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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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말로 설명하는 일에 유난히 서툴다. 글로는 능숙한가? 그렇지도 못하다. 

왜 이렇게 서툰 걸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기도 한다. 허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나마 나은 글로 몇 자 적는 게 고작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대학교 교서관에서 발견한 이후 줄곧 내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준 적이 없었다. 이레 출판사의 판본, 올재 클래식의 판본을 거쳐, 새로 출간된 현암사의 판본까지. 그저 『마음』이기만 하면 그저 좋았다.


 『마음』은 '나'가 만난 '선생님' 이야기다. 나의 부모님도 등장하지만 그쪽의 사정에는 좀처럼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선생님'의 사연이 너무나 기가 막혔고, 비밀이 몹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더 끌렸던 거다. 

 이야기의 결말을 먼저 밝히는 걸 피하는 편이지만 이 이야기는 결말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를 넘어서는 이야기이기에 짧게 이야기를 정리하고 감상을 시작하기로 한다.


 '나'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에게는 자살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자살한 데에는 선생님의 잘못도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선생님은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 그 배신은 친구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지켜왔던 신념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친구가 자살한 후에 선생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세상과 인간을 증오하며 멀리 한 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선생님이 보낸 두꺼운 편지가 도착한다. 그 편지는 선생님의 유서였다.


 '묵독파티'에서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한 분이 내게 "비극을 좋아하시나 봐요."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사실이었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비극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비극적인 이야기, 이루어지지 못한, 엇갈린, 빗나간, 부서진, 깨어진, 멀어진, 다시는 만나지 못한. 

비극을 소개하는 데 쓰는 표현은 많고도 많다. 그만큼 세상에는 무수한 비극이 있을 거라는 걸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비극의 유용성'을 알아차린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비극의 유용성'

비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비극 속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해의 극한, 미움의 극한, 질투의 극한, 엇갈림의 극한, 몰이해의 극한. 슬픔의 극한도 빼놓을 수 없겠다. 


비극을 읽는 동안 나는 누구도 미워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누구든 미워하고 상처 입힐 수 있다. 

'유토피아'

비극의 무대는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슬픔과 고통, 아픔과 괴로움을 얼마든지 경험해도 상처가 되지 않는 무제한의 힐링캠프다.


 선생님의 친구는 자살하기 전 유서를 남긴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내가 가장 통절하게 느낀 것은 마지막에 먹으로 덧붙인 듯이 보이는, 좀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았을까 하는 의미의 문구였어.
『마음』중

만약 가깝게 지낸 누군가가 스스로 폭력적인 죽음을 선택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나'에게 남긴 것이 분명한 문장이 나의 마음에 파고 들어와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 따라다닌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만 할까? 


선생님의 고민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친구의 죽음 이후에 모든 즐거움을 떠나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세상과 인간을 증오하며 조용히 자라나는 죄의식을 지켜보며 괴로워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결말,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를 선생님이 대신 택해줬을 때, 그 비극적인 결말은 그와 함께 괴로워하던 나를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비극이 주는 승화. 

『마음』은 내게 카타르시스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주었다.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하고 묻고는 "마흔쯤 살면 되지 않을까?"하는 물음으로 답하던 날이 있었다. 지금은 조금 늘었지만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나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그날까지 악착같이 무엇을 이루고 가겠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흐지부지하게, 적당히 태평하게 지내도 좋지 않은가 할 뿐이다. 

 흐지부지하고, 흐릿하고, 희미한 시간. 

그런 삶은 분명 내게 잘 어울리는 그런 삶일 거였으니까.


 아니다.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다. 

솔직히는 이루고자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다만 무엇인가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을 읽고 있으면 언제나 서글픈 안심감에 안도하게 된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 결말을 맞은 사람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 어떤 결과의 원인이나 이유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의미를 포함해서 말이다.


 비극이기에 필연적으로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이해'로 수렴되어야 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선생님을 통해 이런 고백을 들려주는 이유도 그런 것일 테고.


 술은 끊었지만 아무것도 할 마음이 일지 않았네. 어쩔 수 없으니 책을 읽었지. 하지만 그냥 읽기만 하고 내팽개쳤어. 아내가 나에게 종종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네. 나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지.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하는 단 한 사람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싶어 슬펐네. 이해시킬 수단이 있는데도 이해시킬 용기가 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슬퍼지더군. 나는 적막했네. 어떤 곳으로부터도 떨어져 세상에 홀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자주 있었지.
『마음』중


슬픔과 고통, 괴로움이 온전히 자신에게서 그치기를 바라며, 이해시키고 싶지만, 이해시킬 수도 있지만 용기 낼 수 없어 적막한 시간을 홀로 견디는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단 한 사람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이해시킬 수 없는, 그러나 그 모든 괴로움과 외로움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아는 삶. 차라리 몰랐더라면 괴로움도 없었을 텐데.


  역시 말로든 글로든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소개하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름 분투했건만 결국 여기까지 와보니, "나는 『마음』을 좋아합니다."하고 고백하기 위해 긴 글을 적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있음만 깨닫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하는 것 외에 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책에 대한, 작품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듯 사람에 대한 고백도 이처럼 수월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선생님을 변호하고 싶어 보탠다. 친구를 배신했고, 그 결과 혹은 원래의 결심에 결심을 더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선생님은 악인이 아니다. 사랑을 믿었고, 또 믿고자 했던 선생님은 다만 용기 없는 가엾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는 돈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의심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았네. 따라서 남이 보면 이상한 것이라도,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모순된 것이라도 내 가슴속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양립할 수 있었지. 

창피를 당하는 것이 괴롭다는 것과는 좀 다른 거였어. (''')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그럭저럭 안정되는 법이라는 이치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열중해 있었지. 다시 말해 나는 아주 고상한 이론가였던 거네. 동시에 가장 에둘러 가는 사랑의 실천가였던 셈이지.
『마음』중

두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생님'은 사랑을 믿었고,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에 열중했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사랑했기에 몹시 외로워야 했던 모순의 희생자였다. 


 사랑이 넘치는, 고백이 판치는, 이별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이 시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은 믿어보고 싶지 않은가? 이 미련하고 답답한 사랑이 행복이 되는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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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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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저마다 깨어나면 사회도 세상도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은 어리석은 것일까. 

"사람들을 깨워야만 한다."

"먼저 깨달은 우리가 모두에게 전해야만 한다."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정말 절대적인 진리이며, 언제까지나 진실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누가 누구를 깨우고, 누가 누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


계몽 :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깨우고 이끈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식민 제국주의.

그들은 무지몽매한 인간과 인종과 후진적인 나라를 일깨우겠다고 표방했다. 선진국의 문물과 서양의 '우수한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더 효율적이고, 더 적극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빼앗아 가기 위해, 그들은 많은 나라와 사람들을 계몽했다.


 꿈.

그들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 마주해야 했던 것은 그 어떤 지독한 악몽보다 더 가혹한 생지옥, 없던 것으로 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무덤 같은 시간이었다. 


말하기를.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산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답하기를.

"아니오. 이제 그만 '살아지기'를 원합니다. 죽음에서 '살아갈'지라도 오롯한 나로 남기를 소망합니다."


 계몽의 폭력성은 지극히 크고, 극악하다. 

"이것이 좋은 것이다.", "이것이 나은 것이다." 

이 모든 말들은 지극히 정당한 폭력인 동시에, 지극히 부당한 폭력이 된다.


먼저 고백하기로 하자. 

나는 이 작품 『채식주의자』에서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소리를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채식주의자』는 연작 소설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세 작품은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화자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란 영혜가 육식을 거부한 것에서 시작해서, 영혜가 죽음의 문턱 즈음에 이르렀을 때 끝이 난다. 기묘하고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제목은 '채식주의자'이지만 이야기 속에는 채식주의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육류만을 먹지 않는 사람, 생선은 먹는 사람, 계란은 먹는 사람, 고기, 생선, 계란, 유제품 등 동물성인 것은 모두 먹지 않는 사람. 이렇게나 많은 거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주의'를 갖고 있다는 거다. 이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발적인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비자발적인 이유로 채식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원하지도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유형자, 죄인들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계기는 꿈 때문이다. 고기가 널려있는 꿈, 얼굴들, 하지만 왜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년의 영혜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흰둥이의 기억과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기억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갑작스럽다고 한다면 왜 하필 그날부터였는가 하는 것 정도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왜, 그날부터였을까?


 처음에는 채식만 하면 됐던 것이 자해와 기이한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자신이 나무이며 더 이상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영혜의 삶에 가장 깊이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형부와 언니다. 형부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하려 하지만 그 작품은 완전히 식물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언니, 언니는 자신의 남편이 동생에게 한 짓을 확인한 후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 강인하게 버텨왔던 인격에 생겨난 균열을 감지한다. 그것은 충격이나 경악이라고 하기보다 슬픔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서 오는 슬픔. 이제는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후의 슬픔. 그런 슬픔 말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공통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게 『채식주의자』는 그저 보통의 소설로 읽힐 뿐이었다. 잘 썼고, 잘 읽히며, 거의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이상적인 한 편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그런 소설이다. 

  

 기이한 것은 『채식주의자』라는 제목과는 달리 이야기를 읽는 내내 느낀 것이 동물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본능이나 욕구와는 다르다. 동물의 그것은 언제나 '생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어쩐지 막막하게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식물적인 것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까?

이것은 나의 편견이다. 식물은 온건하다거나 식물은 생존 욕구가 강하지 않다거나, 식물은 욕망하지 않는다거나, 식물은 잘 어우러진다는 식의 모든 것들이 편견이다. 

  

 촌놈인 나는 식물의 우악스러운 생명력을 익히 보며 자랐다. 식물의 탐욕스러움과 잔인함도 얼마든지 겪었다. 식물의 잔인함은 의도하지 않고도 그렇게 한다는 데에 있으며, 죄의식이나 미안함을 느끼지도 않고, 다만 DNA에 담긴 명령을 충실히 실행한다는 데에 있다. 


 식물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의 정의는 달라져야 한다. 식물적인 것은 거스르지 않지만, 동물적인 것은 거스른다는 식으로 말이다. 채식을 한다는 것은 동물적인 행위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편하고 또 불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잡식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육식만 하거나, 채식만 한다면 자칫 불균형을 초래하기 쉽다. 영양의 불균형은 곧 정신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육식만 하는 것도, 채식만 하는 것도 어려운 이유다. 


 채식주의자는 몹시 섬세해야 한다. 언제, 어떤 음식에, 어떤 재료가 동물적인 것인지 살피고, 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채식을 하면 건강해진다는 말은 그 수준이 적절하며, 균형이 맞을 때의 이야기다. 극단적이고 무모한 채식은 생명을 늘리기보다 단축시키는 결과를 부른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라고 불러도 적절하지 않다. 다만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뿐이다.


 『채식주의자』가 동물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식물의 생태에도 폭력적인 면모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동물적인 것처럼 충동적이거나 갑작스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폭력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유예를 주거나 애초부터 뿌리를 내릴 수 없게 하는 근본적인 것이다. 

 동물적인 폭력은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며, 무엇인가가 '파괴'되는 결과를 부른다. 그 피는 붉을 수도 있고, 푸를 수도 있으며, 하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그 피가 과도하면 반드시 죽음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적는 것을 잊었는데 동물적인 폭력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것은 정신적인 폭력이다. 이것은 소리도, 흐르는 피도 없지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이며, 그 결과는 확실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의 의식은 소설의 밖을 떠돌았다. 소설 안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 혹은 발견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바깥 세계에서 구해야만 했던 거다. 그 결과가 채식주의와 식물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이었다. 이야기가 던진 폭력과 채식이 이야기의 바깥에서 이런 식의 그림을 그려낸 셈이다. 


 이렇게 짧지 않은 글을 끄적이는 동안에도 솔직히 이야기하면 '내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지극히 식물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동물임에도 식물적으로 사고한다. 식물적으로 사고하는 동시에 동물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그 모순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음도 안다. 

 인간은 비극적이며 희극적이다. 인간이 곧 모순이기에. 


나는 아마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에 대해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을 거라는 걸 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끄집어 내지지 않았던 것임도 안다. 

  

미숙함은 미숙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에 깊이가 있다면 그 깊이는 아주 오랫동안 혹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정도로 깊은 것이거나, 너무 파고 들어와 그 깊이보다 깊게 들어왔기에 영원히 발견할 수 없는 얕은 것일 거다. 

 안타까운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의 의지로는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될 것 같지 않다는 거다. 지금 끄적인 이 글 속에 담긴 생각들이 정말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 그 어떤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감상을 읽는 사람 중에 누군가 있어, 자기의 이야기를, 생각을 들려준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의 감상은 여기까지다. 나는 잡식주의자다. 채식주의자의 편도 육식주의자의 편도 아니다. 어쩌면 채식주의자의 적이며, 육식주의자의 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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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인 1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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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멀어졌지만 한때 판타지와 무협지에 취해 살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기연을 얻은 주인공의 한계를 모르는 무위와 환상적인 마법, 상상 속의 존재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현실에도 있을 것 같은 종족과 존재들을 보는 게 그렇게 재미날 수 없었던 거다.


 가끔씩은 단순한 장르 소설의 수준을 넘는 수작을 만난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너무 진지하고, 무겁고, 복잡하면서 어려운 책들에 천착하기 시작했던 것만 같다. 


 그래서였다. 

정말 오랜만에, 판타지 소설을 읽어볼 생각을 했던 이유 말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의 한계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하면 '죽음'을 떠올리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필멸과 소멸이라는 전제가 인간을 규정하고, 가능성과 두려움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인 흡혈귀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흡혈귀, 양귀라고도 하고, 하이랜더라고도 하고, 고지인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연히 제주에 닿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연이어지는 살변, 사건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시체를 모아서 태우는 관직에 있던 염일규를 제주에 파견한다. 그러나 사건은 간단히 해결되지 않고, 희생자와 희생을 저지하려는 자, 그리고 고지인 사이의 대결이라는 피바람이 조선 땅에 불어닥친다.


 표지에 적힌대로 임금을 지키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의 대결이 흐름의 중심에 놓인다.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 결과는 역사가 말하고 있으니 궁금한 자는 조선의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고지인'이라는 제목은 흡혈귀의 기원이라고 하는 예수를 칼로 찌른 병사에게 걸린 불사의 저주와 그 저주가 옮아간 사람들을 '하이랜더'라고 부른 데서 기인한 이름이다. 

하이랜더 = 고지인 이라니, 단순하면서도 어쩐지 우습고, 가벼우면서도, 그럴듯한 등식이다.


 이글의 제목으로 삼은 것처럼, 이 소설은 '죽지 않는 시간조차 죽일 수 있는 소설'이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면의 대결이 궁금했는데 마침 남는 시간에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면 이 책을 읽어봐도 좋겠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생소한 어휘와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흡혈귀와 조선시대, 사랑과 의리, 왕과 신하의 다툼까지 그리고 있다보니 두 권으로는 부족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 '닥터 이방인'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작가인 최지영 씨를 믿어 봐도 좋겠다. 

 

 닥터 이방인의 원작인 <북의>가 이 작가의 작품이니 말이다.


 어떤 책에나 아쉬움은 있기 마련이나, 이 책에서는 굳이 찾지 않기로 한다. 괜스레 의미를 부여하고, 소위 순수 문학에서 찾고자 하는 의의나 깨달음이라는 잣대를 여기에까지 들이대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혹시 상상해 본 적 있는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의 침침한 골목에서 살아남은 고지인이 누군가의 피를 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고?

 괴이한 일은 쉬쉬하여 감추기 마련, 세상에 기괴한 일이 적지 않으므로 한 번은 생각해 볼 일이다. 혹시, 주변에 고지인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사람은 없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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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지비원 옮김 / 현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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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유명한 작가입니다. 

마지막 작품을 남긴 것이 100년도 더 전임에도 지금도 일본에서는 국민적으로 읽히는 국민 작가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작품 중에서 혹은 작가 중에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작가가 있는가를 떠올려보면 조금은 질투가 나기도 합니다. 시험을 위해 공부하면서 기억한 이름은 있어도 작품이 기억에 남는 작가는 얼른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랄까요, 지금의 일본 사람들 역시 나쓰메 소세키를 쉽게 읽을 수 있는 작가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니까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거야 지금도 나쓰메 소세키를 기억하고 사랑하며,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사람이 쓴 책의 제목이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 책의 저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하다는 오쿠이즈미 히카루라는 사람은 분명 나쓰메 소세키를 소세키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또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거야 이 책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니까요. 아주 여러 번 소세키의 작품을 읽었을 것이고, 다양하게 해석해보고 또 썼을 것임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이름은 몰라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아는 분은 제법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 작품이 나쓰메 소세키의 첫 장편 소설이라고 하네요.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지만 대문호, 재능 있는 작가들은 대부분 처녀작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이제 좀 믿을만하다 싶으신지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어쩌다 보니 저도 이 작품은 세 번쯤 읽었네요. 하지만 지금도 그 고양이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없었거든요. 그냥 '고양이'로 살다 '고양이'로 죽습니다. 

 이 고양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건 회색이나 흰색이 섞여있거나, 노랑과 흰색이 섞인 고양이의 모습입니다. 섞인 것도 얼룩얼룩하게 섞인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섞여서 그 경계는 있지만 어느 색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색일 거라는 생각을 해요. 

 나름의 근거라면 하나쯤은 있습니다. 바로 이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를 부르는 호칭이죠. 골목대장 격의 고양이는 검둥이입니다. 어쩐지 야쿠자 같은 느낌이라 느낌이 팍 오는 고양이죠. 또 하나는 얼룩이인데, 일찍 죽습니다. 얼룩이나 검둥이가 아니라면 역시 회색이나 흰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데, 구체적으로 왜 그렇냐고 물으신다면 모르겠다고, 그냥이라고 밖에는 답할 수가 없네요.


 이 책 얘기를 좀 하자면, 쉽게 말하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해설집' 혹은 소세키 '읽기 안내서' 정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한 권만 읽어도 소세키의 작품 10권을 읽은 것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기적 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소세키 작품을 여러 권 읽었거나, 여러 번 읽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책인지.


소세키를 읽고 싶거나, 읽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분들에게는 적극 추천합니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가뿐하게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하고 쉽습니다. 흔히 딱딱하고 재미없는 작품 해설을 생각하고 '거기서 거기지 뭐'라고 여기신다면 아,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거니까, 마음대로 하셔도 좋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총 10장에 걸쳐 10 작품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중간에 들어있는 소세키에 얽힌 칼럼도 쉽고 가볍게 읽힙니다. 이것으로 또 하나의 진리가 증명되는데요. 그 진리란 다름 아니라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어렵게 설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설명까지 쉽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 하나는, 무엇인가가 쉽게 설명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면 함부로 그것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안다고 믿고 싶고, 안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아는 것 같은 것'이지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 스스로도 조심해야지 싶은 생각이 드는 부분이라 제가 적고서도 마음에 와 닿네요. 


혹시 소설은 재미가 없어서 읽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을지 몰라 재밌는 부분을 옮겨와 보기로 하겠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적에는 아무런 재미가 없었던 소설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재미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예전에는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습니다. 
소설의 재미란 그때그때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설이 시시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그 소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쪽

소설가 답다고 해야 할까요. '소설이 시시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그 소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보라고 하다니 말이죠. 하지만 저 역시 어느 정도는 이 견해에 공감합니다. 함량 미달의 소설이 아니라면, 특히 그것이 고전의 반열에 들고 꾸준히 읽힌다면, 그 책은 결코 시시하거나 재미없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옳다고, 나름의 재미를 추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대로 좋겠지만 시시하니까라거나 재미없어서라며 언젠가 읽어볼 가능성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이 시시하고 편협한 태도라는 건 분명합니다.


소세키의 작품과는 무관하지만 또 한 가지 좋은 이야기가 있어 나누고자 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독서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독서가 삶에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삶은 독서에 도움이 됩니다.
21쪽

독서가 삶에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삶은 독서에 도움이 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재밌으면서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경험이 늘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재밌어지는 것이 독서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는 사람의 복잡한 감정이나 욕구와 욕망의 충돌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이 재미없다고 느꼈다가 자라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흥미롭게 여기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삶이 독서에 도움이 된다는 표현이 마음에 콕 박히더군요.


 책의 지면 대부분을 소세키 작품에 숨겨진 비밀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방법들을 이야기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책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 책만 읽어도 소세키의 작품 10권은 읽은 셈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작품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혹시 읽고 싶어 지는 책이 있다면 꼭 마저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네요. 


 타인의 해설이란  아무리 완벽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 법입니다. 반대로 스스로 내놓은 해석은 부족함이 느껴지더라도 만족의 수준이 남다르게 됩니다. 독서가 삶에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고 했었지만 이런 점에서는 분명 독서도 삶에 도움이 됩니다. 삶은 독서에 도움이 되고, 독서가 삶에 도움이 되기에 같은 작품을 다시 읽었을 때 다른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재미가 한층 크고 깊어질 것입니다. 


읽기 어렵다고 하는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기 위해 하는 독서마저도 의미가 있습니다. 독서도 결국 끈기 있는 연습으로 다져지는 능력이니까요. 

 책에서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책에서 얻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제가 찾기를 권하는 것은 자신의 삶입니다. 책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 전혀 상관없는 세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결코 교차할 수 없고, 마주할 수도 없었던 두 세계가 만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기적은 종종 화학작용에 비유되기도 해요. 거기서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혀 다른 성격의 무엇이 나오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죠. 화학작용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라는 신화는 믿지 않는 주의입니다. 그러나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책들은 분명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인생의 무엇을 바꿀지, 어떻게 바꿀지는 읽는 이가 붙들고 있는 방향키를 어느 쪽으로 트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독서란 어디까지나 자율적이고, 열려있는 활동입니다. 그러니 가뿐하게 읽어나가세요.


 그것이 나쓰메 소세키든, 밀란 쿤데라든, 헤밍웨이든, 찰스 디킨스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려움도, 시시함도 내려놓고 산책하듯 가볍게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그 시작이 이 책이어라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네요. 세상에 이렇게 읽는 방법도 있구나 하고 알게 될 테니까요.


 독서에 도움이 되는 삶과 삶에 도움이 되는 독서, 즐기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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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술래잡기 모삼과 무즈선의 사건파일
마옌난 지음, 류정정 옮김 / 몽실북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흔히 절망적인 상황을 악몽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건 악몽이야!!" 하고 말이죠.

어떤 지독한 악몽이라도 깨어나면 사라지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현실이 그 어떤 악몽보다 지독한 악몽처럼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이건 악몽이야라는 말속에는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부정을 부정하고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이제 선택의 시간입니다. 

 당신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억지스럽게 부정하는 것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정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시겠습니까?


 <사신의 술래잡기>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에는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천재적인 능력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탐정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모삼'

천재 탐정 모삼의 이름은 천재 법의학자 무즈선의 이름과 함께 나날이 유명해져 갑니다. 


그러던 중 기이한 사건, 아니, 참혹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람의 시신을 천 조각 이상으로 절단하는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요.


범인은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보다 더 미쳐있는 변태 살인광이 분명했습니다. 

당연히 모삼은 그 사건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삼에게 경고가 날아듭니다.


"더 이상 이 사건을 파고들지 말아라. 계속한다면 너에게 지옥을 보여주겠다."하고요.


당연히 모삼이 포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더 깊이, 더 자세히 사건 속으로 들어가지요. 

그러던 어느 날 모삼은 현실 속 악몽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범인이 약속했던 '지옥'을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모삼은 범인의 칼에 수십 차례나 난도질당합니다. 

고통스러웠겠지요. 하지만 정말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안겨준 것은 사랑하는 여자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건 이후 몇 개월 간이나 기억을 잃고 지내던 모삼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 기억을 되찾습니다. 

그러자 범인은 모삼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게임을 시작하자며 편지를 보냅니다. 


한 쌍의 장갑과 함께 도착한 편지. 

그 편지가 게임의 시작을 알립니다. 

범인을 쫓고, 범인에게 쫓기는 술래잡기 게임의 시작을. 

사건의 범인은 얼마나 철두철미한 인간인지 무수한 사건을 벌이면서도 증거 하나, 흔적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 

단서는 단 하나.

모삼의 최면을 통해 알아낸 'L'이라는 타투입니다. 

모삼과 무즈선은 그 타투를 보고 범인을 'L'이라 부릅니다.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들에도 공통점은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기이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은 사건의 배경과 동기가 기이하고, 어떤 사건은 범행 수법이 기이하며, L의 의도 역시 기이합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경찰이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했더라도 미궁에 빠져 버린 '미해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시그널'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며 방영을 마쳤습니다. 그 드라마의 소재 역시 '미결 사건'이라고 들었습니다. 

증거의 불충분, 공소 시효의 소멸, 실제 범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에게 지워진 형벌. 

해결되지 않고 몇 년 혹은 몇십 년이나 미해결로 남겨지는 사건은 너무나 많습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경찰이 인지하지 못한 사건들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보다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L의 의도가 기이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미해결 혹은 경찰이 인지하지 못한 사건들을 게임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치광이, 변태 살인범이 분명한 L이 경찰의 시야 밖에서 소리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고, 범인들을 검거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L의 정체만큼이나 그 의도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범인을 잡는 쪽을 '정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정의가 너무나도 무능력한 탓에 무고한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때도 그 정의를 믿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범죄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무능한 정의를 대신해 자신이 정의를 행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자신을 괴롭혔던, 피해를 입혔던 이들에게 직접적인 제재 혹은 위해를 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L은 그런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들의 복수를 돕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해결을 도와준 셈이 됩니다. 


의문이 하나 더 늘어납니다.

누가 더 정의로운 것일까요?


새삼스러운 의문은 아니지만 L을 보며 정말 새삼스럽게 떠올려봤습니다.

"도대체 정의란 것이 무엇인가?" 

"이 세계에 아직 정의가 남아있기는 한가?"


한 가지 기대는 이 책의 다음 이야기들을 지켜본다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 있습니다.

L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했는지 알게 된다면 말이죠.


물론, 모삼과 무즈선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에도 흥미는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건들은 하나의 곁가지일 뿐 줄기나 뿌리가 되지는 못하겠지요. 


<사신의 술래잡기>는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미스터리 소설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목격한 작품입니다. 그 죽음의 방식도 잔인하고 또 가혹하더군요.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물음도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추악함과 비극적인 이야기들과의 필연적 마주침입니다. 뉴스와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무수히 마주치는 이야기들을 책에서까지 봐야 한다는 건 때때로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것은 그들의 투쟁을 지켜보는 과정을 통해 현실에서의 투쟁의 단서 혹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 때문입니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삶이 끝나지 않는 한,

투쟁 역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아는 만큼 막연한 두려움은 줄어듭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사건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 게임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서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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