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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평점 :
두께와 무관하게 좀처럼 읽기 힘든 책이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페이지를 넘기는 게 쉽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한 단계 더 들어가면 한 페이지에도 생각하고 정리해볼 내용이 많아 차마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면서 게으르게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이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죠. 그렇게 이것저것 하신 분이라면 도무지 게으를 수 없었을 텐데 자꾸만 스스로가 게으르다고 하십니다. 이것 참.
게으르지 않아 보이는데 게으르다고 억지를 쓰듯 보이는 착각은 '게으름'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은 '나태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자의 '무위'에 가깝죠.
올바른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다'정도의 의미일 거라고 하면 와 닿을까요?
버트런드 러셀이 찬양한 게으름은 '창조'를 내포합니다.
'여유'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겠군요.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동명의 에세이에서부터 국가와 경제, 사회와 역사, 청소년과 여성을 아우르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에세이가 담겨있습니다. 내용으로 미루어 1차 대전 이후부터 2차 대전 전까지 쓴 에세이들인 듯하더군요. 쓴 날짜나, 글이 실린 지면에 대한 안내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뭐, 지금도 좋지만요.
앞서도 말했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스스로를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건 그냥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닙니다. 고민하고, 사고하는 과정, 그러니까 '사유'하는 과정을 거쳐서 형상화되는 거죠.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다양한 사유가 담겨있습니다. 단지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안과 방안까지를 제시하는 모습은 지식인의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실현 불가능한 정책, 특정 집단을 위한 편협한 대안이 난무하는 현대 정치와 경제계에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한데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게을렀기에 지금 당장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실용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일을 고민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한 가지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같은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서문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선 직접적인 실용성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폭넓게 생각하는 사고 습관을 함양시키느냐, 아니냐로 판단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부면 실용성은 많은 경우 오늘날 '무용하다'라고 낙인찍힌 것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서문 中
목차를 살짝 공개하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시작으로,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건축, 청년들의 냉소주의, 획일성, 인간대 곤충, 교육, 이성, 공산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금욕주의, 문명, 혜성, 영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방대합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버트런드 러셀의 생각이 현대에도 대단히 유용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진정한 사유'란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던 거죠.
게으름 덕분인지 모르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오래 살면서, 지적 욕구를 채우는 동시에 많은 글을 썼습니다. 덕분에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모두 경험했으며, 동서 냉전까지 지켜볼 수 있었죠. 이런 경험이 만년의 그를 '정치적'인 인물이 되게 했다고도 하는데, 이미 중년의 버트런드 러셀은 충분히 정치적이었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쓰고 있듯 넘치도록 말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사유'를 말하는 사람이기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했을 테고, 마지막까지 어느 쪽이라고 단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겁니다. 이런 정치적인 성향이라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해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당장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것만 가르치고 배우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사상이나 체제에 얽매여 발전의 기회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거듭하는 이유도 더 나은 세계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소위 '유용한 지식'의 무용함은 100년도 전에 태어난 사람인 버트런드 러셀의 깨달음과 인식보다 더 발전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의 인식이 더 뒤처져 있다는 점만 봐도 증명됩니다.
효율성은 지속성까지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가치 가운데에는 인간의 행복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결정적인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효율성에 밀려 잃어가는 가치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선함'을 꼽을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양심'과 '직업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순간에 '이익'이 이러한 가치를 압도하는 걸 보게 됩니다.
쓰레기 만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까지.
우리는 잃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알아차린다고 해도 현재의 가치,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 버려지고 외면당합니다. 이것이 부지런의 대가, 효율성의 열매라면 우리는 반드시 게을러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제일 많이,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입니다. 수십 억이 들어가는 복지에는 인색하면서 수백 억이 드는 대통령 부친 관련 사업에는 예산을 쏟아붓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재벌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노동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현실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책을 고민하고, 사유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자신은 반대쪽 99%에 있으면서 반대쪽 1%에 들어가기 위해 효율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나라.
버트런드 러셀이 봤다면 가장 안타까워했을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래서라도 우리는 이제 조금 더 게을러져야 합니다.
더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사유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눈 앞의 효율을 위해 아이를 다그치며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사유하는 힘을 길러줘야만 합니다. 자기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양심과 도덕을 외면하며 괴로워할 게 아니라, 선함의 가치를 되찾아야 합니다.
세상은 자꾸만 부지런해지라고 말합니다. 쓸데없는 걸 그만두고, 쓸모 있는 걸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내일',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야 하는 건, 살아가는 건 지금, 바로 '현재'뿐입니다.
게으름의 다른 이름은 '사색'입니다.
사색의 시간이 잃어버린 나, 우리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줄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