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톨스토이의 마지막 3부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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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에 비해 많이 읽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읽은 책이라는 게 정말 간절한 순간에는 별 도움이 안 되곤 하니까요. 특히 감정 문제로 들어가면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그만큼이라도 읽었으니 이 정도에서 끝나는 건지, 읽지 않느니만 못한 건지, 아직 덜 읽어서 그런 건지 판단할 기준도 없지요. 

 결국 언제나 '더 읽어야겠구나'하는 데서 결론짓고는 합니다. 

'타협'이라고 할까요.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길러주시던 고모님마저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톨스토이는 죽음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작품을 읽다 보면 특히 죽음에 골몰하던 시기의 윤곽을 짐작해볼 수도 있죠. 마흔이 넘었을 때는 죽음에 대한 염려가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 남성 평균 수명이 마흔 정도였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겠죠. 당시 톨스토이는 몰랐겠지만 그는 그 두 배가 넘는 시간, 8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았습니다. 걱정, 염려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보여주는 일이겠죠.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는 톨스토이가 죽기 몇 해 전에 완성한 선집입니다. 평생을 보내며 얻은 깨달음을 자기 뒤에 세상을 살아갈 이들에게 남기고자 한 결과물이지요. 80이 넘은 톨스토이는 이제는 아무리 긍정해도 죽음이 삶보다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자주 등장합니다. 신기한 건, 젊은 날에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죽음을 이제는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의 존재가 확실해질수록 두려움은 옅어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를 읽으며 제법 많은 곳에 태그를 붙여 두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문장과 기억하고 싶은 깨달음들이 적지 않았죠. 하지만 여기에는 딱 세 부분만 발췌하고 짤막하게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책들도 그렇지만 여기에 담긴 문장들은 인생의 때가 이르지 않으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성격의 문장들이거든요. 가끔 다시 꺼내 읽어보며, 그때그때 마음을 돌아보는 데 쓰면 좋은 그런 책인 거죠.


 제가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발견한 세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죽음'입니다.

가장 자주 언급한 걸로 기억할 만큼 여러 번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절망이나 종말, 끝이라기보다 그 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거죠.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가치 있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과 관련해 소개할 문장은 이거예요.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톨스토이 작품 중에 죽음을 거부하며 끝없이 괴로워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죠. 원망하고, 저주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 쓸쓸히 죽어간 이반 일리치,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마지막 시간들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간단하지는 않을 거란 걸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부자유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기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도, 표정도,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못을 범하게 되죠. 간단히 말하면 멋대로 굴게 된다는 겁니다. 나부터 자주 그렇게 하고 있기에 그 폐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고치기도 간단하지 않아서 아주 번거롭습니다.

 죽음은 무엇에도 얽어매지 않습니다. 얽매이게 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의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설혹 천국이 있다고 해도 이승의 존재에게 죽음 이후의 천국은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야 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톨스토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두 번째는 '삶'입니다.

죽음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그 삶 말입니다.

삶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삶이 더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삶을 붙들고 나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녔어도 못 찾은 파랑새가 집에 돌아와 보니 거기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요. 

 삶은 불완전합니다. 

위기와 위험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라도 우리에게는 유일하며, 소중하기만 합니다. 더 나아지지 않아도 삶을 누리고 즐길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느라 지금의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톨스토이는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이렇게 적고는 있지만 여전히 더 나은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이 좋아 보여서 모방한다고 해도 좋은 삶이 될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냇가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그 그림자 속 개가 물고 있는 고기가 탐나 짖다가 원래 물고 있던 고기마저 놓쳐버리는 아둔한 개와 같은 실수를 그만둡시다. 너무 욕심내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아도, 조바심 내고, 안달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세 번째도 첫 번째나 두 번째만큼이나 뻔하고 식상한 겁니다. 

특별한 걸 기대하셨다면 안타깝지만 다른 데서 찾아보셔야겠네요.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속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행복은 
인간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이 문장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눠볼 수 있겠죠.

하나는 행복하기 위해 인간은 이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행복이라는 건 이기적인 감정이다라는 말로도 들립니다.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행복을 위해 이기주의자가 된다는 건 자기 행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미안하니까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내 행복을 위해 네가 희생해줘야겠어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걸 의미하죠. 

 아무리 자기 행복이 제일이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해지면 정말 행복할까요.


 행복이라는 건 이기적인 감정이다라는 말을 저는 이렇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라고요. 

앞서 삶이 이미 충분히 좋은 것이라고 말했듯, 행복 역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걸 바라지 않아도 말이죠. 하지만 혼자서는 행복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라고 적었던 거죠.

 세상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 많은 기준이 존재합니다. 행복의 잣대도 저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행복을 훼방하는 무례하고, 파괴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기를 점점 더 믿게 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행복을 단단히 다지는 그런 건설적인 이기주의 말입니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죽음과 삶과 행복을 이야기하면 다 이야기한 셈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하나를 빼먹었네요. 정말 중요한 건데, 왜 빼먹었는지.

 톨스토이가 삶과 죽음과 행복을 통해 목적으로 삼는 게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추구해야 할 단 하나의 가치,

이게 힌트라고 하면 알아차리셨을까요.


 대답은 사랑!입니다.

톨스토이의 말을 들어보죠.


사랑! 
그것은 신의 본질의 발현이다. 
사랑에는 시간이 없다. 
사랑은 오직 현재, 바로 지금, 
시시각각으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사랑은 완전한 존재인 '신의 본질'이 발현된 것이라 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삶과 죽음 사이의 모든 순간, 모든 현재에 존재합니다.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꿔가며 언제나, 항상 말이죠.

신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랑은 신의 본질이자, 삶의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닐까요.


 톨스토이는 그 거대함에도, 낮은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작품 속에서도 민중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죠. 아마도 그 모든 노력이 톨스토이가 사랑을 실현한 방식일 겁니다. 물론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야 말할 것 없겠죠.


종종 책이 인생의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한 없이 무력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만큼 나아진 건 역시 그나마의 책이라도 읽었기 때문이구나 하게 되죠. 그래서 결국 이 이야기를 시작하며 적었듯이 '더 읽어야겠구나'하게 됩니다.


 바보는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이라고도 하고, 바보 온달의 이야기도 있으니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 믿어봅니다. 

 삶을 살며, 죽음을 기억하고, 행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 표지 사진은 물망초로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강건너의 꽃을 따다 주려고 헤엄쳐가던 남자가 물살에 휩쓸려 죽어가며 "나를 잊지 말아줘!(Forget_me_not)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군요. 그 남자, 지금은 행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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