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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복잡한 생각없이 편하게 누워서 읽은 가벼운 책이다. 감상 역시 가볍게 쓰기로 한다.
에노시마에는 100년이 넘게 이어온 사진관이 있다. 그 사진관의 이름이 니시우라 사진관이다.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사진관이지만 세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마지막 주인 니시우라 후지코 사후에 영업을 끝내게 된다. 니시우라 후지코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유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종종 들렀고, 외할머니에게 사진을 배운 마유지만 4년 전의 '그 사건' 이후 사진을 찍는 것도 카메라를 만지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야기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영업을 마치게 된 사진관을 정리하기 위해 마유가 섬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한때 마유는 '과거의 순간을 잘라내'어 사진에 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의 결과 4년 전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기에 사진을 그만둔 거였다.
마유는 사진관을 정리하다가 '미수령 사진'이 담긴 상자를 발견한다. 미수령 사진들 속 주인공들이 바로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연이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과거에서 잘려나온 시간이 담긴 사진들은 주인을 기다린다. 사진 속 주인들이 찾아오고, 마치 시간이 이어진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남아있던 앙금도 하나둘 풀려간다. 어쩌면 사진관의 정리가 끝날 때쯤에는 마유가 사진을 그만두게 된 그 4년 전의 사건, 그 이전의 시간과도 이어질 수 있을지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내용이나 결말에 민감한 이들이 많기에 줄거리도 정말 대략적으로만 적었다. 실제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줄거리 자체는 전혀 다르지 않다. 사진과, 인연과, 시간의 이야기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설정과 프롤로그다.
첫번째 설정은 소재가 사진이며, 그 사진이 의미하는 바가 '과거에서 잘려나온 시간'이라는 점이다. 어쩐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두번째 설정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계기가 니시우라 사진관의 마지막 주인이자 마유의 외할머니인 니시우라 후지코의 죽음이라는 거다. 죽음 이후에 비로소 부활 혹은 재생이 시작된다는 흔하지만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에서 시작하는 셈인거다.
프롤로그 역시 설정과 이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섬'이라는 걸 자세히 묘사한다. 그런데 이 섬은 단지 바다로만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니다.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벌써 예상이 되시는지.
사람은 누구나 '섬'과 같은 고립된 존재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에, 결국 어떤 순간, 혹은 거의 언제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상태를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섬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고립되어 있기만 한 것도 아니다. 다리를 통해 육지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거다.
에노시마라는 섬은 고립과 연결이라는 상태를 통해 무대의 배경이 됨과 동시에 사람의 내면 혹은 존재를 암시한다.
프롤로그에서 고양이 요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8쪽 오른쪽에서는 파도 소리가, 왼쪽에서는 인간의 발소리가 들렸다. 같이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다에 가봤자 찬바람만 맞을 뿐이겠지. 왼쪽으로 꺾어 걸음을 옮겼다. |
사람들은 서로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가능한 바다에 나가 찬바람을 맞는 것보다는 의미 없이 부딪힐지언정 사람들 속에서 방황하는 게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고 깨달음을 얻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렇게 많은 수도승들이 산으로 바다로 나갔음에도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사람은 사람 속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어내고, 잘라버린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다시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흔할 수 있는 일화들에서 내가 읽은 건 단절과 연결, 화해와 이해에 대한 갈망과 필요성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만 어떤 계기나 매개체가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수월하게 연결될 수 있다.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에서는 사진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어떤 사건 이후로 사진을 그만 둔 마유가 섬에서 알게된 묘한 남자 마도리 아키타가 역시 비밀을 감추고 있다. 크고 작은 비밀들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거에서 잘려나간 시간을 담고 있는 사진을 찾기 위해 사진관을 찾는다. 고양이 요나가 말하는 것처럼 탁한 발소리와 함께.
길을 갈 때 사람들이 발소리에 귀기울여 보시기를. 혹시 그 가운데 보통 사람과 다른 탁한 발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