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 나보다 타인이 더 신경 쓰이는 사람들 심리학 3부작
박진영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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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반대의 질문,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건 삼가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행복'에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왜 반대의 질문을 던지지 말라고 가르치는지를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자면, 인간의 사고는 무척 단순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이루려 노력한다는 심리적 연구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 하는 것을 피해 '행복'을 이루고자 하는 의도로 무엇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지만 뇌는 생각 속에 등장한 단어 '불행'을 실현하려 움직인다는 역설적 결과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의도라면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생각하라는 것이다.

 

<눈치 보는 나, 착각하는 너> 이 책은 한 심리학도가 자신이 배움을 통해 깨달은 것 가운데 사람들이 꼭 알고 있었으면 좋겠고, 이것을 알게 된다면 더 행복해지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는 바람에서 적어나간 책인 것 같은 느낌이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타인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 이 관계는 애정이 넘치는 '좋은' 관계일 수도 있고, 만나기 싫고 피하고만 싶은 '나쁜' 관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좋은 관계나 나쁜 관계가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좀 더 잘하면 그 사람하고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을 거야."

"눈치보고 있다가 딱 좋은 타이밍에 짜쨘~하고 놀래켜 줘야지."

"또 내가 잘못한 건가, 이번에는 틀림없을 줄 알았는데 뭐가 문제였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뭐, 지금도 아주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빈도는 확실히 줄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눈치' 와 '착각' 사이에서 우리가 자주 범하는 오류들이 위에 적어 둔 생각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저자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을 하나만 말해보라고 하면 '자존감'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사람에게 자존감은 꼭 적당히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행복의 필요 조건 중 하나다. 많은 심리학, 자기 계발서에서도 자존감을 높일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총 네 개의 PART로 이루어진 이 책은 '나'에서 시작해 '너'를 거쳐 '우리'에 닿은 후 더 나은 관계를 이야기하는 '내일'을 위한 이야기를 차례차례 펴나간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을 인간 관계에 적용한다면 나를 알고 너를 알면 우리 관계는 건강해질 수 있다가 되지 않을까.

 

책의 내용은 사실 그렇게 색다른 이론이나 연구를 담고 있지는 않다. 대부분이 외국에서 연구 된 사례들을 담고 있으며 국내에 출간된 자기 계발서나 심리학 서적에서 한번 씩은 다루었던 내용이 대부분이다. 독창성을 꾀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건 '마시멜로'를 '초코바'로 바꾼다거나 연구의 이름을 달리 적는 수준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중간 중간에 심리학 상식을 체크해 볼 수 있는 O X 퀴즈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건 쉬우면서도 틀렸을 경우에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확인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연구의 도표도 곳곳에 들어있어서 글씨만 읽어나가기가 지루한 사람들에겐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비슷한 서적을 많이 읽어 본 사람들에게는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한다면 사회 심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나, 사례를 주루룩 나열하고 있을 뿐인 책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당할 것 같다는 말을 덧 붙인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타인이 나에게 행복을 제공하거나 행복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존감'은 개인의 행복에 있어 중요한 문제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존감이 높아진다거나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 과제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존감을 높였다고 해서 또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존감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내 위치를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아래에 있을지, 동등한 높이에 있을지, 위에 있을지를 정하는 것도 결국엔 나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거꾸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타인은 천국이다' '나는 지옥이다'

 

모든 것이 나 하기에 달렸다는 식의 막연한 책임 전가형 긍정 심리학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문제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시선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해결 될 수 있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눈치만 보고 착각에 빠지기 보다, 좀 더 자신을 갖고 타인과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나.

벌써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되어온 자살 문제는 물론이고 범죄에서도 낮은 '자존감'은 큰 원인 제공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자존감'은 개인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선은 나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세상과 소통해 나가다보면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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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신맨 - 기계가 된 남자의 사랑
맥스 배리 지음, 박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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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성적 중 하나가 높은 성형율이란다. 아, 이건 자랑이 아닌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단히 열성적이란 것만은 분명하다.

 

재밌는 소설을 만난 것을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소설이 재밌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세상에 아쉬움을 던져야 할까.

아, 이런 생각들은 내려놓고 일단은 재밌는 이야기를 늘어놓도록 해야겠다.

 

세상에는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 공학자가 있다.

인간과 공학자를 굳이 분리한 이유는 그들의 사고가 원초적으로 다른 기준을 바탕으로 움직인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소설 속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현실의 공학자들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모한 결과 개발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그 기술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비극들을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공학기술자이다. 과학자라고 하고 기술자라고도 하는 그런 사람이다.

얼핏 봤을 때 이 사람은 대단히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조금 사교성이 부족하고, 약간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대단히 호흡이 빠른 소설이다. 극도의 반전은 없지만, 그 반전을 대신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하는 그 무엇이 있다.

 

마치 우물가에서 혼자 노는 아이를 지켜보는 관심많은 행인이 느낄 법한, 관전자이긴 하지만 방관자가 될 수는 없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대는 변한다.

세태도 바뀐다.

그리고 인간도 변해간다. 그것은 외양뿐아니라 내용까지를 포함한 변화이며, 긍정적인 변화와 부정적인 퇴화를 함축한 변화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나의 정의가 타인이나 세상의 정의가 될 수는 없으며, 세상의 정의가 나의 정의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혼동하게 되는데서 오는 혼란이다.

 

무엇이 인간을 규정하는가?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은 신중해야 하지만 세상은 그만큼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이야기 속의 생각해 볼 문제를 몇 개 적어본다.

 

기술의 진보는 인류에게 있어 무한한 혜택을 제공한다.

과학의 발전과 더 나은 인간 생활을 위해 하지 못할 것은 없다.

누구도 그에게 혹은 그들에게 "그것은 해선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모든 일이 일어나는 건 '더 나은 미래'라는 회사다.

너무나 노골적인 이름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의심과 의혹이 절로 일어난다.

동시에 '더 나은'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주요 등장 인물들에게는 저마다 고충이 있다. 그들은 연합하기도하고, 거부하기도하고, 미워했다가, 필요로하며, 증오하지만, 동경하고, 망설이지만, 정당화에 바쁘기도 하다. 결국 그들의 고충은 한 가지로 모아진다. "더 나아지고 싶다."

 

결과적으로 누가, 무엇이 더 나아진 것인지 소설의 결말 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

결국 독자에게 남겨진 숙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기술이 부족한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 것인가, 기술의 과잉을 걱정해야 할 것인가.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314쪽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중요한 신체 부위들을 인공 기관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더 이상은 없어야 한다고요.

 

이 말을 읊어대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난 이 부분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중요한 시체 부위란 단순이 인간의 팔 다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생각해 보면 세상의 구조, 혹은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현대는 '스마트 폰'의 시대이기도 하다. 스마트하지 않은 것은 업신여겨지고, 낙후되고 덜 떨어진 것으로 여겨져 좀 더 스마트한 것으로 교체된다.

인간이 하던 것을 기계와 시스템을 통해 효율적으로 처리해 나간다.

계산기가 발달했기에 인간의 계산력이 떨어진다.

휴대전화에 입력한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는다.

아파트 입출차 관리를 경비원이 아닌 CCTV와 컴퓨터가 한다.

 

편안하다는 이유로 바꾸기 전에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해야만 한다.

어떤 일들은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그렇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서 이제 인간은 '대체 가능'해 졌다.

애초에 인간이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언제 시작된 것일까?

고전적인 전투에서 아직 인간을 방패로 사용하던 시대에, 왕을 둘러 싼 인간들의 목숨을 대체 가능한 방어물로 생각했던 폭군의 생각이 그 시초는 아닐까?

노예를 부리던 시절에 전쟁이나 약탈을 통해 공수해 온 노예를 그저 기계의 부품처럼 죽기까지 부리고, 목숨이 다하면 짐승의 먹이로 던져주던 야만이 만연한 시대의 이야기는 아닐까?

애초에 최대의 폭군이 나왔던 시기는 언제고, 진정 야만이 만연해 있는 것은 또 언제인가?

 

그것이 지금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괜스레 열을 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야겠다. 무엇이 진보인가, 무엇이 더 나은 삶, 더 나은 미래인가하는 문제들을 말이다.

 

어떤 책에서 이런 말을 봤다.

능률이란 일을 적절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 효율이란 적절한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_토머스 K. 코넬란

능률과 효율을 오해하지 말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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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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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몽테뉴가 자신의 사유에 고양이를 자주 등장시켰음을 전해 들으며 참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가 몽테뉴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걸까 몽테뉴가 나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걸까?>

 

몽테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재밌는 사람이다.

재밌다는 말은 단순히 웃음을 유발시킨다거나 유쾌하다는 뜻만을 포함한 표현은 아니다. 좀 더 고상한 표현으로 바꿔보면 '멋지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자신에게 당당한, 세상에도 당당한, 그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자긍심이 그의 글에서는 넘칠만큼 느껴진다.

그가 귀족이었고, 영주였으며, 성주였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말은 그에게는 모독이 될 것 같다.

 

'나'를 주제로 한 책을 쓴다면 어떤 책들이 나오게 될까.

몽테뉴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을 통해 몽테뉴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 관해 썼고, 자신을 위해 썼고, 자신의 생각을 썼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끄럼도 없이, 그만큼 자신에게 당당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 멋지게 느껴졌다.(그의 수상록을 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몽테뉴는 말하길

148쪽

이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했다면, 나는 남의 말을 빌려다가 내 품성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내 모습을 가식적으로 훌륭하게 그리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라고 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어디서든 훌륭하신 분들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말을 대신하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그런 말들을 아는 사람은 어쩌면 존경에 가까운 대우를 받기도 하고, 반대로 그런 말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허접'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풍조를 몽테뉴가 봤더라면 정말 안타까워했으리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이 없는 존재들의 홍수 앞에서 염세주의로 돌아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스운 건, 몽테뉴가 경계했던 성현들의 말을 빌려다 자신의 말로 삼는 것을 이 책이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습게 여길 일만도 아닌 것은, 그분들의 말이 너무나 어렵고 심오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만연해진 세상에서 그분들의 말이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해야 했을 것이라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 이렇게 복잡하게 되어먹은 건지 내가 읽기도 어렵네. 것이 것이라는 것이다?허헛)

 

이 책은 몽테뉴의 사유의 축에 담긴 열두 가지의 사유를 풀어 담아내고 있다.

우정부터 자아까지 하나하나의 주제들은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되어줄 사유를 제시해 준다.

 

화에 대해 쓴 부분에서는 이 화를 무기에 빗대어 표현하면서 "다른 무기는 우리가 쥐고 흔들지만, 이 무기는 우리를 쥐고 흔든다."라고 말한다. 요즘엔 비슷한 말이 많이 나왔기에 잘 알고들 있는 사실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쥐고 흔들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는 죽음을 재밌는 표현을 써서 이야기한다.

"죽음은 '의자에 먼저 앉기 놀이'에서 앉을 자리를 빼앗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기상천외한 표현이다. 과연 누구와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322쪽에서 또다른 재밌는 표현을 발견했다.

출세 지향주의에 일침을 놓는 말이랄까?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옥좌에 오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엉덩이로 앉아 있을 뿐이다."

 

자신의 고유한 생각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의 글을 담은 책을 읽고 자꾸 인용하게 되어 참 면목이 없지만 한 번만 더 인용하고자 한다.

330쪽

"그에게 진정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동물에게도 지각력이나 감정 또는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아니라 그저 동물의 '애처로운 울음소리였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슬픔의 원천이다."

 

우리가 동물을 학대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뿐 아니라 동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는 이유가 뭘까?

동물이나 사람이나 존귀한 생명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아니면 법이나 윤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그것이 잔인하고 비인간 적이기 때문에?

 

몽테뉴는 이러한 사상에 기대에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변호하거나, 반대로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을 갈구하는 생명의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목부터 사뿐사뿐한 고양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결코 지적 무게를 추구하고 있지 않다. 괜스레 무게를 잡으려고 으스대지 않는다. 대 사상가의 사유가 담겼다고해서 일일이 풀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고양이와 놀듯이, 혹은 고양이가 놀아주듯이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마지막에 닿게 되는 것이다.

 

'실존'은 어디서 오는 걸까?

무엇이 우리를 증명해 줄 수 있을까?

 

사실 난 다른 사람이 나를 증명해 줄 것이라 생각해왔다. 세상이 나를 증거해 주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나란 존재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몽테뉴 역시 한 때는 염세주의에 빠졌었지만 자신을 믿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드러내면서 '실존'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되었다.

 

세상이, 다른 사람이 나를 증명해주려 해도 정작 증명할 존재 나 자신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짜 새해다.

올해의 목표를 '진짜 나 찾기'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미 자신을 찾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고 말이다.

나를 찾고 완성해가는 일은 생각보다 거창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일인지 모른다. 먼저 솔직한 나를 세상에 보일 용기를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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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당이 되기로 했다 - 결핍과 승부욕이 완성하는 악당의 철학
김헌식 지음 / 한권의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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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을 보면 그 안에는 항상 선과 악 사이의 힘겨루기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속에서 악은 거의 선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자, 선을 각성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사용되고, 곧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선에 의해 제압되고 제거 된다는 이야기다.


 악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가 바로 무엇이 선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해준다는 점이다. 악이 없으면 선도 없다는  식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쉽게 동의를 표한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선거를 늘 치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엇이 선인지는 그동안 드러난 악들을 통해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지니고 있다. 다만 선은 없고 덜 나쁜 것만 있기에 언제나 눈물을 머금고 차악에 기댈 뿐이다.


 이 책의 제목은 나를 강하게 매료시켰다. 분명한 것은 읽어봐야 알게 될 테지만, 악당이 되기로 했다는 도발적 문구에서 악행을 일삼는 악인이 되겠다는 뜻이 아님을 직감했고, 뭔가 '다름'을 추구하겠다는 인상이 비쳐졌던 것이다.


 "뉘신지는 모르오나, 그 말씀 흥미를 동하게 하니 거기서 작은 빛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첫 장을 폈던 기억이 난다. 


 과연, 책 속에 담긴 이야기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고, 얼마만큼은 실행에 옮기고 있던 행동들이 저자의 말 속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꾸며보라는 부추김을 귓가에 불어넣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볼 수 밖에 없게 됐다. 이미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책 속에는 참으로 많은 드라마, 영화, 사람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말이 인용되고 있다.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다른 점은 그 말을 들려주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한 때, 혹은 그 이야기 속에서 '악당'역을 맡았던 사람들 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폭력과 혼란을 조장하는 악인을 뜻하는 말이 아닌, 더 깊은 의미에서 파괴를 통한 창조를 꾀한 시대의 흐름을 바꿀만한 이론을 낳은 학자, 구태의연한 지성과 세태를 향해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선 혁명가들을 '악당'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악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시대와 세태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기에 과거의 악당이 현재의 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이야기야 말로 이 책의 핵심인 것이다.


 시대는 영웅을 원하지만 그 영웅은 평범한 상황에서는 태어날 수 없다. 영웅을 낳는 존재는 언제나 '악당'인 것이고, 그렇기에 악당은 단순히 비난과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는 것인 거다. '악당'으로 몰아 넣었다가 때를 봐서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된 아이러니다. 하지만 언제나 악당은 등장한다. 악당은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간단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악당의 진면목에 대해 새로 생각해 봐야만 한다.


 주의 할 것은 이 책이 '악인'과 '악행'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혼란을 위한 혼란을 일으킨 사람을 두고 혁명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살육을 위한 살육을 행하는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악행을 위한 악행을 벌이는 사람들을 결코 '악당'이라 불러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저 '악'을 행하는 악인일 뿐이다.


 착한 사마리아 인 이후로 사람들은 '선함'을 동경했고, 실천했으며, 선함을 행하지 않는 이들을 미워하고 배척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악인들은 언제나 득세했고, 이익 집단에 속해 있었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들에게 '악'이라는 딱지를 붙여 말살하는 것으로써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지속시켰다. 

 결국 세상은 너무나 선해졌기에, 선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선한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거절할 줄 몰랐고, 벗어날 수도 없었다. 고난이 선한 이에게 내리는 웃지 못할 비극의 연속 상영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러다 그 시대를 뒤집는 일이 벌어진다. 지배자가 보기에 자신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은 '악'이었고 그들은 '악당'이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신의 위엄에 도전한 것은 희대의 악행이었고, 그들은 악당이 되어 배척되었고, 경원시 되었으며, 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그들은 진실에 가장 먼저 도달한 '영웅'이 되었다. 


 이러한 일들 속에서 나오는 결론은 '악당'이 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타인과 다른 주류가 아닌 이론을 내놓는 일을 겁내지 말라는 것이다. 배척 당할지라도 신념을 관철하라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얽매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미래를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책 속에서 저자는 악당은 내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 악당을 지나치게 억누르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악당은 가장 확실한 것을 추구하며, 타인이나 신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서 현재에 충실하면서 미래를 바라보고 살라고 한다.


 사실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때로는 악이 선이 될 수 있고, 선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악당들은 자신들의 의지, 생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지나치게 선한 사회를 경계하라고 한다. 

 사람들은 완벽한 무균 상태, 살균 상태를 유지하면 질병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렇게 행한 결과 새로운 질병을 얻게되었다. 면역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없는 상태는 역으로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고,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는 지구 중심설을 부정함으로써 배척당했으며,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은 이론을 인정받기 전까지 무수한 핍박과 맞서야 했다. 

 다른 쪽에서 볼 때 그들은 '악당'이었지만 그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고, 현재는 '영웅'들로 그 자리를 옮겨 앉을 수 있게 됐다.


 저자는 이러한 무수한 예를 통해 '악당'을 예찬한다.

하지만 이 '악당예찬'에 있어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앞서도 적었듯 단순히 악행을 저지르는 '악인'과 '악당'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284쪽 

 우리는 악당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제멋대로 욕망을 충족하는 악당이 아니라 철학이 있는 악당이 되자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무척 선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해 자신이 겪는 고난, 불편, 부당을 인내한다. 그러한 배려를 이용하는 '악인'들은 선인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비극은 언제나 선한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현대가 불러 일으킨 재앙 중 하나는 '자아의 상실' 혹은 '혼란 된 자아'가 아닌가 싶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발로 삶을 살아 나가기 보다, 타인의 의지에 휩쓸려 다니는 삶을 지속하기에 급급해 있음으로 허무와 공허가 넘치게 되고 그렇게 불어난 상실감이 삶에의 의지마저 감퇴시키고 마는 비극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하고 묻고 있는 거다.


 악당이 되어도 좋다. 철학이 있는, 주의 주관이 뚜렷하며, 타인에게 악의적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삶을 확장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주저하지 않는 그러너 존재가 되는 것은 어떨까?


 절제되지 않는 악행과 철학이 있는 악당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의지가 분명한 사람들, 자유를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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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벌써 이 책이 출간된 게 언젠데 이제와서 스포에 대처하니 마니 하는 뜬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고 해도 별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저 일반적인 읽기 자세를 이야기하는데 특정한 시기나 주제에 대한 제한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난 그다지 스포일러에 구애받지 않기로 하고 있다. 다만 조금의 스포일러조차 용납하고 싶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읽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정도 성의와 노력은 보여야 비로소 스포일러에 대해 할 말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뭐 다른 방법도 있는데, 스포일러가 될 모든 글에서 눈을 돌리고, 소리에 귀를 막는 방법이다. 단순한만큼 효과는 확실하리라.

 

 별달리 할 말도 떠오르지 않고, 이런 소설류의 줄거리를 주절거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시덥잖은 줄 알면서도 주절거려 봤다. 그 덕에 최소한 나 자신이 느끼는 어색함은 대부분 희석되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최초의 타협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이런 물음 역시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이리라. 그 시기는 사람에따라 제각각일 것이고, 그 순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친 사람도 무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그 정도는 다르지만 저마다 실존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 갈등은 우연을 통해 극적인 화해에 이르기도 하지만, 결국은 크고 작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그 과정이 유난히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에도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그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 역시 조금도 옅어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을 겪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존속하고자 하는 의지는 더 강렬해진다. 

 또하나의 아이러니는 그러한 비극 속에서만 빛을 발하는 재능, 혹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극단적 절망은 오래 꿈꿔왔던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을 만큼의 잠재능력을 일깨운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성공과 성취는 더 길고 깊은 고뇌와 좌절을 불러일으키는 최악의 장애물로 그의 앞을 막아선다. 신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신은 그의 죄악이 어떤 응보도 없이 용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잔혹한 존재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살아간다. 그것은 그가 혼자가 아니며 그를 사랑하고, 그가 사랑하는 존재가 함께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경에 욥기라는 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이다. 이 욥이라는 인물은 선한 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축복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날 그를 놓고 사탄과 하나님은 내기를 하게 된다.그 내기의 결과, 욥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는다. 가족, 재산 그가 누리고 쌓아왔던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탈되는 것이다. 처음엔 그도 원망과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믿음으로 그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복을 누린다.

 

 어찌보면 해피엔딩 같지만 이것만한 비극이 없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것으로 보상받는다 해도 그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로 자식을 얻을 때마다 잃어버린 자식 생각이 났을 것이며, 부와 풍요가 늘어갈수록 함께 누렸던 옛 기억들이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번 잃어버린 실존은 되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 모습이 과거와 아무리 비슷해진다해도, 설사 과거보다 더 풍요로워진다해도 늘 공허하지 않을까.

 

 이 소설은 내게 현재 지닌 것들을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지금 꿈을 가지고 있다면 힘들어도 그 꿈을 지켜라.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자꾸 타협을 반복하다보면 점점 지쳐갈 것이고, 그 피로감은 너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옮겨 갈 것이며, 결국 네가 지키기 위해 너 자신을 희생시켰던 것을 희생시켜가며 네 삶을 지속해 나가게 될 것이다. 타협이 안겨주는 풍요가 축복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것은 네가 메피스토텔레스와 맺은 계약을 실행해야 할 날이 오기 전 까지 지속될 행복이다. 그날은 느닷없이, 득달같이 찾아 올 것이며 피할 수도 덜 수도 없는 대가를 요구해 올 것이다. 

 기억하라.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언젠가 반드시 치러야하는 빚을 내는 것이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은 충동과 함께 올 것이며, 느닷없이 일어나는 분노가 그 날을 여는 열쇠가 되리라. 

 

 극단적으로 적었지만 그만큼 꿈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나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아직은 좀 더 꿈을 꾸고 그 꿈을 좇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싶다. 

 

 나를 지키며 나로 살아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누가 희생될 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것이 세상을 겁내게 하고 사람을 겁내게 만든다. 그럼에도 꿈을 계속 좇을 수 밖에 없다. 

 

 책은 언제나 내 편이다.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그 내용을 내게 맞게 내게 편하게 받아들여도 책은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있다. 나로 살아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로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타인이 퍼뜨리는 스포일러를 따라 살아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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