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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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연거푸 하품을 하는 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시간인걸요. 

그럼에도 굳이 졸음을 참아가며 끄적이기 시작한 이유는 밀려가는 감상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기억력도 좋지 않은데, 이러다가 몽땅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말이죠.


 피곤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런 게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좋아서 하고 있으므로, 피곤이 고통이나 괴로움, 원망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벌써 한참 전에 읽은 책이라 거의 다 잊어버렸기에 짧게 적기로 합니다. 


<내 삶의 의미>는 소설은 아닙니다. 에세이라고 하기도 조금 어렵습니다. 오히려 '고백록'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겠네요. 고백록이라고 적은 이유는 이 한 권의 책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로맹 가리 자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완성하고자 했던 소망을 담담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꿈꾸던 삶과 실제로 '살아진 삶' 모두를 이야기하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6년 생을 정리한 거죠.


 로맹 가리는 여러 전설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작가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본래 콩쿠르 상은 한 작가에게 단 한 번 수상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도 수상하면서 예외로 남죠.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말을 들은 로맹 가리가 상을 고사했음에도 선정 위원회에서 수상 거부를 거부하면서 억지로 안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맹 가리는 여러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는데,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이 특히 유명해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로맹 가리는 당시 문단에서 냉대를 받았고, 나이가 들면서 '로맹 가리는 이제 끝'이라며 냉소하는 적들도 늘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이들과 다투는 대신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로 했고, 로맹 가리를 비판하던 이들은 에밀 아자르를 로맹 가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신예 작가라고 믿어버립니다. 로맹 가리가 얼마나 웃었을지.

 로맹 가리는 자신을 비웃는 이들을 실컷 비웃습니다. 로맹 가리가 자살 후 남긴 유서를 통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문단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내 삶의 의미>는 이러한 로맹 가리의 삶과 크고 작은 소동, 논란과 바람까지, 제목 그대로 로맹 가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담겨있습니다.


 <내 삶의 의미>를 읽기 전까지 로맹 가리는 외교관과 전설적인 작가라는 지위에 올라 화려한 삶을 보냈을 유명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찍기도 하고, 유명 배우와 결혼도 한 그런 행복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단순히 적자면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로맹 가리의 삶은 충분히 동경할만하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예상은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요. 왜냐하면 로맹 가리의 작품을 읽다 보면 마냥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외롭고, 쓸쓸하며, 늘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에 이르면 그 느낌은 절정에 이릅니다. 오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선택한 게 납득이 갈 정도로, 로맹 가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의 의미>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 가운데 하나는 로맹 가리가 오랜 시간 동안 군인으로 지내며 전투기를 몰았다는 겁니다. 전장에도 여러 차례 투입됐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베테랑 조종사였던 거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비행 중 사고로 코를 다치는 바람에 코로 숨을 쉬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도 꿋꿋이 비행을 포기하지 않았던 점이었습니다. 

 위태로운 몸 상태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비행을 계속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극한의 상황에서 느끼는 생의 실감, 그런 것이었을까요.


 또 한 가지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은, 로맹 가리가 어머니에게 상당한 애착을 품고 평생을 보냈다는 점이었습니다. 로맹 가리에게 온갖 기대를 품었던 어머니, 죽음의 순간에도 아들을 부르지 않고 자신이 소망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홀로 죽어간 어머니, 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굳건한 바람이 오히려 로맹 가리의 외로움에 외로움을 보태는 요인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꿈을 이루지 못한대도,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며, 막연하게 마음으로, 머리로만 인지하고 있는 사랑과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짧게 적어보겠다고 하고 또 이렇게 늘어지고 있으니 하나만 더 적고 이야기를 마치기로 합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삶을 두고 '살아졌다'라고 말합니다. 로맹 가리의 고백을 들어보죠.


이 대담 초반부에서 나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삶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분명 우리는 삶에 조종당합니다.
<내 삶의 의미> 중


'삶에 조종당'한다는 말,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말,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 

이 말들에는 자기 삶을 주도하는 적극성도 확신도 없습니다. 자포자기처럼 들리기도 하죠. 하지만 로맹 가리는 마지막까지 스스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썼다고 믿습니다. 이런 고백도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삶의 철학으로 '짝' 외에 다른 개인적 가치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만큼은 내 삶은 실패였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자기 삶을 망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를 저버렸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요.
<내 삶의 의미> 중

로맹 가리에게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삶 자체보다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는 게 더 우선이었다는 거죠. 늦은, 유예된, 미뤄진, 그러나 결국 결행된 로맹 가리의 자살은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삶이 충돌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일 말입니다.


 삶을 관통하여 추구할 가치를 생각하기는커녕 당장 내일의 일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급하고도 바쁘게 흘려보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제게 로맹 가리의 삶은 상당히 멀고도 희미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저 역시 나름 추구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막연히 '이해'라고 부르고 있고, 무엇을, 어디까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삶이 닿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최선'에 객관적인 기준은 없지만, 개인의 삶이 객관적일 필요는 없겠죠.

로맹 가리는 삶에 조종당하고, 삶에 의해 살아졌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저는 이렇게 살고자 합니다.


살아지는 삶을 살기보다 살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면서 말입니다.


자, 오늘도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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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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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허구입니다. 

사실과는 다른 지어낸 이야기라는 거죠. 하지만 소설 속 모든 이야기가 허구인 건 아닙니다. 

어떤 소설들은 사실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소설이라는 이름보다는 '전기'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기도 합니다. 바로 이 소설 <HHhH>가 그런 것처럼 말이죠.


제목 <HHhH>는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 라 불린다'라는 문장을 이루는 네 단어의 머릿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히믈러는 제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핵심 간부였던 그 히믈러이고, 하이드리히는 히믈러를 보좌하며 정보를 관리하고, 히틀러의 정적을 제거하며, 체코 등 강제로 합병한 나라의 통제와 유대인의 효율적인 제거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금발의 짐승, 프라하의 도살자로 불리기도 했으며 전후 오래 잊히지 않을 유대인 '최종 해결' 계획을 세운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드리히는 점령지인 프라하 시내를 별도의 호위도 없이, 운전기사만을 데리고 오픈카를 타고 지나다녔는데 그런 오만한 행동이 죽음을 앞당기게 됩니다. 1942년, 영국에서 파견된 낙하산 병, 가브치크와 쿠비시 두 사람의 공격에 부상을 당하고, 감염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거죠.


<HHhH>는 하이드리히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암살 직후 프라하에서 벌어진 일들까지를 편집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다른 상황이나 인물은 배제하고, 하이드리히라는 인물과 가브치크, 쿠비시의 세 사람에게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합니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2차 대전의 상황이나 프라하의 역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읽었음에도 낯설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이 얼마나 사실적인가 하면 검색창에 '유인원 작전(하이드리히 암살 작전명)'을 검색하면 결과가 나오는데, 그 시작이나 경과, 결말이 소설에 나오는 것과 일치합니다. 거의 말이죠. 소설이기에 상상으로 그려진 대화나 내면 심리가 나오지만, 작가가 어찌나 깐깐하게 구는지 과장을 허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라고 하면 조금 묘하긴 하지만, 그래서 이 소설은 '거의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별 차이나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논쟁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이드리히의 오픈카가 검은색이냐, 초록색이냐 하는 문제에서 일 거고요.


 한 줄로 적어보면 '1942년 6월의 체코 프라하에서 일어난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을 대단히 사실적이고, 실감 나게 그려낸 소설'이 <HHhH>라는 겁니다. 

 

 프라하의 도살자, 금발의 짐승, 유대인 최종해결의 주동자. 

하이드리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HHhH>의 작가는 단순히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처럼 엄격한 작품을 쓴 것은 아닐 겁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단순히 사실 확인을 위해 읽기 시작한 게 아닐 겁니다. 

'사실' 혹은 '진실' 너머에 있을 그 '무엇'을 찾고자 함이겠죠. 그게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딴소리를 좀 하기로 하죠.

평범한 아이로 학교 생활을 했음에도 열 개가 넘는 별명이 붙어 버렸습니다. 

별명의 기원도 다양해서, 이름에서 생겨난 유치한 것에서부터, 생각이나 행동까지 고려된 복합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듣기에 좋은 별명이 있는가 하면, 듣고 싶지 않은 별명도 있었습니다. 

 각각의 별명이 '나'라는 존재를 조금씩이라도 반영하는 거라면 그 모든 별명들은 세상과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었을 겁니다. 제 견해가 어떻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말이죠.


 하이드리히에게도 별명이 몇 개인가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대인'을 암시하는 것도 있었는데, 자신이 순수한 독일인이라고 믿었던 하이드리히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된 별명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 최종해결을 승인하면서 나치의 수뇌부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역시 하이드리히는 위대한 독일인의 후손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의 피가 섞였다고 한다면 유대인이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니 그것도 흥미로운 결과일 거라는 거였습니다. 어느 쪽이든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죠.


 온갖 숙청을 주도하고, 학살 수단을 찾는데 열심이었던 만큼 하이드리히가 냉혈한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많습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썼고, 근무하던 해군에서 쫓겨났을 때도 무척 괴로워했으며,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기도 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일을 무수히 저질렀지만, 여전히 인간이었다는 거죠.


 하이드리히를 죽인 두 낙하산병,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 존재는 희미합니다. 말 그대로 사진 몇 장만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죠. 

 증명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이 하이드리히를 죽음으로 이끈 결과, 역사의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라는 건 확신합니다. 그것이 더 '나은 현재'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최선'이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이드리히의 암살을 주제로 한 소설이지만 사실 감상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인물은 가브치크와 쿠비시라는 영웅 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의 존재에 더 끌리는 마음을 끊지 못했습니다. 하이드리히라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 내면이 궁금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실컷 하이드리히 이야기를 적었던 거죠. 별명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같습니다. 

 모든 모습이 하이드리히입니다. 하지만 만약 모순되는 지점들이 있다면 어느 쪽이 진짜 하이드리히였을까요. 

히믈러의 두뇌로 2차 대전을 진행하며, 점령지의 치안을 공고히 하고, 레지스탕스를 소탕하며,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앞장서는 나치 SS의 최고지도자가 처음 태어나던 순간부터 하이드리히의 운명이었을까요? 아니면 아주 사소한 선택의 차이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그 가능성 혹은 여지에 하이드리히를 넣어둬야 하는 걸까요.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기에, 이런 궁금증은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의 도살자가 되지 않았다면 가브치크나 쿠비시가 하이드리히를 죽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이후에 벌어지는 학살의 양상도 달라졌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마는.


 2차 대전에 대해, 나치에 대해, SS와 유대인 최종 해결에 대해, 하이드리히 암살작전 유인원 작전과 두 사람의 낙하산병 가브치크와 쿠비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에 이 소설을 한 번 읽고 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감상을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이드리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보는 모양으로요.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가정도, 수정도 허락되지 않죠. 하지만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게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 역사 속 인물이 '누구'였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져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대한민국은 긴 역사만큼 다양한 해석과 무수한 여지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요. 

 해석은 후대의 몫입니다. 하지만 기록은 당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록할 셈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 우리의 삶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요.


 대통령인지, 꼭두각시인지, 몸통인지, 피해자인지, 코스프레인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짐을 기억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우리가 아무리 경의를 표해도 죽은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기억은 당사자인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기억을 통해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다.
<HHhH>_238쪽
"진실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싫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글이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진실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진실을 가리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천박한 인간들이다.
<HHhH>_318쪽

 

그래서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며, 진실이 밝혀지는 날까지 진실에 무관심해지지 않기 위해 애쓰려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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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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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온은 신화 속에서 헤라클레스가 살해한 괴물의 이름입니다. 
누구는 게리온의 팔다리가 여섯이라 했고, 누구는 날개가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말하고 전했지만 한 가지에는 동의했습니다. 

"게리온은 괴물이다."

이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던 거죠.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신화 속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책 <빨강의 자서전> 속 주인공, 게리온은 신화 속 괴물과 동일한 존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신화 속 게리온과 <빨강의 자서전> 속 게리온이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신화 속 이야기에서는 괴물로 간단하고도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현재의 이야기 속에서도 괴물로 태어나 불안과 두려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도저히 행복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유쾌하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유쾌함은 웃음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이 당장 제게 닥친다면 결코 즐거워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고, 꿋꿋이 살아낸 결과 어떤 '의미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걸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에 유쾌하다는 말을 꺼내볼 수 있었습니다.

 괴물로 태어난 존재와 알고 지내는 분이 계신지 궁금하군요. 그런 분에게는 이 이야기가 조금 더 가깝고도 실감 나게 다가갈 겁니다. 
 '시로 쓴 소설'이라고 소개를 했더군요.
시, 읽기는 쉬운데 이해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너무 염려 말아요. 

 <빨강의 자서전>은 시의 형식을 빌렸고, 
상징이 적잖이 등장하며, 
개념조차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데다, 
시점과 배경이 모호한 게 사실이지만,
결국 소설이니까요. 

네.
방금 제가 적은 모양처럼 줄 바꿈이 잦고, 희미하지만 운율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렇다고 하는 건지 저렇다고 하는 건지 모호하기는 하지만 의미 자체가 모호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여타의 소설처럼 줄거리가 있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테니 독자는 자기 나름의 결론과 해석에 닿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장난을 조금 쳐봤습니다. 
그리 두껍지도 않은 빨강 괴물의 자서전을 겁내시는 분들이 계실까 봐서요.

 장난은 그만하기로 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빨강의 자서전>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헤라가 내놓은 열두 과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소떼를 차지하기 위해 게리온이라는 괴물을 죽입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무참하게 죽여버리죠. 게리온은 괴물이라고 등장하며 그 생김은 괴물처럼 생겼고, 어쩌면 날개가 있었을 겁니다. 
 아, 앞에서 한 이야기를 또 적고 말았군요.

 날개,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습니다. 
적어도 보통의, 평범한,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없죠. 
인간이 날개를 달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혹시 그런 경우를 보거나 들어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그들의 삶이 어떨지, 조금 더 수월히 상상할 수 있겠죠.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요. 
비약하면 천사는 날개가 있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비틀어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는 게 '정상'이고, 날개가 있는 건 '비정상', 줄여서 '괴물'처럼 여기는 존재가 될 겁니다. 
 
 <빨강의 자서전>은 '빨강' 존재, '날개'를 달고 태어난 소년, 게리온의 이야기입니다. 괴물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소외당하고, 배척받는 게리온이었지만 엄마만큼은 게리온을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엄마를 무척 따르고 의지했죠. 하지만 형은 야박했습니다. 동생을 멍청이로 여기고, 괴물처럼 생각했죠. 게리온은 날개를 옷 속에 숨기고 다녔습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밖에 꺼내놓고 있으면 불편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지냈습니다.  
 게리온은 형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소년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바로 '헤라클레스'라는 소년이죠.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은 연인이 됩니다. 어린 소년과 소년 커플이죠.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헤라클레스를 좋아하는 만큼 게리온을 좋아하지는 않는 듯 보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오래 만나지 못하죠. 

줄거리가 길어졌군요.
 <빨강의 자서전>은 그런 소년 게리온의 이야기입니다. 헤라클레스와 다시 만나게 될지,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아끼게 될지 아니면 신화 속 이야기처럼 운명적인 대결에 이은 파멸로 이어질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빨강의 자서전>은 난해하다면 난해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소설입니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읽을 수 없지도 않죠. 문장 형식이 조금 낯설고, 내용에 난해한 부분이 종종 등장하지만 줄거리 자체는 간단합니다. 게리온과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니까요. 빨강인 존재, 날개 달린 괴물 게리온과 헤라클레스 이야기라는 겁니다. 
 사랑인지, 좌절인지, 고독인지, 고통인지, 기대나 희망인지, 절망인지는 읽은 사람 마음대로 판단 내려도 됩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는 거니까요.

 말장난을 조금 하자면 <빨강의 자서전>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화의 신화적 해석과 실재적 적용 혹은 실제적 재해석'
신화와 실재와 실제와 해석과 재해석.
네, 말 그대로 말장난입니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해볼 만한 말장난이죠.

신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며, 실재하지도 않습니다.
허구에,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괴물 이야기를 작가는 왜, 현대에, 지금에 되살려낸 걸까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읽어야 하는 건 '그들을 되살림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하는 메시지입니다. 메시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겠죠.
 
 어떤 사람은 빨강이라는 표현에서 불길함이나, 외설적임을 읽을 수도 있고, 소년과 소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으며, 신화 속 괴물을 현대의 인간으로 되살림으로써 괴물로써 살해당해야 했던 무고하고 순수한 존재 게리온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정답일까요? 솔직히는 작가조차 정답은 이것입니다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어렵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장난이나 늘어놓으며 자꾸만 이야기를 길게 늘이는 이유를 솔직하고도 간단하게 밝히자면 제가 읽은 메시지가 너무 시시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빨강의 자서전>이 '존재보다는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리온이라는 괴물, 빨강 괴물로 태어난 소년. 
 소년을 꺼려하면서도 쾌락에 이용하려는 형과 조용히 지켜봐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엄마와 소년이 너무나 사랑하지만 소년만큼은 사랑하지 않는 헤라클레스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응원군 하나.
 
 관계, 관계를 단절시키는 건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지만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회복하는 건 너무나 너무나 어렵죠. 특히 보통의 평범한 존재가 아닌, 특이한, 기이한, 이상한, 괴물 같은 존재라면 보통의 관계를 꿈꾸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길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일과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거나, 포기하는 일도 잦을 겁니다. 괴물은  박해받는 존재, 언제든 세상의 의혹과 미움 혹은 증오를 살 수 있는 존재니까요.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게리온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고 있으며, 괴물이라고 놀리거나 괴롭히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거죠. 
 <빨강의 자서전>에서는 명확해서 혼동할 수 없는 것을 자꾸만 뒤섞어 보여줍니다. 
 검은 것과 흰 것.
사람이 먼저인가, 세계가 먼저인가 하는 선후관계.
시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물음.
화산과 용암과 불.

 정말 솔직히는 저 자신이 지금 지독하게 오독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버리기로 했습니다. 궁금하면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 되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결론이 달라진대도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지금의 횡설수설이 횡설수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치거나 정리하거나 바로잡거나 하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횡설수설, 혼란, 어수선함, 어지러움, 불확실함과 불명확함, 모호하고 애매함까지 도요.

 자서전을 적어보지 않아서 알지 못하지만 자서전이라 함은 결국 '주관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독자는 결국 주관적이기에 주관적인 이야기조차 주관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무수한 주관과 주관이 교차하는 게 감상의 세계, 메시지의 세계가 되겠죠.

 기승전이 엉망이었으니 이제 결이나마 조금 나은 것을 내놓아야겠네요.

날개는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징'입니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데.
바다 깊이 들어가는 데.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데.
형태와 색깔은 다를지 모르지만 날개는 깨달음이자, 가능성의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깨달음이나 가능성이 언제나 '축복'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깨달음을 얻는 열매를 먹어 에덴이라는 천국에서 쫓겨나, 평생 노동하고, 산고에 시달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눈이 밝아져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이마에 표를 얻는 벌을 받지만, 사람들은 표를 지닌 카인을 두려워합니다. 

 게리온은 빨강 괴물입니다. 빨갛고, 날개를 지녔죠. 
왜 빨간 건지, 날개는 무엇을 위한 건지 의문은 간단히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고, 그 존재의 의미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겁니다. 
  <빨강의 자서전>이 존재보다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보통의 우리는 신화 속 영웅처럼 빛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웅의 발길질, 손짓, 입김에 후두둑 나가떨어지는 이름 없는 인물들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찮은 존재들에게도 나름의 삶과 인생,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저마다의 자서전이 있고, 그 자서전들에서는 모두가 주인이자 주인공이 됩니다. 

 자서전을 써봅시다.
이 하찮고 흔한 삶이, 유일하고도 소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존재들과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역사를 남겨봅시다.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계속하기로 합시다.

//이렇게 엉망인 걸 다시 읽어볼 마음도, 고쳐 써 볼 생각도 들지 않으니 나란 괴물도 차암,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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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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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펄 눈이 옵니다~'하는 동요 노랫말이 이상하게 느껴진 건 처음입니다.

(아마, 처음일 겁니다.)


한강 작가의 <흰>에 감상을 적으려고 시작할 말을 찾기 시작한 지금, 떠오른 생각이니까요.

이유가 또 단순한데, 어제 내리는 눈을 보면서 정말 조금의 소음도 내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비하면 비는 대단히 요란하게, 말 그대로 '쏟아지'죠.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는 빗소리는 천둥 소리나 바람 소리가 아니어도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눈은 세계를 빽빽하게 채우며 내리더라도 소리 내는 법이 없지요.  

 도심을 떠난 시골 혹은 산 속이라면 작은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설혹 들린다고 해도, 그 소리는 거스르거나 부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겠지요. 

'그래서? 그게 뭐?'라고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하는 동요 노랫말이 이상하게 느껴진 이유는 눈이 워낙 소리 없이 내린다는 사실, 하나였으니까요.


 책 얘기는 빼놓고 눈 얘기로 시작하게 된 건 제목이 <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눈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지나기까지 다시 몇 번이고 다시 눈이 내릴 거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아니지만 <흰>에는 줄거리와 비슷한 게 있습니다. 

제목이 <흰>인 이유에서부터, 책 속에 담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하나의 독백처럼 이어집니다. 

 책 속에 담긴 이야기의 시간이야 어떠하든 글 자체는 짧기에 '이 책은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하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책 얘기를 빼놓고 눈 얘기로 시작한 이유를 적는 건 앞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책에 대해 이렇다거나 저렇다고 할 얘기가 없어서도 그 이유가 되겠습니다.


 식상한 말, 무책임한 말이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 책은 이런 책입니다.


"읽어보면 압니다."


알만 하죠?

읽어보면 알게 됩니다. 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 읽는 게 나은 책이 있다는 거 아시죠?


책은 제목도 <흰>이고 표지도 '흽'니다. 그런데 겉표지를 보고 있자니, 속표지가 어떨지 궁금해지더군요.

 '예감'같은 거겠죠.

제목도 표지도 희지만 감춰진 표지는 '검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요.


예감은 절반만 맞아떨어졌습니다.

검다고 하기에는 밝고, 희다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짙은 회색입니다. 

회색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색에 밝은 분이 계시다면 이 색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빛'을 '희다'라고 합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책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얘기를 꺼내는 게 못나 보이지만 떠오른 게 있어 조금 더 적기로 합니다.


 <흰>은 흰 것에 대한 이야기, 기억들을 담은 책이지만 희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읽어보면 오히려 '검은' 것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기이한 일입니다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흰 것'은 눈부실 수 있겠죠. 

예를 들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의 칼에 비친 찌를 듯 눈부신 흰 빛에 위협을 느꼈던 것처럼 말입니다. 

'눈부시다'는 건 마주 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마주 볼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 의지'로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 압도적인 '흰', 그래서 오히려 '어둠'이 되어버리는 '흰'이 바로 <흰>에 담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이야기를 끝낼 셈인데, 딱 한 줄만 더 적겠습니다.


'흰' 것은 한 없이 가벼울 듯한데, 몹시도 무겁게 느껴지니 참 기이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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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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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법칙 안에서 인간의 삶은 '불가역적' 성격을 갖습니다. 

현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죠. 

'돌이킬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한 번뿐인 삶이니 신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걸요.


 <제 5 도살장>은 2차 대전 당시 벌어진 '드레스덴 공습'을 핵심으로 해서, 전쟁의 비극과 죽음의 하찮음과 시간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흔히 영화에서 그려지는 영웅적인 승리와는 거리가 먼 아직 어리고, 여린 아이들이 희생되는 비극.

전쟁은 다만 비극이라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비극이라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비극이라고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제목 <제 5 도살장>은 전쟁 당시 드레스덴에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원래는 가축 도살장이었던 곳을 수용소로 개조하고 붙인 공간의 이름입니다. 

 확대 해석해 보자면(제 특기죠), '가축'이 머물던 곳에 '인간'이 머물게 함으로써 '인간성 상실'을 의미하고, '도살'되는 게 가축이 아니라 '인간'이던 시기이기에, '인간 학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목부터 아주 처참하고, 비극적인 전개를 '암시'가 아니라 '명시'하고 시작한 셈입니다. 


 실제로 이야기는 처참하고 또 참담합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제 5 도살장>이라는 제목에 자세한 세부 제목이 붙습니다. 

<제 5 도살장 혹은 소년 십자군 죽음과 억지로 춘 춤>


 이 이야기가 처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히 무수한 죽음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죽음을 '당하는' 이들은 결코 스스로 원해서 죽는 것이 아니며, 죽은 이들 가운데 '소년(아이들)'과 민간인이 너무나 많았고, 승자에게나 패자 모두에게 남은 건 상처와 슬픔뿐이기 때문입니다.


  <제 5 도살장>은 '나'가 쓴 '드레스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첫 줄에 이렇게 적습니다.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제 5 도살장> 中

작가인 거트 보니것은 실제로 2차 대전에 참전했고, 드레스덴 공습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 소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는 말이죠.


 이야기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난 자'입니다. 자주 쓰는 표현으로 바꾸면 '시간 여행자'라는 이야기죠. 하지만 빌리 자신은 여행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물론 일어날 일을 안다고 해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바꾸려고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뭐 그런 거'기 때문에요.

 빌리는 시간에서 풀려난 사람일 뿐 아니라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지구에서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구경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시간 여행'에 '외계인'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같지도 않은,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그럴 리 없는, 시답잖은, 하찮은,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농담 따먹기 같지요. 하지만 빌리는 그 모든 걸 행하고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죽는지까지도 말이죠. 


  <제 5 도살장>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하지만 빌리가 경험한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보다 더 말이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은 왜 치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빌리는 시간에서 풀려났기에,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깨달았기에, 어쩌면 너무 많은 죽음을 경험했기에 죽음 자체를 일상적인 것 혹은 결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모든 죽음 뒤에는 이 말이 따라붙습니다.


"뭐, 그런 거지."

 

 죽음을 마치 숨 쉬거나 밥을 먹는 일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유감스럽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새겨진 결과 생겨난 만성적인 무력감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보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유감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하는 거라는 쪽으로 생각이 쏠리게 됩니다. 

  

 좀처럼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끼기에 본문 소환 찬스를 쓰기로 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빌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었다.
 <제 5 도살장> 中


 현실 앞에서 기도는 의미를 잃습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용기만으로 바꿀 수 없음을(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차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빌리 필그림처럼 말입니다.


 전쟁의 처참함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제 5 도살장>은 참혹한 인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습게' 느껴지죠. 전쟁, 죽음 같은 모든 게 말입니다. 하지만 우습게 느껴진다고 해서 처참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전쟁의 비극적인 면모가 확대되고 극대화되어 마음에 와 닿는 거죠. 

 기이한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로버트 베번의 저서 <집단 기억의 파괴>라는 책에서는 '전쟁'이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학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학살'은 인간 혹은 인종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기억' 자체를 학살하려는 시도가 무수히 일어난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기억을 어떻게 학살할 수 있는지 궁금하신가요?


기억을 학살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기억'을 간직한 공간, 건축물, 책과 같은 '기록'을 지우면 되는 겁니다. 

영국과 독일이 주고받은 공습처럼, 단순히 전략적 요충지나 무기를 생산하는 곳 외에 문화유산이 가득한 곳을 벽돌 한 장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쓸어버리면 기억도 쓸려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거라고요?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느냐고요?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러한 과정은 무수히 반복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 조선 시대 이전의 건축물 혹은 유물 혹은 역사 기록이 얼마나 남아있나요?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봤을 때,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게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합니다. 

'소거' 혹은 '삭제'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는 거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는 유태인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최종 해결'이라고 했다고 하죠. 

가슴에 별을 달게 하고, 한 번 수용소에 들어가면 연기가 되어 소각로의 굴뚝을 통해서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하는 상황에 몰아넣은 것에 그치지 않고, 체계적으로 유태인의 건축물과 역사를 파괴한 것이 나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 역시 죽어 마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백만 명이 죽죠.


 무엇이 남았을까요.

나치, 제국의 영광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희생 없는 정말무결한 승리 혹은 영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차고 넘쳤고, 그에 비례해 슬픔과 절망, 상처가 후유증으로 남았습니다. 


  <제 5 도살장>은 죽음 안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지지배배뱃'하는 소리는 어쩌면, '너희는 지금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어.'라는 속삭임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는, 이 짧아 보이지 않는 감상이 뭐라고 쓴 건지, 뭘 쓰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지배배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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