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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신맨 - 기계가 된 남자의 사랑
맥스 배리 지음, 박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성적 중 하나가 높은 성형율이란다. 아, 이건 자랑이 아닌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단히 열성적이란 것만은 분명하다.
재밌는 소설을 만난 것을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소설이 재밌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세상에 아쉬움을 던져야 할까.
아, 이런 생각들은 내려놓고 일단은 재밌는 이야기를 늘어놓도록 해야겠다.
세상에는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 공학자가 있다.
인간과 공학자를 굳이 분리한 이유는 그들의 사고가 원초적으로 다른 기준을 바탕으로 움직인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소설 속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현실의 공학자들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모한 결과 개발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그 기술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비극들을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공학기술자이다. 과학자라고 하고 기술자라고도 하는 그런 사람이다.
얼핏 봤을 때 이 사람은 대단히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조금 사교성이 부족하고, 약간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대단히 호흡이 빠른 소설이다. 극도의 반전은 없지만, 그 반전을 대신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하는 그 무엇이 있다.
마치 우물가에서 혼자 노는 아이를 지켜보는 관심많은 행인이 느낄 법한, 관전자이긴 하지만 방관자가 될 수는 없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대는 변한다.
세태도 바뀐다.
그리고 인간도 변해간다. 그것은 외양뿐아니라 내용까지를 포함한 변화이며, 긍정적인 변화와 부정적인 퇴화를 함축한 변화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나의 정의가 타인이나 세상의 정의가 될 수는 없으며, 세상의 정의가 나의 정의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혼동하게 되는데서 오는 혼란이다.
무엇이 인간을 규정하는가?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은 신중해야 하지만 세상은 그만큼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이야기 속의 생각해 볼 문제를 몇 개 적어본다.
기술의 진보는 인류에게 있어 무한한 혜택을 제공한다.
과학의 발전과 더 나은 인간 생활을 위해 하지 못할 것은 없다.
누구도 그에게 혹은 그들에게 "그것은 해선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모든 일이 일어나는 건 '더 나은 미래'라는 회사다.
너무나 노골적인 이름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의심과 의혹이 절로 일어난다.
동시에 '더 나은'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주요 등장 인물들에게는 저마다 고충이 있다. 그들은 연합하기도하고, 거부하기도하고, 미워했다가, 필요로하며, 증오하지만, 동경하고, 망설이지만, 정당화에 바쁘기도 하다. 결국 그들의 고충은 한 가지로 모아진다. "더 나아지고 싶다."
결과적으로 누가, 무엇이 더 나아진 것인지 소설의 결말 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
결국 독자에게 남겨진 숙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기술이 부족한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 것인가, 기술의 과잉을 걱정해야 할 것인가.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314쪽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중요한 신체 부위들을 인공 기관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더 이상은 없어야 한다고요.
이 말을 읊어대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난 이 부분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중요한 시체 부위란 단순이 인간의 팔 다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생각해 보면 세상의 구조, 혹은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현대는 '스마트 폰'의 시대이기도 하다. 스마트하지 않은 것은 업신여겨지고, 낙후되고 덜 떨어진 것으로 여겨져 좀 더 스마트한 것으로 교체된다.
인간이 하던 것을 기계와 시스템을 통해 효율적으로 처리해 나간다.
계산기가 발달했기에 인간의 계산력이 떨어진다.
휴대전화에 입력한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는다.
아파트 입출차 관리를 경비원이 아닌 CCTV와 컴퓨터가 한다.
편안하다는 이유로 바꾸기 전에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해야만 한다.
어떤 일들은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그렇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서 이제 인간은 '대체 가능'해 졌다.
애초에 인간이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언제 시작된 것일까?
고전적인 전투에서 아직 인간을 방패로 사용하던 시대에, 왕을 둘러 싼 인간들의 목숨을 대체 가능한 방어물로 생각했던 폭군의 생각이 그 시초는 아닐까?
노예를 부리던 시절에 전쟁이나 약탈을 통해 공수해 온 노예를 그저 기계의 부품처럼 죽기까지 부리고, 목숨이 다하면 짐승의 먹이로 던져주던 야만이 만연한 시대의 이야기는 아닐까?
애초에 최대의 폭군이 나왔던 시기는 언제고, 진정 야만이 만연해 있는 것은 또 언제인가?
그것이 지금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괜스레 열을 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야겠다. 무엇이 진보인가, 무엇이 더 나은 삶, 더 나은 미래인가하는 문제들을 말이다.
어떤 책에서 이런 말을 봤다.
능률이란 일을 적절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 효율이란 적절한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_토머스 K. 코넬란
능률과 효율을 오해하지 말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