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던 거죠.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신화 속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책 <빨강의 자서전> 속 주인공, 게리온은 신화 속 괴물과 동일한 존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신화 속 게리온과 <빨강의 자서전> 속 게리온이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신화 속 이야기에서는 괴물로 간단하고도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현재의 이야기 속에서도 괴물로 태어나 불안과 두려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도저히 행복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유쾌하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유쾌함은 웃음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이 당장 제게 닥친다면 결코 즐거워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고, 꿋꿋이 살아낸 결과 어떤 '의미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걸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에 유쾌하다는 말을 꺼내볼 수 있었습니다.
괴물로 태어난 존재와 알고 지내는 분이 계신지 궁금하군요. 그런 분에게는 이 이야기가 조금 더 가깝고도 실감 나게 다가갈 겁니다.
'시로 쓴 소설'이라고 소개를 했더군요.
시, 읽기는 쉬운데 이해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너무 염려 말아요.
<빨강의 자서전>은 시의 형식을 빌렸고,
상징이 적잖이 등장하며,
개념조차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데다,
시점과 배경이 모호한 게 사실이지만,
결국 소설이니까요.
네.
방금 제가 적은 모양처럼 줄 바꿈이 잦고, 희미하지만 운율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렇다고 하는 건지 저렇다고 하는 건지 모호하기는 하지만 의미 자체가 모호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여타의 소설처럼 줄거리가 있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테니 독자는 자기 나름의 결론과 해석에 닿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장난을 조금 쳐봤습니다.
그리 두껍지도 않은 빨강 괴물의 자서전을 겁내시는 분들이 계실까 봐서요.
장난은 그만하기로 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빨강의 자서전>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헤라가 내놓은 열두 과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소떼를 차지하기 위해 게리온이라는 괴물을 죽입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무참하게 죽여버리죠. 게리온은 괴물이라고 등장하며 그 생김은 괴물처럼 생겼고, 어쩌면 날개가 있었을 겁니다.
아, 앞에서 한 이야기를 또 적고 말았군요.
날개,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습니다.
적어도 보통의, 평범한,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없죠.
인간이 날개를 달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혹시 그런 경우를 보거나 들어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그들의 삶이 어떨지, 조금 더 수월히 상상할 수 있겠죠.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요.
비약하면 천사는 날개가 있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비틀어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는 게 '정상'이고, 날개가 있는 건 '비정상', 줄여서 '괴물'처럼 여기는 존재가 될 겁니다.
<빨강의 자서전>은 '빨강' 존재, '날개'를 달고 태어난 소년, 게리온의 이야기입니다. 괴물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소외당하고, 배척받는 게리온이었지만 엄마만큼은 게리온을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엄마를 무척 따르고 의지했죠. 하지만 형은 야박했습니다. 동생을 멍청이로 여기고, 괴물처럼 생각했죠. 게리온은 날개를 옷 속에 숨기고 다녔습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밖에 꺼내놓고 있으면 불편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지냈습니다.
게리온은 형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소년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바로 '헤라클레스'라는 소년이죠.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은 연인이 됩니다. 어린 소년과 소년 커플이죠.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헤라클레스를 좋아하는 만큼 게리온을 좋아하지는 않는 듯 보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오래 만나지 못하죠.
줄거리가 길어졌군요.
<빨강의 자서전>은 그런 소년 게리온의 이야기입니다. 헤라클레스와 다시 만나게 될지,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아끼게 될지 아니면 신화 속 이야기처럼 운명적인 대결에 이은 파멸로 이어질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빨강의 자서전>은 난해하다면 난해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소설입니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읽을 수 없지도 않죠. 문장 형식이 조금 낯설고, 내용에 난해한 부분이 종종 등장하지만 줄거리 자체는 간단합니다. 게리온과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니까요. 빨강인 존재, 날개 달린 괴물 게리온과 헤라클레스 이야기라는 겁니다.
사랑인지, 좌절인지, 고독인지, 고통인지, 기대나 희망인지, 절망인지는 읽은 사람 마음대로 판단 내려도 됩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는 거니까요.
말장난을 조금 하자면 <빨강의 자서전>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화의 신화적 해석과 실재적 적용 혹은 실제적 재해석'
신화와 실재와 실제와 해석과 재해석.
네, 말 그대로 말장난입니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해볼 만한 말장난이죠.
신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며, 실재하지도 않습니다.
허구에,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괴물 이야기를 작가는 왜, 현대에, 지금에 되살려낸 걸까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읽어야 하는 건 '그들을 되살림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하는 메시지입니다. 메시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겠죠.
어떤 사람은 빨강이라는 표현에서 불길함이나, 외설적임을 읽을 수도 있고, 소년과 소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으며, 신화 속 괴물을 현대의 인간으로 되살림으로써 괴물로써 살해당해야 했던 무고하고 순수한 존재 게리온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정답일까요? 솔직히는 작가조차 정답은 이것입니다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어렵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장난이나 늘어놓으며 자꾸만 이야기를 길게 늘이는 이유를 솔직하고도 간단하게 밝히자면 제가 읽은 메시지가 너무 시시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빨강의 자서전>이 '존재보다는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리온이라는 괴물, 빨강 괴물로 태어난 소년.
소년을 꺼려하면서도 쾌락에 이용하려는 형과 조용히 지켜봐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엄마와 소년이 너무나 사랑하지만 소년만큼은 사랑하지 않는 헤라클레스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응원군 하나.
관계, 관계를 단절시키는 건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지만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회복하는 건 너무나 너무나 어렵죠. 특히 보통의 평범한 존재가 아닌, 특이한, 기이한, 이상한, 괴물 같은 존재라면 보통의 관계를 꿈꾸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길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일과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거나, 포기하는 일도 잦을 겁니다. 괴물은 박해받는 존재, 언제든 세상의 의혹과 미움 혹은 증오를 살 수 있는 존재니까요.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게리온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고 있으며, 괴물이라고 놀리거나 괴롭히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거죠.
<빨강의 자서전>에서는 명확해서 혼동할 수 없는 것을 자꾸만 뒤섞어 보여줍니다.
검은 것과 흰 것.
사람이 먼저인가, 세계가 먼저인가 하는 선후관계.
시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물음.
화산과 용암과 불.
정말 솔직히는 저 자신이 지금 지독하게 오독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버리기로 했습니다. 궁금하면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 되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결론이 달라진대도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지금의 횡설수설이 횡설수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치거나 정리하거나 바로잡거나 하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횡설수설, 혼란, 어수선함, 어지러움, 불확실함과 불명확함, 모호하고 애매함까지 도요.
자서전을 적어보지 않아서 알지 못하지만 자서전이라 함은 결국 '주관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독자는 결국 주관적이기에 주관적인 이야기조차 주관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무수한 주관과 주관이 교차하는 게 감상의 세계, 메시지의 세계가 되겠죠.
기승전이 엉망이었으니 이제 결이나마 조금 나은 것을 내놓아야겠네요.
날개는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징'입니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데.
바다 깊이 들어가는 데.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데.
형태와 색깔은 다를지 모르지만 날개는 깨달음이자, 가능성의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깨달음이나 가능성이 언제나 '축복'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깨달음을 얻는 열매를 먹어 에덴이라는 천국에서 쫓겨나, 평생 노동하고, 산고에 시달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눈이 밝아져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이마에 표를 얻는 벌을 받지만, 사람들은 표를 지닌 카인을 두려워합니다.
게리온은 빨강 괴물입니다. 빨갛고, 날개를 지녔죠.
왜 빨간 건지, 날개는 무엇을 위한 건지 의문은 간단히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고, 그 존재의 의미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겁니다.
<빨강의 자서전>이 존재보다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보통의 우리는 신화 속 영웅처럼 빛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웅의 발길질, 손짓, 입김에 후두둑 나가떨어지는 이름 없는 인물들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찮은 존재들에게도 나름의 삶과 인생,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저마다의 자서전이 있고, 그 자서전들에서는 모두가 주인이자 주인공이 됩니다.
자서전을 써봅시다.
이 하찮고 흔한 삶이, 유일하고도 소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존재들과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역사를 남겨봅시다.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계속하기로 합시다.
//이렇게 엉망인 걸 다시 읽어볼 마음도, 고쳐 써 볼 생각도 들지 않으니 나란 괴물도 차암, 빨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