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농민들의 신음소리. 배교에 대한 강압.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 절망적 고뇌의 끝에 로드리고 신부는 성화에 발을 올린다. 믿음. 로드리고 신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무자비가 자행되는 일본에 발을 딛는다. 숲을 헤치고 그리스도를 믿는 농민들을 구제하며, 사랑을 실천한다. 침묵. 믿음때문에 농민들이 피를 흘린다. 믿음때문에 물 속으로 빠져든다. 믿음때문에 지탄 받는다. 믿음때문에 생긴 고통을 믿음으로 이겨내려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리고 '배교한 바오로'가 되는 시간을 기점으로 로드리고 신부는 또 다른 침묵을 알게된다. 바로 자신에 대한 침묵. 그 누구보다 선구자였던 페레이라 신부의 초라한 일본인 행색처럼 성화에 발을 올림으로써 잃게 된 절대자와의 끈. 바로 그것이 로드리고의 또 다른 침묵이다. 로드리고의 내면세계에 따라 펼쳐지는 <침묵>은 너무나 처절하다. 믿음에서 배교에 이를 때까지의 로드리고의 마음은 갈기갈기 찣어진 걸레조각이 된다. 타인을 죽게 내버려 두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뿐이었으며,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묻은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난과 역경 속에도 그 분은 대답이 없으시다. 결국 로드리고는 생각한다. 정말 계시는 겁니까? 정말 신은 존재할까? 그 분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까? 그렇다면 다른 종류의 신들은? '직장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종교'라는 우스갯 말 처럼 조선시대 당파싸움 버금가는 인간 구분선 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이다. 엔도슈사쿠는 그런 '선'의 의미없음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절대자들은 어쩌면 우리 '마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내는 허상일 수도 있다. 그들의 침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