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에는 아는 바가 없어 몰랐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있는 감독이라고 한다. 이 책 《걷는듯 천천히》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철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어쩌면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을 말랑말랑한 에세이다.


 내 이름, 정확히 성은 한자로 '천천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느릿하고 느긋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런데 이름의 마지막 한자는 '민첩하다'는 뜻을 갖고 있어서 천천히 민첩하다는 모순을 품게 되어버렸다. 만약 이름에 의미를 부여해본다면 느긋하고 싶어 하면서도 급해지고 마는 건 모순된 이름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걷는듯 천천히》라는 제목과 어쩐지 느긋하고 아련하기만 한 파스텔톤 표지 그림이 천천해지고 싶은 바람을 이끌었다. 그렇게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었으나, 시작하고 나니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져 버린 통에 결국 두 시간 만에 읽어버리고 말았다. 

 아, 결국 민첩함으로 끝이나다니.


 책에 감상을 쓰려고 앉았다가 먼저 밑줄 그어둔 부분을 다시 표시하고, 한 번씩 더 생각해봤다. 생각하는 것까지 민첩하게 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지금의 감상은 그렇게 느린 과정을 거치고 나서 적는 거다. 처음의 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기에, 적으나마 천천한 감상이 되지 않을까.


 고레에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영상에 입문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품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 불린다고. 

 다큐멘터리 같아지고 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고레에다 감독이 영화에 작위보다 자연스러움을 더 크게 담고자 하기 때문이다. 아역 배우에게는 대본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도 그런 이유에서 생긴 것이다. 대본을 주지 않는 대신 상황을 설명해주고 그 상황에 '너라면' 뭐라고 말할지, 그 생각을 말하게 하는 거다. 아이는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그 어떤 대사보다 더 진실한 마음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고. 

  

 영화라는 게 감독의 의도와 취향을 깊이 반영하기는 하지만 그 영화에 담기는 것은 결국 배우 개개인의 면모다. 진심이라는 게 전해질 수 있다면 그런 자연스러움이 조금 더 수월히 진심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고레에다 감독은 천천히 한 가지, 한 가지씩 이야기해 나간다. 영상을 담을 때의 생각과, 자신의 기억과 그 기억이 남긴 의미와 촬영하며 깨닫는 것과 세상을 보는 시선과 불안과 바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는다.


 가볍게 읽어도 페이지는 사뿐히 넘어가고,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의미가 풍부해져서 영화만 좋은 게 아니라 텍스트도 좋구나 하고 인정하게 만들어버린다. 고레에다 감독을 모르지만, 언제나 진심을, 최대한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한다.


 기억에 남는 문장은 많지만 몇 군데만 적어보기로 한다.

"세상에는 쓸데없는 것도 필요한 거야. 모두 의미 있는 것만 있다고 쳐봐. 숨 막혀서 못 살아."
《걷는듯 천천히》 중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공기 중에서 산소만이 쓸데 있다고 해서 공기가 산소로 가득하다면 인간도 동물도 살아가지 못한다. 생명이 숨을 쉬고, 생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그런 '쓸모없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상대의 대사를 들을 수 있는 힘이야말로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임이 분명하다. 말하는 힘이란 우선 이런 힘이 있어야 생긴다고, 고키 군을 보며 확신했다.
《걷는듯 천천히》 중

 듣는 능력, 태도, 힘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부터 시작해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대화를 나눈다고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 시간을 끝내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상대의 대사를 듣고 거기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한다면, 상대의 말을 듣고 진심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지녀야 할 정말 중요한 능력이다. 말하는 건 그다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또 적고 있지만 얼마나 잘 들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된다. 

 

 걷는 듯, 천천히.

모든 걸음이 천천하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천천히 걸어야 진짜로 걷고 있는 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더운 날의 연속이다. 이런 날들에는 역시 천천히 걸어야 하지 않을까. 

 걷는 듯, 천천히. 

천천히 걸어나가야겠다.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준 이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복잡한 생각없이 편하게 누워서 읽은 가벼운 책이다. 감상 역시 가볍게 쓰기로 한다.


 에노시마에는 100년이 넘게 이어온 사진관이 있다. 그 사진관의 이름이 니시우라 사진관이다.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사진관이지만 세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마지막 주인 니시우라 후지코 사후에 영업을 끝내게 된다. 니시우라 후지코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유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종종 들렀고, 외할머니에게 사진을 배운 마유지만 4년 전의 '그 사건' 이후 사진을 찍는 것도 카메라를 만지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야기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영업을 마치게 된 사진관을 정리하기 위해 마유가 섬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한때 마유는 '과거의 순간을 잘라내'어 사진에 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의 결과 4년 전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기에 사진을 그만둔 거였다.

 마유는 사진관을 정리하다가 '미수령 사진'이 담긴 상자를 발견한다. 미수령 사진들 속 주인공들이 바로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연이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과거에서 잘려나온 시간이 담긴 사진들은 주인을 기다린다. 사진 속 주인들이 찾아오고, 마치 시간이 이어진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남아있던 앙금도 하나둘 풀려간다. 어쩌면 사진관의 정리가 끝날 때쯤에는 마유가 사진을 그만두게 된 그 4년 전의 사건, 그 이전의 시간과도 이어질 수 있을지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내용이나 결말에 민감한 이들이 많기에 줄거리도 정말 대략적으로만 적었다. 실제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줄거리 자체는 전혀 다르지 않다. 사진과, 인연과, 시간의 이야기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설정과 프롤로그다. 

첫번째 설정은 소재가 사진이며, 그 사진이 의미하는 바가 '과거에서 잘려나온 시간'이라는 점이다. 어쩐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두번째 설정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계기가 니시우라 사진관의 마지막 주인이자 마유의 외할머니인 니시우라 후지코의 죽음이라는 거다. 죽음 이후에 비로소 부활 혹은 재생이 시작된다는 흔하지만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에서 시작하는 셈인거다. 

 프롤로그 역시 설정과 이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섬'이라는 걸 자세히 묘사한다. 그런데 이 섬은 단지 바다로만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니다.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벌써 예상이 되시는지.


 사람은 누구나 '섬'과 같은 고립된 존재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에, 결국 어떤 순간, 혹은 거의 언제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상태를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섬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고립되어 있기만 한 것도 아니다. 다리를 통해 육지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거다.

 에노시마라는 섬은 고립과 연결이라는 상태를 통해 무대의 배경이 됨과 동시에 사람의 내면 혹은 존재를 암시한다.


프롤로그에서 고양이 요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8쪽

 오른쪽에서는 파도 소리가, 왼쪽에서는 인간의 발소리가 들렸다. 같이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다에 가봤자 찬바람만 맞을 뿐이겠지. 왼쪽으로 꺾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서로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가능한 바다에 나가 찬바람을 맞는 것보다는 의미 없이 부딪힐지언정 사람들 속에서 방황하는 게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고 깨달음을 얻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렇게 많은 수도승들이 산으로 바다로 나갔음에도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사람은 사람 속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어내고, 잘라버린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다시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흔할 수 있는 일화들에서 내가 읽은 건 단절과 연결, 화해와 이해에 대한 갈망과 필요성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만 어떤 계기나 매개체가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수월하게 연결될 수 있다.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에서는 사진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어떤 사건 이후로 사진을 그만 둔 마유가 섬에서 알게된 묘한 남자 마도리 아키타가 역시 비밀을 감추고 있다. 크고 작은 비밀들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거에서 잘려나간 시간을 담고 있는 사진을 찾기 위해 사진관을 찾는다. 고양이 요나가 말하는 것처럼 탁한 발소리와 함께. 


 길을 갈 때 사람들이 발소리에 귀기울여 보시기를. 혹시 그 가운데 보통 사람과 다른 탁한 발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눈팔기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이현 작가님이 해설을 썼다는 걸 알았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읽기 전이었다. 

읽고 난 후에 뒤 표지에 있는 정이현 작가님의 해설 일부를 발췌한 글을 봤다. 작가님은 이 작품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물론 해설 전문을 읽는 일은 이번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만한 자부심으로 뭉친 사내가 자신이 기실 길가에 핀 풀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가는 과정이다.

멋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에 설득력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쓰메 소세키는 정말 좋아하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작품도 거의 다 읽어봤다. 

 『한눈팔기』가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거듭되는 주에서 그것은 저렇고, 저것은 이렇고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생각을 너무 많이 알게 되어버려서 그에게 실망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게 걱정의 정체였다. 

 정이현 작가님과 다르게 생각한 부분을 먼저 말하자면, 나쓰메 소세키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다른 사람과 같다는 걸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쓰메 소세키다. 

 『한눈팔기』에서 보여주는 겐조의 내면은 분명 보통 사람처럼 흔들리고, 불안해하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협한다거나 자기 생각을 고쳐먹지는 않는다. 같은 것을 말하면서도 다르게 표현하고, 다른 것 안에 같은 것이 있음을 알면서도, 분명히 다르다고 말하는 모순되지만 사실인 이야기를 거듭 말하고 보여주는 이유도 자신은 마지막까지 오만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아니었을까.


 간파당한 오만이라고 해도, 허울뿐인 자부심이라고 해도 굽히지 않으면 자기 자신만은 지켜낼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억지지만 사실이니까 말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나라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 인물을 만든 소세키가 자신을 '길가에 핀 풀과 다르지 않다'고 인정할 리 없다. 설사 다르지 않다고 느끼더라도 그 다르지 않음 안에서 다름을 발견해 낼 사람이 소세키라고 생각한다. 


 앞에 말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한눈팔기』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본제는 『道草』인데 도무지 어떤 의미인지 오리무중이다. 자유롭게 해석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자유롭게 해석하기로 했다. 대략 제목 그대로다. 풀이 잔뜩 깔린 길이 있다고 하자, 그 풀들이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풀은 아닐 거다. 거기에는 화려한 꽃도 있을 것이고, 잔디처럼 표시 나지 않게 뻗어가는 것도 있을 거다. 

 길 위의 풀들도 모두 다르다.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삶이 있다. 그 다름을 자기 자신조차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한눈팔기』는 나쓰메 소세키의 삶을 담은 자전적인 소설이다. 입양되었다가 본가로 돌아온 과정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과 그 시간이 빌미가 되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잊어버리고 싶은 시간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마찰이 주로 담겨 있다. 독특한 것은 이 작품이 특별히 어떤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적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그야말로 '나쓰메 소세키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려고 적은 작품 같다고 하면 적절할까?


가장 가까워야 할 형제와 부부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이 괴롭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는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 단지 사람은 저마다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면서도 묵묵히 그 괴로움을 끌어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이야기 속 겐조이고, 나쓰메 소세키였다.


 시기 상으로 보면 『한눈팔기』는 거의 말년에 쓴 작품이다. 어쩌면 멀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다음 세상에 남기는 유언처럼 혹은 자서전처럼 자기 삶을 돌아보려는 시도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에 골몰한다. 이 작품에서도 이해에 대해 거듭 이야기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의 주의와 주장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체념이나 포기와는 다른, 수용이라고 할까.


 100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소세키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현재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어느 날 그는 그 청년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행복하네. 졸업하면 뭐가 되겠다든가 뭘 하겠다든가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건 선생님 세대 일이지요. 요즘 청년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물론 뭐가 되겠다든가 뭘 하겠다든가 하는 걸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세상이 그렇게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과연 그가 졸업했던 시대에 비하면 지금 세상은 열 배나 살아가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주에 관한 물질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청년의 답에는 그의 의도와 다소 어긋난 점이 있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과 그 말에 청년들이 답하는 말과 닮아 보이지 않는지.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멋진 문장은 이 부분인 것 같다. 

"세상에 매듭지어지는 일은 거의 없어. 한번 일어난 일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다만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니까 남들도 자신도 알 수 없을 뿐이야."

 매듭을 짓는다는 건 싹둑 끊어낸다는 것과는 다르다. 매듭을 어디에 짓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어떤 매듭을 지었는가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다. 거기다 그 매듭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또 달라지기에 점점 알기 어려워지는 거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소세키는 쓸쓸했을까? 

분명 쓸쓸했을 거다. 하지만 그 쓸쓸함이 더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다.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떠밀리듯 선택한 쓸쓸함이지만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태도는 고집과도 다르다. 가장 가까운 말을 찾자면 '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되기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닌 자의에 의한 것, 스스로 자처한 것이기에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롱하면서, 때로는 비웃고 비난하면서, 그것이 자신임을 점점 더 밝히 알아갔을 거다.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하는 마음은 내게도 있다. 어쩐지 그런 마음이 소세키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새삼 모든 독서가 자기 마음에 글을 비춰보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걸 깨닫는다. 그 해석이 어떻든 옳거나 그름이 있기 어려운 이유도 그런 것일 테지.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기억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상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세상이 바라는 나를 돌아보고 온 기분이랄까.


 『한눈팔기』는 그런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삶에서 잠시 눈을 돌려 과거로, 내일로 마음을 옮겨 보는 그런 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씨의 맛 -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를 느끼는 감수성의 역사
알랭 코르뱅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는 당연하지만 인간을 떠나서 생각해보면 무척 억울할 것이 적지 않다. 그 억울할 것 가운데 한 자리는 분명 날씨가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날씨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건만 날씨 때문에 우울해지거나 슬퍼졌다고 말하는 건 예삿일이고, 날씨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날씨'가 존재한다면 그에게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할 것처럼 하소연하는 이들도 거의, 늘, 언제나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인간이 날씨를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고충'이 사라지게 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거다. 오히려 보통의 고충에 다툼이 추가될 거고 그 결과 날씨를 탓하는 사람만 늘어날 게 뻔하다.


 웃지 못할 일이 있다. 기상청에서 새로 도입했다는 슈퍼컴퓨터 이야기다. 기상청이 새로운 슈퍼컴퓨터를 도입했음에도 오히려 전보다 오보 횟수가 잦아졌고, 오차도 커졌다는 거다. 

 "세금을 들여서 무엇하는 짓?" 이 정도는 귀여운 편이다. 

 '기상청이 아니라 구라청'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여럿 봤다. 

기상청에서는 날씨가 변덕스러운 탓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웃기는 건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한 유럽의 경우 예보의 정확도가 올라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슈퍼컴퓨터라고 해도 기상을 예측해주는 건 아니다. 수집된 무수한 정보를 취합해 분석하는 일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거다. 최후의 결정과 해석은 숙련된 예보관이 하게 된다. 결국 일기예보도 사람 문제라는 거다.


 이웃집 할머니의 예보가 더 정확하더라는 말은 웃기지만 사실일 수 있다. 날씨 역시 경험을 통해 전조를 읽는 일에 속하니 말이다.


 《날씨의 맛》은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와 같은 기상현상을 주제로 여러 사람이 쓴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우리가 '날씨'라고 부르는 현상의 구성 요소와 기상 상태에 대한 인식과 감정의 변화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기상현상에 대한 인식에 치우쳐 있어서 편협해 보인다는 한계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느꼈던 감정인 공포와 경외, 놀라움과 애정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다. 아쉬움도 있는데 문장 속에서 접속사의 위치나 쓰임이 의미를 밝히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텍스트의 해석과 이해 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해가 쉬운 번역도, 편집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날씨의 맛》의 번역자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도 번역했다고 적혀 있는데 찾아 읽어봐야겠다.


인상 깊었던 부분을 하나 발췌하는 걸로 감상을 마칠까 한다.

보험에 관해서는(보험으로 우리는 위험과 돌발적인 일에 경제적으로 대비한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기치 못한 일을 더욱 견디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고, 우리 각자는 더욱 개인적인 방식으로 이에 동의하면서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보장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신체, 보건, 건강과 맺는 관계에 접근하여 영향을 미치며(청결과 웰빙에 대한 우리의 걱정과, 일부 사람들이 드러내는 이에 대한 강박을 보라) 이 분야에 대한 우리의 요구사항은 나날이 배가 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휴가를 위해 숙소나 기차표를 일찍부터 예약하도록 부추기는 것, 하늘의 색깔과 계절 고유의 돌발 사고를 예측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결국 같은 원리다. "우리는 규격에 맞춰진 계절을 기다리며", 언제나 태양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라고, 계절들이 "달력에게 약속을 이행하기를 희망한다고, 드 세비녜 후작 부인도 어떤 서신에서 썼다. 돌발적인 기후 사건을 더욱더 참아내지 못하고, 우리 생활 방식은 점점 그것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으니 우리는 그 점에 관해서는 전혀 발전을 하지 못했다. 
《날씨의 맛》중

 미래의 어느 날에는 우리가 '삶의 변수'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이 예측 가능해질까? 그렇게 많은 것을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단순히 준비하지 않는 것보다는 준비하는 것이 나으니까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나도 뒤처질 수 없다는 기분이라면 어쩐지 서글퍼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재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산이 없어 짚을 엮어 쓰고 다니던 시대보다 지금의 우리가 더 젖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거다. 세탁과 건조가 더 간단해졌음에도 젖거나 더럽혀지는 것을 더욱더 경계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풍의 위력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압도적인 현상 앞에서는 그 어떤 대비나 준비도 무력해진다. 그 거대함과 강력함은 두려움을 느끼게 했지만 오히려 마음을 비우게 만들기도 했다.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오만임을 기억해야 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젖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하늘에 대고 화를 내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명한지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염려된다면 언제나 가방에 우산을 넣어가지고 다니면 된다. 그것이 번거롭다면 소나기를 걱정하는 걸 그만두는 편이 더 낫다.


 날씨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거나 의도를 품지도 않는다. 그저 거대한 흐름 안에서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없어야 할 곳에 없을 뿐이다. 물론 기상 이변이라는 변수도 있다. 그러나 큰 의미로 보면 기상 이변이라는 표현 역시 인간의 견해일 뿐, 자연의 견해는 아니다. 


 적이 부족해서 자연까지 적대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날씨를 탓하기를 그만두고 날씨를 맛보기를 권한다.

오늘 밤만 해도 빗소리가 이렇게 좋지 않은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마음 놓고 재밌게 읽은 책을 만났다. 그런데 묘한 건 신나고 재밌게 읽었건만, 읽는 동안 크게 웃은 적이 있던가를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는 거다. 

 뭐,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자. 요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는 거다. 그리고 아마 몇 번쯤 '풋'이라거나 '푸흡'이라거나 '푸흐훗'이라거나 하고 웃기는 했을 거다. 지하철에서 거진 다 읽었으니 소리 내어 웃을 수 없었을 뿐.


 보건교사인 아는형, 아차, 안은영 선생님(별명이 아는형)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바로 사람이 아닌 것들을 보고, 해로운 것들을 흩어버릴 수 있는 '엑소시스트'의 능력이 그것이다!(두둥) 


그렇다고 아는형 선생님, 아차, 안은영 선생님이 어떤 소설의 누구처럼 '월향'을 날린다거나, 기도력으로 싸우느냐? 그건 아니다. 안.은.영. 선생님의 무기는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이다(이건 뭐, 설정부터 기대할만하다). 


 안은영 선생님은 보건교사다. 그러므로 당연히 배경은 학교다. 그런데 이 학교가 위치한 곳이 참 묘한 곳이라 자꾸만 나쁜 것들이 꼬이고 난리도 아니다. 다른 직장에 있을 때도 타고난 능력 때문에 힘들었기에 좀 편하게 지내볼 생각으로 학교에 발을 들였건만 역시 세상은 능력자를 가만두지 않는 모양이다. 


 이 학교에는 또 한 사람의 특이한 인물이 있는데 학교 창립자의 손자인 한문 선생님 홍인표다.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기운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안은영에게 힘을 빌려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둘의 묘한 협력 관계는 학교의 다른 이들에게는 '연애질'로 보이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낸다는.


 여하튼, 안은영 선생님은 매일매일 죽은 것과 산 것과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것과의 혈투(?)를 계속한다. 이 이야기는 죽음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는 미련과 산 자를 해치려는 원한과 죽은 자들보다 더 무서운 산 자들의 사념에 관한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작가의 말을 통해 알게 된 거지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대부분 실재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름 혹은 별명이었다.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전적으로 사실적인 존재라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보건교사 퇴마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 이렇게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내는 시리즈에 들어갔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이 소설은 처음에도 적었던 것처럼 재미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더 흥미로운 것은 아무 의미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 가끔씩 스리슬쩍 비치는 현실의 모습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조금이라도 곱씹어 보지 않으면 지나간 줄도 모를 그런 풍경들. 

 하지만 그런 걸 오래 곱씹거나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만 호흡을 끊어가며 집요하게 굴어서야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한 번 더 읽게 되면 그때는 사건이나 배경의 의미나 전개 등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의도를 찾아볼까 싶기는 하다. 그러나 어떤 작품들은 굳이 의미를 찾지 않는 것이 더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현명한 태도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안다. 


 누구에게 선물해도 좋을 책을 발견했다는 기쁨 외에도 이 작품이 마음에 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단순한 건데, 흔히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한 상대방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복수를 꾀한다는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특이한 학교에, 묘한 인물들의 이야기인데 결국 흔한 무협지 속 복수극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졌다면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판타지가 무협지보다 좋은 건 상상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벌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나 존재가 등장할 수 있는 것도 판타지다. 무협지는 '초인'들의 세계에 가까워서 오히려 현실적인데도 이 세상은 현실적인 무협지보다 환상적인 판타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현실적인 것보다 판타지가 더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류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느껴지는 걸 그렇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또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거다. 


 하지만 판타지가 좋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환상적인 일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좋은 거다. 결국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일들, 얼토당토않은 사건들이 일어나도 내 삶의 주인공이 나인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정말 재밌게 읽힌다. 늦었지만, 이 책을 주신 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을 다시 전한다. 

고맙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