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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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허구입니다. 

사실과는 다른 지어낸 이야기라는 거죠. 하지만 소설 속 모든 이야기가 허구인 건 아닙니다. 

어떤 소설들은 사실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소설이라는 이름보다는 '전기'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기도 합니다. 바로 이 소설 <HHhH>가 그런 것처럼 말이죠.


제목 <HHhH>는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 라 불린다'라는 문장을 이루는 네 단어의 머릿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히믈러는 제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핵심 간부였던 그 히믈러이고, 하이드리히는 히믈러를 보좌하며 정보를 관리하고, 히틀러의 정적을 제거하며, 체코 등 강제로 합병한 나라의 통제와 유대인의 효율적인 제거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금발의 짐승, 프라하의 도살자로 불리기도 했으며 전후 오래 잊히지 않을 유대인 '최종 해결' 계획을 세운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드리히는 점령지인 프라하 시내를 별도의 호위도 없이, 운전기사만을 데리고 오픈카를 타고 지나다녔는데 그런 오만한 행동이 죽음을 앞당기게 됩니다. 1942년, 영국에서 파견된 낙하산 병, 가브치크와 쿠비시 두 사람의 공격에 부상을 당하고, 감염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거죠.


<HHhH>는 하이드리히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암살 직후 프라하에서 벌어진 일들까지를 편집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다른 상황이나 인물은 배제하고, 하이드리히라는 인물과 가브치크, 쿠비시의 세 사람에게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합니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2차 대전의 상황이나 프라하의 역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읽었음에도 낯설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이 얼마나 사실적인가 하면 검색창에 '유인원 작전(하이드리히 암살 작전명)'을 검색하면 결과가 나오는데, 그 시작이나 경과, 결말이 소설에 나오는 것과 일치합니다. 거의 말이죠. 소설이기에 상상으로 그려진 대화나 내면 심리가 나오지만, 작가가 어찌나 깐깐하게 구는지 과장을 허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라고 하면 조금 묘하긴 하지만, 그래서 이 소설은 '거의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별 차이나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논쟁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이드리히의 오픈카가 검은색이냐, 초록색이냐 하는 문제에서 일 거고요.


 한 줄로 적어보면 '1942년 6월의 체코 프라하에서 일어난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을 대단히 사실적이고, 실감 나게 그려낸 소설'이 <HHhH>라는 겁니다. 

 

 프라하의 도살자, 금발의 짐승, 유대인 최종해결의 주동자. 

하이드리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HHhH>의 작가는 단순히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처럼 엄격한 작품을 쓴 것은 아닐 겁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단순히 사실 확인을 위해 읽기 시작한 게 아닐 겁니다. 

'사실' 혹은 '진실' 너머에 있을 그 '무엇'을 찾고자 함이겠죠. 그게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딴소리를 좀 하기로 하죠.

평범한 아이로 학교 생활을 했음에도 열 개가 넘는 별명이 붙어 버렸습니다. 

별명의 기원도 다양해서, 이름에서 생겨난 유치한 것에서부터, 생각이나 행동까지 고려된 복합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듣기에 좋은 별명이 있는가 하면, 듣고 싶지 않은 별명도 있었습니다. 

 각각의 별명이 '나'라는 존재를 조금씩이라도 반영하는 거라면 그 모든 별명들은 세상과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었을 겁니다. 제 견해가 어떻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말이죠.


 하이드리히에게도 별명이 몇 개인가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대인'을 암시하는 것도 있었는데, 자신이 순수한 독일인이라고 믿었던 하이드리히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된 별명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 최종해결을 승인하면서 나치의 수뇌부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역시 하이드리히는 위대한 독일인의 후손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의 피가 섞였다고 한다면 유대인이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니 그것도 흥미로운 결과일 거라는 거였습니다. 어느 쪽이든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죠.


 온갖 숙청을 주도하고, 학살 수단을 찾는데 열심이었던 만큼 하이드리히가 냉혈한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많습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썼고, 근무하던 해군에서 쫓겨났을 때도 무척 괴로워했으며,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기도 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일을 무수히 저질렀지만, 여전히 인간이었다는 거죠.


 하이드리히를 죽인 두 낙하산병,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 존재는 희미합니다. 말 그대로 사진 몇 장만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죠. 

 증명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이 하이드리히를 죽음으로 이끈 결과, 역사의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라는 건 확신합니다. 그것이 더 '나은 현재'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최선'이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이드리히의 암살을 주제로 한 소설이지만 사실 감상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인물은 가브치크와 쿠비시라는 영웅 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의 존재에 더 끌리는 마음을 끊지 못했습니다. 하이드리히라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 내면이 궁금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실컷 하이드리히 이야기를 적었던 거죠. 별명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같습니다. 

 모든 모습이 하이드리히입니다. 하지만 만약 모순되는 지점들이 있다면 어느 쪽이 진짜 하이드리히였을까요. 

히믈러의 두뇌로 2차 대전을 진행하며, 점령지의 치안을 공고히 하고, 레지스탕스를 소탕하며,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앞장서는 나치 SS의 최고지도자가 처음 태어나던 순간부터 하이드리히의 운명이었을까요? 아니면 아주 사소한 선택의 차이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그 가능성 혹은 여지에 하이드리히를 넣어둬야 하는 걸까요.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기에, 이런 궁금증은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의 도살자가 되지 않았다면 가브치크나 쿠비시가 하이드리히를 죽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이후에 벌어지는 학살의 양상도 달라졌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마는.


 2차 대전에 대해, 나치에 대해, SS와 유대인 최종 해결에 대해, 하이드리히 암살작전 유인원 작전과 두 사람의 낙하산병 가브치크와 쿠비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에 이 소설을 한 번 읽고 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감상을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이드리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보는 모양으로요.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가정도, 수정도 허락되지 않죠. 하지만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게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 역사 속 인물이 '누구'였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져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대한민국은 긴 역사만큼 다양한 해석과 무수한 여지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요. 

 해석은 후대의 몫입니다. 하지만 기록은 당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록할 셈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 우리의 삶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요.


 대통령인지, 꼭두각시인지, 몸통인지, 피해자인지, 코스프레인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짐을 기억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우리가 아무리 경의를 표해도 죽은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기억은 당사자인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기억을 통해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다.
<HHhH>_238쪽
"진실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싫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글이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진실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진실을 가리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천박한 인간들이다.
<HHhH>_318쪽

 

그래서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며, 진실이 밝혀지는 날까지 진실에 무관심해지지 않기 위해 애쓰려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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