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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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연거푸 하품을 하는 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시간인걸요. 

그럼에도 굳이 졸음을 참아가며 끄적이기 시작한 이유는 밀려가는 감상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기억력도 좋지 않은데, 이러다가 몽땅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말이죠.


 피곤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런 게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좋아서 하고 있으므로, 피곤이 고통이나 괴로움, 원망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벌써 한참 전에 읽은 책이라 거의 다 잊어버렸기에 짧게 적기로 합니다. 


<내 삶의 의미>는 소설은 아닙니다. 에세이라고 하기도 조금 어렵습니다. 오히려 '고백록'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겠네요. 고백록이라고 적은 이유는 이 한 권의 책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로맹 가리 자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완성하고자 했던 소망을 담담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꿈꾸던 삶과 실제로 '살아진 삶' 모두를 이야기하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6년 생을 정리한 거죠.


 로맹 가리는 여러 전설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작가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본래 콩쿠르 상은 한 작가에게 단 한 번 수상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도 수상하면서 예외로 남죠.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말을 들은 로맹 가리가 상을 고사했음에도 선정 위원회에서 수상 거부를 거부하면서 억지로 안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맹 가리는 여러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는데,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이 특히 유명해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로맹 가리는 당시 문단에서 냉대를 받았고, 나이가 들면서 '로맹 가리는 이제 끝'이라며 냉소하는 적들도 늘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이들과 다투는 대신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로 했고, 로맹 가리를 비판하던 이들은 에밀 아자르를 로맹 가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신예 작가라고 믿어버립니다. 로맹 가리가 얼마나 웃었을지.

 로맹 가리는 자신을 비웃는 이들을 실컷 비웃습니다. 로맹 가리가 자살 후 남긴 유서를 통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문단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내 삶의 의미>는 이러한 로맹 가리의 삶과 크고 작은 소동, 논란과 바람까지, 제목 그대로 로맹 가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담겨있습니다.


 <내 삶의 의미>를 읽기 전까지 로맹 가리는 외교관과 전설적인 작가라는 지위에 올라 화려한 삶을 보냈을 유명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찍기도 하고, 유명 배우와 결혼도 한 그런 행복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단순히 적자면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로맹 가리의 삶은 충분히 동경할만하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예상은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요. 왜냐하면 로맹 가리의 작품을 읽다 보면 마냥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외롭고, 쓸쓸하며, 늘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에 이르면 그 느낌은 절정에 이릅니다. 오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선택한 게 납득이 갈 정도로, 로맹 가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의 의미>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 가운데 하나는 로맹 가리가 오랜 시간 동안 군인으로 지내며 전투기를 몰았다는 겁니다. 전장에도 여러 차례 투입됐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베테랑 조종사였던 거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비행 중 사고로 코를 다치는 바람에 코로 숨을 쉬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도 꿋꿋이 비행을 포기하지 않았던 점이었습니다. 

 위태로운 몸 상태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비행을 계속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극한의 상황에서 느끼는 생의 실감, 그런 것이었을까요.


 또 한 가지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은, 로맹 가리가 어머니에게 상당한 애착을 품고 평생을 보냈다는 점이었습니다. 로맹 가리에게 온갖 기대를 품었던 어머니, 죽음의 순간에도 아들을 부르지 않고 자신이 소망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홀로 죽어간 어머니, 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굳건한 바람이 오히려 로맹 가리의 외로움에 외로움을 보태는 요인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꿈을 이루지 못한대도,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며, 막연하게 마음으로, 머리로만 인지하고 있는 사랑과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짧게 적어보겠다고 하고 또 이렇게 늘어지고 있으니 하나만 더 적고 이야기를 마치기로 합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삶을 두고 '살아졌다'라고 말합니다. 로맹 가리의 고백을 들어보죠.


이 대담 초반부에서 나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삶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분명 우리는 삶에 조종당합니다.
<내 삶의 의미> 중


'삶에 조종당'한다는 말,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말,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 

이 말들에는 자기 삶을 주도하는 적극성도 확신도 없습니다. 자포자기처럼 들리기도 하죠. 하지만 로맹 가리는 마지막까지 스스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썼다고 믿습니다. 이런 고백도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삶의 철학으로 '짝' 외에 다른 개인적 가치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만큼은 내 삶은 실패였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자기 삶을 망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를 저버렸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요.
<내 삶의 의미> 중

로맹 가리에게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삶 자체보다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는 게 더 우선이었다는 거죠. 늦은, 유예된, 미뤄진, 그러나 결국 결행된 로맹 가리의 자살은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삶이 충돌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일 말입니다.


 삶을 관통하여 추구할 가치를 생각하기는커녕 당장 내일의 일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급하고도 바쁘게 흘려보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제게 로맹 가리의 삶은 상당히 멀고도 희미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저 역시 나름 추구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막연히 '이해'라고 부르고 있고, 무엇을, 어디까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삶이 닿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최선'에 객관적인 기준은 없지만, 개인의 삶이 객관적일 필요는 없겠죠.

로맹 가리는 삶에 조종당하고, 삶에 의해 살아졌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저는 이렇게 살고자 합니다.


살아지는 삶을 살기보다 살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면서 말입니다.


자, 오늘도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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