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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
김미월 외 지음 / 열림원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일곱 명의 '여성' 작가들과 '비'의 만남. 극한의 감수성을 경험시켜 줄 것 같은 책이다. '비'는 고집스럽게 한 방향으로 흐른다. '비'만큼 중력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자연물이 있을까.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에는 일곱가지 '비' 소설이 있다. 서로 다른 일곱 명의 작가들처럼 그들이 만들어낸 '비' 소설들은 모두 다르다. 인물의 모습, 상황, '비'의 등장 시점 까지, 동일한 부분은 오로지 '비'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감히 여성 작가님들의 작품에 왈가왈부 할 수 없지만 지극히 내 편의데로, 색깔로 각 소설들의 느낌을 전달해 보겠다.
첫 번째 소설, 장은진 님의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티슈,,, 눈 송이를 따라한 듯, 누군가 장난을 친 듯, 하늘에서 날아오는 부드러운 티슈. 지붕에서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티슈는 어쩌다 모은 '소유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비 오는 어느 날, 비를 따라가듯 추락한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난 문득 '티슈는 요긴하게 쓰인다.(47p)'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한 가지 큰 배움을 얻어간다. "문득 삶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가벼울 수도 상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장의 티슈처럼 말이다.(48p)" 연회색의 소설.
두 번째 소설, 김숨 님의 [대기자들]이다. 그녀의 [물]을 읽으며 창조적 시각의 진면목을 느꼈다. 그런데 이 소설 역시 만만치 않다. 한 치과에서 난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순서는 네 번째.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도 진료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기자 중 한 사람이 말한다. '비가 와요!' 비를 구경하러 창에 붙어 선다. 세 번째 남자가 기다림에 지쳐 돌아간다. 난 세번째가 된다. 또 다른 대기자와 카운터 간호원들에게 설명한다. '난 세번째예요.' 가발을 사달라는 엄마의 전화에 난 말한다. '난 세번째예요.' 그는 여전히 대기하고 있다. 코발트블루의 소설.
세 번째 소설, 김미월 님의 [여름 팬터마임]이다. 문학 소녀를 좋아하던 문학 소년, 그 소년을 좋아하던 진. 전단지에서 우연히 봤던 한 시구절을 외워 적어 당선 되었는데, 그건 유명한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문구였다. 진실과 창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진의 마음을 대변하듯 하늘에선 비가 내린다. 남자친구의 엉뚱한 반응에 질문한다. '너 천둥과 번개 중에서 어떤 게 먼저 치는지 알아?(104p)' 그 때, 하늘에서는 천둥도 치지 않고 번개도 치지 않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맑은 초록색의 소설.
네 번째 소설, 윤이형 님의 [엘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꽂히질 않았다. '마법'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판타지소설에 두드러기 반응을 보이는 내 취향이 한 몫 했으리라. 엘로라는 일종의 힘을 움직이는 마르한과 소녀가 등장한다. 마법으로 빗방울을 만들어 쓰고, 도둑질을 하고, 고양이를 쳐다본다. 남녀의 사랑인지, 엘로라는 마법인지, 잘 파악이 안된다. 책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소설인데 잘 모르겠다. 마법스러운 일들이 많이 등장하므로 가벼운 노란색이 적합하겠다.
다섯 번째 소설, 김이설 님의 [키즈스타플레이타운]. 자본주의적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토사물을 먹으라고 윽박지른 경험이 있다는 한 유치원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어린이'라는 약자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당하고 있을까. 또 다른 종류의 토사물을 아이들에게 억지로 먹이는 원장 부부가 있다. 원장이 그 범죄의 중심에 있고 아내는 그의 파트너다. 남편의 모습을 보며 어릴 적 소름끼치게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음흉하고 교활한 눈빛을 닮은 남편의 눈에 유리 조각을 꾹 집어 넣는다. 비가 개인 하늘은 반짝인다. 하드코어 빨간색의 소설이다.
여섯 번째 소설, 황정은 님의 [낙하하다]이다. 이 소설은 '떨어지고 있다'로 시작해서 '상승하고 있다'로 끝난다.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은 외계인이 거꾸로 본 세상의 모습일지 모른다. 내가 지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건, 제 삼자가 봤을 때 자판을 만들고 있는 건지 모른다. '떨어진다. 떨어지고 있다. 삼년 째 떨어지고 있다.'는 '농담이 아니다. 떨어지고 있다. 상승하고 있다.(218p)'의 동일한 표현일지 모른다. 전체적인 묘사가 너무 멋지다. '호상'과 '죽음'에 대해 묘사한 부분(202p) 한 귀퉁이에는 내가 적은 '표현의 끝'이라는 메모가있다. 베르나르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의 느낌을 풍기는, 통통튀는 주황색 소설이다.
마지막 소설은 한유주님의 [멸종의 기원]이다. 죽어가는 할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불행하거라.(222p)" 할아버지는 날씨표시상자를 주셨다. 왕의 등 뒤에서 막으로 얼굴을 가린 왕비처럼 신비롭고 어둡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다 문득 할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다. 코에 물방울이 떨어진다. '불행하거라.'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왕이 날씨를 다스리고, 건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다시. 신비한 보라색의 소설이다.
소설 하나를 읽을 때마다 리뷰를 적어놓을걸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표현이 안된다. 이 책 한권에 담긴 소설 일곱 편은 작가들의 빨주노초파남보 개성데로 다양하다. 몽환적이면서 사실적이고 혼란스러우면서 깔끔하다. 이성을 잠시 던져두고 마음으로, 감정으로 흠뻑 취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