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닥터 -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 수상작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생김새, 나이, 사고방식이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내'가 -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심지어 그 사람은 공주일거라며 - 존재할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성장과 함께 종별 다양성등의 이론에 학습되어 가며, 그런 순수한 동화같은 생각은 사라졌지만, 가끔 현실에 치가 떨릴 때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 안보윤도 그런 생각이었을까? 그녀는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희고 검은 네모칸의 반복같은, 매직아이를 해야할것 같은, 바둑판 무늬의 모습이 일어나고 있다. 종수. 그는 세계사 선생님이다. 홍대앞에서 꽤 값이 나가지만 질이 심히 떨어지는 목걸이를 사곤한다. 수연. 우수한 성적의 고등학생. 딱히 이렇다할 특징이 없는 여고생이다. 종수. 어릴 적 보험금을 노린 아버지가 뜨거운 물에 빠뜨렸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 뜨거운 물에 대한 무한거부증이 생겼다. 수연. 세계사 선생님의 뒤를 밟다가 어느 순간 묶여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종수. 어머니에게 '쪽 팔린다'며 자신을 숨기던 아버지는, 어릴적 자신의 주특기가 점프였다고 말한다. 별안간 그게 뭐 어쨌다고,,, 왕년의 우수한 점프를 꿈꾸던 아버지 놀이기구에서 힘찬 점프를 도약한다. 수연. 상상과 감각의 고통에 시달리며 점점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이 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종수. 변태인지 호모인지 아무튼 성 정체성이 모호한 닥터 팽에게 슬슬 믿음이 떨어지고 있다. 내 말을 믿기는 하는가? 이런 정신병자같은 자에게 상담이랍시고 내 얘기를 술술 풀어내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 까지 하다. 수연. 점점 사지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 배와 가슴에 닿는 찬 바닥의 기운에 몸이 아찔하다. 종수. 연탄가게 아저씨가 가만히 누워있다. 시멘트를 바른다...

 

<오즈의 닥터>는 종수, 수연, 닥터 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의 종수, 현실의 수연, 그 중간을 넘나드는 진실 혹은 거짓일 닥터 팽. 그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 '술'이라는 것에 대해 생뚱맞게 논해보자. 건강에도 안좋고, 정신도 살짝 풀어지게 해서 언젠가는 꼭 후회할 짓(?)을 하게 만드는 이 '술'이라는 놈이 어떤 종류의 모임에서든 등장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술'이란 것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 '술'의 파워가 곧, 내 인생의 '닥터 팽'이 아닐까.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든, 숨 막히게 현실을 탈피하고 싶을 때가 한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뭐 같아서 더러울 수도 있고, 내 자신이 한심할 수도 있고, 머피의 법칙이 나만 따라 다니는 듯 억울할 수도 있고, 모든 악재는 내 어깨위에 올라앉은 듯한 심정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한다. '이게 꿈은 아닐까?' '내일 자고 일어나면, 없었던 일인것처럼 내가 원하는 방향데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져 있을거야.' 그러나 눈 감고 일어나면 그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종수도 화상에 데여 하반신을 뒤덮은 수포들 마냥, 겹겹이 쌓여있는 -인간 김종수가 있기 까지의 - 순간들을 모조리 마꿀 꿈이 필요했다. 그 수단으로 그는 '닥터 팽'을 만들었다.

 

앞서 말했듯, 저자 안보윤은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현실과 이상의 허물어진 경계가 아닌, 상처받은 마음을 도닥여주는, '그래도 괜찮아~'라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목소리를 들은 느낌이다. 일벌레가 되어 개미같이 일하다가 조직에게 뭇매질당한 내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현실이 어쩌면 내가 닥터 팽에게 고백하고 있는 가상 속의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기 때문이다. 허구여도 상관없다. 감쪽같이 허물어질 진실이어도 상관없다. 잠시 잠깐 고해성사를 통해 평안을 되찾듯, 삐뚤어진듯한 종수의 닥터팽을 잠깐 만나보는게 이런 부질없는 삶에서 우리가 살아나갈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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