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홍석영 옮김 / 풀빛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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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낯설고 생소한 이름 니코마코스. 그리고 니코마코스 윤리학.
 하지만 어쩐지 윤리 이야기를 하기보다 행복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본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완역하면 5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이 될테지만 내가 고른 이 책은 무려 '청소년 철학창고' 도서이기에 단출하다.

 그래서 비교적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단출하게 편집된 책이라고 해도 역시 고대 굴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유행가 가사를 흘려 들으며 '읊조리듯'이라는 표현처럼, 조금은 모순된 독서를 했던 것 같다.

 

왠지 어렵지만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나 나름의 방식은 다른건 흘려 읽고 읽고 싶은 부분이 나오길 기다리다 그런 부분이 나오면 그것만 기억하고 생각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하면 딱딱하다거나 거칠다거나 심지어 난폭하기까지한 책들까지도 읽은 책 목록에 아무 가책없이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후후.

 

이 책은 제목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에서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이라는 소제목을 붙여서 출간한 것 같다.

 소제목에 '행복의 길'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 내용 전체를 반영한 것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시작부터 한다는 말이 '행복이 최고의 선이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행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리들 범인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뭐 이런 어려운 행복이 다있어!, 행복해지기 전에 하늘나라 가겠네."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철학자가 이야기하고 철학자의 삶 속에서 추구하는 행복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철학자에게 있어 무엇이 최고의 선이겠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철학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동물과 어린아이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는데 그 이유가 "정신적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면 느낌이 팍! 오지 않는가?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꺼내든다.

 그리고 모든 정념들의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인 '중용'을 강조하며, 그 정념을 규정하고 이상적인 상태인 '중용'을 실천하기를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은 크게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긍정할 수 없는 항목도 적지 않았다.

 뭐, 워낙 시대적으로 격차가 심하기에 고대와 현대 사이의 가치관의 차이를 감안하면 눈감아 줄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딱 한가지만 빼고.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정치적 정의'에 관해 설명하며 예로 든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변명은 정치적 옳음이다.에서 끝이난다.

 

난 여기서 딱 한마디가 떠올랐는데, "모르는 사실입니다."라는 청문회 혹은 기자회견에서 자주 마주하는 '말말말'의 선두주자 말이다.

 이런 생각만은 본받지 말았으면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한 것에서 '정치적으로 정의롭지 못하다.'

 

서둘러 수습을 해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론적으로 "이성에 따르는 관조적 활동이 완전한 행복이다."라고 말한다.

 '신'이라는 존재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성품이 바로 '이성을 통해 관조적 활동'을 하는 것이기에 신과 가까울 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덧붙여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정말 행복해지고 싶으면 생각없이 살지 말아라.는 단순한 진리다.

 

우리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고자 친절히 각각의 정념들의 중용을 이야기하고 그 뜻을 밝게 알리기 위해 특징들, 혹은 그것을 가진 사람들,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제법 상세히 살펴가며 이야기를 해주고는 있지만 수천년 전 사람의 사상,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되려 오해만 늘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기에 저런 것이 진정한 행복이요 정의라고 믿었을까?라며 불신의 눈초리를 하고선 그들의 다음 책을 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 다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들끼리도 서로 인정할 수 있는 것,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었고 후에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모습도 보인다.

 

과거의 가르침을 현재에 도입하거나 선전하기 위해 그 시대를 다룬 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때의 가르침과 현재의 가르침의 차이의 인식, 교훈의 획득, 지식의 습득도 궁극적인 목적은 될 수 없다.

 다만 통찰을 위한 넓은 생각을 키워 세상이라는 큰 강을 건널 수 있는 디딤돌 하나를 놓기 위해 과거의 가르침은 책이 되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떤 것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어떤 것은 현재에는 제발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랬던 것처럼.

 그 시대에는 철학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난 자주 책들을 오독하는 실수들을 범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용서해주는 책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다음에는 완역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마음 먹고 읽어봐야겠다.

 철학은 분명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음 가는대로 생각하고 결론 내려도 용서받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학문이 아닐까 싶다.

 문득 그 넓은 마음이 닮고 싶어 그들이 남겨둔 이야기를 읽어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낭만적 몽상도 해본다.

 

덕을 덕이라고 하는 이유는 남이 나에게 잘해 주는 것보다는 내가 남에게 잘해 주는 데 있고, 또 비천한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고귀한 일을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58쪽

 

법은 경우에 따라 모든 사람들, 또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제정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국가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들이 많아지게 하는 행위를 옳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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