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대충형 인간
디터 브란데스 지음, 이영희 옮김 / 큰나무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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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드물게 감상을 적으려하면 아쉬움이 먼저 떠오르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런 아쉬움 책 중의 한권에 또 올라갈 것 같다.

 내 보기에 우리나라는 효율을 무척 중시한다.

 그래서 한가지 일을 통해 여러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하고 때로는 그런 희망이 목적이 되어 어떤 경향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조준점은 어긋나 있지 않나 싶다.

 

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것으로(단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단순, 혹은 대충은 자포자기 식의 막무가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그 나름의 버림, 포기,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을 포함한 삶의 형태다.) 누릴 수 있는 효과를 기업 경영 측면에서만 이야기하고 있기에 읽는 와중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생겨버렸다.

 본래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는 쉽사리 집중을 흐트리고 산만하게 하곤 하니 말이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알아도 내가 경영인의 위치에 서 있지 않는 한 경영인의 단순하지 않은 방참에 이끌려 갈 수 밖에 없을테니 되려 몰랐을 때보다 불평 불만이 늘어버리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완벽을 추구하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으며 빗나간 예측에 가슴을 졸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불안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기업과 사회 구조에 단순함의 미덕이라는 화두를 건네려는 노력은 그 호응의 정도와 무관하게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더 큰 이익, 더 큰 편리함, 더 큰 발전을 위해 선택한 완벽을 추구하는 경향이 되려 성취와 효율을 저하시키는 일이 빈번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는 단순 경영의 성공 사례를 예로 들며 단순경영이 결코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 경영 방식이 아니며 되려 그 어떤 완벽주의 경영 방식보다 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비효율적인 복잡성을 줄여 단순 경영으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몇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신뢰다.

 기업은 고객을, 고객은 기업을, 그리고 직원과 기업이 서로 신뢰를 두텁게 해야하며 그 신뢰가 없이는 불안의 증대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복잡성의 증가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명확한 목표를 지니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할 때 일의 추진력은 속도가 붙고 목표가 분명하지 않을 때는 자주 길을 잃고 헤멜 수 밖에 없다.

 

 세번째로 일관성이다.

 명확한 목표와 마찬가지로 흔들리지 않는 주관, 일관성이 결여된 기업은 결국 최초의 목표를 망각한 채 난파된 배처럼 시장이라는 바다에서 침몰할 수 밖에 없다.

 

 네번째로 집중력이다.

  어떤 일에서든 집중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의 요구에 응하려면 기업 역시 복잡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복잡한 요구를 단순한 방법으로 충족시켜 나가면서 발전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어쩌면 지금의 세상은 우리에게 완벽한 삶을 제시하고 그 완벽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사회의 요구였던 완벽함은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지우는 의무라는 족쇄처럼 되어 우리의 행복을 갉아 먹고 있는지도.

 

행복 할 수 있다면 좀 더 단순해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굳은 신뢰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일관성을 견지하며 집중한다면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보고와 예측에 온 힘을 쏟아낼 때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계획을 세우는데 지쳤다.

 성과를 예측하고 분석하는데 온 힘을 쏟아도 결과는 늘 빗나간다.

 그렇다면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보다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왜 그것을 하는지 늘 목적을 잊지 말라는 것이리라.

 

내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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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기욤 아레토스 그림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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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백하자면 이 책의 첫페이지를 편 것은 작년 11월이다.

 하루 한페이지 읽을까 말까하면서 다른 책 열심히 읽는다는 핑계로 왠지 찬밥 신세로 전락해버려 늘 미안한 마음으로 눈에 채이던 녀석이라 이번 기회에 새 달의 출발선에 올려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읽다 말다 방치한 이유는 이 책이 재미가 없다거나 읽히지 않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되려 정반대쪽에 설 이유로 언제든 읽을 마음이 생기면 금새 읽힐 것을 알았기에 오히려 태만해졌던 것이다.

 흔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소홀하게 된다거나, 자신에게 목매는 이성에게는 되려 시큰둥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유랄까?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찬양에 가까울 만큼 좋아하고 즐겨읽게 된 핵심적 요인이 잘 표현되어 담겨있는 책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베르나르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x권'이라는 이름으로 인용된 구절을 몇번이고 본 적이 있으리라.

 어딘가 독특하면서 독자적인 견해로 자연 현상, 지식, 역사, 인간과 사물에 대한 해석하고 있는 작가의 박식함과 풍부한 상상력에 늘 감탄하게 했던 짤막한 구절들.

 

 그 '지식의 백과사전'이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의 특징을 속되게 표현하면 '잡다함'이 될 것 같다.

 과학적, 역사적, 사회적인 현상 혹은 경향 또는 지식들을 작가의 관점으로 신빙성있게 적어 두었다.

 '박학다식', '팔방미인' 이란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다양한 지식과, 폭넓은 견해, 적절한 표현력, 자신감과 사회에 전하고자하는 메시지까지를 짤막한 사전 항목에 적어내는 모습은 존경스러움까지 느껴진다.

 

잡다하다고해서 지저분하고 어수선하지 않으며, 일목요연하게 정돈된 목차는 없지만 산만해지지는 않는 일관성이 담겨 있다.

 특히 그가 무척 사랑하는 것으로 밖에 여길 수 없는 '개미' 이야기가 다양하게 담겨 있다.

 그는 개미를 단순한 곤충이 아닌 인간과 아주 닮은 존재로 여기며 그들의 사회적, 생물학적 생태와 습성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

 

현재로서는 최상위에 위치해있는 '인간'이라는 종의 상대적 보잘 것 없음과 인간의 권위와 능력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포함해 다양한 상대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도 간과해선 곤란해겠다.

 자연의 지배자, 세상에 군림하는 자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지구에서 '번성'해왔던 종의 이야기를 자꾸 들려주는 이유도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그 나름의 메시지를 전하고자하는 노력은 아니었을까? 

 

신기함과, 신비로움으로 시작된 감상은 설렘에서 탄성으로 이어진다.

 지식과 지혜, 알기 쉽게 적어둔 역사적 사건들, 끝없는 그의 작가적 재능의 깊이가 느껴진다.

 "학자가 되었어도 이 사람은 크게 되었겠어."라며 상상해보는 재미도 적잖다.

 

결국 꼬집어도 내 입에선 칭찬 밖에 안나올 책이다.

 

우스운 이야기, 신기한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 낯선 이야기.

 이 책에 담긴 수 많은 이야기가 다음엔 어떤 작품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기대가 된다.

 

개미? 뇌?  나무? 돌고래? 외계? 신? 다시 인간.

 

결국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아, 인간을 이야기하는 그의 다음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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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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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혹시 "더 나은 질문이 더 나은 대답을 만든다."는 말을 알고 있는가? 

 내가 이 책을 읽으려한 이유는 '정의'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동기에서 펴든 이 책은 최악의 선택이었거나 또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최악의 선택'이었던 이유는 내가 원한 확적정이고 명료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으며, 무척이나 다양한 견해를 내게 제시함으로써 되려 혼란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최고의 선택'이었던 이유는 나만의 능력으로는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다양한 견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같은 선택을 두고 정반대에 설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내가 이 책에서 만난 정의는 늘 양극단에 동시에 설 수 있는 모순되면서 변화 무쌍하고 무한의 잠재력을 지닌 신기한 존재였다.

 

무척 가볍게 펴들었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무척 무겁고 더디게 느껴졌다.

 당나귀가 꾀를 부린다고 솜짐을 지고 물 속에 빠졌다가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된 것처럼, 내가 바로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을 펼쳐든 내 의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간신히 100페이지 쯤을 넘어갔을 때다.

 그래서 이것은 이야기해두련다.

 쓸데없는 참견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 책이 무척 더디고 난해하다 못해 산만하게 느껴진다면 즉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펴시길.

 그리고 동봉된 DVD를 꺼내어 재생.

  그런 후에 다시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난 이 책에서 정의에 관한 단정적인 결론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정의에 대한 완전무결한 정의를 내려줄 생각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던 것 같다.

 독자와 저자의 의도가 상충될 때 그 책을 읽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난 얻지 못해 화를 낼테고, 저자는 말이 없을테니.

 

계시나 영감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을 정도로 내 선택은 탁월했다.

 DVD를 보며 "아, 이런 것들이 담긴 책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DVD를 보고 난 후에 책 속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되었는데 그 이유는 저자가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 하는 사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난 그가 제시하는 수 많은 견해를 보고, 그 안에서 비판 혹은 동조 할 수 있으며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할 수도 있었다.

 

결국 그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은 '강의'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있었다.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게하고 타인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그 견해를 수정 혹은 강화 또는 보완해가며 자신만의 '정의'의 개념을 확립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밀, 로크, 롤스의 말이나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 많은 견해가 존재함을 아는 것과 그 견해들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통해 무조건적 수용이 아닌 스스로가 이성적, 도덕적으로 숙고하고 판단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주제넘게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려 들었으니 진도가 더딜 밖에.

 

저자인 마이클 샌댈은 어쩌면 답이 없는 '정의'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필요한 질문이다. 이성을 일깨워 이성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 보는 것 만으로도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

 

그의 말대로 해보기로 한 나는 이 책의 흐름을 따라가며 우리 나라의 상황들(예를 들면 예전의 유승준 사건, 최근의 SNS와 관련해 논란이 되었던 선거법 관련 사건, 버핏세, 학교 폭력, 일본군 위안부, 독도 영토분쟁 등)을 떠올리며 많은 곳에서 공감하거나 비판적 입장에 서기도 했다.

 

책에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견해의 충돌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자세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는 완결 혹은 완료 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들 하나 하나의 '정의'가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의 '정의'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스스로의 '정의'를 견지할 것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한 그 권한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 책은 '정의'를 정해주는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정의'에 대한 견해를 보여주는 책에 가깝다.

 그것이야말로 이 책의 원본 격인 '수업'의 역할이 아닐까?

 

다시 적어보지만 "더 나은 질문이 더 나은 답을 만든다."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정말 다양한 사회, 다원화 된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사건과, 분쟁, 논란, 이슈들이 하루도 쉬지않고 흘러나온다.

 

그 안에서 '나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정의'를 관철할 필요가 있다.

 관철한다고 해서 딱딱하게 굳어있을 이유는 없다.

 굳건하지만 유연한 그런 '정의'를 추구한대도 그 '정의'가 내게 있는 한 스스로는 타인의 비난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참, 책을 읽으며 "이 사람의 강의가 정말 듣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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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의 추구 - 하버드대 최고의 행복 강의
탈 벤 샤하르 지음, 노혜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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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ve You."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다.

 아, 물론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마는.

그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계신가요?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실수 중 하나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모르는 내가 하는 사랑은, 그 사랑이 내가 모르던 어떤 것을 가르쳐 주게되는 상황이 오게되면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까?

 

먼저 물어보도록 하자.

"당신은 완벽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 입니까?"

 "당신은 종종 행복합니까, 혹은 종종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 책은 완벽을 추구하는 방법을 적어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완벽주의에 실체와 부작용을 숱하게 적어가며 완벽주의에 회의적 의견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내게 쓴 소리를 한다고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적대적 관계에 서있는 '적'이 아니듯, 완벽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서 완벽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스스로 완벽주의자로 살던 때의 괴로움과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완전해지고 완벽해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여유도 행복도 뒤로 미뤄두고 있을, 열심히 살아가는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던 것 뿐이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의외로' 자주 목격하게 된다.

 늘 성공에 목마른 우리는 왜 그토록 성공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그 이해하기 어렵던 그들의 행위에 대한 단서가 이 책에는 들어있다.

 

완벽의 추구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완벽'이라는 단어가 많이도 등장한다.

그리고 '완벽'이라는 말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말이 '최적'이라는 말이다.

 최적은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말하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상태다.

 '최적'이라는 말이 가장 높은 빈도로 등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최적주의' 예찬론자다.

 

'완벽'이 말 그대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상태라면 '최적'은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상태에 있으며, 최상은 아니더라도 수준 이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마음자세다.

완벽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최적주의자는 '대충형 인간' 정도로 표현 될 것이다.

 

완벽주의자 만큼 행복과 거리가 먼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완벽주의자는 모든 것에서 완벽을 추구하기에 자신의 성과에서도 미흡한 점을 먼저 찾게 되고, 성공을 했더라도 성공의 기쁨은 잠시일 뿐 아직 하지 못한 미완의 것들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늘 불행하고, 불만족러운 상태에 놓이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최적주의자를 지향하자고 이야기한다.

 성과에 순수하게 기뻐할 줄 알고,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하기보다 어느 정도 이상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완벽주의자는 실패와 성공 모두를 거부하는 모순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패를 거부하기에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 것도 불가능하며, 성공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기에 성공을 즐길 수도 없다.

 그에 반해 최적주의자는 실패와 성공 모두를 받아들인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공에는 마음껏 기뻐한다.

 

완벽주의자 중에는 우울증 환자가 많다고 한다.

 그들은 늘 가지지 못한 부족에대한 갈망이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에 극도의 긴장이라는 살 얼음판을 기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두가지의 세상을 이야기했다.

 이데아와 현실 세계말이다.

 당신은 현실에 살면서 이상향인 이데아를 꿈꾸며 괴로워하는 완벽주의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는 달리 세상은 오직 우리가 보고 듣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살며 '중용'을 실천하려했던 최적주의자인 것이다.

 

이 책은 최적주의자를 칭하는 저자답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중용'을 지킨 중후함과 편한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 

 

"난 왜 행복하지 않지?"라고 늘 되뇌는 당신.

 당신은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나?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양비론에 휘둘려 실패에도 성공에도 괴로움만 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서양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을 거부했다면 우리나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외면해왔다.

 유교 윤리에 의해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 혹은 나약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온 것이다.

 

급격한 발전과 더불어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사회로 변화함에 따라 과정보다는 빠른 성과가 우선시되고 멀리 돌아가는 우회로보다는 직선적인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이 미덕이 되어버렸다.

 

불완전함에 대한 불안과 완벽에 대한 갈망,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만족도 휴식도 잊은채 그저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닌지 한번 쯤 심각하게 생각해 볼 때다.

 

이 책은 '워크 북'으로, 실천해가며 천천히 읽어가면 좋은 책이라고 한다.

 그에 맞게 각 장의 마무리에 '과제'처럼 어떤 연습들이 적혀있다.

 모두 완벽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최적의 삶을 누릴 준비를 위한 연습들이다.

 

달리기를 할 때도 트랙의 발판에 발을 딛고 엉덩이를 높이 들어올리며 시선은 목표를 향하는 준비자세가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변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준비는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나를 모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모르고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래전 부산으로 떠났던 자전거 여행이 떠올랐다.

 지도를 펴고 '완벽한' 라인을 그리고 출발했으나, 결국 '최적의' 여행을 해야했던 기억이 말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완벽할 수 없기에 내가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오늘부터 나도 '최적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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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홍석영 옮김 / 풀빛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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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낯설고 생소한 이름 니코마코스. 그리고 니코마코스 윤리학.
 하지만 어쩐지 윤리 이야기를 하기보다 행복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본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완역하면 5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이 될테지만 내가 고른 이 책은 무려 '청소년 철학창고' 도서이기에 단출하다.

 그래서 비교적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단출하게 편집된 책이라고 해도 역시 고대 굴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유행가 가사를 흘려 들으며 '읊조리듯'이라는 표현처럼, 조금은 모순된 독서를 했던 것 같다.

 

왠지 어렵지만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나 나름의 방식은 다른건 흘려 읽고 읽고 싶은 부분이 나오길 기다리다 그런 부분이 나오면 그것만 기억하고 생각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하면 딱딱하다거나 거칠다거나 심지어 난폭하기까지한 책들까지도 읽은 책 목록에 아무 가책없이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후후.

 

이 책은 제목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에서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이라는 소제목을 붙여서 출간한 것 같다.

 소제목에 '행복의 길'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 내용 전체를 반영한 것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시작부터 한다는 말이 '행복이 최고의 선이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행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리들 범인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뭐 이런 어려운 행복이 다있어!, 행복해지기 전에 하늘나라 가겠네."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철학자가 이야기하고 철학자의 삶 속에서 추구하는 행복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철학자에게 있어 무엇이 최고의 선이겠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철학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동물과 어린아이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는데 그 이유가 "정신적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면 느낌이 팍! 오지 않는가?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꺼내든다.

 그리고 모든 정념들의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인 '중용'을 강조하며, 그 정념을 규정하고 이상적인 상태인 '중용'을 실천하기를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은 크게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긍정할 수 없는 항목도 적지 않았다.

 뭐, 워낙 시대적으로 격차가 심하기에 고대와 현대 사이의 가치관의 차이를 감안하면 눈감아 줄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딱 한가지만 빼고.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정치적 정의'에 관해 설명하며 예로 든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변명은 정치적 옳음이다.에서 끝이난다.

 

난 여기서 딱 한마디가 떠올랐는데, "모르는 사실입니다."라는 청문회 혹은 기자회견에서 자주 마주하는 '말말말'의 선두주자 말이다.

 이런 생각만은 본받지 말았으면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한 것에서 '정치적으로 정의롭지 못하다.'

 

서둘러 수습을 해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론적으로 "이성에 따르는 관조적 활동이 완전한 행복이다."라고 말한다.

 '신'이라는 존재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성품이 바로 '이성을 통해 관조적 활동'을 하는 것이기에 신과 가까울 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덧붙여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정말 행복해지고 싶으면 생각없이 살지 말아라.는 단순한 진리다.

 

우리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고자 친절히 각각의 정념들의 중용을 이야기하고 그 뜻을 밝게 알리기 위해 특징들, 혹은 그것을 가진 사람들,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제법 상세히 살펴가며 이야기를 해주고는 있지만 수천년 전 사람의 사상,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되려 오해만 늘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기에 저런 것이 진정한 행복이요 정의라고 믿었을까?라며 불신의 눈초리를 하고선 그들의 다음 책을 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 다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들끼리도 서로 인정할 수 있는 것,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었고 후에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모습도 보인다.

 

과거의 가르침을 현재에 도입하거나 선전하기 위해 그 시대를 다룬 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때의 가르침과 현재의 가르침의 차이의 인식, 교훈의 획득, 지식의 습득도 궁극적인 목적은 될 수 없다.

 다만 통찰을 위한 넓은 생각을 키워 세상이라는 큰 강을 건널 수 있는 디딤돌 하나를 놓기 위해 과거의 가르침은 책이 되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떤 것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어떤 것은 현재에는 제발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랬던 것처럼.

 그 시대에는 철학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난 자주 책들을 오독하는 실수들을 범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용서해주는 책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다음에는 완역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마음 먹고 읽어봐야겠다.

 철학은 분명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음 가는대로 생각하고 결론 내려도 용서받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학문이 아닐까 싶다.

 문득 그 넓은 마음이 닮고 싶어 그들이 남겨둔 이야기를 읽어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낭만적 몽상도 해본다.

 

덕을 덕이라고 하는 이유는 남이 나에게 잘해 주는 것보다는 내가 남에게 잘해 주는 데 있고, 또 비천한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고귀한 일을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58쪽

 

법은 경우에 따라 모든 사람들, 또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제정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국가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들이 많아지게 하는 행위를 옳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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