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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독자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듯한 베르나르 키리니의 상상력을 질투하며 왜 그보다 먼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한탄할 것이다. 확실히 그는 재능 있는 작가다. 특허를 받아도 좋을 만큼!'라는 권위있는 프랑스 문학잡지 Le Magazine Litteraire의 평처럼 베르나르 키리니의 상상력은 독보적이었다. 탄탄한 전개와 독특한 발상, 기묘한 연결고리,,, [육식 이야기]는 문학을 구성하는 모든 필요충분을 갖춘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에피소드를 교차시켜 서술하거나 개별 토막들이 결국 종합되는 구성에 관성화된 나는 어리석게도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단편집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밀감]의 오렌지 아가씨와 [아르헨티나 주교]의 주교가 말미에 그 어떤 개연성으로 엮일 거라는 기대마저 했었다. 그러나 [육식 이야기]는 '서문'의 이름을 단 '고인들의 목록'을 포함한 총 열 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실린 단편집이었다.
그 중 단연 인상깊은 것은 저자가 오렌지를 까는 한 여자를 보고 구상했다는 [밀감]이다. 칼에 베인 괴물의 등이 악어가죽 같다는게 일반적인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극한 상태의 '피부'일까! 여기에는 온 몸이 '오렌지'인 여자가 등장한다. 이 여자는 주스를 마시고 나면 향이 감도는 유리 잔만 남듯, 한 껍질 한 껍질 조심스럽게 벗겨 신비를 풀고 나면 방 안 가득 오렌지 향만을 남긴다. 또 하나 특징적인 이야기는 [기름 바다]다. 기름이 유출된 바다의 美에 빠진 한 남자가 있다. 아주 운 좋게 간혹 볼 수 있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기 위해 이 남자는 기름 유출 현장을 보러 다닌다. 이미 벌어진 일을 아름답게 해석하자는 궤변도 펼쳐 놓는다. 책의 제목과 같은 [육식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파리지옥과 식물학자의 애증을 그린 이 이야기는 책을 통틀어 가장 괴기스럽지만 마지막 반전은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이렇겠지 싶으면 역시 이렇게 끝나고 저렇겠지라고 생각하면 저렇게 끝나는 '뻔한' 소설이 답답한 사람과 한정된 사고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육식 이야기]는 필독서라 하겠다. 열 다섯 편을 전부 읽는 것 만으로도 상상력의 역치가 무한 상승하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도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에 자꾸 등장하는 '피에르 굴드'는 누구일까?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의 3D 인물 구성처럼 키리니의 다른 소설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 혹, 저자의 자아를 표현한 걸까? 지극히 유럽스럽고 의뭉스러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당장 그의 다른 작품들을 섭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