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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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온은 신화 속에서 헤라클레스가 살해한 괴물의 이름입니다. 
누구는 게리온의 팔다리가 여섯이라 했고, 누구는 날개가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말하고 전했지만 한 가지에는 동의했습니다. 

"게리온은 괴물이다."

이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던 거죠.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신화 속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책 <빨강의 자서전> 속 주인공, 게리온은 신화 속 괴물과 동일한 존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신화 속 게리온과 <빨강의 자서전> 속 게리온이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신화 속 이야기에서는 괴물로 간단하고도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현재의 이야기 속에서도 괴물로 태어나 불안과 두려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도저히 행복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유쾌하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유쾌함은 웃음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이 당장 제게 닥친다면 결코 즐거워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고, 꿋꿋이 살아낸 결과 어떤 '의미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걸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에 유쾌하다는 말을 꺼내볼 수 있었습니다.

 괴물로 태어난 존재와 알고 지내는 분이 계신지 궁금하군요. 그런 분에게는 이 이야기가 조금 더 가깝고도 실감 나게 다가갈 겁니다. 
 '시로 쓴 소설'이라고 소개를 했더군요.
시, 읽기는 쉬운데 이해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너무 염려 말아요. 

 <빨강의 자서전>은 시의 형식을 빌렸고, 
상징이 적잖이 등장하며, 
개념조차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데다, 
시점과 배경이 모호한 게 사실이지만,
결국 소설이니까요. 

네.
방금 제가 적은 모양처럼 줄 바꿈이 잦고, 희미하지만 운율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렇다고 하는 건지 저렇다고 하는 건지 모호하기는 하지만 의미 자체가 모호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여타의 소설처럼 줄거리가 있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테니 독자는 자기 나름의 결론과 해석에 닿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장난을 조금 쳐봤습니다. 
그리 두껍지도 않은 빨강 괴물의 자서전을 겁내시는 분들이 계실까 봐서요.

 장난은 그만하기로 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빨강의 자서전>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헤라가 내놓은 열두 과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소떼를 차지하기 위해 게리온이라는 괴물을 죽입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무참하게 죽여버리죠. 게리온은 괴물이라고 등장하며 그 생김은 괴물처럼 생겼고, 어쩌면 날개가 있었을 겁니다. 
 아, 앞에서 한 이야기를 또 적고 말았군요.

 날개,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습니다. 
적어도 보통의, 평범한,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없죠. 
인간이 날개를 달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혹시 그런 경우를 보거나 들어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그들의 삶이 어떨지, 조금 더 수월히 상상할 수 있겠죠.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요. 
비약하면 천사는 날개가 있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비틀어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는 게 '정상'이고, 날개가 있는 건 '비정상', 줄여서 '괴물'처럼 여기는 존재가 될 겁니다. 
 
 <빨강의 자서전>은 '빨강' 존재, '날개'를 달고 태어난 소년, 게리온의 이야기입니다. 괴물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소외당하고, 배척받는 게리온이었지만 엄마만큼은 게리온을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엄마를 무척 따르고 의지했죠. 하지만 형은 야박했습니다. 동생을 멍청이로 여기고, 괴물처럼 생각했죠. 게리온은 날개를 옷 속에 숨기고 다녔습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밖에 꺼내놓고 있으면 불편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지냈습니다.  
 게리온은 형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소년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바로 '헤라클레스'라는 소년이죠.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은 연인이 됩니다. 어린 소년과 소년 커플이죠.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헤라클레스를 좋아하는 만큼 게리온을 좋아하지는 않는 듯 보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오래 만나지 못하죠. 

줄거리가 길어졌군요.
 <빨강의 자서전>은 그런 소년 게리온의 이야기입니다. 헤라클레스와 다시 만나게 될지,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아끼게 될지 아니면 신화 속 이야기처럼 운명적인 대결에 이은 파멸로 이어질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빨강의 자서전>은 난해하다면 난해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소설입니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읽을 수 없지도 않죠. 문장 형식이 조금 낯설고, 내용에 난해한 부분이 종종 등장하지만 줄거리 자체는 간단합니다. 게리온과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니까요. 빨강인 존재, 날개 달린 괴물 게리온과 헤라클레스 이야기라는 겁니다. 
 사랑인지, 좌절인지, 고독인지, 고통인지, 기대나 희망인지, 절망인지는 읽은 사람 마음대로 판단 내려도 됩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는 거니까요.

 말장난을 조금 하자면 <빨강의 자서전>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화의 신화적 해석과 실재적 적용 혹은 실제적 재해석'
신화와 실재와 실제와 해석과 재해석.
네, 말 그대로 말장난입니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해볼 만한 말장난이죠.

신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며, 실재하지도 않습니다.
허구에,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괴물 이야기를 작가는 왜, 현대에, 지금에 되살려낸 걸까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읽어야 하는 건 '그들을 되살림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하는 메시지입니다. 메시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겠죠.
 
 어떤 사람은 빨강이라는 표현에서 불길함이나, 외설적임을 읽을 수도 있고, 소년과 소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으며, 신화 속 괴물을 현대의 인간으로 되살림으로써 괴물로써 살해당해야 했던 무고하고 순수한 존재 게리온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정답일까요? 솔직히는 작가조차 정답은 이것입니다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어렵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장난이나 늘어놓으며 자꾸만 이야기를 길게 늘이는 이유를 솔직하고도 간단하게 밝히자면 제가 읽은 메시지가 너무 시시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빨강의 자서전>이 '존재보다는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리온이라는 괴물, 빨강 괴물로 태어난 소년. 
 소년을 꺼려하면서도 쾌락에 이용하려는 형과 조용히 지켜봐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엄마와 소년이 너무나 사랑하지만 소년만큼은 사랑하지 않는 헤라클레스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응원군 하나.
 
 관계, 관계를 단절시키는 건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지만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회복하는 건 너무나 너무나 어렵죠. 특히 보통의 평범한 존재가 아닌, 특이한, 기이한, 이상한, 괴물 같은 존재라면 보통의 관계를 꿈꾸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길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일과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거나, 포기하는 일도 잦을 겁니다. 괴물은  박해받는 존재, 언제든 세상의 의혹과 미움 혹은 증오를 살 수 있는 존재니까요.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게리온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고 있으며, 괴물이라고 놀리거나 괴롭히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거죠. 
 <빨강의 자서전>에서는 명확해서 혼동할 수 없는 것을 자꾸만 뒤섞어 보여줍니다. 
 검은 것과 흰 것.
사람이 먼저인가, 세계가 먼저인가 하는 선후관계.
시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물음.
화산과 용암과 불.

 정말 솔직히는 저 자신이 지금 지독하게 오독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버리기로 했습니다. 궁금하면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 되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결론이 달라진대도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지금의 횡설수설이 횡설수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치거나 정리하거나 바로잡거나 하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횡설수설, 혼란, 어수선함, 어지러움, 불확실함과 불명확함, 모호하고 애매함까지 도요.

 자서전을 적어보지 않아서 알지 못하지만 자서전이라 함은 결국 '주관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독자는 결국 주관적이기에 주관적인 이야기조차 주관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무수한 주관과 주관이 교차하는 게 감상의 세계, 메시지의 세계가 되겠죠.

 기승전이 엉망이었으니 이제 결이나마 조금 나은 것을 내놓아야겠네요.

날개는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징'입니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데.
바다 깊이 들어가는 데.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데.
형태와 색깔은 다를지 모르지만 날개는 깨달음이자, 가능성의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깨달음이나 가능성이 언제나 '축복'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깨달음을 얻는 열매를 먹어 에덴이라는 천국에서 쫓겨나, 평생 노동하고, 산고에 시달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눈이 밝아져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이마에 표를 얻는 벌을 받지만, 사람들은 표를 지닌 카인을 두려워합니다. 

 게리온은 빨강 괴물입니다. 빨갛고, 날개를 지녔죠. 
왜 빨간 건지, 날개는 무엇을 위한 건지 의문은 간단히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고, 그 존재의 의미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겁니다. 
  <빨강의 자서전>이 존재보다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보통의 우리는 신화 속 영웅처럼 빛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웅의 발길질, 손짓, 입김에 후두둑 나가떨어지는 이름 없는 인물들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찮은 존재들에게도 나름의 삶과 인생,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저마다의 자서전이 있고, 그 자서전들에서는 모두가 주인이자 주인공이 됩니다. 

 자서전을 써봅시다.
이 하찮고 흔한 삶이, 유일하고도 소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존재들과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역사를 남겨봅시다.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계속하기로 합시다.

//이렇게 엉망인 걸 다시 읽어볼 마음도, 고쳐 써 볼 생각도 들지 않으니 나란 괴물도 차암,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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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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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펄 눈이 옵니다~'하는 동요 노랫말이 이상하게 느껴진 건 처음입니다.

(아마, 처음일 겁니다.)


한강 작가의 <흰>에 감상을 적으려고 시작할 말을 찾기 시작한 지금, 떠오른 생각이니까요.

이유가 또 단순한데, 어제 내리는 눈을 보면서 정말 조금의 소음도 내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비하면 비는 대단히 요란하게, 말 그대로 '쏟아지'죠.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는 빗소리는 천둥 소리나 바람 소리가 아니어도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눈은 세계를 빽빽하게 채우며 내리더라도 소리 내는 법이 없지요.  

 도심을 떠난 시골 혹은 산 속이라면 작은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설혹 들린다고 해도, 그 소리는 거스르거나 부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겠지요. 

'그래서? 그게 뭐?'라고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하는 동요 노랫말이 이상하게 느껴진 이유는 눈이 워낙 소리 없이 내린다는 사실, 하나였으니까요.


 책 얘기는 빼놓고 눈 얘기로 시작하게 된 건 제목이 <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눈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지나기까지 다시 몇 번이고 다시 눈이 내릴 거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아니지만 <흰>에는 줄거리와 비슷한 게 있습니다. 

제목이 <흰>인 이유에서부터, 책 속에 담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하나의 독백처럼 이어집니다. 

 책 속에 담긴 이야기의 시간이야 어떠하든 글 자체는 짧기에 '이 책은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하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책 얘기를 빼놓고 눈 얘기로 시작한 이유를 적는 건 앞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책에 대해 이렇다거나 저렇다고 할 얘기가 없어서도 그 이유가 되겠습니다.


 식상한 말, 무책임한 말이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 책은 이런 책입니다.


"읽어보면 압니다."


알만 하죠?

읽어보면 알게 됩니다. 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 읽는 게 나은 책이 있다는 거 아시죠?


책은 제목도 <흰>이고 표지도 '흽'니다. 그런데 겉표지를 보고 있자니, 속표지가 어떨지 궁금해지더군요.

 '예감'같은 거겠죠.

제목도 표지도 희지만 감춰진 표지는 '검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요.


예감은 절반만 맞아떨어졌습니다.

검다고 하기에는 밝고, 희다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짙은 회색입니다. 

회색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색에 밝은 분이 계시다면 이 색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빛'을 '희다'라고 합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책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얘기를 꺼내는 게 못나 보이지만 떠오른 게 있어 조금 더 적기로 합니다.


 <흰>은 흰 것에 대한 이야기, 기억들을 담은 책이지만 희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읽어보면 오히려 '검은' 것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기이한 일입니다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흰 것'은 눈부실 수 있겠죠. 

예를 들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의 칼에 비친 찌를 듯 눈부신 흰 빛에 위협을 느꼈던 것처럼 말입니다. 

'눈부시다'는 건 마주 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마주 볼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 의지'로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 압도적인 '흰', 그래서 오히려 '어둠'이 되어버리는 '흰'이 바로 <흰>에 담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이야기를 끝낼 셈인데, 딱 한 줄만 더 적겠습니다.


'흰' 것은 한 없이 가벼울 듯한데, 몹시도 무겁게 느껴지니 참 기이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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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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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법칙 안에서 인간의 삶은 '불가역적' 성격을 갖습니다. 

현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죠. 

'돌이킬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한 번뿐인 삶이니 신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걸요.


 <제 5 도살장>은 2차 대전 당시 벌어진 '드레스덴 공습'을 핵심으로 해서, 전쟁의 비극과 죽음의 하찮음과 시간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흔히 영화에서 그려지는 영웅적인 승리와는 거리가 먼 아직 어리고, 여린 아이들이 희생되는 비극.

전쟁은 다만 비극이라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비극이라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비극이라고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제목 <제 5 도살장>은 전쟁 당시 드레스덴에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원래는 가축 도살장이었던 곳을 수용소로 개조하고 붙인 공간의 이름입니다. 

 확대 해석해 보자면(제 특기죠), '가축'이 머물던 곳에 '인간'이 머물게 함으로써 '인간성 상실'을 의미하고, '도살'되는 게 가축이 아니라 '인간'이던 시기이기에, '인간 학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목부터 아주 처참하고, 비극적인 전개를 '암시'가 아니라 '명시'하고 시작한 셈입니다. 


 실제로 이야기는 처참하고 또 참담합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제 5 도살장>이라는 제목에 자세한 세부 제목이 붙습니다. 

<제 5 도살장 혹은 소년 십자군 죽음과 억지로 춘 춤>


 이 이야기가 처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히 무수한 죽음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죽음을 '당하는' 이들은 결코 스스로 원해서 죽는 것이 아니며, 죽은 이들 가운데 '소년(아이들)'과 민간인이 너무나 많았고, 승자에게나 패자 모두에게 남은 건 상처와 슬픔뿐이기 때문입니다.


  <제 5 도살장>은 '나'가 쓴 '드레스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첫 줄에 이렇게 적습니다.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제 5 도살장> 中

작가인 거트 보니것은 실제로 2차 대전에 참전했고, 드레스덴 공습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 소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는 말이죠.


 이야기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난 자'입니다. 자주 쓰는 표현으로 바꾸면 '시간 여행자'라는 이야기죠. 하지만 빌리 자신은 여행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물론 일어날 일을 안다고 해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바꾸려고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뭐 그런 거'기 때문에요.

 빌리는 시간에서 풀려난 사람일 뿐 아니라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지구에서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구경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시간 여행'에 '외계인'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같지도 않은,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그럴 리 없는, 시답잖은, 하찮은,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농담 따먹기 같지요. 하지만 빌리는 그 모든 걸 행하고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죽는지까지도 말이죠. 


  <제 5 도살장>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하지만 빌리가 경험한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보다 더 말이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은 왜 치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빌리는 시간에서 풀려났기에,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깨달았기에, 어쩌면 너무 많은 죽음을 경험했기에 죽음 자체를 일상적인 것 혹은 결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모든 죽음 뒤에는 이 말이 따라붙습니다.


"뭐, 그런 거지."

 

 죽음을 마치 숨 쉬거나 밥을 먹는 일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유감스럽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새겨진 결과 생겨난 만성적인 무력감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보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유감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하는 거라는 쪽으로 생각이 쏠리게 됩니다. 

  

 좀처럼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끼기에 본문 소환 찬스를 쓰기로 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빌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었다.
 <제 5 도살장> 中


 현실 앞에서 기도는 의미를 잃습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용기만으로 바꿀 수 없음을(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차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빌리 필그림처럼 말입니다.


 전쟁의 처참함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제 5 도살장>은 참혹한 인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습게' 느껴지죠. 전쟁, 죽음 같은 모든 게 말입니다. 하지만 우습게 느껴진다고 해서 처참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전쟁의 비극적인 면모가 확대되고 극대화되어 마음에 와 닿는 거죠. 

 기이한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로버트 베번의 저서 <집단 기억의 파괴>라는 책에서는 '전쟁'이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학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학살'은 인간 혹은 인종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기억' 자체를 학살하려는 시도가 무수히 일어난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기억을 어떻게 학살할 수 있는지 궁금하신가요?


기억을 학살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기억'을 간직한 공간, 건축물, 책과 같은 '기록'을 지우면 되는 겁니다. 

영국과 독일이 주고받은 공습처럼, 단순히 전략적 요충지나 무기를 생산하는 곳 외에 문화유산이 가득한 곳을 벽돌 한 장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쓸어버리면 기억도 쓸려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거라고요?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느냐고요?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러한 과정은 무수히 반복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 조선 시대 이전의 건축물 혹은 유물 혹은 역사 기록이 얼마나 남아있나요?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봤을 때,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게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합니다. 

'소거' 혹은 '삭제'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는 거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는 유태인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최종 해결'이라고 했다고 하죠. 

가슴에 별을 달게 하고, 한 번 수용소에 들어가면 연기가 되어 소각로의 굴뚝을 통해서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하는 상황에 몰아넣은 것에 그치지 않고, 체계적으로 유태인의 건축물과 역사를 파괴한 것이 나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 역시 죽어 마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백만 명이 죽죠.


 무엇이 남았을까요.

나치, 제국의 영광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희생 없는 정말무결한 승리 혹은 영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차고 넘쳤고, 그에 비례해 슬픔과 절망, 상처가 후유증으로 남았습니다. 


  <제 5 도살장>은 죽음 안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지지배배뱃'하는 소리는 어쩌면, '너희는 지금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어.'라는 속삭임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는, 이 짧아 보이지 않는 감상이 뭐라고 쓴 건지, 뭘 쓰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지배배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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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톨스토이의 마지막 3부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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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에 비해 많이 읽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읽은 책이라는 게 정말 간절한 순간에는 별 도움이 안 되곤 하니까요. 특히 감정 문제로 들어가면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그만큼이라도 읽었으니 이 정도에서 끝나는 건지, 읽지 않느니만 못한 건지, 아직 덜 읽어서 그런 건지 판단할 기준도 없지요. 

 결국 언제나 '더 읽어야겠구나'하는 데서 결론짓고는 합니다. 

'타협'이라고 할까요.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길러주시던 고모님마저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톨스토이는 죽음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작품을 읽다 보면 특히 죽음에 골몰하던 시기의 윤곽을 짐작해볼 수도 있죠. 마흔이 넘었을 때는 죽음에 대한 염려가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 남성 평균 수명이 마흔 정도였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겠죠. 당시 톨스토이는 몰랐겠지만 그는 그 두 배가 넘는 시간, 8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았습니다. 걱정, 염려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보여주는 일이겠죠.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는 톨스토이가 죽기 몇 해 전에 완성한 선집입니다. 평생을 보내며 얻은 깨달음을 자기 뒤에 세상을 살아갈 이들에게 남기고자 한 결과물이지요. 80이 넘은 톨스토이는 이제는 아무리 긍정해도 죽음이 삶보다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자주 등장합니다. 신기한 건, 젊은 날에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죽음을 이제는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의 존재가 확실해질수록 두려움은 옅어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를 읽으며 제법 많은 곳에 태그를 붙여 두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문장과 기억하고 싶은 깨달음들이 적지 않았죠. 하지만 여기에는 딱 세 부분만 발췌하고 짤막하게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책들도 그렇지만 여기에 담긴 문장들은 인생의 때가 이르지 않으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성격의 문장들이거든요. 가끔 다시 꺼내 읽어보며, 그때그때 마음을 돌아보는 데 쓰면 좋은 그런 책인 거죠.


 제가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발견한 세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죽음'입니다.

가장 자주 언급한 걸로 기억할 만큼 여러 번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절망이나 종말, 끝이라기보다 그 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거죠.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가치 있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과 관련해 소개할 문장은 이거예요.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톨스토이 작품 중에 죽음을 거부하며 끝없이 괴로워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죠. 원망하고, 저주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 쓸쓸히 죽어간 이반 일리치,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마지막 시간들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간단하지는 않을 거란 걸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부자유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기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도, 표정도,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못을 범하게 되죠. 간단히 말하면 멋대로 굴게 된다는 겁니다. 나부터 자주 그렇게 하고 있기에 그 폐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고치기도 간단하지 않아서 아주 번거롭습니다.

 죽음은 무엇에도 얽어매지 않습니다. 얽매이게 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의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설혹 천국이 있다고 해도 이승의 존재에게 죽음 이후의 천국은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야 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톨스토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두 번째는 '삶'입니다.

죽음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그 삶 말입니다.

삶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삶이 더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삶을 붙들고 나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녔어도 못 찾은 파랑새가 집에 돌아와 보니 거기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요. 

 삶은 불완전합니다. 

위기와 위험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라도 우리에게는 유일하며, 소중하기만 합니다. 더 나아지지 않아도 삶을 누리고 즐길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느라 지금의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톨스토이는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이렇게 적고는 있지만 여전히 더 나은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이 좋아 보여서 모방한다고 해도 좋은 삶이 될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냇가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그 그림자 속 개가 물고 있는 고기가 탐나 짖다가 원래 물고 있던 고기마저 놓쳐버리는 아둔한 개와 같은 실수를 그만둡시다. 너무 욕심내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아도, 조바심 내고, 안달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세 번째도 첫 번째나 두 번째만큼이나 뻔하고 식상한 겁니다. 

특별한 걸 기대하셨다면 안타깝지만 다른 데서 찾아보셔야겠네요.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속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행복은 
인간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이 문장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눠볼 수 있겠죠.

하나는 행복하기 위해 인간은 이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행복이라는 건 이기적인 감정이다라는 말로도 들립니다.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행복을 위해 이기주의자가 된다는 건 자기 행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미안하니까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내 행복을 위해 네가 희생해줘야겠어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걸 의미하죠. 

 아무리 자기 행복이 제일이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해지면 정말 행복할까요.


 행복이라는 건 이기적인 감정이다라는 말을 저는 이렇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라고요. 

앞서 삶이 이미 충분히 좋은 것이라고 말했듯, 행복 역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걸 바라지 않아도 말이죠. 하지만 혼자서는 행복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라고 적었던 거죠.

 세상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 많은 기준이 존재합니다. 행복의 잣대도 저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행복을 훼방하는 무례하고, 파괴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기를 점점 더 믿게 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행복을 단단히 다지는 그런 건설적인 이기주의 말입니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죽음과 삶과 행복을 이야기하면 다 이야기한 셈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하나를 빼먹었네요. 정말 중요한 건데, 왜 빼먹었는지.

 톨스토이가 삶과 죽음과 행복을 통해 목적으로 삼는 게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추구해야 할 단 하나의 가치,

이게 힌트라고 하면 알아차리셨을까요.


 대답은 사랑!입니다.

톨스토이의 말을 들어보죠.


사랑! 
그것은 신의 본질의 발현이다. 
사랑에는 시간이 없다. 
사랑은 오직 현재, 바로 지금, 
시시각각으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사랑은 완전한 존재인 '신의 본질'이 발현된 것이라 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삶과 죽음 사이의 모든 순간, 모든 현재에 존재합니다.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꿔가며 언제나, 항상 말이죠.

신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랑은 신의 본질이자, 삶의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닐까요.


 톨스토이는 그 거대함에도, 낮은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작품 속에서도 민중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죠. 아마도 그 모든 노력이 톨스토이가 사랑을 실현한 방식일 겁니다. 물론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야 말할 것 없겠죠.


종종 책이 인생의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한 없이 무력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만큼 나아진 건 역시 그나마의 책이라도 읽었기 때문이구나 하게 되죠. 그래서 결국 이 이야기를 시작하며 적었듯이 '더 읽어야겠구나'하게 됩니다.


 바보는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이라고도 하고, 바보 온달의 이야기도 있으니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 믿어봅니다. 

 삶을 살며, 죽음을 기억하고, 행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 표지 사진은 물망초로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강건너의 꽃을 따다 주려고 헤엄쳐가던 남자가 물살에 휩쓸려 죽어가며 "나를 잊지 말아줘!(Forget_me_not)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군요. 그 남자, 지금은 행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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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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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와 무관하게 좀처럼 읽기 힘든 책이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페이지를 넘기는 게 쉽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한 단계 더 들어가면 한 페이지에도 생각하고 정리해볼 내용이 많아 차마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면서 게으르게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이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죠. 그렇게 이것저것 하신 분이라면 도무지 게으를 수 없었을 텐데 자꾸만 스스로가 게으르다고 하십니다. 이것 참.

 게으르지 않아 보이는데 게으르다고 억지를 쓰듯 보이는 착각은 '게으름'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은 '나태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자의 '무위'에 가깝죠.

 올바른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다'정도의 의미일 거라고 하면 와 닿을까요?


 버트런드 러셀이 찬양한 게으름은 '창조'를 내포합니다. 

'여유'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겠군요.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동명의 에세이에서부터 국가와 경제, 사회와 역사, 청소년과 여성을 아우르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에세이가 담겨있습니다. 내용으로 미루어 1차 대전 이후부터 2차 대전 전까지 쓴 에세이들인 듯하더군요. 쓴 날짜나, 글이 실린 지면에 대한 안내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뭐, 지금도 좋지만요.


 앞서도 말했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스스로를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건 그냥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닙니다. 고민하고, 사고하는 과정, 그러니까 '사유'하는 과정을 거쳐서 형상화되는 거죠.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다양한 사유가 담겨있습니다. 단지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안과 방안까지를 제시하는 모습은 지식인의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실현 불가능한 정책, 특정 집단을 위한 편협한 대안이 난무하는 현대 정치와 경제계에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한데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게을렀기에 지금 당장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실용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일을 고민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한 가지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같은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서문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선 직접적인 실용성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폭넓게 생각하는 사고 습관을 함양시키느냐, 아니냐로 판단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부면 실용성은 많은 경우 오늘날 '무용하다'라고 낙인찍힌 것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서문 中

 목차를 살짝 공개하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시작으로,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건축, 청년들의 냉소주의, 획일성, 인간대 곤충, 교육, 이성, 공산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금욕주의, 문명, 혜성, 영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방대합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버트런드 러셀의 생각이 현대에도 대단히 유용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진정한 사유'란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던 거죠.  


 게으름 덕분인지 모르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오래 살면서, 지적 욕구를 채우는 동시에 많은 글을 썼습니다. 덕분에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모두 경험했으며, 동서 냉전까지 지켜볼 수 있었죠. 이런 경험이 만년의 그를 '정치적'인 인물이 되게 했다고도 하는데, 이미 중년의 버트런드 러셀은 충분히 정치적이었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쓰고 있듯 넘치도록 말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사유'를 말하는 사람이기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했을 테고, 마지막까지 어느 쪽이라고 단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겁니다. 이런 정치적인 성향이라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해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당장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것만 가르치고 배우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사상이나 체제에 얽매여 발전의 기회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거듭하는 이유도 더 나은 세계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소위 '유용한 지식'의 무용함은 100년도 전에 태어난 사람인 버트런드 러셀의 깨달음과 인식보다 더 발전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의 인식이 더 뒤처져 있다는 점만 봐도 증명됩니다. 

 효율성은 지속성까지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가치 가운데에는 인간의 행복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결정적인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효율성에 밀려 잃어가는 가치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선함'을 꼽을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양심'과 '직업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순간에 '이익'이 이러한 가치를 압도하는 걸 보게 됩니다. 

 쓰레기 만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까지. 

 우리는 잃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알아차린다고 해도 현재의 가치,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 버려지고 외면당합니다. 이것이 부지런의 대가, 효율성의 열매라면 우리는 반드시 게을러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제일 많이,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입니다. 수십 억이 들어가는 복지에는 인색하면서 수백 억이 드는 대통령 부친 관련 사업에는 예산을 쏟아붓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재벌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노동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현실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책을 고민하고, 사유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자신은 반대쪽 99%에 있으면서 반대쪽 1%에 들어가기 위해 효율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나라. 

버트런드 러셀이 봤다면 가장 안타까워했을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래서라도 우리는 이제 조금 더 게을러져야 합니다.

더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사유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눈 앞의 효율을 위해 아이를 다그치며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사유하는 힘을 길러줘야만 합니다. 자기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양심과 도덕을 외면하며 괴로워할 게 아니라, 선함의 가치를 되찾아야 합니다.


 세상은 자꾸만 부지런해지라고 말합니다. 쓸데없는 걸 그만두고, 쓸모 있는 걸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내일',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야 하는 건, 살아가는 건 지금, 바로 '현재'뿐입니다. 


 게으름의 다른 이름은 '사색'입니다. 

사색의 시간이 잃어버린 나, 우리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줄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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