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미터 - 너와 내가 닿을 수 없는 거리
임은정 지음 / 문화구창작동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연리지'가 있다. 영역싸움에 의한 또는 영양분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 태생이 다른 두 나무는 결국 서로의 조직을 합쳐 한 몸이 되어버린다. 여기 한 병실에서 연리지가 된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눈이 있지만 볼 수 없고 생각은 있지만 말할 수 없고 몸은 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그들은 사소한 사람들이다. 아니 그렇게 되버렸다. 없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그리고 혹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고생하느니 잘갔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없는 존재들이 되 버렸다.(343p) 한 때 세상은 내 눈 아래만 있었다. 어떤 기준의 절대치는 모두 내 차지였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예상치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했던가. 그나마 다행인건 옆에 있는 다른 나무에 비해 난 '틱' 반응을 보이며 일종의 행동이란 것을 할 수 있다.
[1미터]는 행복요양원의 한 병실에 있는 두 식물인간 - 강찬과 찬강 - 의 이야기다. 설정이나 구도가 영화 [죽이고싶은]와 오버랩 되지만 두 사람에게는 비누 담긴 스타킹이 허락되지 않는다. 강찬이 찬강에게 묻는다. "혹시 이런 생각 안해봤어? 만약 그 날 수영을 안했다면,,, 만약 누군가 나를 조금 더 일찍 발견했다면,,, 만약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강찬의 질문에 찬강은 "신은 죽을 때까지 영혼을 기른다."고 대답한다. 잘난 만큼 원망이 컸던 강찬은 병실에서도 까칠하다. 그러나 떨어지는 나뭇잎만 봐도 까르르 거릴 나이에 이 곳에 온 찬강은 그의 거친 말도 부드럽게 안아준다. 두 사람의 방은 요양원의 안식처가 된다. 두 나무만 누워있으니 비밀얘기가 있을 땐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연애 감정도,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도, 누군가에 대한 원망도. 두 그루 나무는 아무 말도 건낼 수 없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말한다. 덕분에 모든게 잘 해겼됐다고. 들어줘서 고맙다고.
정상인들과 대화할 수 없는 두명은 서로 '주파수'를 맞춰 점점 연리지가 되어간다. 1미터의 간격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 영원히 허물 수 없는 - 장벽이다. 두 사람에게는 서길자여사, 상혁, 소연, 원장님, 살자와 같은 친구들도 있다. 이 친구들은 자신을 화장실 구석의 '걸레'로 표현한다. 쓰이고 뜯겨 때가 묻어 쓸모없어진 걸레.
식물인간들의 사랑은 [소나기]에서 처럼 깨끗하고 순수하다. 그리고 걸레라고 말하는 군상들의 마음은 [내 생의 마지막 저녁식사]에서처럼 아름답다. "함께 있을 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가 있음을(371p)" 알려주는 진정한 사람들이라고 할까? 강찬과 찬강이 속삭이는 사랑들은 부자유스런 몸과 비례해 더 깊고 의미있는 메세지를 담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30년 넘게 세상을 살아왔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답을 알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고 억울했다. 착하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바보 같다'고 무시 했고,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겠느냐'고 비아냥거렸다. 남녀 간의 사랑과 인생살이는 내개 비슷하게 비열하게 느껴졌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래서 찬강과 강찬이라는 두 그루의 나무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한다. 세상은 오히려 '바보 같고'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에 의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증명하기 위해서.
신년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시는 어른신을 본 적이 있다. '가족과 움직일 수 있는 몸을 가진 것 만으로도 다 가진 것이다.'라는. 우리가 항상 배고픈 이유는 그 동안 너무 많이 먹어서 위가 늘어났기 때문인지 모른다. 물리적 위보다 마음과 감정과 사랑의 위를 키울 수 있는 좋은 책, [1미터]였다.
** 좋은 구절 **
밖의 상황을 방 안에서 듣고 있던 건장했던 식물인간, 아니 식물인간에서 동물이 된 그 사람은 울고 있었다. 34p
사람이 그렇다.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할 수 있지만 자신의 영역에 조금이라도 들어오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날카로워진다. 131p
인생을 뭔가에 빗대어 비유하자면 뭐가 있을까요? 여러 가지 비유가 있겠지만 누군가는 인생을 신 사탕에 비유했다고 하죠. 겉으로는 달콤한 것 같지만 막상 입에 넣으면 시고 쓰고 참을 수 없어서 뱉어버리고 싶은 맛.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뱉으려야 뱉을 수 없어 삼켜버려야 하는 것. 그게 인생이라고 했다고 하죠. 167p
'눈으로 직접 봐야 안다'며 사람들은 직접 보면 진실을 알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눈으로 제대로 보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만 봤다. 177p
세상일이라는 게 다 자기가 맡은 일이 시시콜콜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제 색깔을 내려고 하지만 멀리서 신이 바라본다면 그것은 희미한 바탕색에 알록달록 무늬가 생긴 것같이 보일 것이다. 어두운 바탕에 알록달록 무늬가 늘어갈수록 세상은 촌스러운 몸빼 바지가 된다. 246p
예전에 세상사에 찌들어서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서 일 년 동안 그대로 있다가 치료가 됐대요. 268p
그들은 사소한 사람들이었다. 없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그리고 혹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고생하느니 잘갔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없는 존재들. 343p
함께 있을 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가 있음을... 371p
http://minerva1156.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