엄마'이길 바라고 나만을 응원해주는 '엄마의 편지'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욕심을 우리 독자들에게 양보해준 딸 '위녕'양의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어야지 싶었다.

 더하여 에필로그에 적어둔 엄마에게의 편지를 읽으며 두 모녀가 참 닮았구나 싶은 생각을 한 것은 나만의 이야기일까?

 

사실 이야기 내내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래서, 언제 수영장에 가실건가요?!"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의 마지막인 작가 후기에 결국 수영장에 갔다만 슈퍼가 되어있더라 그래서 못갔다는 얘기로 끝나고 있었다.

 

이런이런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애틋한 마음들이 눈에 보이는 듯 했지만, 그러면서도 오늘은 이런 이유로 수영장에 못가고 저런 까닭에 못갈 것 같고 이러다보니 가면 안될 것 같고 하는 이야기에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여 "오늘도 좋은 하루!"라는 반복되는 끝맺는 말이 마치 주문이나 기도처럼 들려 애틋함을 더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

 오늘까지 30년을 살았다. 나는 30년을 산 것일까 아니면 똑같은 1년을 30번 산 걸까하는 물음.

 지금을 살아가라는 말.

 

요즘 수없이 읽고 듣고 보는 그래서 이젠 진리처럼 마음에 새겨져가는 그 말들이 책속의 이야기에 멋대로 끌려가기 시작하게 만들었다.

 

메모해둔 책 제목을 열거해보면 <얀 이야기 - 얀과 카와카마스>, <새들은 페루에가서 죽다>, <소박한 기적>, <열정>,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시민의 고백>, <팡세>, <어떻게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정도다.

 

가만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책도 몇 권 눈에 띈다.

 떠넘겨받듯 받은 책들에 한권, 한참전에 사둔 책 한권, 오래전에 읽었던 책 한권.

 아마 곧 혹은 머지않아 다른 제목의 책들과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은 필연적 예감을 해본다.

 

이 책의 제목인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말은 맥팔레인이라는 노교수가 손녀 릴리에게 전하는 편지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속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었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테니 너는 두려워 말라며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라고 말하는 든든한 할아버지와 같은 말을 인용해 딸에게 응원의 편지를 띄우는 엄마, 시대와 세대 인종을 넘어선 어떤 깊고 끈끈한 사랑이 느껴졌던 것 같다.

 

들을 때는 그 말이 옳든 그르든 관계없이 '잔소리'가 되어버리는 부모님의 말씀들이 왜 이렇게 한 다리를 건너서 대면하게 되면 쉽사리 납득하고 마음에 새겨지는 조언이 되는지 알 수 없음을 떠올리며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경계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현재에 안주하느냐 앞으로 나아가느냐의 선택에서 주저앉는가 아닌가가 될 것 같다.

 어떤 편지 속에 담긴 이야기에 '설사 여기 괴로움이 있다해도 그것이 내가 아는 것이라면 더 나았다.'는 말이 있었다.

 그 이유가 참.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미지이다."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의 미지에 뛰어드는 것이 두려워 익숙한 현재의 고통을 계속 겪는 것.

 

현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에 그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 미지의 방법에 도전하는 것보다 이미 알고 있는 고통을 계속 겪는 것을 선택하고 멈춰서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거기서 멈춰서는 순간 우리는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인생을 그들은 응원할 것이라고 한다.

 살아지는 인생은 응원해도 소용없는 그저그런 널리고 널린 인생으로 가는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처럼 시시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편지에 적었던 작가의 마음이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포기하게 되는 다양성있는 인생과 창조적인 삶에대한 아쉬움이 아니었을까.

 있는대로 스펙을 올리기위해 모두가 달리길 원하는 출세가도에 합세하기 위해 전력질주하지만 그 끝이 꼭 행복으로 이어져있는 것은 아닌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젊음에대한 안타까움은 아니었을까.

 

너무 작가가 수영장에 가게되는 날에만 집중했나보다.

 제대로 읽어낸 기분이 들지 않는다.

 살아가야 한다는 것, 미지를 두려워하기보다 현재에 안주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 올바른 '표상'을 지녀야 한다는 것.

 오늘은 이정도만 마음에 새긴 것으로 만족하기로 해야겠다.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면 하나도 건지지 못하게 되고 만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오늘부터 내 오랜 상처들을 치유해 나가야겠다. 상처가 대물림 되는 이유가 그것이 치유되지 않았았기 때문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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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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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바나나의 소설들은 어딘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면서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저 평범하게 적어내려간 쉽게 읽히는 평이한 문장들이 왜 그런 느낌을 자아내는지 어디서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지는 역시 알 수가 없다.

 

다만 늘 뭔가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계속 들려줄 이가 떠나버린 것처럼 막연하고 막막한 아쉬움과 모호함, 거기서 오는 어떤 갈망 같은 것이 오래 남는 이야기로 기억될 뿐이다.

 

이번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일본풍의 그림들이 이제 더는 낯설지 않게 된 것은 참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스스로 평가해본다.

 낯설지 않음은 그녀가 그리는 세계의 어떤 배경이 내 안에서 조금은 자리를 잡게 되었음일테니까.

 낯설음으로 말하자면 철학책을 읽는 기분과 닮아있는 것도 같다.

 철학은 언제나 색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고하면 난 너무 과장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일까.

 

후훗.

 더해서 이야기의 끝에 나름의 결론이랄지, 설명이랄지 뭔가 이해를 돕는 결정적인 단서를 적어놓는 것도 특징적인 것 같다.

 앞의 이야기에서 계속 헤메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마지막 장을 읽었을 즈음엔 "아~ 그런 이야기였던걸까?" 하는 생각정도는 할 수 있게 인도해 준다.

 그리고 조금은 해피엔딩.

 아직 내가 배드엔딩인 이야기를 못 읽어서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세 권의 책은 비교적 조금은 해피엔딩이었다.

 

'아르헨티나 할머니', 이 책은 90페이지가 채 되지않는 짧은 소설이다.

 담고 있는 이야기를 간단히 줄여보면.

 엄마가 죽었다. 난 열여덟살이었고, 외동딸이었고, 엄마가 죽던 때 아빠는 자리에 없었고, 엄마가 죽고 얼마 후 마을의 유명인(놀리는 듯한 뉘앙스인) 아르헨티나 할머니라 불리는 여성의 집에 아빠가 눌러앉게 되고, 아빠가 만다라를 만들고, 엄마의 비석으로 돌고래 모양의 비석을 세우고,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쉰인 것을 알았고, 그럼에도 임신을 하고 제왕절개로 사내아이를 낳았고, 나에게 이복동생이 생겼고,

그 동생이 여섯살 때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죽었고, 아빠와 그 이복동생은 아르헨티나로 떠날 준비를 한다. 난 여행을. 그리고 아르헨티나 할머니와의 대화를 회상하며 이야기가 끝이난다.

 

너무 담담하게 적고 있고 주인공 '나' 역시 어딘가 의연하고 침착해서 되려 나 혼자 호들갑 떨게되는 뭔가 이상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런 당황, 당혹, 분노, 좌절이 없는 묘한 분위기가 어색하지는 않다.

 그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환경'이 사람들과 배경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이었으리라.

 

정말 낯설지만 당황하지는 않게되는 그래서 되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리는 마력적 분위기가 돋보였던 것 같다.

 주인공 '미쓰코'는 "이 인생에서 나를 위한 유적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미쓰코'의 아빠는 석공으로 아내가 죽은 후 '돌고래 비석'과 '만다라'를 만드는 것을 통해 자신의 유적을 만들어 간 셈이다.

 아르헨티나 할머니, 이름은 '유리'는 자신의 집 '아르헨티나 빌딩'을 비슷한 의미로 여기고 있던 것 같고, 아빠와 만나 '미쓰코'의 이복동생을 남김으로써 유적을 완성해 낸 것 같다.

 이 '유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신하는 것도 없으면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완성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딘가 모순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렇게 적을 수 있는 이유는 "그냥 그렇게 느껴지니까."다.

 

음, 조금 생각해보면 '유적'이라는 것은 이어지고 전해지는 '살아있음의 증거'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죽고 없어져도 남는 것.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부모님이 아르헨티나 할머니에게 남겨준 빌딩, 아빠가 만든 돌고래 비석, 만다라, 이복동생 같은) 일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엄마가 죽던 날 '미쓰코'가 받았다고 느끼는 어떤 특별한 선물, 사랑, 기억 같은)일 수도 있겠다.

 다만 "세상에 어떤 의미를 남긴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항상 짧은 이야기는 짧기에 부담없이 읽기 시작하게 되는데 뭔가 짧은 이야기일 수록 더 생각해볼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 짧은 이야기에 어떤 사실 혹은 이야기 감정들을 담아내려니 얼마나 밀도가 높겠나?

 

바나나의 짧고 간결한 메세지 안에 두루뭉술하게 적어나간 그래서 모호하고 아리송하면서 어딘가 일본 특유의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분위기까지가 요술을 부리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는 말로 조금 무리하게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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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2 - 죽도록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아가며, 개정판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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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 속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불거진 질문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는 누구일까?"하는 것이었다.

 터 놓고 말하자면 그것은 신이 아닌 "의사"일 것이다. 

 

그것은 비단 그들이 항상 생과 사의 경계에서 분투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의 위기'라고 말하곤 하는 순간에 의사에게 기대하는 '기적'과 그 기대가 무저진 순간에 발하는 '원망'우리가 '신'을 대하는 모습과 닮아있으면서도 '신'처럼 보이지 않는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땅을 딛고 같은 공기 속에 숨쉬며 '생(生)'이라는 원인과 '사(死)'라는 결과의 공통점을 가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생긴 독서 경향으로 '에세이'가 있다.

 '에세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와 감동이 담긴 보물상자 같다는 것에는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와 같이 '현재'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지혜와 넓은 마음과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경험들, 그리고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끊임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본 것은 단순히 삶의 지혜가 아닌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게 해줄 이야기와 눈물을 그쳐야 할 때 그쳐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줄 이야기와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을 부여안고 그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이야기와 사람의 삶과 죽음에 동반하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그리고 눈물의 단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이유들이다.

 

굳이 수 많은 이유의 이름을 만들고 적어야했던 이유는 내가 이유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의 슬픔과 기쁨 절망과 눈물 그리고 희망이 담긴 소중한 이야기 하나 하나를 처음 그 감정을 느낀 순간의 온 기억을 담아 쥐어짜듯 적어낸 이야기를 읽은 감상에 수 많은 이유를 달아야 할 만큼 내 마음을 뒤흔든 이야기란 것은 말해두고 싶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2.

 뒤에 붙은 숫자 2가 말해주듯 이 책은 앞서 출간된 1의 후속편이다.

 저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만 1편이 지나는 풍경을 탈 것에 서 바라보듯 관망하는 '타인'의 입장의 이야기였다면 2편은 실제로 그 풍경 속을 걸어가며 몸으로 겪어낸 '자신'의 경험들과 그 속에서 느낀 온갖 플러스적 혹은 마이너스적 감정, 생각을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1편도 충분히 감동적이었지만 이번 이야기는 읽으면서 몇번이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적 경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이고 존경받지만 그보다 더 많은 원망을 들을 사람들, 한 생명의 회생에 일희하고 한 생명의 죽음에 일비하지만 살려낸 수 백의 생명보다 놓쳐버린 하나의 생명에 더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실의에 빠질 여유도 없이 또 다른 삶을 위해 쉴 새 없이 뛰고 달리는 사람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미화하는 것 같고, 분명 현실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사람들과 생명 윤리보다 명예와 이윤을 쫓는 '의사'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런 쓰레기들은 잊고, 자신만의 원칙과 소신, 신념에 철저한 사람들, 진정한 의술인들을 기리고 싶다.

 

사실 이 책은 의사의 고된 삶을 이야기하고자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신념에 찬 희생을 기리고자하는 이야기도 아님을 안다.

 다만 자신이 겪어왔던 삶의 '질곡'이 담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 깨닫게 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적어나갔으리라.

 

잘 읽힌 책과 잘못 읽힌 책으로 내가 읽은 책들을 나누어 저울에 올리면 어느쪽으로 기울게 될까.

 바라건데 수평을 이룰지언정 잘못 읽힌 책쪽으로 기울지 않기를.

 

버릇처럼 어떤 책을 읽고 난 후 바로 감상을 적으면서도 다음날까지 그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되뇌곤한다.

 그때서야 "아, 그 부분은 이런 이야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내 감상을 정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제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좀처럼 정정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이미 내 마음 속에서 그 깨달음이 내 것이 되어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깊은 곳에 새겨진채 지워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저자의 '안타까움'이었다.

 미처 알아채지 못해 놓쳐버린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

 너무나 아름답고 착한 사람의 이른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소통(언어, 감정, 기억들이)되지 못하는 상황이 불러오는 안타까움.

 수 많은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그 죽음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

 미쳐버린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

 인생에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하는 안타까움.

그렇게 수 많은 안타까움들이 이야기 하나 하나에 깊고 진하게 녹아있는 것 같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안타까움'들이 크게 느껴질 수록 더 큰, 언제까지나 안타까워하고만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여전한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책을 묶으며 수 없이 되물었다는 "정말 사랑하는가?"라는 질문.

 그것이 이 이야기 속에서 정말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드러나지 않게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의 숫자만큼 사랑의 방식도, 형태도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말 사랑하는 것.

 사소한 것에서 일어난 분노로 사람을 해하거나, 그런 상황을 묵인하고 모른채하거나, 집 안과 집 밖에서의 얼굴이 완전히 다르거나, 사람의 목숨을 두고 흥정을 하는 것이나,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것이 되는 책임져지지 않는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은 여전히 실망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정말 정말 사람의 마음이 깊이 담긴 책은 잘 읽고 싶었다.

 그래서 왠지 아쉬움에 아쉬움이 더해져 말꼬리를 끊기 어렵다.

 

이 마음도 사랑이길 바라며, 짧은 감상을 마무리해본다.

 

 

"원장님요, 사람들은 죽어서 천당엘 갈라꼬 애들을 많이 쓰지예. 하지만 살아서 천당을 만들지 못하면 죽어서 천당은 없답니다. 그저 오늘이, 여기가 천당이거니 하고 살아야 안 되겠능교.  109쪽.

 

사람의 집착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누구에겐가 무엇엔가 한번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절대 아니다'에서 '그럴 리가 없다'로 바뀌다가, 결국에는 '혹시 그럴지도 몰라'에서 '아니, 분명히 그래'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때마침 주변 상황이 좋지 않으면 그 좋지 않은 상황을 전부 그쪽으로 몰아가버린다.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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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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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무엇보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떤 광인의 인간 실격기" 

 

이야기는 내가 본 한 남자의 세장의 사진, 그 사진 속의 인상에대한 이미지 혹은 느낌을 적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표정도, 인상도, 감정도 없을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이야기는 그 사진의 주인공의 수기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를 적은 듯, 담담한 관찰자의 어조는 그의 비극적 삶을 떠올려 볼 때 무척 어색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39세의 나이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이 수기의 주인공인 '요조'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남았다.

 하지만 자살 시도 이후의 삶은 그를 인간에서 실격하게 만드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에겐.

 

어쩐지 다자이 오사무와 '요조'를 동일시하게 되는 요소다.

 읽으면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적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니다, '요조'의 이야기를 하자.

 '요조'의 집은 이른바 대가족이다.

 무엇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그는 어릴 때부터 '인간'을 무척이나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불식시키기 위해 항상 '익살'이라는 쑈를 통해 '인간'을 대하게 됩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 가장 바라는 것은 '무(無)'가 되는 것.

 텅 빈 존재가 되어 사람들에게 거슬리지 않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일찌감치 하인과 하녀들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익살'이 모두를 보기 좋게 속여넘겼다고 생각할 때 백치라고 여겨 전혀 주의하지 않던 다케이치라는 중학교 동창에게 자신의 쑈를 간파당하고, 그 후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어떻게든 환심을 사 다케이치와 친해진 '요조'에게 다케이치는 예언하듯 "너한테는 여자들이 홀딱 반할꺼야."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던 어느날 다케이치는 요조에게 도깨비 그림이라며 하나의 그림을 건넵니다.

 요조는 그것이 도깨비 그림이 아니라 고흐의 자화상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본 것을 익살로 얼버무리지 않은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 후 만족스러운 자신을 그린 그림이 완성되자 다케이치에게만 자신에게서 익살을 뺀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케이치는 "너는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라는 또 다른 예언같은 말을 합니다.

 

이후에도 '요조'의 인간 공포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축복이 아닌 저주처럼 다케이치의 첫 번째 예언이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고 첫번째 자살기도.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여자는 죽고 그는 살아남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더 깊은 나락이 그를 찾아옵니다.

 

언제나 인간으로부터 도망치던 그에게도 때로 빛이 비추는 것 같을 때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빛은 곧 사라지고 더 깊은 어둠이 그를 찾아옵니다.

 망가지고 망가졌을 때 희망이 그를 찾아옵니다.

 바로 '요시코' 의심할 줄 모르는 진실한 여자.

모든 인간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그와 정반대편에 서있는 '요시코'와의 만남은 그를 갱생시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순수했던 '요시코'의 의심할 줄 모르는 신뢰심은 능욕당하고 '요조'는 절망의 끝에서 결국 인간 실격에 이르고 맙니다.

 

 

오랜만에 비극을 읽은 것 같다.

 주인공의 삶과 작가의 삶이 너무 닮아있어서 더 비극적인 이야기.

 

무엇이 그에게 인간을 그토록 두렵고 경계해야만 하는 존재로 만든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의 엄마 이야기도 보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일까?

 

인상이 없는 인간, 무(無), 공허한 존재가 되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 긍정적인 단어들과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불신을 짝지어 놓아야 했던 그의 삶.

 

그런 뒤틀림이 무척 자극적이었던 소설이다.

 

이렇게 읽어봐야 결국 겉핥기에 그칠 것 같다.

 다자이 오사무를 알고 그 시대를 알아야 작품을 바로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섯번이나 자살을 시도해 결국 다섯번째 성공해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는 다자이 오사무.

 이 이야기가 그의 절망과 절규가 담긴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더해본다.

  

극도로 인간을 두려워했던 '요조'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가족에게서 세상에게서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들 속에서만 극복하고 떨쳐낼 수 있는 두려움 이었음을 겨우 깨달았을 뿐이다.

 인간은 두려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인간은 따뜻한 존재임에도 틀림이 없다.

 인간만이 인간을 절망에 빠뜨릴 수 있다. 그리고 인간만이 그 절망에서 구원할 수 있다.

 

두렵다고 가면으로 자신의 진면목을 가리고 거짓된 나를 연기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지 말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 그토록 동경해왔던 우리를 향한 신뢰심, 그 사랑을 잡을 수 있으리라.

 

쉽게 읽히더니 감상을 적어내기가 이리 어려울 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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